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33화 (333/401)

나는 스스로를 믿는다 (8)

"화이팅! 화이팅!!"

"와, 여기서 구마하를 보다니... 아, 카메라를 가져왔어야 되는데."

"운동 오는데 누가 카메라를 챙겨요. 핸드폰으로 찍으세요."

"때깔이 다르잖아. 이따가 싸인 해 달라고 하자."

체육관 관원들이 링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관중 역할을 해 준다.

오랜만에 사람들 앞에서 운동하는 것 같다.

나쁜 기분은 아니지만, 낯설음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밖에선 제법 크게 보이던 링도 그물 안으로 들어오니 생각보다 작았다.

무엇보다 나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이 있으니 좁은 링이 더 작게 느껴진다.

도망칠 곳 없는 사각의 무대.

멋진 투쟁을 기대하며 어린아이 같이 웃는 아저씨들.

나에게 복싱은 그런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다.

"후욱, 후우!"

호흡부터 자세까지, 조용하던 매니저 민구 형은 어디 가고 눈빛을 이글이글 빛내는 파이터 양민구가 내 앞에 서 있다.

조용한 사람한테 이런 모습이 있을 줄은. 의외긴 하지만 조금 멋진 것 같다.

형이 내 쪽을 향해 천천히 글러브를 흔들며 다가오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정말 게임이 될까?

나는 사람의 내공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여러 가지 앞서 판단할 수 있는데, 아무리 봐도 형이랑 나는 힘의 차이가 너무 나지 않나?

민구 형도 선수 출신이긴 하지만, 그건 일반인과 비교했을 때 이야기지. 나랑은...

"훅. 후욱!"

안 될 땐 때려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만든다.

그것도 어쨌든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니까 이해할 순 있는데...

근데, 힘이 통할 때 이야기지.

이렇게 차이가 역력한데. 마음쓰는 만큼 고생한 효과가 없다면...

"준비됐냐?"

"네!"

"간다."

뭐? 뭐가? 나는 그런 말 할 수 있잖아.

남들이 그러면 자만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실질적으로 그만한 내공을 가지고 있는데. 이건 자만도 뭣도 아닌 현실이라고.

아. 몰라. 그냥 빨리 끝내고 술이나 마시러 가고싶.

"훅!!"

그 순간, 어벙한 생각이나 하면서 나른한 긴장감을 떨쳐 내지 못한 나에게 민구 형이 기합인지 숨소리인지 모를 호흡을 뱉으며 빠르게 펀치를 날렸다.

퍽! 소리를 내며 반사 신경으로 글러브를 들어 공격을 막았다.

"..."

"후욱! 후우!"

제대로 오판이었다.

내공이 강해? 나랑은 안 돼?

대체 나는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던 걸까...?

펀치 한 방으로 전신에 위기 경보가 퍼져 나간다.

왜냐면, 물렁물렁 이거 맞는다고 아프겠어? 했던 펀치가 예상보다 더 무겁게 전달되니까.

가죽으로 표면을 감싼 솜뭉치 덩어리에 불과하다 생각했는데, 뭔가 신촌에서 지나가던 취객에게 어깨빵을 당한 것 같다.

그래. 맞어. 올림픽에서도 보면 복싱 선수들 코피도 터지고 뼈도 부러지고 그러지...

얼굴에 왜 반창고 붙이고 다니겠어. 그게 무슨 패션도 아니고...

"왜 그래?"

"네? 뭐가요?"

"갑자기 왜 그러고 있어. 몸이 굳었잖아."

젠장. 그걸 또 봤어? 쪽팔리게... 눈치는 빨라 가지고...

에잇. 몰라.

"아니요? 저 아무렇지 않은데?"

"집중해라. 시작했어!"

내가 시작했나? 형이 시작했지...

아무튼, 남자가 가오가 있지. 여기서 우는소리 했다간 진짜 쪽 팔리는 게 되잖아.

도전을 받아들인 이상 물릴 순 없다.

가보자. 형의 펀치가 이 정도라면 내 펀치도 만만치 않겠지.

퍽!!

"윽!"

"어우..."

역시. 그냥 솜뭉치가 아니야. 권투는 권투다.

근데 은근 치는 맛이 짜릿하다면 내가 이상한 걸까?

"훅. 훅."

"..."

아니야. 난 귀찮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야.

스파링도 처음부터 내가 하자고 한 것도 아니야.

뭐가 짜릿하다는 거야? 변태야? 누가 전립선이라도 핥아 줘?

"민구야, 떨어져야지. 체급이 있는데. 맞으면 너 크게 다친다."

"예!"

"멈추지 말고 몰아붙여! 힘은 너가 더 위야!!"

"네!"

일반인이라곤 믿을 수 없는 어마무시한 내공을 가진 정 사장님이란 분이 민구 형에게 코칭을 해 주시고, 나한텐 최두필 관장님이 붙어 계셨다.

이쪽 저쪽 코칭을 받으며 시합을 이어가니 마치 꼭 진짜 권투선수가 된 착각이 들었다.

확실히 다르긴 다르구나. 육상이나 스키는 선수 혼자 뛰지만, 복싱은 팀이 옆에 있네.

"역시 힘이 좋구나."

"..."

"왜?"

"뭐예요...? 갑자기 왜 칭찬을 하고 그래요. 사람 때리러 왔다면서...?"

"하하! 이 자식."

"저라고 맞고만 있을 순 없잖아요."

"그래. 이건 스파링이니까! 가자!!"

둘이서 연속되는 공격과 방어를 주고받았다.

정확하게 공격과 방어라기보단, 저 형은 권투를 했고 나는 좀 발악을 했던 것 같다.

확실히 배운 사람이 자세나 뭐가 효과가 좋았다.

유효타라고 그러나? 그런 게 나보단 훨씬 더 잘 들어간다.

"헉. 헉"

"훅. 후욱!"

대신 나한텐 체격이 있었다.

쉽게 말해 맷집이 좋다는 건데, 유효타가 아무리 크게 들어와도 일단 버틸 수는 있다.

"근육값을 하네. 몸이 튼튼해."

"당연하지. 애초에 체급이 다르다니까."

시합 중간중간 사람들 이야기를 통해 몇 가지를 알았다.

나는 헤비급에 속하고 민구 형은 슈퍼미들급 같은 거란다. 형이 70 중반쯤 나가던가? 나랑은 20kg 정도 차이 나니까.

타격은 무게에 비례하여 증가하기에 같은 펀치를 때려도 아까정 사장님이란 분 말씀대로 민구 형의 피해가 더 큰 것 같다.

"훕!"

그럼에도 민구 형은 멈추지 않고 덤벼든다.

중간중간 자기 헤드기어를 툭툭 치면서 쫄지 말고 공격하라고 도발까지 한다.

그냥 짜증 나서 줘패고 싶었던 거 아닌가?

아니면 대체 왜 자기 몸 상해가면서까지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선수 출신이, 몸이 소중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대체 왜?

"야! 집중해!"

"집중하고 있어요."

"아니잖아! 너 지금 딴생각 하고 있잖아!"

"..."

"나중에 봐줬다 이딴 소리 하지 말라고! 후웁!!"

짧은 기합과 함께 민구 형의 주먹이 또 한 번 얼굴을 강하게 때렸다.

어질어질하다.

와. 뭐지 이 아픔은?

통증? 고통? 울림?

아무튼 존나 아프네.

"후우..."

"진지하게 해라. 훅. 후욱!"

"후우우..."

진지하게라...

선배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후배가 말을 들어야죠.

"웁!!"

도발에 응하듯 온몸에 힘을 실어 주먹을 질렀다.

민구 형도 신속하게 자세를 바꿔 두 팔을 닫으며 가드를 올린다.

퍼억! 소리가 난다.

팔 위로 때렸는데, 내가 봐도 제대로 들어갔다 싶은 공격이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짧은 함성을 질러 준다.

몸이 살짝 뒤로 밀린 민구 형도 가드를 풀며 나를 본다.

오는가? 반격인가?

"그렇지!! 좋아!"

뭐가 좋아? 왜 좋아하냐고??

아니 자기가 맞았잖아. 왜 좋아하는데?

이 형 정말 뭔가 있나?

혼내 주러 왔던 거 아니었어??

"후욱! 가자!"

"허억 허억."

민구 형의 파이팅에 전염이 되는 건가?

내 안에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싹트고 있다.

복싱... 오랜만에 운동을 해서 그런가? 뭔가 재밌다.

"..."

아니야! 아니야. 씨발, 뭐라는 거야!!

재밌긴 뭐가 재밌어!! 맞고 때리고 이건 그냥 싸움이지.

그래. 이건 그냥 내 안에 있는, 난 겪어 보지도 못한 무림의 피가 주는 원초적인 공격과 방어에 반응을 하고 있을 뿐이야.

피의 원초적인 반응이라...

근데 그런 걸 다른 말로 남자의 본능이라고 하지 않던가?

빠른 남자. 운동 잘하는 남자.

진짜 싸움 잘하는 강한 남자는 타이틀이 다르잖아.

"야! 너 또!"

"네...?"

"이 새끼 또 딴 생각하지!!"

"아... 알았어요."

"알긴 뭘 알어! 그러다가 맞는 거라니까!"

아니. 혼내러 왔다면서 왜 걱정을 하냐고.

아 몰라. 일단 틀린 말은 아니야.

연습이든 뭐든, 잡생각 버리고 집중해야지.

보자. 시간은 벌써 2분 40초. 3분이 생각보다 길구나.

"훅. 훅!!"

"헉!"

민구 형한테 뭔가 목적이 있는 것 같다.

이 형이 모자란 사람도 아니고. 단순히 지랄 좀 하자고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할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 * *

땡!

1라운드를 마치고, 구마하는 최두필 관장에게 양민구는 정 사장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정 사장이 수건을 내밀자 양민구가 목 얼굴 헤드기어 구석구석 땀을 닦아내며 웃음을 지었다.

그 미소에 정 사장은 호기심이 갖고 묻는다.

"재밌나 보다?"

"네. 후. 역시 애가 힘이 좋으니까 한 방 한 방이 묵직하네요."

"당연하지. 아까 얘기했잖아. 맞으면 너한테 더 타격이 간다고."

"그러게요. 2라운드부터는 본격적으로 해야겠어요."

"허허허. 1라운드는 탐색이다?"

"그럼요. 정석이잖아요."

"야. 민구야. 진짜로 왜 구마하랑 스파링을 하는 거야?"

"말씀드렸잖아요. 저 자식 정신 상태 해이해져서 기강 좀 바짝 잡고 싶었다고."

"니가 선배고, 저 친군 후배니까?"

"그런 것도 있고요. 또 내가 담당하는 뭐, 스타라고 해야 하는지..."

"매니저가 그런 것까지 챙겨야 하는 직업인 거냐?"

"..."

"너 뭔가 있지? 지금."

양민구는 대답을 피하며 슬쩍 시계를 올려본다.

30초. 남은 시간 최대한 체력을 회복해야지. 링에 두 팔을 걸고 쭉쭉 스트레칭을 당기는데 정 사장이 또 한 번 묻는다.

"운동시킬려고?"

"운동하면 좋죠. 술 마시는 것보다는 자기관리도 되고."

그 한 마디로 정 사장이 양민구의 속마음을 읽어낸다.

"복싱 시킬려고 그러는 거지? 지금."

"...모르겠어요."

"우와... 구마하가 복싱을...?"

"아. 사장님. 목소리 낮추시고."

양민구가 사람들 몰린 곳을 돌아보며 목소리를 손가락 하나를 입으로 가져다 댄다.

구경하던 이들은 지금 거진 다 구마하와 최두필 관장쪽에 붙어 있었다.

정 사장은 비밀을 공유하는 아이같이 신난 얼굴로 말했다.

"구마하가 복싱이라. 최두필이 안다면 쌍수를 들고 반기겠네."

"어쩌면 관장님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뭐?"

"아니요. 보자. 남은 시간이..."

"너 진심이구나. 그치?!"

"에이. 모른다고요. 일단 오늘은 정신이나 바짝 차리라고 끌고 온 건 맞아요."

"하하! 그런 놈이 아까 맞았다고 좋아해? 제대로 펀치 들어오니까 아주 신나 죽더만."

"뭐... 그건 그거였고요..."

구마하가 복싱을. 육상의 구마하가 스키를 정복하고 이제 권투를.

많은 이들이 축구 야구 농구 등으로 빠져도, 묵묵히 의리를 지키며 장충체육관을 찾았던 정 사장에게, 구마하의 복싱이란 마치 먹어보지 못한 진미가 있다는 소리와 같았다.

"이겨야겠다."

"예?"

"압도적으로 이겨야지. 선수들은 원래 자존심이 쎄다고 하잖아. 대충 흐지부지 끝나면 저 친구도 흥미를 못 가질 거 아냐."

"하하! 사장님?"

"보고 싶다. 이런 동네 체육관이 아닌 장충동에서 정식 스폰서가 박힌 트렁크를 입은 구마하를."

"아. 사장님? 지금 너무 앞서가신다니까요."

"아니야. 내가 봤을 땐 너한테 충분히 승산이 있어."

정 사장이 자세를 낮춰 양민구에게 코칭을 해 준다.

"구마하는 리치가 길고 파워가 있지만, 아무리 그래 봐야 복싱초심자라는 걸 잊지 마."

"기술로 승부를 하라고요?"

"그럼. 니가 지금 아마추어 대회를 나가도 두 시합은 뛸 체력과 기술이 있다고 본다 나는."

"그래도 애가 반사 신경이 원체 좋아서. 저도 한 방 한 방 맞추기 어려운데요."

"민구야, 그럴 땐 바짝 붙어. 반사 신경이고 뭐고 도망칠 구석이 없도록 만들라고. 초심자기 때문에 링을 활용하든가 피하는 방법을 모를 거야. 그러니 자꾸 파고들면 구석으로 몰리겠지?"

"아아~ 기둥에 세우면 마하도 도망칠 곳이 없긴 하겠네요."

"그럼. 그게 더 니가 혼내 주고 싶다는 목적을 달성하기도 쉽고."

"흠."

"인파이트다. 멀어지면 오히려 너한테 어려운 경기야. 체급은 무시 못해."

"저. 근데, 사장님. 거리가 짧아지면 저도 파워가 실리지 않는데요?"

양민구의 질문에 정 사장이 해답을 알려 주듯, 주먹을 낮게 쥐고 보디 블로를 치는 몸짓을 보였다.

"아아~"

"부족한 리치는 회전으로 파워를 싣고."

"허리."

"그래. 주문 받았으면 어서 갔다 와라!"

마침 땡 하는 종소리와 함께 2라운드가 시작된다.

정 사장이 양민구의 헤드기어를 툭툭 때리며 축복을 걸고, 양민구도 마우스피스를 다시 끼우며 눈빛을 빛낸다.

"후후후."

작전을 접수한 양민구가 링 중앙으로 걸어 나오자 구마하도 성큼성큼 주먹을 쥐며 다가왔다.

그가 복싱 베테랑 정 사장에게 코칭을 받았듯, 구마하도 짧은 사이 최 관장에게 몇 가지 지도를 받은 것 같다.

어깨가 정면이 아닌 살짝 기울어지고 무릎을 굽혀 제자리 스텝을 뛸 준비를 하고 있다.

자세나 여러 가지가 1라운드 때보단 많이 안정되어 보였다.

"후욱. 후우!"

호흡도 아까랑은 다르다.

아까는 그냥 불편한 마우스피스를 끼운 채 숨을 몰아쉬었다면, 지금은 제대로 리듬에 맞춰 숨을 뱉고 들이마신다.

그 새 기본기를 깨우친 건가? 역시. 마하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는구나.

이런 놈이 술이나 마시고 여자나 끼고 산다는 건 인류의 낭비지.

"훕!!"

그래서 이겨야 한다.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고 싶다.

양민구가 빠른 스탭을 딛으며 구마하와 거리를 좁혔다.

애정을 담아. 강한 의지를 담은 주먹을 지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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