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39화 (339/401)

도전자 (4)

"보자, 아메리카 복싱 플레이어."

정말 오랜만에 컴퓨터 앞에 앉아 포르노가 아닌 건설적인 무언가를 찾아보는 것 같다.

진짜 한국만 복싱에 관심 없지, 외국은 뭐가 엄청 많구나.

미국 쇼 오락 스포츠 전문 채널 estv HBN 등을 중심으로 다양하고 재미난 명경기가 수십 년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우리 최두필 관장님의 워너비 무하마드 알리를 시작으로 타이 슨, 포먼, 산체스. 리카르도 등등. 누군지는 몰라도 얼핏 들었던 이름들이 있어 경기가 더 재밌게 느껴진다.

물고기 한 번 잡아 봤다고 어부가 되는 건 아니지만, 말은 제일 많지 않던가. 그런 기분으로 시합을 보았다.

"그렇지. 와, 반응속도 미쳤네."

처음엔 잘 싸웠네 뭐네 주절주절 평가하고 떠들며, 앉은 자세로 흉내도 내 보고 어깨도 들썩거렸다.

보다 보니 재밌어서 오후 수업도 제끼고 시간을 보냈다. 어차피 출결은 이미 끝난 상황이기도 하니까.

마음 편하게 이것도 봐야지, 저것도 봐 볼까? 검색에 검색을 이어, 선수 정보도 찾아보고 한창때 사진도 보는데. 밝고 조용하던 신촌 거리가 어느새 어둑어둑한 하늘과 퇴근하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차오른다.

"허어..."

그리고 그쯤 되어선 경솔하게 입을 열지 않고 감탄만 했다.

주먹 한 방 한 방. 선수들의 고단한 훈련 과정과 삶이 묻어 나오는 느낌이다.

"아까 그렇게 맞았는데 그걸 버티네..."

눈두덩이가 붓고 입술이 찢어져 피를 흘리지만, 포기하지 않는 독기 어린 선수들의 눈빛.

가슴과 배 어깨가 타격으로 빨갛게 부어올라도 주먹을 피하지 않는 정신.

미친 근성이다, 진짜... 저건 아픔을 참고 자시고의 단계가 아닐 거야...

자정에 가까워서는 감탄도 하지 않고 조용히 모니터만 응시했다.

"11라운드..."

복싱 1라운드는 중거리 달리기 800m와 비슷하다.

단거리가 내가 가진 모든 힘을 써!! 라면, 중거리는 내가 가진 전력의 7~80정도의 힘을 안배하여 빠른 시간에 결승점을 넘는다.

그렇게 800을 완주하면 100미터 달리기보다 더 많은 기력이 소모되어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복싱은 그런 시합을 9~10라운드를 뛰는 것이다...

이런 시합이 세계 타이틀로 올라가면 12라운드까지 이어진다.

이것도 사람이 죽어서 14라운드에서 줄인 거란다.

죽지. 당연히 죽지. 이렇게 체력을 소모하면서 경기를 하는데.

포기하지 않으면 목숨을 거는 거야.

고인이 되신 한국 선수 분의 이름도 찾아보았다.

근성 가득한 사나이의 표정을 보았다. 영화도 있는데 그건 다음에 봐야지.

와, 진짜 대단하네. 가만히 뛰는 것도 뒤질 거 같은데, 서로 맞고 때리는 시합을 하면서 10라운드 이상을...

진짜 전쟁이구나.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체력과 정신력이 아닐 수 없다.

괜히 태릉에서 복싱선수들이 불암산을 선두로 찍는 게 아니었어.

정말 우리 형 말대로 이 세상은 말도 안 되는 강자들이 많다.

나는 그냥 빠르게 잘 달리고 뱃심 있게 스키를 탔을 뿐이지...

강함으로 따지면...

"복싱이라..."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강자들이 즐비한 세상을 보자니 내 안의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걸 느끼는데. 이건 내가 곤륜 출신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스포츠선수 출신이라 그런 걸까?

만약 복싱을 시작한다면, 육상에서 스키로 갈 때 그랬듯이, 내 안의 내공은 투기로 바뀔 것이고 몸도 근육도 그쪽으로 변해 갈것이다.

몸이 지금보다 더 단단해질 것이고 어깨와 복근이 더 갈라지겠지. 타격을 견디려면 맷집이 필요하니까.

바디 블로우를 견디려면 무슨 훈련을 해야 하는 걸까? 옆구리 여기가 대복사근이던가?

"에이. 적당히 해. 말도 안 돼. 내가 뭐라고. 민구 형한테 개처발린 실력인데,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건 안 돼."

입으로는 그렇게 떠들지만. 붙으면 상대도 안 되고 맞고 쓰러져 기절할 걸 분명히 알지만. 이상하게 몸은 여기저기 근육을 체크하고 머릿속은 자꾸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돌려 저 역사적인 선수들과 내가 시합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코칭 스테프로 민구 형과 최 관장님, 그리고 정 사장님이 함께 하고 있다.

팀원들과 함께 있는 대기실에서 나는 미리 붕대를 감고 글러브를 낀 상태로 거울을 보며 쉐도우를 뛰는데, 문밖, 멀리 시합장에서 오프닝 경기가 관중들의 아드레날린을 폭발시키는지 잔잔하던 함성이 점점 뜨거워져 온다.

누군가 시간이 됐다고 알려 준다.

최 관장님 특유의 가자!! 라는 외침에 두 다리에 힘이 번쩍 들어갔다.

미리 달궈놓은 체온을 지키기 위해 머리끝까지 가운을 눌러쓰고 밝은 복도를 지나자 기자들이 뭐라 뭐라 떠드는데 무시하고 계속해서 걷는다.

가디언들이 문을 열어 주자 어둡고 열광하는 관중들 저 앞으로 사각의 링이 조명을 받고 있다.

환성을 애써 외면하며 링으로 걸었다.

민구 형과 관장님이 양쪽에서 그물을 잡고 정 사장님이 붕대나 수건 등 부상을 방지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무대에 올랐다. 정장을 갖춰 입은 콧수염 신사가 선수들을 보며 마이크를 들었다.

상대가 나를 노려본다. 죽일 듯한 기세. 아니, 죽이고도 남을 각오가 서려 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고, 승부와 별개로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맛있는 걸 먹으러 가는 친구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경기장 밖에서의 이야기.

오늘 둘 중 하나는 승자가 된다.

그리고 나는 지고 싶지 않다.

붙어 보자. 덤벼라!

눈 한 번 깜박이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 줄 알고, 서로를 향해 작은 몸짓 하나 흔들리지 않는 상태로 링 중앙에 있으니, 콧수염신사가 손을 높이 들어 관중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레이디스 앤 젠틀맨~~! 크으~! 인간들 막 소리치고, 난리 나고."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살짝 고개만 돌려도 이곳이 신촌 오피스텔이라는 걸 알지만, 몸은 마치 시합장에 올라와 있는 듯 손끝까지 긴장감이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뭐. 상딸도 치는데, 이런 거 가지고."

정말 엄청난 긴장감이다. 진짜 시합은 상상한 그 이상이겠지?

두려움이 아니다. 내가 어디까지 통할지 평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선수를 설레고 떨리게 만든다.

시합이라는 건 땀, 노력, 인내. 그 모든 가치를 평가받는 자리니까.

성적표가 나오는 날은 누구든 떨리기 마련이지 않겠어? 그게 스포츠 선수의 삶이지.

"하아. 진짜, 복싱이라..."

경험해 볼 수 있다면 당연히 해 보고는 싶지. 그런 무대는 올림픽 스타디움과는 또 다른 기분일 테니까. 섹스도 이 사람 저 사람이 체위 저 체위 맛이 다른...

아무튼,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도전이라니 얼토당토않은 생각이지.

열심히 하면 빠르게 정 사장님 위치의 실력은 만들어도, 선수는 어나더 레벨이잖아.

취미로만 해. 건강한 생활을 유지해 주는 지금 정도가 딱 좋아.

늘 말하던 생활 스포츠를 마침내 찾은 거니까.

그 정도면 된다.

그 이상으로 가려면 또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몰라.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까지 운동을 하고 싶지도 않고.

"..."

딸치고 현타에 빠진 듯 한참을 멍하게 있다 겸사겸사 키보드를 배 쪽으로 끌어당겼다.

신작 포르노를 찾아보려는 게 아니라 검색창에 내 이름을 두드려 봤다.

아테네, 구마하. 영어 아닌 한국어로만 쳐도 적지 않은 결과가 쏟아진다.

육상 네 시합 결승부터 토리노 다운힐 경기까지. 나의 과거가 고스란히 인터넷에 남아있었다.

"크하하~!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지?"

처음으로 월계관을 수여받던 순간을 보는데, 얼빠진 표정으로 금메달을 걸면서 아직도 이게 현실인지 뭔지 어리벙벙하던 그 모든 감정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날의 함성. 그날의 영광.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장면들을 보며 남은 밤을 보냈다.

"맞어. 저랬었는데..."

이제 볼 것도 다 봤고 밤도 깊었으니, 일본 신인배우들이나 찾아보면서 딸치고 자야지.

* * *

"흠, 흠. 어... 우리도 새로운 자원 봉사자가 오신다는 건 들었지만..."

"아이고, 아이고. 이게 누구야?"

"와!! 진짜에요!!?"

"네! 진짜 구마하입니다.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 날, 민구 형이 기획한 이미지 쇄신 프로그램 자원봉사를 나왔다.

혼자 계시는 어르신들을 위한 겨울 김장김치 1,000포기를 담그는 일이었다.

"마하 씨, 일단 이것부터 옮겨주시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

"무거워요. 천천히 하세요."

"아니요! 빨리빨리 해야죠!!"

어제 찾아본 복싱 선수들은 어찌 그렇게 다들 가난하고 힘든 시절을 보냈는지.

국적과 인종을 초월해 왜 그렇게 살아온 모습들이 비슷비슷한지.

그러면서도 성공한 후엔 또 왜 그렇게 좋은 일들을 많이 하는지.

나도 좋은 일 많이 해야지. 어찌 보면 이런 사회 활동이 너무 늦은 거야.

성장 과정만 따지면 나도 그들과 크게 다를 게 없으니까.

"후우, 후우. 어머님, 이거 어디다 내려놓을까요?"

"아이고, 아이고! 이 무거운걸!! 어서 내려놔요!"

"하하! 괜찮습니다. 빨리 해야죠!"

라고 좋은 마음을 품긴 했지만...

와 솔직히 존나 무겁네...

몸이 이렇고 체격이 이래서 기대하는 시선에 맞춰 무리해서 들었는데 젠장.

"후우, 으쌰!"

"마하 씨, 조금씩 옮겨요. 사람도 많은데 왜 그걸 그렇게."

"아. 위에서 기다리고들 계셔서."

"후후. 힘내세요."

"네!!"

그래도 가야 해. 들어야 해. 이것은 삶의 무게니까.

정석이 새끼가 그렇게 술만 처먹으면 대학생인 니들이 현실을 아냐고 떠드는 그 삶의 무게.

"후욱, 후욱. 와, 미쳤다 진짜. 이런 게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할걸."

무엇보다 이게 생각보다 자극이 좋다.

벤치 250을 거뜬히 들어도 가만히 안전한 자세로 드는 것과 계단을 오르내리며 흔들리는 배추 망을 들고 가는 건 다르다.

온몸에 자극이 온다.

코어는 물론이고. 허벅지 어깨, 발끝까지 신경 써서 움직이지 않으면 배추도 상하고, 자빠져 크게 다칠 수 있다.

이래서 진짜 근육은 실전 노가다 근육이라고 하는 구나. 우리 형이 왜 따로 운동을 안 해도 몸이 좋은지 알겠어. 맨날 고기 들고 야채 들고 하는데, 힘이 좋지.

"이야~ 열기 봐라."

"휴우. 민구 형, 이거 운동 되는데요?"

"하하! 여기 물 마셔라."

"물 말고 프로틴은 없어요?"

"아하하하! 야. 운동이 아니야."

김장 봉사 활동의 좋은 기분을 시작으로 연탄 배달, 식사 배급 등등 이미지 관리 프로그램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아동 병원까지 찾아가게 됐는데.

"병원. 형? 여기선 무슨 봉사 활동을 해요?"

"아. 여긴 봉사 활동은 아니고 그냥 아픈 애들 만나서 사진 찍고 그러고 갈 거야."

"으음."

"어떻게 보면 팬미팅이지."

"나를 왜?"

회사 차원에서 내 이름으로 여기저기 기부를 많이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좋은 뜻도 있고 세금 관련 일도 있어 맡기고 있는데. 지금까지는 운동하는 애들한테만 지원이 가는 줄 알았더니 그게 점점 수익이 확대 되면서 병원까지 오게 됐단다.

"아, 근데 이건 너무 계산적이지 않나요?"

"괜찮아. 다 그래. 좋은 일이 다 그렇지."

"으음. 형, 이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좀 그래요. 그냥 기부만 하고 가요, 우리."

"괜찮다니까. 예전부터 한번 와 줄 수 있냐고 병원에서도 계속 부탁했었어."

우리 같은 사람들은 기사가 그냥 나가는 게 아니라 회사 홍보팀과 기자들이 조율을 해서 만든다.

겸사겸사 좋은 일 하는 이때, 웃는 얼굴로 기록만 남기고 가자 길래 일단 따라왔는데.

"자. 찍겠습니다."

병원 관계자 만나 악수하고 기부 증서 받고 사진찍고 하는 건 정치인 행사 얼굴마담하는 것과 다를 게 없어 크게 어려울 건 없었다.

그러다 막상 아픈 아이들과 만나는 시간이 왔는데.

와, 이게 진짜 곤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휴..."

"와, 마하야. 저기."

"네... 봤어요."

"저렇게 어린 애가 어쩌다가..."

학생 때 봉사 활동 수행 평가로 여기저기 잡일을 하러 갔던 적이 있다.

요즘엔 주민 센터라고 하나? 동사무소에서 서류도 정리하고 양로원 청소도 하고 그랬는데. 접근성도 좋고 봉사 활동 시간도 팍팍 준다고 태윤이가 큰 병원에 가자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아픈 사람들 보는 건 참 어렵고 힘든 감정이었다.

사고를 당했거나 하는 건 과정이 있으니까 좀 나은데, 특히나 아픈 애기들. 태어나기를 아프게 태어난 애들은 보는 것도 진짜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하 씨, 우리 애랑도 사진 한 장만 찍어 줄 수 있을까요?"

"어우, 네. 그럼요."

그런 친구들에게 이제 내가 뭐라도 된 듯 위로를 건네줘야 한다.

어렵고 힘든 상황이지만, 나보다 이 친구들이 더 고통스런 상황이기에 일단 참고 돌아다녔다.

그런 상황에서 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형, 저 여기 싸인해 줘요."

"우와. 이건 뭐야?"

김도영(9)라는 명찰을 붙인 침대에 누운 작고 왜소한 아이가 아테네 올림픽 때 내 사진을 내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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