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37화 (337/401)

도전자 (2)

"원 투. 다시 해 봐. 원 투. 어깨에 힘 빼고. 팔 너무 뻗지 말어.

팔꿈치 나가니까."

"어? 쭉 펴야 파워가 실리는 거 아니에요?"

"타격은 친 사람에게도 똑같은 반동이 온다."

"아~아. 자세가 완충작용을 하는 거구나."

"그렇지. 그럼 다시 원 투. 스텝 밟고."

"좋아, 됐어. 관장님, 저 민구 형이랑 설욕전 언제 해 주실 거예요?"

"하하하! 야, 인마. 사람 팼다고 뉴스 나올 일 있어!!"

원투 잽 스트레이트로 이어지는 기본 펀치를 배우고 있었다.

화려하게 어퍼컷, 라이트 훅 이런 것도 하고 싶지만, 복싱은 습관이 곧 기술이고, 숙달된 기술과 기술이 엮여 실력이 된다는 말에 욕심을 비우고 하나하나 쌓아 가기로 했다.

"역시 몸이 좋으니까 자세가 흔들림이 없구만."

"고맙습니다!"

"보통은 몸이 힘들어서라도 꾀를 부리지만, 자네는 이미 완성에 가까운 체격을 가지고 있으니까 익숙해지는 데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야."

모든 것이 기본이 중요하다.

달리기도 스키도 기본을 익혀야 체력 소모도 적고 부상을 방지 할 수 있으며 실력이 상승할 수 있다.

배우고 나니 민구 형과 스파링 뛸 때 왜 그렇게 빨리 지쳤는지 알 것 같다.

펀치, 스텝, 위빙, 호흡 하나하나 에너지를 땅바닥에 버리고 있었구나.

좋아. 뭔가 새로운 걸 배운다는 것도 좋고 몸이 새로운 움직임을 익히는 것도 좋다.

그리고 복싱이라는 게 막 굳이 화려한 걸 배우지 않더라도, 실밥 삐죽거리는 붕대만 감고 있어도 남성 본능이 막 미쳐 날뛰는 것 같다.

"훅!"

거울을 향해 펀치 연습을 하는데. 와. 봐 봐. 지금 진짜 존나 멋있는 거 아니냐? 여기서 고개 살짝 꺾어 주면 화보 저리 가라 겠는데.

그래서 권투 선수들이 포스터 찍을 때 다들 이 포즈를 하는 거구나.

진짜 강한 남자의 표본 같다.

육상이나 스키가 싫은 건 아니지만 복싱은 뭔가 남성성을 깨우치는 그런 게 있어.

수컷의 본능을 울리는 아우라가 있다고.

진짜 남자의 운동이다.

씨발, 안 되겠다. 오늘도 한 시간 더 연습하고 가야지.

"어이구, 어이구. 잘하나 하고 냅뒀더니만 똥폼 잡기는. 집중 안 해!"

"죄송합니다, 관장님. 근데요, 제가 봐도 지금 이 포즈가 너무 멋있는 거 같아서..."

"크하하하! 까불지 말고. 일단 자세는 좋아."

"아, 진짜 잽만 알았어도 형한테 그렇게 안 당했는데..."

"아직 한참 멀었어. 1초에 세 방은 때릴 줄 알아야지."

"1초에 세 방이요? 뭐. 주먹이 세 번은 나간다는 소린가?"

"그렇지."

최두필 관장님이 자세를 잡고 예시를 보여 주시는데 주먹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우와..."

"나도 나이 먹고 많이 느려진 거야."

"와... 그럼 현역 선수들은 대체 손이 얼마나 빠르길래..."

"무하마드 알리는 3초에 12방의 콤비네이션 펀치를 날린 적도 있었지."

"열두 방이요?"

"음. 그것도 양손 콤비네이션으로. 잽만 쳤다면 더 빨랐을걸?"

"허어... 헤비급은 다 뚱뚱하고 그런 사람들만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자네도 헤비급이라니까?"

"전 지금 살 많이 찐 거예요."

"왼쪽을 제압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잽만 잘 때려도 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레너드의 명언이지."

"오오~! 멋있어요!!"

잽. 단순 펀치가 아니구나.

씨발, 뭐 하나하나가 다 간지네.

이런 운동이 왜 인기가 없지??

"아, 그리고. 봐 봐. 자네 스텝 훈련하는 거 봤는데, 앞다리를 딛고 뒷발이 따라오는 게 아니야. 뒷발로 밀어 앞으로 간다. 반대도 마찬가지고. 모든 스텝은 추진력을 가져야 힘을 얻는 거야."

"이렇게. 으음. 네. 알겠습니다."

"역시. 밸런스가 좋아. 한 번 더 해 봐."

시키는 대로 쉭쉭 움직이니 관장님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며 말씀하신다.

"하하! 육상도 밸런스가 중요한가?"

"엄청 중요하죠. 육상은 코어가 잡혀야 추진력을 얻고, 스키에서 밸런스는 뭐 말할 것도 없죠."

"복싱도 마찬가지야. 중심을 빨리 알아야 나만의 리듬을 찾고, 그에 맞는 스타일을 익힐 수 있는데. 뭐 봤을 때 시간 문제겠군."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자네 혹시 왼손잡인가?"

"아니요. 왜요?"

"흐음. 봤을 땐 오른손만큼 왼손을 잘 쓰는 거 같길래."

"아. 그거요."

원래 공부에 적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밥상에서 왼손 쓴다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그냥 이 손이 편하면 이 손을 쓰고 저 손이 편하면 저 손을 써 버릇하며 자라왔다.

나는 아직도 똥을 양손으로 다 닦을 수 있다.

학교 다니면서는 아무래도 오른손이 주 손이 됐지만, 지금도 딸칠 땐 기분에 따라 왼손과 오른손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만큼 양손을 쓰는 데 어려움이 없다.

무엇보다 양손을 잘 써야 상대방을 공략할 때도 여러 곳을 만져 줄 수 있고, 가슴도 두 개고 엉덩이도 두 개고 구멍도. 아, 구멍은 세 개?

"양손잡이였구만."

"그런 거 같아요. 저 기구 만질 때나 체단실에서 운동할 때도 딱히 좌우 틀어지는 거 잘 못 느꼈거든요."

"알리도 스위치 히터였어. 양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다채로운 기술과 페인팅을 썼는데."

"관장님, 알리 진짜 좋아하셨나봐요."

"마하야. 알리는 단순한 선수가 아니야. 위대한 인물이지."

이왕 새로 시작하는 거, 몸도 갖춰진 만큼 어느 한 자세나 방향을 벗어나 양손잡이 스위치 히터 훈련을 해보는 건 어떻겠냐 물으셨다.

그 편이 운동량도 늘고 나도 전신을 쓸 수 있어 마음에 들었다.

"이거 봐, 이거. 남들은 힘들다고 하면 어떻게든 쉬운 길로 가려고 하는데."

"저는 선수였잖아요."

"좋아! 하하! 계속해."

땡!

이제는 3분 종소리도 친근하게 들려온다.

"훅훅!"

오히려 3분이기 때문에 할 때 바짝 집중하지 않으면 몸이 달아오르질 않는다.

복싱은 매 라운드가 인터벌과 같다.

뛰어라. 주먹을 뻗어라.

시간은 3분밖에 없다.

* * *

"뭐야? 진짜? 연고전이 벌써 끝났어?"

"아. 마하야. 야!! 뭔 소리야, 지금!!!"

"선배님, 언제적 얘기를 하시는 거세요."

"아니... 난 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니가 학교를 안 나왔잖아!!"

"저기, 후배님아. 익범이 왜 이렇게 화났냐? 설마 졌어?"

"미친놈아! 조용히 하라고!!!"

이제 와선 하루라도 빨리 민구 형이 붙잡아 준 게 고맙기만 하다.

연고전이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쳤던 삶이었는데.

땀도 빼고 몸도 쓰니까 딱히 섹스를 하지 않아도 음양이 알아서 조화를 이루는 것 같다.

몸에 에너지가 다시 차오르는 게 느껴진다.

정신이 맑으니 어려운 수업도 듣는 자세로 앉아 있을 수 있고, 학교를 나오니 중간고사에 이름이라도 써서 제출할 수 있었다.

"익범아, 여기 커피."

"후우..."

"미안하다고, 새끼야. 난 한 번도 못 가 봐서. 그게 언제 하는지 잘 몰랐다고."

"한 번도? 1학년 때도?"

"그때가 나 씨발 약물이니 뭐니 존나 지랄하던 때잖아."

"아. 맞다 그런 일도 있었지."

"한 것도 없는데 벌써 3학년이라니..."

"뭐, 대신 넌 휴학 많이 했었잖아."

"흐음. 넌 좀 어떠냐? 프로 얘기 나오던 거 있었잖아."

"...모르겠어. 나도 군대나 갔다 올까 싶어."

"음. 그렇구나."

익범이와 운동장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농구 선수인 익범이는 작년 도하 아시안게임의 결과가 못내 아쉬운 것 같다.

"부산에서 우리가 우승했었지?"

"어..."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대회에서 노메달이라..."

"기대들이 너무 높아. 한국 수준은 생각도 안 하고."

"후후후. 다 그렇지 뭐."

"넌 진짜 은퇴 잘 했어. 그만큼 해 줬으면 됐지. 뭘 더 어쩌라고 안 그래?"

"훗. 모르겠다, 나도."

"요즘은 일 없냐? 학교 잘 나온다."

"아. 그냥 운동하고 그러다 보니까 생활이 리듬을 찾더라고. 아침에 눈도 잘 떠지고."

"운동? 뭐?"

"어어. 있어. 민구 형 하는 거 따라 나가서 하고 있어."

"으음. 생활 체육 같은 건가?"

"그렇지."

"마하야, 아쉽지 않냐?"

"뭐가? 은퇴한 거?"

"응. 다시 선수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흠. 선수라..."

태극마크를 내려놓으며 실업팀에서 이야기가 들어왔던 것도 사실이었다.

동민이를 영입한 서울 시청도 있었고 대기업 실업팀들도 몇 군데 있었다.

스키도 마찬가지였다.

정준이 형이 따로 표현은 안 했지만, 건너 건너 얘기를 들어봤을 때 스키로 완전 전향을 하면 상택이 형과 나를 중심으로 실업팀 감독 자리를 맡고 싶어 했다는 것 같다.

"없어. 나도 운동 힘들었어."

"하긴. 세계 신기록인데."

"그냥 지금이 좋아. 경쟁 없이 즐겁게 운동할 수 있는 지금이."

"하하! 새끼야, 그것도 너가 연금을 받으니까 하는 소리지."

"하하하! 억울하면 다음 대회 때 너도 대표 팀 나가서 금메달따든가."

"국제 대회라..."

* * *

방과 후 민구 형을 만나 체육관으로 가는 길에 이야기를 나눴다.

"익범이는 잘 지내?"

"연고전에서 졌다고 신경 날카롭더라고요."

"그랬구나. 짜증나겠네. 2년 전에는 우리가 발랐던 걸로 아는데."

"다 졌다고 하더라고요. 분위기 엄청 우울했다고 고대 쪽은 신났고. 근데 뭐 전 한 번도 못 가 봐서..."

"정말? 한 번도?"

"1학년 땐 뉴질랜드로 스키 훈련 갔다 오니까 약물이니 뭐니 해서 반강제 자숙 중이었고. 작년은 딱 그 기간에 대표 팀 나간다고 해서 미국 갔다 돌아와 태릉 들어갔고요."

"어어~ 기회가 없었구나."

"아무튼 오늘 익범이랑 이런저런 얘기하는데, 애가 처음으로 제가 평범한 친구 같았다는 말 해 주더라고요."

"일상이 겹쳐지니까 더 그랬나 보다."

"그러니까요."

"흠."

"보자. 오늘은 뭘 하나. 형, 저 이제는 샌드백 때릴 수 있을까요?"

"근데 마하야. 너..."

"네."

"으음. 아니야."

"말씀하세요. 뜬금 갑자기?"

"아니. 그냥. 지금 복싱은 그냥 취미로 하는 건가 해서."

"당연하죠. 저 형한테도 뚜드려 맞은 놈이에요. 제가 무슨."

"그러니까... 그냥 회사에서도 물어보니까."

"회사에 얘기하셨어요?"

"어. 대표님도 물어보시더라고. 교수님한테 연락 받으신 거 같던데. 너 요즘 학교 성실하게 나간다고."

"이래서 내가 딴짓을 못 해요. 뭐 주변에서 죄 감시를 해 대니..."

"하하! 다들 아끼는 마음이 있으니까 그러지."

"감독님은 뭐라고 하세요?"

"별말씀은 없으셨고. 갑자기 복싱이냐고 하시더라고."

"형이 끌고 가서 줘팼다고 하시죠."

"야! 미쳤냐!!"

그래도 이 형이 아니었다면.

난 아직도 술과 클럽을 전전하며 몸을 망치고 있었겠지.

나중에 감독님이 물어본다면 민구 형이 크게 도와줬다고 얘기 해야겠다.

그래서 보너스 두둑하게 받으면 고기 사 달라고 해야지.

"참. 마하야. 스케쥴 하나 잡을까 하는데."

"좋죠. 뭐든 할게요."

"아. 그게 일은 아니고."

난 민구 형이 하자고 하는 건 군말 없이 수행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 형이 가지고 온 일은 다름 아닌.

"봉사 활동요?"

"어. 그때 우리 체육관 형님들이랑 술 마실 때, 그게 좀 걸리더라고."

"아. 막 이미지 안 좋았다 했던 거 말이죠. 싸가지 없다고."

"응. 형님들도 방송에서 비췬 이미지만 그런 거라 했지만, 난 그것도 너한테 달리는 악플에 없지 않아 영향이 있다고 보여서."

운동을 다시 시작했을 뿐. 나는 여전히 한구스포츠의 간판이자 주 수입원이다. 해야 하는 것과 내가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다.

"네. 형이 하자는 대로 할게요."

"진짜? 괜찮겠어?"

"그럼요."

"어. 막 어려운 사람들도 만나고 아픈 사람들도 보고 이럴 건데. 진짜로?"

"하하! 형이 하자면서요."

"아니. 나는 의견을 묻는 거지. 바로 이렇게 선뜻 한다고 하니까 좀 걱정돼서."

"그게 뭐 어때서요. 저도 지금이니까 이러지. 나 어릴 때 우리 형이랑 형 일하는 가게 테이블에서 자고 그랬던 적도 많아요."

"정말? 너랑 형님이?"

"그럼요. 우리 형제 고생 많이 했어요. 여기저기 눈칫밥도 엄청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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