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자 (7)
형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라고 했지만 감독님께는 진실을 알렸다.
"그래서? 지금 부모님이 중국에 계신다고?"
"중국인지 어딘지는 모르겠어요. 티벳에서 마지막으로 헤어졌다는데, 헤어진 그 장소에 부모님 흔적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아이고... 이걸 어쩌냐. 연락처는?"
"그런 건 없었고요."
"에헤이... 그것만 있어도 일이 편한데..."
형이 가져온 부모님의 편지를 보았다.
나무에 붓 같은 걸로 한잔지 뭔지 모를 글씨가 쓰여져 있는데, 나는 도무지 보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글자들이였다.
연락처가 있을 리 만무하지. 그런 문화를 알지도 못하는 분들일건데.
"형님도 심란하시겠네."
"그러니까요. 신혼여행인데..."
"사람 일이라는 게 참..."
감독님은 우리 형제가 탈북자로 대한민국 국적을 받은 걸 알고 있다.
무엇보다 감독님이 알아야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미 이분 머릿속에는 몇 가지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떠오르는 것 같다.
"그럼 너가 시끄럽게 해 달라고 한 것도 다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네. 최대한 많이많이 이슈가 돼야 해요."
"그래야 어른들이 조금이라도 너를 알아보실 수 있으실 테니까?"
"네! 역시 감독님. 오오~~ 역시 서울대!!"
"야 인마. 지금 학교는 아무 관계없고."
잠깐 생각에 잠기던 감독님이 조심스레 입을 여셨다.
"근데 마하야, 너 하나로 될까?"
"무슨 뜻이세요?"
"형님을 모셔 오는 건 어떻게 생각해?"
"형을요? 뭐로요?"
갓난아기 때 헤어진 만큼 부모님은 어른이 된 내 얼굴을 모르고 계신다.
하지만 형이라면 장성한 지금도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나랑 형이 늘 같이 다니면 그만큼 언론에 형 얼굴도 많이 나올것이고 부모님이 우리 형제를 알아보는 것도 한결 더 빠르게 진행 될 수 있다는 게 감독님 생각이었다.
"와, 좋네요. 역시 서울..."
"야 인마, 장난하지 말고. 심각한 얘기 하는데."
"아니요. 근데 형을 뭐로요. 가뜩이나 그 고깃집 벗어나면 지구망하는 줄 아는 인간한테."
"고깃집을 대신할 역할을 드리는 거지."
감독님이 트레이너로 형을 초빙하자고 말했다.
"형을 트레이너로 부른다고요?"
"어. 아테네 때부터 생각했던 건데, 형님 마사지 능력 대단하시잖아."
"그쵸. 우리 형 마사지 미쳤죠."
"실제로 유진 볼트도 효과를 봤었고."
새롭게 시작하는 운동인데, 꼭 이런 일 아니어도 마윤이 형님이 옆에 있으면 내 부상 방지에 도움이 될 거 같다고 하신다.
복싱이니까, 맞는 것도 있을 것이고 붓기도 빼야 하고. 생각할수록 좋은 아이디어 같기는 한데.
"저 그럼, 그건요. 감독님이 대신 설득 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왜? 형님이랑 싸웠어?"
"아시잖아요, 우리 형. 사람 답답한 거..."
"하하하. 아... 나도 마윤이 형님 은근 어려운데."
"그래도 감독님 말이라면 형도 잘 듣고."
"흐음, 그래. 한번 시간 내서 찾아뵐게."
감독님을 비롯해서 한구스포츠에선 새로운 도전에 맞춰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우선 집을 신촌 바닥에서 고양시 세계체육관 근처로 옮겨 주었다.
그리고.
"어이고, 어이고... 민구야, 이 친구들 이거 지금 진심인 거냐?"
"그럼요. 1000% 진심이죠."
"허이고야... 돈들이 썩어 도나... 이러다 실패하면?"
"관장님, 구마하를 놓고 실패를 생각하십니까."
"야 인마,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 게 모르는 건데."
"말씀드렸잖아요. 그런 걸 생각 안 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런 결과를 보는 거라고요."
이번에 수도관이 터져 세입자가 비운 세계체육관 윗층을 우리 회사에서 임대해 나를 위한 체단실과 운동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어이고, 오셨네. 관장님, 여기요."
"허허허~ 한 대표님, 돈이 좋긴 좋네요. 그 후줄근하던 데가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가 되다니."
"화장실도 손보라고 했고요. 다음 주면 아래 체육관도 겸사겸사 같이 보수 작업 들어갈 겁니다."
"에헤이, 그런 걸 왜 세입자가. 건물주가 해야 되는데."
"급한 사람이 불부터 꺼야죠. 괜찮습니다."
"흐음. 그래서 마하는요?"
"이미 먼저 운동하고 있어요."
"어디서?"
운동 공간이 갖춰지는 그날도 나는 시간을 버리지 않고 화정과 행신동을 가로질러 한강까지 로드워크를 뛰고 있었다.
"훅, 후욱!"
서두를 상황이지만 조급해 하지는 마라.
남보다 몇 배나 뒤쳐졌으니 실패해도 이상할 건 없다.
그냥 해낼 수 있다는 믿음만 가지고 달리는 거다.
무식하고 단순하게.
그냥 '된다!'는 생각만 가지고 뛰자.
"헉! 다녀왔습니다."
"허허허, 땀 봐라. 이 추운 날."
"관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줄넘기부터 뛸까요?"
"야 인마, 됐으니까 일단 숨부터 쉬어."
내가 복싱을 시작했단 소문이 빠르게 스포츠계와 사회로 번져 나갔다.
"어, 인수야. 어, 맞어. 시작했어."
친구들. 기업들. 그리고 뉴스 등등.
회사에서 힘써 준 것도 있지만, 내가 또 뭔가를 한다는 말에 잠잠하던 기자들이 더듬이를 발딱 세우고 찾아들었다.
"구마하 선수! 이번엔 복싱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선수 선발전을 목표로 운동중이라고 하던데, 설마 베이징 올림픽을 노리시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어이고, 가능하겠어요?"
"최선을 다 해 볼 생각입니다! 지켜봐 주세요!!"
착실한 모습으로 기자 회견을 해서 그런가, 어쩐 일로 스포츠기자들이 나에 대해 좋은 이야기만 써 주는 기분이다. 아니면 봉사 활동 이야기가 정말 이미지를 조금 좋게 만든 것일까?
[구마하, 어린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돌아오다.]
늘 우리를 위해 심도 깊은 기사를 써 주는 임한기 기자님이 이번 도전에 제대로 스토리텔링을 해주셨다.
미안하다, 얘들아. 그렇지만 형도 도움이 필요하니까. 너희의 응원을 이용하는 만큼 실패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을게.
"병원을 한 번 더 갔다 와야겠는데?"
"그러게요. 대신 뭔가 결과를 내고 가죠, 이번엔."
"하하. 그러자."
"후우. 그럼 다시 운동할까요?"
"어? 벌써?"
"종 쳤어요. 형."
일부러 NICE가 아닌 다른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아주 작은 논란도 지금은 버릴 수 없기에, 외국은 또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아니나 다를까 디아다스에서 기뻐하며 찾아오고, NICE에선 서 운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회사로 쳐들어 왔다.
이쪽 관련 일은 감독님을 비롯한 길수 형과 회사 사람들이 대신 맡아 싸워 줬다.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하이고야, 진 빠진다. 일단 물 좀 먹고. 나보다 길수한테 설명들어."
"어. 일단 디아다스는 복싱은 원래 자기들이 전문으로 하던 종목이라고. 신발이고 뭐고 다 제공해 주고 그런다는데."
"NICE는요?"
"거기는 소송도 불사하겠다고 했었어."
"와 소송까지나?"
"근데, 소송 걸 게 있나. 너가 육상이랑 스키만 타겠다고 전속계약을 맺은 것도 아닌데, 대표님도 이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어."
"그럼 제가 요청한 것도 들어주겠다고 해요?"
"음. 일단 제시는 했어. 그러니까 자기네들도 미국 본사랑 상의 해 보고 연락 준다고 했는데. 근데 마하야, 이번 기회에 디아다스로 갈아타는 것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 않냐?"
"하하! 그쪽이 돈 많이 준다고 했나봐요?"
"야, 장난 아니야. 진짜 회사 생각하면 이런 요청을 거절하는 게 멍청한 거다, 너."
NICE와 같이 갈 것이다. 하지만 같이 가려면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마하야, 길수한테 연락 왔는데."
"훅, 후욱!"
"어, 집중하고 있구나."
"그렇지. 더 때리고. 여기서 훅! 왜? 민구 뭔데?"
"아닙니다. 관장님. 나중에 이야기할 게요."
훈련 중이라 연락을 못 받았는데, NICE 측에서 우리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단다.
"와, 진짜요? 회사 일 잘하네."
"대신 계약 조건이 좀 붙긴 했는데..."
"뭔데요?"
"일단 하나씩 정리하자면. 전 세계 모든 매장에 니 사진은 걸어 준대."
"그렇지!! 대형으로?"
"어. 특대형으로. 전성기 마이클 조던 못지않게."
"그럼 그거는요? 모든 NICE 광고에 내 사진 붙이는 건?"
"그건 어렵지. 그냥 복싱을 시작했을 뿐이잖아."
"흠. 그래요?"
"그래서 이거랑 관련해서 다시 저쪽이 제시한 조건이 뭐냐면."
전속이다. 구마하는 앞으로 모든 스포츠에 있어 NICE 용품만 써야 하고 신발도 옷도 다 NICE만 입어야 한다.
"사복도?"
"사복은 경계가 애매하긴 한데, 아마 속옷 까지는 자기네 꺼 입으라고 할 거야."
"하하! 그럴 거면 콘돔도 로고 찍어서 보내라고 하세요."
천문학적인 금액을 제시한 디아다스는 내가 변죽만 올렸다고 이를 갈았단다.
그 모든 걸 포기하고 NICE와 손을 잡았기에 나의 행동은 두 세계적인 스포츠 기업의 자존심 싸움으로까지 번졌다.
"와, 이런 기사가 나왔네."
"뭔데요?"
"박상택이 해외에 많네."
"하하! 뭔지 안 봐도 알 거 같은데?"
육상에서 스키로 갈 때 반발을 샀던 것만큼, 해외에서의 복싱선수들이 나의 새로운 도전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근데 하나같이 디아다스가 후원하는 선수들이네. 이번에 제대로 너한테 빡쳤나 본데?"
"어이고, 무서워라."
"야, 이건 진짜 무서운 거 아니냐?"
복싱에선 세 줄 로고가 메이저고 NICE의 갈고리가 마이너다.
마이너의 도전은 그 자체로 팬들의 응원을 받고 기업의 도전 의식이 된다.
"뭐가 됐든 시끄러우면 됐어요."
"하하, 너도 참."
"후우. 전 다시 운동할게요."
"어. 근데, 곧 있으면 저녁이다."
"아, 저녁... 먹어야지."
보통 복싱 선수들은 감량 때문에 식사량을 줄이며 운동을 한다.
하지만 나는 하루 15000칼로리를 소화하며 운동을 해야만 했다.
"아우... 부대껴..."
"그래도 먹어. 안 그럼 너 또 살 빠진다."
"후우... 아, 미치겠네..."
"야. 도영이한테는 밥 잘 먹으라고 하던 놈이."
"하하하! 이래서 진짜 사람이 어디 가서 함부로 입 놀리면 안돼."
미리 상상을 좀 해 봤지만, 실제 경험하는 복싱의 운동량은 상상한 그 이상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빠른 시간에 웨이트와 기술을 동시에 익히려다 보니 먹어도 먹어도 뛰면 또 살이 빠진다.
그럼 90키로가 깨지고 체급이 헤비급에서 라이트 헤비로 내려 선다.
라이트 헤비로만 가도 선수층이 확 올라간다. 그만큼 동양인은 작은 체구에 있어 큰 강세를 보이는 것이다.
"후우, 후우."
"잘 했어. 잘 먹었다. 있어, 이건 형이 치울 게."
"후우. 아... 배 터지겠네."
"그래도 대단하다. 진짜 이렇게 먹는데 어떻게 살이 빠지냐..."
"민구 형."
"어. 뭐, 물 줄까?"
"아니요. 그냥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무슨 소리야."
헤비급으로 선수 선발전을 통과하는 건 한국 땅에서의 이야기.
세계 레벨로 가면 그쪽은 또 헤비급 선수들 레벨이 월등히 올라가 또 다른 세상이 된다.
"나 가서 존나 쳐맞고 오는 거 아닐까?"
"하하! 그럴 수도 있겠지."
"역시나, 그렇겠죠?"
"그래도 뭐, 이미 시작했잖아. 그리고 맞으면 어때. 너가 한 대더 때려 주면 되는 거지."
"...훗. 그렇죠. 그게 복싱이지."
"미트 한 번 더 잡아 줄까? 아까 배운 콤비네이션 해 볼래?"
"3분만. 소화 조금만 더 시키고요. 지금 바로 움직이면 토할 거 같애요."
아버지, 어머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우리를 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