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49화 (349/401)

형제는 용감했다 (7)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우리 사이에."

"그래도, 정말 귀한 분인데... 감정이 정리되지 않아 선뜻 나오질 못하다니..."

구마윤의 나약한 고백에 한상률도 깊이 호흡을 들이마시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형님, 제가 그래도 선생을 몇 년 하다 마하를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러셨죠."

"체육 교사라고 학생부에 있다 보니 학부형들도 많이 만났는데요."

한상률은 위로를 건네며 구마윤의 상처입은 마음을 달래 주었다.

그 말에 구마윤이 자신을 힘겹게 하는 마음을 털어 놓는다.

"조금 충격적이긴 했어요."

"어떤 점이요?"

"마하가 이 자식이... 후후후."

"하하하하~ 이 자식. 제가 반드시 혼내 주겠습니다. 어디 형님한테!"

"그러지 마세요."

"..."

"그냥 동생이 생각하는 길이 있다는 걸 제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형님, 그냥 이렇게 된 거 편하게 말씀해 주시죠."

왜 그렇게 마하가 복싱을 하는 걸 싫어하는가?

이에 구마윤이 답한다.

"싫진 않습니다. 좋았구요. 마하가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다는 것에 기뻤습니다."

"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다만, 저에겐 부모님의 가르침을 동생에게 전해 줄 의무가 있습니다."

"음..."

진지한 얘기가 나올 것을 대비해 한상률은 달콤한 과일 하나를 입으로 가져가고, 구마윤은 고향 땅을 떠올린다.

"아버지는 늘 힘을 과신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과신이라. 어려운 이야기죠."

"남을 이기는 건 다른 말로 나를 안전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말씀과 함께요. 우위에 서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에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오오..."

"그렇게 힘에 취하면 그다음은 맹목적으로 주변을 자신에게 종속시키기 시작한다고 배웠습니다."

"..."

"그래서 자연을 보라고 하셨죠."

"어... 음... 사과가... 다 먹었네."

이빨과 발톱이 모든 흐름을 정하지 않는다.

힘이 없으면 호랑이도 살을 쪼이고, 수리도 다시는 날개를 펼칠수 없다.

힘을 과신하지 말라.

과하지 않기에 순리가 생기고, 순리를 알면 벗어남이 없다.

"순리... 아, 네. 순리..."

"마하는 이미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 많은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거야 마하가 잘하니까..."

"부모님은 순리를 벗어나면 위기가 찾아온다 하셨습니다."

"흠. 흠! 아 저 근데, 형님, 잠시만..."

"네."

"잠깐만 제가 이야기를 드려도."

"네. 제가 너무 혼자 떠들었죠."

"아니요, 아니요! 좋은 이야기였어요. 이빨, 순리. 예, 뭐. 발톱도 좋고."

구김살이 보여도 구마윤은 언제 어느때고 구마윤이구나.

한상률이 아찔해지는 정신을 빠르게 붙잡으며 반문을 시작했다.

"근데 마하가 그렇게 순리를 벗어나는 짓을 한 건 아니지 않습니다?"

"녀석이 그런 대회에 참가한 것이 자신의 강한 힘을 과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흐음..."

한상률은 마른 침을 삼키며 제자이자 동료인 구마하의 입장을 대변한다.

"마하도 이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어요."

"녀석은 이미 누구보다 강자의 반열에 올라서 있습니다. 굳이 그런 대회에 참가하여 이목을 끌지 않아도..."

회사 이야기를 할까? 마하의 활약에 많은 직원의 생계가 걸려있다고 얘기를 해 줘?

아니, 그 전에 그냥 마하의 계획을 알려 줘?

세상의 이목을 끌어야만 했던 이유를.

생이별한 부모님을 찾고 싶다는 이 녀석의 깊은 마음을?

그것이 형을 위한 마하의 깊은 우애라는 것을?

"이 녀석이 새로운 운동으로, 그것도 주먹이 오고 가는 경기로,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꺾는 모습은 저에게는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아니다. 그건 마하와 마윤 형제가 풀어야 할 일이다.

나는 지금 한구 스포츠 대표로서, 소속 아티스트이자 공동 창업자, 사랑하는 제자의 입장을 지켜 줘야 한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해야 명예를 지킬 수 있으니까.

"형님."

"네, 감독님."

"스포츠 세계를 조금 오해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오해요?"

"네."

한상률이 차분히 그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하는 힘을 과신한 게 아니라 대회를 나간 겁니다."

"저는 마하가 이길 걸 알았습니다..."

"그런 말씀이 어딨습니까. 승리는 누구도 자신할 수 없어요."

"..."

"그런 이야긴 마하의 노력을 폄하하시는 거에요?"

"감독님... 저희는..."

"형님, 마하가 훈련하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나요?"

한상률의 질문에 구마윤은 눈만 껌벅일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직접 본 적은 없죠."

"마하 누구보다 노력하는 선수예요. 정말로요."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진 구마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감독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보지 않아도 마하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말씀하셨던 그 내공인가요?"

"네. 맞습니다."

"그래도 그 과정을 직접 보신 적은 없으시잖아요."

"음..."

"내공도 훈련이 없다면 아무 의미 없는 거라고 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그렇죠. 수련 없이는 힘을 가질 수 없는 게 내공이죠."

"마윤이 형님, 저는 마하가 내공이 있든 초능력이 있든. 단지 재능만 믿고 나태하게 구는 선수가 아니라고 봐요. 그런 게 저를 이놈을 믿고 인생을 던지게 만들었고요."

"..."

늘상 마하에게 해 줬던 말을 이렇게 듣게 될 줄이야. 구마윤의 감정이 복잡해진다.

누구보다 자신의 말을 지켜 주고 있던 동생.

그리고 그 동생의 스승이 지금 말한다.

"스포츠는 냉정한 세상이에요. 그리고 마하는 그 냉정한 세상에서 우뚝 올라설 만큼의 노력을 합니다."

저녁에 가게에 한주고 아이들이 올 거란다.

그 아이들을 직접 보면 구마하란 존재가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로 전해질지 알 수 있을 거란 말을 끝으로.

"불쑥 찾아와 실례를 끼치고 가네요."

"별말씀을요."

"오... 올라가세요, 감독님."

"하하! 형수님. 다음엔 서울에서 봬요. 저희가 맛있는 것 대접하겠습니다."

한상률은 집을 나섰다.

손님이 떠나간 구마윤에게 새색시가 다가와 묻는다.

"마윤 씨. 괜찮아?"

"음. 그럼."

"오늘 가게 나갈 거야?"

"나가야지. 단체 손님이 온다는데."

"그럼 나도 같이 갈래."

"쉬어. 나 때문에 하루 휴가도 냈는데."

"내 남편이야. 내가 옆에 있어 주고 싶어."

"후후후. 그래."

아내의 응원에 힘입어 구마윤은 일터로 발길을 돌렸다.

오후 다섯 시, 한상률이 예약한 손님들이 밀어닥쳤다.

한상률에 이어 이주영 감독과도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한 감독은 갔어요?"

"네."

"허. 이 자식 뭐야? 남의 애들은 죄 끌고 와 놓고..."

이주영 감독과 점잖게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그 옆에서 팔팔한 10대 운동 선수들은 고기 냄새보다 공간에 더 큰 의미를 부여 하고 있었다.

"우와!! 바로 여기가!!!"

"코치님! 마하 형이 밥 먹던 자리는 어디에요!!"

"야, 야! 이놈들아. 일단 사장님한테 인사부터 드려야지!"

"아이고, 그런 말씀을. 손님들인데. 편하게 있으세요."

"아, 안녕하세요. 저 마하 형이랑 같이 운동했던 동생인데요."

"그러세요? 동생이 실례가 많았습니다."

"어우! 어우!! 그런 말씀을!!"

"와... 근데 진짜 마하 형 형이세요?"

"네, 맞습니다."

"어... 우와... 아니... 뭔가 닮으신 거 같기도 하고..."

구마윤이 가게를 둘러본다.

마하가 한주고에서 운동을 할 때는 모든 선수와 코치가 찾아와도 스무 명이 되질 않았다.

몇 테이블에 나눠 앉아 그들끼리 즐겁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가게 하나를 비워 줘도 공간이 비좁게 됐구나.

"..."

"저, 사장님! 잠시만 계산대로."

"그래, 정석아. 왜 그래?"

"아니, 이거 이렇게 되면 와..."

"왜 그러는데?"

"선생님이 계산하신 거 안 맞아요. 아니. 넉넉하게 계산해 주신다고 했는데..."

"하하하~ 그런 거 따지지 말고"

"어떻게 안 따져요. 매출인데!"

만약 모든 스포츠 선수를 꿈꾸는 아이들이 가게를 찾아온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보고 싶다. 이 아이들에게 있어 구마하란 이름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저기, 음식은 입에 맞아요?"

"네!! 큰형님!!"

"큰형님?"

"코치님들이 마하 형, 형이라고 하셔서요. 저희끼리는 큰형님이라고."

"하하하~!"

그나마 조용해 보이던 한 아이에게 용기 내어 물었다.

육상은 언제부터 시작했는가?

마하가 아테네에서 금메달 따는 모습을 보면서 시작했다.

스키하는 걸 보면서 시작했다.

가지각색이지만, 모든 아이들이 대체적으로 한 사람을 보면서 운동을 하게 됐단다.

"그래요? 다들 고생이 많네."

마하와 두 살 터울 동생이라는 젊은 코치가 슬쩍 다가와 말해 준다.

"근데, 다들 꿈만 높아요..."

"네?"

"마하 형같이 하려면 운동 더 하라고 하는데, 애들은... 아이고, 말만... 하하하~ 힘들어요."

"코치님은 마하가 운동하는 걸 봤어요?"

"아우! 큰형님. 저한테까지 왜 그러세요. 저 스무살이에요."

"으음, 그래도. 이 자리에선 지도하는 스승님인데."

예의바른 구마윤의 태도에 젊은 코치들도 장난기 뺀 모습으로 질문에 답해 준다.

"봤었죠, 저희 1학년 때. 진짜 짧지만, 마하 형 운동하는 거 봤어요."

"맞어. 형 국가 대표 훈련 들어가면서 학교 안 나왔으니까."

"그때도 진짜. 동민이 형도 그렇고, 미쳤다고 했었죠."

"마하가 어떻게 운동을 했길래..."

3월 아직은 싸늘한 시간.

모두가 한입으로 반팔 반바지를 입어도 땀이 나던 사람은 처음 봤다고 말해 준다.

"진짜로요, 코치님?"

"그래. 너네들 3월도 영하에 가까운 거 알지. 그런 날씨에 땀이 나야 운동을 했다고 하는 거야."

"야, 나 말리지 마. 난 내일부터 반바지만 입는다."

"나도! 난 팬티만 입고 뛸 거야!"

"난 맨발!!"

"이 자식아! 마하 형도 맨발은 안 뛰었어!!"

도전을 부르짖는 젋은 패기에 구마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철부지 동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한 사람 한 사람 눈빛과 피어나는 내공의 씨앗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곤륜에서 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르던 제자들을 보는 것 같구나.

조용히 주변을 관찰하는 그에게 원수정이 다가온다.

"마윤 씨."

"음..."

"그런 표정 하지 말고 빨리 마하랑 화해해."

"..."

"어서.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잖아."

"싸운 것도 없어. 그 녀석이 혼자 흥분해 날 뛴 거지."

"고집부릴래? 그럼 나랑 싸우면 하나밖에 없는 아내 혼자 날뛴 거라고 할래?"

결혼을 하더니 성격이 변했는가. 구마윤은 원수정의 협박을 이기지 못해 밖으로 끌려 나왔다.

"가게 손님들 많은데."

"뭐가 손님이야. 그리고 정석이 있어. 마윤 씨 없는 게 더 편해."

"음..."

"가자. 마하 어딨는데?"

"몰라."

"후우... 감독님한테 전화 걸어."

"이 시간에?"

"이 시간이 뭐? 8시밖에 안 됐어."

"그래도 늦었는데..."

"아, 그럼 식사비라도 달라고 하든가! 맨날 돈돈거리는 사람이 이럴 땐 왜 그래?"

서로가 모르게 형제는 똑 닮은 구석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무안하면 쭈뼛거리는 태도였다.

구마하가 그러듯 구마윤도 똑깥이 머쓱한 모습으로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세계체육관을 찾아갔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

"뉴스."

"아아..."

"뉴스 맨날 나왔어. 형 빼고 전 국민이 다 알 걸?"

"..."

"가 보자."

"있을까...?"

"일단 가 봐."

"흐음..."

밖에서 볼 때 불은 켜져 있었다.

아내의 손에 이끌려 못 이기는 척 계단을 올라가니 삑삑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있나 보다. 소리가 나."

"..."

"어서."

"저기... 수정아, 잠깐만."

"어?"

"잠깐만 여기 있어 봐."

원수정을 반 계단 아래에 두고, 구마윤이 먼저 조용히 체육관문을 향해 다가간다.

이건 뭐지..?

이게 마하의 기란 말인가?

무시무시한 투기다.

당장 무림에 던져도 고수들의 시선을 피할 수 없을 정도의 투명한 유리 문 앞으로 다가가자, 구마하가 혼자 거울을 보며 쉐도우 복싱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

"마윤 씨, 있어?"

"..."

"마윤 씨, 마하 있어?"

있다. 그것도 처음 보는 모습으로.

구마하는 누가 왔다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훈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목덜미에 수건 하나를 끼웠지만, 그럼에도 흐르는 땀을 주체하지 못해 주변 체육관 바닥이 바가지로 물을 뿌린 것 같다.

주먹은 빨랐고 발은 날렵하게 움직였다.

무엇보다 눈빛이 날카로웠다.

표정에 진지함이 있었다.

구마윤이 늘 동생을 보며 느꼈던 감정을, 저기 홀로 운동하는 청년은 보여 주질 않는다.

어딘가 어려 보이던, 철없는, 지켜줘야 하는, 사람에 상처 입어 흔들리는.

그래서 매정하지만 더 홀로 설 수 있도록 나무라야 하는.

그런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응. 운동하고 있네..."

"그럼 가서 얘기해."

"아니야. 다음에..."

"왜? 보니까 혼자 있는 거 같은데."

"다음에 하자, 수정아. 정말로. 오늘은 그냥 가."

"그래도 되겠어?"

"응. 화는 다 풀렸어."

지금 마하를 만났다간 먼저 신혼여행에서 돌아올 때 같이 또 주체할 수 없이 안겨 눈물을 흘릴 것 같다.

듬직했다.

그것이 못내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울컥해지는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사내는 마지막 자존심을 부리고.

아내는 그런 배우자의 마음을 모르는 척 감싸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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