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는 용감했다 (8)
"그래서? 하루 푹 쉬고 대미지 회복하라고 시간 빼 주고 체육관까지 닫아 줬더니, 막상 니놈은 어제 여길 나와서 스무 시간을 뛰었다?"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까."
"마하야, 왜 혼자 있었어. 형이라도 부르지!"
"혼자 안 있었어요. 정 사장님 오셔서 몇 시간 같이 했어요."
"어이구, 장하다 이 자식아. 아주 노력을 아끼지 않는구만! 니몸은 무슨 강철로 되어 있다냐!!!"
아니라서 문제다.
모든 스포츠가 다 그렇지만 회복은 훈련만큼 중요한 과제였다.
괜히 흥분해서 샌드백을 두드린 게 문제가 된 것 같다. 멀쩡하던 팔이 왜 쑤시고 난린지...
역시 뭘 하든 차분한 마음에서 집중해야지.
흥분해서 지랄하면 꼭 어딘가 탈이 난다니까.
"지 몸 귀한 줄 모르는 놈은 운동할 자격도 없는 거야."
"죄송합니다..."
"관장님, 마하도 일이 있었잖아요."
"그것도. 뭘 담아 두고 있어. 잊어, 인마. 이 짓 하면서 가족들 이랑 틀어지지 않는 인간이 없어."
"정말요? 다른 분들도 그래요?"
"그래. 지 새끼든 남편이든. 나가서 뚜드려 맞고 오는 모습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어."
"어제 정 사장님도 그러던데..."
꾸지람 받을 땐 언제나 그렇듯 민구 형이 빠르게 분위기를 바꿔준다.
"안 그래도 어제 대표님이 성남 다녀오셨데."
"감독님이 거긴 왜요...?"
"형님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오셨다고 하시던데. 너 운동했던 동생들 회식도 시켜 줬다 그러고."
아~ 그래서 아까 정석이한테 이런 정신 빠진 문자가 왔구나.
뭔 밑도 끝도 없이 서로 불편할 거 없게 계산은 깔끔하게 하자 길래, 뭔 소린가 했는데.
나랑 형이 싸운 게, 회사 사람들까지 움직이는 이야기가 됐구나.
이것도 스타의 숙명인가? 스캔들 터진 것보다 괜히 더 민망한 기분이네.
"아무튼, 잔소리는 여기까지 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그거부터 오늘 끝내자."
"관장님은 아직도 제가 태릉으로 갔으면 하세요?"
"갔으면이 아니라, 가야 한다니까."
"그럼 같이 가요. 민구 형도 같이."
"으하하하! 야, 이놈아. 국가 대표 코치를 선수가 선발하냐? 그것도 신인이란 놈이?"
"그래. 그건 무리가 있어."
"아니요. 할 수 있어요. 미국은 그런 시스템이 있던데."
"거기는 거기고. 우리는 우리지."
또 답답한 논쟁이 시작됐다.
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야 좋을까? 나는 나한테 제일 좋은 훈련법을 말하는 것뿐인데. 사람들은 자꾸 아니라고만 하고.
"너, 방금 너한테 제일 좋은 훈련법이라고 그랬어?"
"네. 진짜요, 관장님. 저는 이렇게 운동을 해야……."
"기분 나쁘게 듣지 마라. 니 놈이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든, 짧은 시간에 국내 챔피언이 됐든 넌 아직 복싱의 기본도 잘 모르는 놈이야."
"..."
"그런 자식이 내 앞에서 제일 좋은 훈련이란 걸 떠들어? 그럼가서 어디 니 좋을대로 훈련 해 봐. 그럼 되겠구만."
"관장님,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실력이 있으니까 대우는 해 준다만. 너 인마, 방금 그 말은 굉장히 시건방진 말이었어."
맞설 상황이 아니구나. 근데 진짜 태릉이 안 맞는데...
"저, 관장님. 제가 마하 매니저라서가 아니라, 그래도 얘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이유 있지. 들었지. 강압적인 훈련이 싫다고 지 입으로도 말했고. 그래서 자유롭게 해 줬더니 그 결과가 뭐야? 혼자 흥분해서 팔에 무리나 오고. 그것도 권투 선수라는 놈이..."
"그건... 정말 죄송합니다."
"위험한 운동일수록 강한 통제가 필요한 법이다. 너 인마. 스키탈 땐 니 맘대로 타게 했었어?"
아니었지. 자세니 뭐니 기본을 지켜야 했고, 자유 스키라고 해도 정해진 라인을 벗어나면 차분한 정준이 형도 불같이 화를 냈었다.
민구 형이 슬쩍 관장님도 속상하셔서 그렇다고 위로를 건네며 기분을 풀어 준다. 관장님도 다 들으면서 애써 아니라고 하지는 않으셨다.
"무엇보다 마하 너가 태릉으로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꼭. 반드시. 절대적으로!!"
"그렇게나요...?"
"뭔데요? 관장님?"
"여기선 너랑 연습해 줄 선수를 구할 수가 없어."
이게 무슨 소린지 민구 형을 돌아보는데, 형도 관장님을 향해 묻는다.
"스파링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역시 안 해 준데요?"
"안 해. 없어."
"...마한데도요?"
"마하든 하마든, 여기저기 아무리 찔러봐도 없어."
"형도 알고 계셨어요?"
"음. 듣긴 했었지. 어쨌든 스파링은 중요하니까."
"먼저는 장난칠 시간 없다고 거절하더니, 지금은 챔피언 상대로 망신살 뻗치기 싫어 할 사람을 구할 수가 없으니. 빌어먹을...
인간들이 도전 정신이 없어."
와우. 이건 진짜 생각지도 못한... 그 정도라고?
그럼 내가 괜히 체육관 회원들이랑 스파링을 뛴 게 아니었구나.
"한국 헤비급 선수 풀이 적어서 그런 거죠?"
"그것도 있고. 다들 몸도 사리고 싶고."
관장님도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신다.
"나라고 왜 너랑 같이 하기 싫겠냐."
"..."
"그럼에도 보내야만 하는 때가 있는 거야, 이놈아."
그나마 태릉을 들어가야, 전 국가 대표라든지 상대해 줄 사람들이 있으니, 거기선 훈련이 될 거란다.
하늘이 재능을 내려 줘도 경험이 없으면 답이 없다.
복싱은 육상 스키와 다르게 실전 감각이 중요한 경기니까.
이것만은 정말 수많은 시합을 뛰어 보고 스파링을 통해 몸으로 체득해야만 풀리는 과제였다.
"다시 체육관 형님들이나 정 사장님이랑 하면...?"
"그 사람들은 일반이지. 넌 이제 선수고. 훈련이 안 돼."
"아..."
"그러니까 가. 고집부리지 말고. 정상을 오르고 싶다면서?"
최두필 관장님이 어깨를 꽈악 움켜쥐며 말씀하셨다.
"사람이 좋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네. 알아요..."
"태릉이 너랑 안 맞아도. 그곳이 조선 팔도에선 가장 운동하기 좋은 환경이라는 건 변함이 없어."
"..."
"가. 어른 말 들어. 끝까지 나랑 있고 싶다고 한 건 진심으로 고맙다, 이놈아."
상황이 그렇다면 나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걸까?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도 않고, 선뜻 ‘네, 그럴게요’라고 답도 안나오는 상황.
불쑥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우리들이 있는 곳으로 들려왔다.
"같이 가시죠."
뭐야? 누구야?
셋이 빠르게 고개를 돌려보니 형이 체육관으로 걸어오고 있다.
"어...?"
"어...? 형님?"
"뭐야? 저 친구가 여길 어떻게 왔어?"
"마하랑 같이 가시죠."
뭔데? 저거 우리 형 맞어? 왜 아무렇지 않게 다가오면서 저래?
"마하야, 너 뭐해. 형님 오셨잖아. 어서 일어나야지."
"아니... 뭔가 여기 형이 있다는게 너무 쌩뚱맞아서..."
"나도. 자네들 불과 며칠 전에 서로 으르렁거리고 싸우지 않았나?"
최두필 관장님이 내 말을 대신 해 준다.
올 순 있지. 형이 동생 보러 오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고.
근데 연락도 없고. 먼저 그런 일도 있었고. 불쑥 나타나서 갑자기 무슨?
"뭔 소리야? 같이 가자니?"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어. 성장하고 싶은 자. 길을 떠나라."
"..."
"길을 떠나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어이. 잘생긴 친구. 다짜고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길이라니?"
"물론, 수행의 길이죠."
형이 우리들 앞에 털버덕 자세를 잡으며 앉는다.
"실은 아까 도착했는데, 마하를 포함한 세 분 대화가 너무 진지해 문 밖에서 기다리며 들었습니다."
"흠."
"제 동생이지만, 저 녀석이 강압적인 걸 못 견디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내가 못 견디는 게 아니라!"
"그래도 마하는 늘 좋은 성과를 보였죠."
"..."
칭찬을 하는지 욕을 하는지...
불편한 감정은 새록새록 피어나는데, 형은 내 시선을 피해 관장님을 먼저 바라본다.
"마하가 사부님을 떠나지 못하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겁니다."
"하하, 사부는 무슨. 근데 뭐가 자연스럽나?"
"무릇 제자가 되어서, 존경하는 어른을 쉽게 놓을 순 없는 노릇아니겠습니까?"
"으하하하!! 아니, 나는 존경이고 뭐고 그런 말을 들을 사이는 아니고."
"그리고 사형도. 이 녀석이 의지하는 마음이 강해요."
"저, 저를요?"
"어쩌면 친형제인 저보다 사형을 더 가깝다고 생각할 겁니다."
"아하하... 아니, 전 뭐... 매니저니까..."
그러니까 뭐냐고 지금? 뭐하는 건데? 진짜 이해가 안 가네.
왜 잘 알지도 못 하는 사람들 그네를 태워 줘?
"형, 뭐해? 갑자기 와서?"
"잠깐만, 내가 먼저."
형이 최두필 관장님과 민구 형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마하가 빠르고 강하게 성장할 수 있던 배경엔 두 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흐으음."
"음..."
"두 분을 벗어나는 순간, 이 녀석의 성장도 더뎌질 겁니다. 그건 제가 확신을 할 수 있습니다."
"흠."
"환경이 바뀌면...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함께 가 주시죠. 마하의 성장을 위해서."
와, 진짜 못 참겠다.
그래서 또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형!! 잠깐만!"
"음, 그래."
"그러니까 뭐냐고? 뭘? 어디를 가는데? 수행의 길이 뭔데?"
형이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킨다.
관장님, 민구 형, 나. 셋 다 뭐에 홀린 듯 고개를 돌렸지만, 그곳엔 지저분한 창문밖에 없었다.
"적수가 없다면 니가 찾으러 가면 돼."
"어... 어? 어???"
도무지 이해가 안 가서 민구 형을 돌아보니, 형도 아리송한 얼굴로 말해 준다.
"그러니까 형님 말씀은 너한테 직접 연습 경기를 뛸 선수를 찾으러 가라는 말씀 아닌가?"
"그게 돼요? 어차피 안 오는데?"
관장님이 형을 향해 묻는다.
형이 가리킨 손 끝을 여전히 쳐다보면서.
"어이, 잘생긴 친구. 나도 뭐 하나 물어봄세."
"네. 어르신."
"자네의 그 손끝은 지금 어디를 가리키고 있나?"
"밖입니다."
"밖 어디?"
"해외죠."
"역시, 역시... 그렇지... 그래, 그런 방법이."
최두필 관장님이 자기 허벅지를 막 철썩철썩 두드리며 형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셨다.
"그렇구나!!! 그런 방법이 있었어. 어이~ 자네!!"
"고맙습니다."
"아하하. 이야, 생긴 것만 보고 오해할 뻔 했어. 보통이 아니구만!!"
민구 형은 정말 의지가 되는 사람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형도 오가는 대화를 이해 못 해 자꾸 눈빛을 마주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형 말은 즉, 도장 깨기를 해라 이거지?"
"음, 맞어."
"어어... 그러니까. 형님은, 마하가 외국으로 나가서. 강한 선수들을 찾아다니면서 직접 스파링을 뛰면 된다?"
"네. 맞습니다."
"그게 되나요?"
"맞어. 그게 돼?"
나랑 민구 형은 여전히 현실성 없는 소리라 여기고 있었다.
오직 관장님만 뭐에 홀리셨는지, 아니면 간밤에 마신 술이 지금 해독이 되는지. 끝도 없이 텐션이 올라간다.
"암! 그럼 되지!! 당연히 되고말고!!"
"말도 안 되죠. 그런 실례가 어딨어요..."
"실례가 되니까 말이 되는 거라고, 이놈들아!!"
관장님이 벌떡 일어나서 물으셨다.
"니놈들은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불쑥 우리 체육관을 찾아와 여기서 제일 강한 사람이 나오라면 어떻게 하겠어?"
"가라고 하죠."
"네. 그런 사람 없다고 해야죠."
"아니지!! 아니야!! 혼쭐을 내줘야지!! 건방진 자식,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까불어!!"
아니. 진짜로 누가 왔어? 왜 이렇게 흥분을 해서 난리야... 무섭게...
"근데 그건 싸움이잖아요."
"야, 인마! 복싱이 싸움이지!!"
언제는 복싱은 과학이라면서... 맨날 갖다 붙이면 단 줄 알어...
"구마하라는 명성있는 인물이 불쑥 찾아와 도전장을 내민다면."
그 와중에 형이 최두필이란 불타는 프라이팬에 기름을 뿌린다.
"호승심이 있는 남자라면 누구든 상대를 해 줄 겁니다."
"암! 그게 남자니까! 무엇보다 헤비급은 어차피 국내가 아닌 해외와 싸워야 하는 경기!! 그렇다면 태릉을 가지 않아도 돼! 내가 끝까지 따라가 줄 수도 있어!"
"돈은요?"
"네. 경비는요?"
"너 돈 많다면서. 나한테 매번 그러지 않았어?"
"..."
"니 능력이면 그 정도 지출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걸로 아는데."
이번에도 형이다.
진짜 갑자기 왜 저러는지... 이건 또 다른 의미로 무섭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