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는 용감했다 (5)
늦은 밤, 서울 한구 스포츠 본사.
양민구는 모든 일정을 마치고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한상률을 찾아와 보고를 올렸다.
"운전하느라 고생했다."
"괜찮습니다. 일인데요."
"그래서 마하는?"
"일단은 집에 데려다 줬습니다."
"저녁들도 못 먹었겠네."
"관장님이랑 다 같이 체육관 근처에서 먹었습니다. 솔직히 배가 고픈 줄도 모르겠어요... 관장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그래도 이놈은 많이 먹지 않어?"
"걸신들린 사람같이 먹더라고요. 음식에 원수를 진 거 같이."
"아무튼. 빨리 알려 준다는 게, 하필 오늘 바로 갈 줄이야. 양실장이 고생했네..."
"죄송합니다. 저도 미리 연락 드렸어야 됐는데."
"알았나 뭐... 괜찮아. 양 실장 잘못 아니야."
"아까 식당에서 밥 먹을 때도. 뉴스에서 막 시끄럽게 마하 우승이야기 나오는데, 막상 저희는 잘... 모르겠네요."
"인생이 그런 거지. 하여간 쉬운 게 없다 쉬운 게."
어두컴컴한 사무실에서 두 사람은 차 한 잔씩을 놓고 긴장감을 내려놓았다.
"왜 그랬던 거야? 아는 대로 이야기해 봐."
"그게. 저도 다 아는 건 아닌데요."
이야기를 전해들은 한상률의 얼굴에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피어올랐다.
힘자랑이라. 그렇구나. 이제 좀 이해가 된다.
마하의 도전을 구마윤은 그렇게 보고 있었구나.
이놈도 깊은 사정까지는 말을 못 했겠지.
형제들이란 참...
솔직하면 쉽게 가는 길을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드는 걸까.
"처음부터 뭔가 좀 무섭긴 했는데. 와, 제 촉이 그대로 들어맞더라고요."
"그분이 원래 좀 우리랑 달러. 양 실장도 느끼지 않았어?"
"마하도 올라오면서 계속 형 이야기를 했는데요."
"뭐라 그래?"
"꽉 막힌 사람이라고..."
"하하하! 맞어. 그분이 좀 답답한 구석이 있어."
너무 비난만 하면 그러니, 한상률은 적당하게 무게 추를 맞춰 본다.
"그래도, 그런 엄격함이 있으니까. 마하같은 선수가 탄생할 수 있던 거 아닐까?"
"맞습니다. 저도 느꼈어요..."
"그래서? 매니저로서 양 실장이 걱정하는 건 뭐야?"
"역시 마하 멘탈이죠."
"음."
"혜정 씨랑 헤어졌을 때도 그렇게 무너졌는데... 지금은 아우..."
기쁨과 설렘이 가득해야 하는 순간 걱정과 고민이 한 트럭으로 밀려오는 것 같다.
양민구가 말했듯, 구마하는 운동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반비례하여 내면이 너무 여린 구석이 있었다.
기둥이 되어 줄 사람과 다툼은 과연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가.
다양한 문제를 예상해 보는 두 사람은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대표님..."
"음?"
"제가 실수한 걸까요...?"
"무슨 소리야."
"제가 마하 형님만 안 찾아갔어도..."
"주먹을 쥐어 보였다면서."
"그냥 한 대 때려 주라는 말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요."
"후후후. 양 실장, 양 실장은 가족들이랑 사이 어때?"
"저요? 그냥 데면데면하죠."
"그래? 의외네. 봤을 땐 전화도 자주하는 거 같던데."
"아. 그게. 저도 고등학교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다 보니까요.
그럭저럭 대학 오고 군대 다녀오고. 자취하고. 10년 넘게 쭉 나와서 살다 보니까 통화가 편하더라고요. 같이 있으면 부모님도 저도 서로 어색해서 이야기 잘 안 해요."
"그렇구나. 우리 집은 엄청들 싸워. 조부님이 재산이 있거든."
"아. 네."
"그래서 난 어려서부터 어른들 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어. 저런 가족이 왜 있을까? 저렇게들 싸울 거면 대체 왜 만나는 걸까? 안 보면 싸울 일도 없잖아. 그렇지 않어?"
"저희도 친척으로 가면 그렇긴 합니다."
"아마 어느 집이나 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사정은 비슷비슷할 거야."
"그렇겠죠."
"근데 말이야. 나이 들고. 나도 이제 결혼도 하고 그러니까. 생각이 조금 변하더라고."
"어떻게요?"
"가족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구나. 원래 저렇게 서로 으르렁거리고 싸우는 존재구나. 그렇게라도 만나니까 가족이라고 하는 거구나."
"저는 아직 잘..."
"후후, 차차 느끼게 되겠지."
한상률이 책장 한쪽에 놓아 둔 구 씨 형제와 찍은 사진을 돌아본다.
아테네에서 우승을 기념하며 찍은 첫 번째 육상 금메달 사진이었다.
사진 속 구마하나 구마윤, 한상률 셋 모두 지금과는 조금 다른 촌스러움이 느껴진다.
"양 실장은 저들 형제가 어떻게 컸는지 상상이 돼?"
"어렵죠.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러니까. 두 사람은 너무 늦은 거야."
"뭐가요...?"
"이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난 지금이라도 붙은 게 다행이다 싶어."
"음...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거지. 마윤이 형님은 장가를 갔고, 마하는 성공한 사회인 이 됐어. 그만큼 형제간에 싸울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고 보자고."
"그건 너무 긍정적으로 보시는 거 아닌가요?"
"하하하! 그런가?"
한상률은 우선 양민구의 부담을 덜어 주고 싶었다.
"신경 쓰지 마. 양 실장이 마윤이 형님 이야기를 오해했든 뭐 든, 마하한테 복싱은 나쁜 일은 아니었어. 안 그래?"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면... 고맙습니다."
"뭐든 결국 선택한 건 이놈이니까. 복싱도 지가 직접 선수로 뛰고 싶다고 찾아와서 말했고. 투자랑 설비는 회사가 한 거고."
"네... 알겠습니다."
"터질 일은 언제든 터진다. 두 사람에겐 남들이 쉽게 재단하기 어려운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어. 우리는 지켜보자고."
"예."
"그래. 오늘 피곤하겠다. 내일은 쉬고. 일정들 차차 논의하자고."
"저, 그럼 마하는요?"
"마하도 쉬라고 해. 내가 연락 할게. 들어가."
"알겠습니다. 가 보겠습니다."
"수고했어."
그렇게 한상률은 양민구를 우선 사건의 중심에서 빼냈다.
20대 후반의 신입 매니저가 감당하기엔 두 형제의 관계나 이야기가 너무 깊었다.
"하지만 나한텐 남 일이 아니지..."
그리고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나선다.
"이 꽉 막힌 형님을 어떻게 풀어 드려야 하나."
* * *
다음 날, 한상률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오전 일찍 용인으로 내려갔다.
한주 고등학교의 그리운 풍경을 지나 육상부 사무실의 문을 여니, 친구 이주영이 반겨 준다.
"뭐하냐?"
"어이고. 이게 누구셔? 한 사장님 아니야. 바쁘신 분이 여길 어떻게 오셨나?"
"능청떨기는. 너, 오늘 시간 어때?"
"나야 한가하지. 누구랑 다르게."
"누구를 말하는 거야?"
"글쎄다? 누굴까?"
대뜸 왜 이렇게 까칠하게 나오나 알아보니, 간밤에 구마하 복싱으로 여기저기 걸려 오는 전화에 시달렸단다.
"하하! 너는 왜?"
"그러니까. 나는 마하 얼굴 본 지도 1년이 넘었는데."
"제수씨는 잘 있고?"
"야. 우리는 됐고. 니네나 좀 얘기해 봐. 복싱은 또 뭐야. 어?"
"하하하! 누가 물어보면 그냥 모른다고 해."
"아는 게 있어야 말을 해주지. 그거 국가 대표 선발전이었다면서. 대표 팀 가는 거야?"
"아직은 뭐 결정된 건 없고."
"마하는 뭐 올림픽 간다 뭐다 했다던데?"
"그러니까. 아직은 결정된 건 없다고."
"흠. 그래?"
주제를 바꾸고 싶은 한상률에게 마침 드르륵거리며 손님들이 찾아온다.
"감독님!!"
"어? 야, 너네들?"
한상률이 왔다는 소식에 몇몇 젊은 코치들이 인사를 하러 찾아왔다.
이동민의 1년 후배들이었다.
한상률도 반가운 얼굴을 보며 뜨겁게 안아 준다.
"이야~ 이 자식들. 이제 대학생 됐다고 알바 온 거야?"
"감독님이 코치할 사람 모집한다 하셔서요."
"그래. 장하다."
"저, 감독님. 근데 마하 형은요? 복싱은 갑자기 왜 하는 거예요?"
"하하하! 얘들아."
"봤지? 나만 이러는 게 아니라니까."
"말씀해 주세요. 아니 선수 복귀면 우리한테 와야지. 왜 복싱을?"
"으음. 그렇게 됐어. 아 참. 너희는 오늘 뭐하니?"
"저희야, 뭐. 애들 훈련 봐 주고. 끝이죠."
"그래? 몇 시까지 하는데?"
"상률아, 왜? 뭐 있어?"
"아. 끝나고 다들 회식이나 가자고."
"회식?"
"이야!! 진짜요!!"
"저희도요?"
"그럼. 너희들, 선수들 다 데리고 와."
"선수까지요?"
"야, 선수도?"
"감독님, 저희 애들 많아요..."
"진짜 많아요... 3학년들도 입시 준비 중이고 1,2 학년들도 겨울 훈련 바로 시작하고 있어요."
"하하하하! 그럼 더 시끌시끌하겠네."
젊은 코치들이 빠져나가고 이주영이 한상률에게 물었다.
"마하 우승 축하 턱이라도 쏘는 거냐?"
"그런 것도 있는데... 강적을 상대하려면 아무래도 쪽수가 필요 하니까."
"무슨 소리야? 너네 진짜 무슨 일 있어?"
"마하가 형이랑 싸웠어."
"갑자기 왜?"
"알고 싶으면 끝나고 마하 형네 가게로 와. 거기가 회식 장소니까."
한주고 다음은 성남 구마윤네 식당으로 이동한다.
가게 밖에 차를 세우고 지켜보는데, 몇몇 직원들과 함께 이정석이 가게 안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희 11시부터 영업하는데요."
"저녁 단체 예약하러 왔습니다."
"어? 선생님?!"
"정석이 오랜만이다."
"아... 네. 안녕하셨어요."
"인사가 왜 그래? 마하랑 싸웠다더니 나까지 달갑지 않게 느껴져?"
"어... 알고 계셨어요...?"
"그럼, 형님은 어디 계시니?"
"아직 출근 안 하셨어요..."
"그래? 오늘 안 나오시나?"
"그렇진 않을 거예요. 근데 이렇게 늦게 오시는 건 저도 취직하고 처음 봐요."
"그렇구나."
"사장님 화 많이 나셨어요."
"음."
어젯밤 가게에서 벌어진 일을 떠올리는 이정석.
친구 구마하의 폭주하는 모습에 점점 분노가 치미는가, 덩달아목소리가 높아지고 몸짓이 커지기 시작했다.
"선생님, 마하 이 새끼가 어제요!"
"그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얘기해 봐."
"저 좀 거칠게 말해도 돼요?"
"그럼. 우리 사이에 뭐 그런 걸 가지고."
"아, 이 미친놈이! 손님들 다 있는데! 깽판을!!"
양민구에겐 들을 수 없던 생생한 현장 반응을 이정석에게 전해 듣는다.
생각보다 두 사람의 감정이 첨예하게 대립했었다는 걸 한상률도 알았다.
"그래? 심각했었네."
"이 새끼가 저까지 쳤다니까요!!"
"들었다. 너도 차까지 따라와서 계속 뭐라고 했었다면서."
"죽여 버리려다 참았어요."
"하하하~! 아이고 이놈아, 죽이면 안 되지."
"아, 선생님이라도 좀 뭐라고 하세요. 다들 오냐오냐 해 주니까 더 그러는 거잖아요."
"그래, 알았어. 진정하고."
"근데 단체라고요? 몇 분 정도 오시는데요?"
"이야~ 정석이. 흥분해도 본분은 잃지 않는구나."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사회인인데."
"멋지다. 보자. 전세를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네? 가게 전세요?"
"음. 한주고 육상부가 올 거야. 너도 알다시피 거기가 요즘 학생들이 많거든."
"어... 갑자기 그런 건 좀 무린데..."
"부탁 좀 하자. 선생님이 계산은 넉넉하게 해 줄게."
"그러시다면, 일단 저 사장님께 연락을..."
큰 결정을 앞두고 이정석은 구마윤에게 전화를 걸어 보지만 통화가 연결되진 않는다.
"제 전화도 안 받으시네요..."
"생각보다 상심이 크셨나 보다."
"사장님도 오죽하면 그러시겠냐고요. 아, 이 또라이 새끼가 진짜."
"그러게. 형님 입장에서도 이런 일은 처음이겠지."
"그런데요, 선생님. 구마 이 새낀 대체 왜 그랬던 거래요?"
"글쎄다. 너가 한번 전화로 물어볼래?"
"지금요?"
"응. 궁금하다며. 전화해 봐. 난 마윤이 형님한테 갔다 올게."
"아..."
"정석아. 욕을 해도 좋고 시비를 걸어도 괜찮아. 직접 만나서 때려도 돼. 내가 허락할게."
"..."
"그러니까 마하한테 전화 좀 해 줘. 알다시피 그 녀석 보기와 다르게 속이 여린 놈이니까. 마하도 지금 생각보다 괴로운 상황일거다."
"아... 진짜... 번거로운 새끼..."
"선생으로서 부탁하마."
"알겠습니다..."
한상률은 예전 구마하가 살던 아파트로 차를 몰았다.
"여긴가? 11층."
집으로 초대받은 적은 없지만 그래도 어디 사는지는 알고 있다.
아파트 앞 슈퍼에서 가벼운 선물을 챙겨들고, 신혼집을 찾아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안녕하십니까. 마하랑 같이 일하는 한상률이라고 합니다."
"아. 네. 알아요. 선생님이시죠?"
"네. 맞습니다. 형수님 되시나요? 마윤이 형님 좀 뵈러 왔습니다."
없으면 돌아가려고 했는데, 원수정이 문을 열어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예식장에서 뵀었는데."
"네. 저도 누군지는 알지만, 이렇게 뵈니까 어색해서, 하하하..."
"하하. 그러세요. 형님은요?"
"신랑 방에 있어요..."
"그러시군요. 형님? 저 왔습니다."
"우리 신랑이 형이에요?"
"네. 저보다 한 살 많으세요."
"봤을 땐 안 그럴 거 같은데..."
"으하하! 잘 생긴 분이랑 사니까 즐거우시죠?"
"그렇긴 하지만..."
어색함을 풀기 위해 원수정이 한상률을 상대하는 사이. 구마윤이 수척한 모습으로 방에서 나와 인사를 건넸다.
"감독님, 여긴 어쩐 일로..."
"그냥, 형님 보고 싶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