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 (1)
"그래서 마하는?"
"아이고, 기자님... 말도 마세요. 아주 그냥 어른이고 애들이고 짝짜꿍이 맞아 가지고 멋대로들 움직이는데……."
"좀 제대로 얘기를 해 줘 봐! 정말로 간 거야?"
"네. 가서는 뭐. 큰 밴 하나 빌려서 대륙을 횡단한다나."
"뭐야, 이런 큰 뉴스를 왜 숨기고 있었어...?"
"기자님, 저 기자님한테 지금 처음 말씀드린 거에요."
"사진은?"
"없죠. 부랴부랴 여권 챙기고 옷 챙기더니 훅 갔는데."
2008년 1월.
새해가 밝아옴과 동시에 새롭게 팀을 결성한 다섯 남자가 남아 메리카 대륙으로 떠났다.
비행기 표도 없었다.
그냥 공항 가서 칠레나 아르헨티나 둘 중 갈 수 있는 것으로 시작하는 정말이지 대책 없는 무사 수행이었다.
그날 밤, K―일보 임한기 기자가 다급하게 데스크를 찾아가 말한다.
"그러니까, 지금 취재를 위해 자기를 남미로 보내 달라?"
"네!! 엄청나지 않습니까!"
"모르겠는데. 엄청난 건가?"
"부장님, 구마하가 방랑자가 되어 강자를 찾아다니는 이야기가 엄청나지 않다고요?"
"언제 온다는데?"
"모르죠. 한 달이 걸릴지 일주일이 될지."
"안돼."
"왜요?"
"이 사람아, 가뜩이나 요즘 다 인터넷으로 넘어가는 추센데, 임기자같이 제대로 글 쓸 사람 사라지면 우리 신문은 어떡하라고?"
"신문 때문에 이런 특종을 그냥 놓치자고요? 지금 구마하 이름만 나와도 부수가 얼마나 오르는지 모르세요?"
"아는데, 그냥 나중에 오면 그때 취재해."
"부장님...!!"
"왜 이렇게 흥분을 하고 그래. 임 기자가 그쪽들이랑 가까운 건 나도 알어. 알아도 뭐, 정말로 무슨 구마하가 올림픽이라도 나가서 뭔가 해낼 거라고 믿는 거야?"
속상하다는 말투로 투덜거렸지만, 한상률의 얼굴엔 자부심과 긍지가 느껴졌었다.
분명 믿는 구석이 있다는 소리지. 임한기도 구마하라면 또 한번 세계를 뒤흔들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요!!"
"하... 참, 나..."
"보내 주세요."
"안돼. 그럴 출장비도 안 나오고..."
"반년 뒤에 올림픽이에요. 지금부터 끌어오면 되죠."
"이봐, 나도 아주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에요. 알잖아. 나도 들은 얘기가 있어서 그래."
"무슨 얘기요?"
"구마하 그 친구가 우리나라 챔피언이 된 건 놀라운 일은 맞어.
근데 그게 그 친구가 잘 한 게 아니라, 우리 복싱계가 그만큼 벽이 낮다는 뜻이 된대요."
"그래서 마하가 해외로 간 거 아닙니까.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강해지기 위해서."
"거, 사람 진짜 고집하고는... 그냥 자기가 떠나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잘 생각해 보세요. 살면서 이런 기회가 얼마나 오겠냐고요. 특집이 됩니다. 기사 계속 보낼게요. 여차하면 거기서 실시간으로 올릴 수도 있잖아요."
"가서 일 봐."
"진심이십니까...?"
"그럼 진심이지. 자네가 내 입장이 돼서 생각해 봐. 그만 나가 봐."
임한기는 탄식을 뱉었다.
그때, 해외 커뮤니티 한쪽에선 작은 소식이 올라왔다.
[혹시 여기 구마하란 사람이 누군지 아는 애 있어?]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던 글에 한 사람이 찾아와 리플을 달았다.
[나 알어.]
[진짜? 유명한 사람이야?]
[대충 그러지 않을까? 일단 올림픽 메달리스트니까.]
[맞구나. 오늘 우리 체육관에 왔는데, 다짜고짜 도전장 던졌음.]
[너네 체육관이 뭐 하는 곳인데?]
[짐 클럽에 복싱 클럽.]
[그런 곳에 구마하가 왜 갔지?]
소소하게 달린 리플 개수가 한가한 이들의 눈길을 끈다.
뭐지? 여기 뭔가 읽을거리가 있나?
클릭 수가 늘어나자, 대화에 참가하는 이들도 늘어난다.
[나도 구마하가 누군지 알려 줘.]
[올림픽 메달리스트. 더 궁금한 사람은 직접 찾아봐.]
[그 사람이 왜 도전장을 던졌어? 너희와 싸운 거야?]
[자세하게 이야기해 줘 봐.]
[평범한 날이었어. 갑자기 대여섯 낯선 동양인 집단이 찾아왔지. 모두들 처음엔 차이나 마피아가 온 줄 알았었어.]
[그리고?]
[시합을 했지. 매너는 깔끔했어.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고. 단지, 자기네가 되게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잘 몰라서]
[구마하 유명해. 세계 신기록도 냈던 사람이야.]
[혹시 구마하가 그 사람 아니야? 스키 선수? 스페인 사는 누나 만나러 갔을 때 그때 유럽에선 동계 올림픽이 열리고 있었거든. 제정신 아닌 거 같긴 했었어.]
[제정신 아니라는 건 무슨 뜻이야?]
[해설이 그랬어. 세상 저렇게 위험하게 경기하는 선수는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하지만 결과는 우승이었지.]
[중간에 끼어들어 잘 모르는데, 너희들 얘기 들어보면 이 사람은 육상 선수라는 거야? 스키 선수라는 거야?]
[둘 다야 이 한심한 놈들아. 구마하는 올림픽 선수고. 육상, 스키 두 종목에서 금메달을 탄 스페셜 리스트야.]
[어디가 한심해? 그 사람 모르는 게 한심한 거야? 난 올림픽보다 월드컵에 더 관심이 있는데.]
[상식이지.]
[상식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상식이라 하는 거고. 이런 건 가십이라고 부르지 않을까?]
논쟁이 시작되는 글은 더더욱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마침내 지구 반대편 사람들이 구마하란 존재를 또렷하게 각인한다.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구마하는 육상 선수에 스키 선수고.]
[생각보다 위험한 짓을 즐기는 놈이라는 거네.]
[금메달리스트라. 괴물이네.]
[이 친구 진짜 괴물인데? 육상에서 이미 메달을 세 개나 받았어. 심지어 1500미터에서도 결승전에 올랐고.]
[세계 신기록에 올림픽 신기록 보유자라.]
[그런 친구가 왜 지금 복싱을 하고 있는 거야?]
[모르지. 누구 코리아 인터넷 볼 수 있는 사람 있어?]
[처음 찾아갔다는 친구. 너희 지역이 어딘지 말해 줄래?]
[푸에르토 몬토. 중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야.]
[동양의 스포츠 챔피언이 자기 종목도 아닌 운동을 하면서 칠레시골 구석에서 등장했다는 건 뭔가 낯설면서 어색한 이야기야.]
[한 가지는 고쳐서 말해 줘. 우리 고향은 그렇게 시골이 아니고. 아름다운 풍경과 조용한 바다를 간직한 곳이야.]
시끌벅적한 이야기 가운데 한 사람이 묻는다.
[나는 이 신기한 녀석의 복싱 실력이 어땠을까 그게 궁금해.]
[그건 실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만 알지 않을까?]
[얘기해 줘. 질문한 사람. 봤을 거 아니야.]
[봤지. 형편없었어. 몸은 크고 빠른데 기술이 너무 없더라고.]
그렇게 구마하 이야기는 잠깐의 수다거리로 소비된다.
하지만 한 달 뒤. 2008년 2월.
[여기 먼저 코리안 챔프에 대해서 물었던 놈 어딨냐? 오늘 우리 체육관도 왔다.]
[코리안 챔프가 누군데?]
[하하하! 그게 누구냐면.]
[너는 어디 사는데?]
[산티아고.]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수많은 명성 있는 주먹을 탄생시킨 이곳에서 두 번째 소식이 들려온다.
[난 보기보단 잘하는 거 같던데?]
[너희가 못 하는 선수를 내보낸 거 아니야?]
[아니야. 유명하진 않아도 아마추어 전적이 50회에 다다르는 선수였어. 승수도 꽤 많고.]
[누가 이겼어?]
[우리지. 하지만 구마하도 괜찮은 몸놀림을 보였던 거 같애.]
[맞다. 구마하 하니까, 내 고향 친구가 지금 산티아고 남쪽 작은 도시에 있는데, 그쪽에서도 봤다는 사람이 있어.]
[나도 그 얘기 들었어. 쿠리코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네티즌들은 또 한 번 모여 상황을 종합해 본다.
[그러니까 지금 멀고 먼 아시아에서 온 아틀렌틱 챔피언이 우리 대륙의 남쪽부터 시작해 올라오고 있다는 말인 거네.]
[그것도 뭔가 도전자라는 입장으로 말이야. 하나하나 상대를 해 가면서]
[뭐지? 무슨 목적이지?]
[내가 봤을 땐 배우는 자세가 꽤 좋았던 거 같애. 정말 다들 매너가 있는 사람들이었어.]
[구마하는 혼자 다니는 게 아니야?]
[아니야. 작은 친구가 한 명 있고. 피부가 하얀 귀족 같은 사람이 하나 있었어. 그리고 또 우리 옆집 중국인 아저씨 같은 사람이 둘 있고. 아마 그들이 코치였겠지? 시합 때도 많은 걸 옆에서 지시하더라고]
[어이, 산티아고. 구마하 실력이 좋다고 말했냐?]
[좋아. 무엇보다 빨랐어. 스피드만 봤을 땐 절대 헤비급 선수라는 느낌이 안 들 정도로. 단지 기술은 정말 없는 것 같더라.]
[사진은 없어? 난 사진이 보고 싶은데.]
[사진이 어딨어. 운동하는 데 카메라 챙겨가는 사람이 어딨다고.]
[나는 챙기는데. 내 바디 체크 하고 싶어서]
[몇 사람 사진 찍는 거 같기는 했는데, 혹시 모르니까 내일 같이 운동하는 친구한테 물어볼게.]
다음 날, 한 장의 사진이 올라온다.
[떨렸잖아!! 누가 누군지 어떻게 알어?]
[이 사진만 봐서는 누가 라티노고 누가 아시안인지도 모르겠는데.]
[움직이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라고? 친구도 이것밖에 못 찍었다고 했는데.]
[이 녀석 다음엔 어디로 간다는 말 못 들었나?]
[우리 코치가 근처 다른 체육관을 소개해 주는 건 들었는데.]
[거기가 어딘데?]
* * *
[이봐, 친구들. 오늘 내가 구마하 사진을 찍어 왔어!!]
그렇게 구마하의 복싱 로드는 조금씩 소소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맞어. 이 얼굴 기억나. 올림픽에서 봤었어!!]
[찾아보니까 이 친구가 세계 신기록도 썼었던데?]
[난 오늘 당사자한테 직접 들었어. 지금까지 8전 3승 5패를 기록 중이라 하더라고.]
[스페인어를 해?]
[올라 아미고 정도는. 내가 영어를 할 줄 알어.]
[왜 칠레를 온 거래?]
[비행기 표가 그것만 있었데. 별다른 계획은 없는 것 같더라고.]
[브루스 구가 이런 여행을 하는 목적은?]
[먼저 누가 말했던 거 같은데. 강자를 찾아다니고 있다고 했었어.]
[왜?]
[강해지고 싶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야기였다.
구마하 소식은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들였다.
[전적만 봐서는 그렇게 잘 하는 건 아닌데.]
[복싱을 시작한 건가?]
[코리아 인터넷 찾아봤는데, 이 친구가 지금 코리아 헤비급 챔프래.]
[나도 구마하 찾아가 봤는데, 누구였냐? 옐로우 멍키라고 부른 놈. 장난 아니게 크잖아!!]
[정말로? 사진만 봤을 땐 그렇게 안 커보이던데?]
[구마하랑 같이 뛴 선수가 2미터가 넘었어! 그쪽도 봤는데 거긴 거인이었어!!]
[동양인이 그렇게 크다고?]
[운동 선수는 크겠지.]
[코리안은 실제로 동양인들 가운데 가장 체격이 좋은 사람들이야. 재패니즈나 차이니즈완 달라.]
[하지만 코리안은 몽골리안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작은 페니스사이즈를 가졌다는 말도 있지. 재미난 놈들이야.]
접속하는 숫자가 늘어날수록 이야기는 점점 더 살을 붙이고. 사람들은 먼 이국땅에서 날아온 도전자에게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자연히 그를 찾는 발걸음도 늘어났다.
하지만.
[어제 떠났어.]
[나도 오늘 갔는데, 구마하 갔다고 들었어.]
[그래도 아직 산티아고에 있지 않을까?]
[모르지. 사람들한텐 더 위쪽으로 간다고 했다는 거 같던데.]
[너희 그거 아냐? 미국에선 구마하 인기 장난 아니다.]
[맞어. 우리 삼촌도 미국에서 학교 체육 선생님인데, 스포츠 쪽에서 구마하는 이미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더라.]
[왜?]
[위대한 업적을 달성했으니까.]
[잘은 몰라도 엄청 유명한 사람이었나 보네. 먼저 보고 온 애들은 운이 좋았구나.]
[아쉽다. 우리 집 바로 옆이었는데...]
[나도. 동양인들 우리 동네 슈퍼에서 장 보는 거 봤었는데.]
얼굴도 모르고 언어도 다른, 그렇게 누군가의 가십거리가 되어버린 한 스포츠 선수의 독특한 행보는 또다시 조용히 사라지는.
[올라 아미고스, 여기는 아르헨티나. 너희들 얼마 전에 구마하란 선수에 대해 재미난 이야기를 하던데.]
줄 알았으나.
[아르헨티나로 갔다고?!]
[정말로? 진짜로 거길 갔어?]
[응. 왔어. 내일 우리 체육관에 와서 시합하자고 부탁했고.]
[사진, 사진!!]
[비디오를 같이 올려 줘!]
[아르헨티나는 가난해서 그런 거 가진 사람 보기 어려울 건데?]
멀고 먼 동양에서 넘어온 도전자들의 행보는 또 한 번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