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는 용감했다 (6)
"후욱! 흡!!"
다음 날.
원래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집에서 쉬기로 했지만, 흥분이 가라앉질 않아 잠 한숨 못 자고 체육관을 나와 샌드백을 두드렸다.
"훅! 훅! 후욱!!!"
어젯 밤 일이 떠나가질 않는다.
형의 말투가 행동이 잊혀지질 않어.
그렇다고 여자들을 만나거나 했다간 간신히 붙잡은 건강한 삶이 다시 깨질 거 같아 운동을 하고 있다.
근데, 어째 샌드백을 때리면 때릴수록 어젯 밤 일이 더 또렷해지는 기분이다.
"뭐? 무슨 자랑? 어이가 없어서..."
동생이 메달리스튼데, 어떻게 스포츠를 그렇게 볼 수 있는지...
뭘 아냐고. 어? 뭘 알어 형이...
"뭘 아는데!!!"
주먹이 멈추질 않았다.
그동안 눌려온 모든 마음이 다 터지는 기분이라. 진짜 나도 참을만큼 참았다고.
하지 말라는 거 정말 많았고, 지키라는 거 장난 아니었고. 어디가서 부모님 없단 소리 안 듣게 행동 조심한 것도 정말 한 두가지도 아니고!!
"내가 무슨!! 지 마음대로 움직이는 사람이냐고!!!"
형이 무슨 이유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이해가 된다.
다만, 이해가 되는 영역과 납득이 되는 영역은 달라서.
뭐 어쩌라고? 어쩔 건데? 이미 결과는 나왔고 상황은 벌어졌는데.
내공을 썼으니까 지금에 이르른 걸 어떡하라고.
아니 애초에 왜 그런 운동을 하는지는 생각을 안 해!
물어보든가.
다짜고짜 자기 기분만 내지르지 말고.
내가 동생이면. 자기가 형이면!!!
"진짜 뭘 안다고!! 왜 매번!!"
대체 언제까지 그 고리타분한 곤륜이니 무림이니 하고 살 생각인지.
여기는 대한민국. 그것도 21세기잖아.
자기도 결혼을 했으면 어느정도 타협을 하고 살든가.
꽉 막혀가지고.
생긴 건 반에 반도 써먹지 못하면서.
"후웁!!"
퍽!! 소리를 내며 날린 레프트 훅이 샌드백을 솟구치게 만든다.
쇳소리를 내며 돌아오는 육중한 녀석에게 라이트를 작렬시켰다.
어찌나 부딪히는 힘이 강한지, 때린 나도 뼈가 얼얼해지고.
검고 굵은 가죽 백은 기역 자로 꺾여 연결고리와 함께 빠져버렸다.
"헉! 헉! 훅! 후우우... 아 씨발 이건 또 왜 빠져...?"
진짜 개무식한 새끼... 혼자 이걸 어떻게 걸라고...
이런 게 진짜 힘 자랑이지...
그때 체육관 밖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뭐야? 누가 있나 했더니만. 마하 씨가 왜 여기있어?"
"사장님?"
"어제 시합 끝났잖아. 혼자 뭐해? 민구도 없이."
"아... 그냥."
여기저기 보이는 흔적이 누가봐도 운동이 아닌 화풀이 현장이었다.
정 사장님이 바닦에 흩뿌려진 땀방울과 생뚱맞게 떨어진 샌드백을 보며 물으신다.
"뭐하고 있는 거야?"
"..."
"왜 윗층으로 안 가고?"
"...윗층 키는 민구 형이 가지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오늘 관장님이 체육관 아무도 안 온다고 하던데. 기자들 온다고 관원들도 다 피하라고."
"사장님은 왜 오셨어요?"
"아니. 시끄러운 소리가 나길래 누가있나 들려봤지."
"...헉. 허억."
"이건 왜 이래? 자기가 이런 거야?"
"그냥. 뭐..."
"하하. 아하하하! 진짜로? 진짜로 혼자서 이걸? 어떻게? 주먹으로?"
"저 사장님... 잠깐만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그래."
절그럭 절그럭 두 사람의 힘을 합쳐 샌드백을 원위치로 돌려놓으며 말했다.
"형이랑 싸웠어요..."
"형 누구? 민구?"
"아니요. 우리 친형..."
"갑자기 왜?"
"그냥..."
"뭔데. 얘기해 봐."
"..."
"마하 씨. 자기 어제 챔피언 된 사람이야. 근데 지금은 다 죽을 거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뭐냐고 대체? 관장님도 아시는 일이야? 민구는?"
"아... 사장님..."
어른한테 위로를 받으면 견딜만하던 감정도 괜히 더 서럽게 느껴진다.
울 정도의 일도 아닌데 괜히 눈물이 나고.
훌쩍 거리고. 병신같이 말도 안 나와서 주절 거리고...
"허허. 알았으니까 일단 진정하고."
"아니. 그게 무슨 힘 자랑이냐고요. 내가 무슨... 사장님. 나 진짜..."
"그래 그래. 에이. 하필 좋은 날에..."
구구절절 어떻게 저렇게 속에 있던 얘기를 다 일러바치고 말았다.
뭐 어떠냐. 민구 형이 믿는 어른인데.
무엇보다 지난 훈련동안 하루 15000칼로리의 식사를 책임져 주신 분인데.
이렇게라도 하소연 할 사람이 있으니까 그게 고마울 뿐이지.
"그래서 혼자 아침부터 나와서 지금까지 이러고 있는 거야?"
"네..."
"배는 안 고파?"
"조금 고프긴 한데. 별로 먹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그럼 안 돼. 아무리 그래도 어제 시합을 치뤘는데. 제대로 회복을 해야지."
"후우... 진짜 우리 형은 인간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후후후... 가족 일이라... 쉽지 않지."
"아니 어떻게 자기 생각만 맞냐고요. 마음에 안 들면 물어라도 보든가. 다짜고짜. 그것도 민구 형이나 관장님 다 있는데..."
조용히 얘기를 들어주던 정 사장님이 갑자기 일어나 링으로 걸어가셨다.
너무 혼자 떠들었나?
덩치도 큰 새끼가 존나 찡찡거린다고 그러나?
하긴, 나 어제 국내 헤비급 챔피언 됐지.
내가 봐도 타이틀에 안 맞는 쪽팔림이긴 하다.
진짜... 돌겠다.
"뭐해? 올라 와."
"네?"
"어차피 운동하고 있었잖아. 와 봐. 나도 챔피언 주먹 한 번 받아보자."
혼자 구시렁구시렁 땀과 눈물을 추스르고 있는데, 어느새 정 사장님이 양손에 코치용 미트를 끼우고 계셨다.
"올라오라니까?"
"지금요?"
"응!"
훈련 중 간간이 도움을 받은 적도 있던지라, 일단 링으로 따라 올라갔다.
쭈뼛거리며 자세를 갖추자, 사장님이 먼저 팡팡! 힘있게 미트를 때리며 말씀하셨다.
"중간중간 내가 알아서 들어갈테니까 잘 피하고."
"네!!"
그 상태로 30여분을 말 없이 훈련을 마쳤다.
"먼저보다 위빙이 많이 좋아졌는데?"
"관장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셔서."
"그래. 우승 축하해. 얼굴 봤는데, 아직까지 그 말을 못 해줬네."
"고맙습니다."
"어깨도 자연스럽게 돌고. 펀치력이 더 늘은 거 같애."
"뭐... 다 시키는대로 한 거죠."
"후후. 겸손하기는."
정 사장님은 양 손에서 미트를 빼며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씀하셨다.
"그래. 형이랑 그런 일이 있었구나."
"..."
"근데, 형 말이 틀린 것도 아니잖아?"
"네?"
"하하! 힘 자랑도 맞잖아. 안 그래?"
"아니죠... 사장님. 스포츠죠. 그게 어떻게 힘 자랑이에요?"
"복싱의 본질이 결국 나보다 더 강한 놈들 있으면 나와바라 붙어보자. 아니야? 난 틀린 말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럴거면 체급이 왜 있고 규칙이 왜 있냐고 따지고 싶지만. 뭔가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아 일단 조용히 호흡이나 뱉었다.
"형이 동생을 많이 아끼나 보네."
"아끼기야 하겠죠. 근데, 사장님은 우리 형이 얼마나 답답한 인간인지 몰라서 그래요."
"답답하기는. 내가 봤을 땐 엄청 열린 사람 같던데."
"우리 형 아세요?"
"난 솔직히 마하 씨 보다 마하 씨 형 팬이었어."
"네?? 왜요?"
안 그래도 가끔 형에 관해서 이것저것 묻던 정 사장님이었다.
가게는 몇 평이냐? 임대냐 자가냐? 왜 고깃집을 하냐. 고깃집은 고정비가 얼마나 나가는지 아느냐? 등등등.
그냥 자영업자 입장에서 묻는 줄 알았더니, 안으로 굽을 팔이 밖으로 꺾이는 기분이 이런 건가?
"그럼 언제 형한테 여기를 와보라고 할까요?"
"에이. 싸웠다면서."
"아니. 그건 그거고..."
"대단한 사람이야. 그 어린 나이에 사업을 시작하다니. 아이구야..."
"그거야 먹고 살려다보니까 그렇게 된 거죠."
"그거야."
"뭐가요?"
"그거. 먹고 살아야 한다는 거. 그게 무서운 거거든."
정 사장님이나 나나 링 그물에 대충 걸터앉은 자세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봤을 땐. 형이 마하 씨가 다치는 걸 걱정한 거 같애."
"하하하! 우리 형이요?"
"음. 육상이랑 복싱은 아무래도 위험도가 다르니까."
"위험하기로 따지면 스키가 더 위험하죠. 그건 정말 목숨을 걸고 달리는 운동인데. 그때는 아무 소리도 안 하고 있다가 왜 지금?"
"아이고. 그렇게 따지면 한도 끝도 없지."
사장님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추셨다.
"마하 씨한텐 형이 부모님 같은 사람 아닌가? 먼저 기사 보니까 그렇게 나오던데."
"네... 맞아요."
"나도 애가 있지만. 부모 마음이라는 게 그래. 특히 아빠들은. 괜히 걱정되는 걸 툴툴거리고 표현하고."
"..."
"잘 했다고 칭찬만 건네주자니 오히려 애가 더 안 좋은 길로 빠질 것만 같고."
"우리 형은 표현의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럼?"
"그냥. 아 그냥. 아니 근데 사장님은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야지. 왜 자꾸 모르는 사람 옹호를..."
"으하하! 슈퍼스타가 이런 면이 있었나? 마하 씨 생각보다 인간적이네."
뭔가 자꾸 이야길 나누면 나눌수록 나만 철없는 놈이 되는 거 같아 내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끔 형에 관한 이야기를 던졌다.
"사장님. 우리 형은요. 생각하시는 거 같은 그런 좋은 의도를 가진 사람이 아니에요."
"흐음. 실제론 어떤데?"
"장난 아니게 고리타분해요."
"고리타분하다는 게 무슨 뜻이야?"
"그냥 다 뭐라고 하고. 잔소리도 장난 아니고."
"엄하게 대한다는 뜻인가?"
"네에!! 그것도 그냥 엄한 게 아니라. 공포에요 공포."
그 말에 정 사장님이 기다렸다는 듯 피식 입꼬리를 올리셨다.
"그래서 내가 얘기했잖아. 먹고 사는 게 무서운 일이라고."
"..."
"자네 형은 학교도 못 다녔다면서?"
"네..."
"있잖아. 난 내가 장사 하기 전엔, 이 일이 이렇게 힘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감정이 이입된 듯 목소리에 막 처량처량함이 묻어 나온다.
"몇 살 이었어?"
"뭐요? 부모님 없이 형이랑 저랑 같이 산 거요?"
"그거 말고. 자네 형님이 장사 시작한 거."
"지금 제 나이쯤. 전 사장님한테 가게 물려받았던 거 같은데요."
"세상에나. 하하하! 진짜로? 20대 후반도 아니고?"
생각을 해보란다.
그 나이에 물려받은 가게를 지금까지 키워내면서 나 같은 동생을 키워낸 한 사람의 인생을.
"마하 씨. 보통 그렇게까지 못 해. 그걸 알아야 돼."
와 이렇게 되면 진짜 가불기잖아.
근데 그 가불기에 정 사장님이 원투 스트레이트를 꽂는다.
"형이 자기한테 그렇게 엄하게 대했으면 본인은 어땠을까?"
"..."
"더 엄했을 거야. 보통 부모는 그렇게들 하니까."
감독님도 가끔 형에 관한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이렇게 완전 타인의 입을 통해 우리 형 구마윤의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내가 깊은 마음으로 고마워해야 할 대상이 정 사장님인지, 미워 죽겠는 우리 형인지 진심으로 헷갈리는 순간이었다.
* * *
구마하가 정 사장을 만나 형제에 관한 남다른 시각을 열던 시각.
구마윤을 한상률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윤 씨. 난 방에 있을 게. 그전에 뭐 마실 거 좀 준비할까?"
"어. 그래."
"감독님. 뭐 좋아하세요?"
"하하! 뭐든 어떻습니까. 아무거나 주세요."
새신부가 다과를 준비하는 동안 한상률은 구마윤을 살핀다.
언제 어느 때고 흐트러짐 없는 사나이도 동생의 일이라면 구겨짐을 감출 수 없구나.
그래서 더 그에게 마음이 열린다.
"말씀들 나누세요."
"고맙습니다 형수님."
"아하하~! 형수님이라뇨."
원수정이 물러나자, 구마윤도 부드러운 미소로 인사를 건넨다.
"먼길을... 오셨네요."
"먼길이라뇨. 어차피 저도 여기서 출퇴근 했었는데요. 저 집도 저기 저쪽 아파트에 있었어요."
"그래도. 이렇게 시간을 내주시는 게 감사한 일이죠.
"형님. 마하가 저나 우리 회사에 벌어다 주는 걸 생각하면, 이쯤은 약소하다 못해 무성의에 가깝습니다."
"다들 도와주시니까 그놈이 그만큼 하는 겁니다."
"흐음. 생각보다 집이 아늑하고 좋네요. 마하는 맨날 집 작다고 투덜 거렸는데."
"예..."
"왜 이렇게 기운이 없으세요. 형님도 제가 어색하십니까?"
"아니요 그냥. 오늘은 뭐랄까, 조금 부끄럽네요..."
"부끄러울 게 뭐가 있습니까. 이야긴 들었습니다. 마하랑 안 좋은 일이 있으셨다고."
"네..."
"저 방이죠? 이놈이 쓰던 곳이?"
"독립하기 전까지 저곳에 있었죠."
"금메달이 몇 개나 탄생한 집인데. 집값 비싸게 쳐줄 테니 팔라는 분 없으세요? 운동 선수 키우는 학부형은 그런 데 민감하던데. 으하하하!!"
분위기를 풀어내려는 한상률의 노력에 구마윤도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