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 (2)
칠레와 아르헨티나 국경 검문소.
안데스 산맥에 위치한 이곳에서 구마하와 일행들은 멋진 추억을 남기고 있었다.
"민구야, 정말 멋지지 않냐?"
"그러니까요. 와, 내가 살면서 이런 곳에 오게 될 줄이야..."
"나도 지금 그 생각했는데."
"형님도요?"
"마윤 씨도?"
"매일 집 가게만 왔다 갔다 했는데. 뭔가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은 있네요."
"하하하! 마윤 씨, 신혼인데 벌써 그러면 안 돼!"
"민구 씨, 마하랑 같이 있으면 보통 일상이 이런가요?"
"아무래도 평범함보단 조금 더 다이나믹함이 있죠. 사건 터지면 그만큼 시끄러워지기도 하고요."
"정말이지, 저런 녀석이 나랑 어떻게 살았을까요."
"식구라고 다 안다는 착각을 버려야 돼. 마누라도 그래."
"하하하~! 명심하겠습니다.
차분한 세 사람이 경치를 구경하는 동안 뒤에선 뜨거운 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어이! 거기서들! 뭐해? 일로 와서 사진 찍어!!"
"형!! 일로 와!! 민구 형! 형은 제 매니저면서 왜 맨날 우리 형이랑만 같이 있어요!!"
"정말이지... 두 분이 계셔서 제가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진짜 민구, 너 혼자 저 두 사람 어떻게 상대했냐..."
"아하하하~! 가요. 우리도 사진 찍어야지."
다들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며 주어진 역할에 바빠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 몰랐다.
구마하의 복싱 로드는 해외에서 먼저 인기몰이를 시작하고 있었다.
남미 대륙을 떠돌던 이야기는 멕시코를 지나 미국으로 넘어가고, 마침내 태평양을 건너 대한민국까지 전달된다.
조악학 경기 영상과 사진 몇 장이 전부지만, 한국 네티즌들은 그것만 가지고도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진짜로 구마하야?]
[왜 저기까지 갔지? 전지 훈련인가?]
[나 아는 사람이 체육 쪽에 있는데, 우리나라 헤비급 선수층이 얇아서 연습할 상대가 없다고 나가서 훈련하는 거래.]
[역시 돈이 많으니까.]
[근데 저거 잘 하는 거냐?]
[그러니까. 저게 지금 잘 하는 건가? 존나 맞는데?]
[근데 헤비급이 왜 이렇게 날씬해?]
[얘들아. 헤비급이 뚱뚱한 선수들만 있는 게 아니야. 타이슨도 알리도 다 헤비급이었어.]
[와~ 구마하 이 새끼 스위치 히터네.]
[그건 또 뭐냐?]
[양손잡이.]
[제대로 봤구나. 나도 어릴 땐 복싱 열심히 했는데, 중학교 전국체전에서 우승도 해 봤고. 내가 볼 때 구마하는 초급자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양손을 써서 그런가 뭔가 공격이 다채로워 보인다.]
[씨발 중학 수준이 현직을 논하다니. 하여간 좆문가들 나셨다.]
어디든, 정식 인가를 받지 못한 전문가들이 있다.
그들의 냉정한 분석과 평가, 그리고 답이 없는 논쟁은 화재를 끌어모은다.
구마하 소식은 국적을 가리지 않았다.
스포츠를 사랑하는 전 세계 네티즌은 언제나 그의 이름을 올리며 커다란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과연 구마하의 복싱은 어떤 결과를 낳게 될 것인가?
사람들은 그의 성장을 기대하면서, 이미 높은 성과를 거둔 인간의 한계를 의심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기 시작했다.
물론 부정적인 인식도 상당히 크게 번지고 있었다.
[병신들. 구마하가 진짜 올림픽까지 갈 거 같냐? 저 새낀 그냥 기업 상대로 자기 몸 값 올리려고 지랄하는 거야.]
[그래. 속칭 떡밥들만 상대하면서 이미지 메이킹 하는 거지.]
긍정적인 인식과 부정적인 인식. 뭐가 됐든 구마하는 스포츠계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이 같은 소식에 분을 참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아테네의 기적을 직접 목격했던 K―일보 임한기였다.
"부장님!!"
"깜짝이야. 뭐야, 임 기자? 사람 놀라게?"
"이것 좀 보세요!! 그러니까 제가 남들 알기 전에 빨리 보내 달라고 했었잖아요!!"
"뭔데?"
임한기는 인터넷에 올라온 구마하 경기 영상과 네티즌의 반응을 프린트해 상사에게 내밀며 항의했다.
"어어~ 여기 이 빨간 헤드기어 쓴 게 구마하구나."
"그렇다니까요!! 내가 갔으면 이 사진, 조회수 다 우리가 끌어 오는데..."
"흠. 그렇게 잘 못 하는 거 같은데, 이게 왜 화제가 되는 거지?"
"실력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테스토스테론이 넘치는 놈들은 무모한 걸 좋아합니다. 승부와 도전 정신이 가득한 이야기에 관심을 안 가지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자네, 지금 나 가르치는 거야?"
"선배! 지금 자존심 세우실 때냐고요!!"
임한기가 입씨름을 하는 그 순간, 구마하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짐을 풀고 있었다.
미국 프로모터들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아르헨티나 복서들은 믿고 쓸 수 있다.
강하고 선수층도 두꺼우며, 무엇보다 아르헨티나 복서들은 열정적인 남미 대륙의 긍지를 보여 주듯 파이팅이 넘치는 경기 시합을 펼친다.
미국 멕시코와 더불어 복싱의 메카 중 한 곳인 아르헨티나.
그런 땅에 구마하가 도전장을 들고 나타나니 사람들은 열렬한 반응으로 그들을 반겨 주었다.
"어째 설명도 필요 없이 바로 시합을 잡아 주는데?"
"그러게요. 역시 본고장이라 뭔가 다르네, 달라."
"자, 자. 마하는 시합 준비하고. 민구야."
"네, 관장님. 마하야, 이따가 보자."
"네!! 형 비디오 잘 찍어 줘요!"
"아우. 어째 매번 시합 때마다 꼭 내가 뛰는 거 같이 떨리냐. 안그래요, 마윤 씨?"
"저는 뭐, 재밌는데요."
"재밌어? 난 씨, 외국 사람들 둘러싸여 있는 것만으로도 괜히 위축되는데."
첫 번째 시합이 열리자 인터넷은 또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기대는 관심으로 이어지고, 구마하가 있다는 체육관엔 먼저 사람들이 찾아와 사진을 찍고 경기 내용을 관람했다.
급기야 아르헨티나 방송국에서도 그를 찾아와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미스터 구, 당신은 아틀렌틱과 스키의 스페셜리스트 아닌가요? 왜 지금 복싱을 시작한 겁니까?"
"그냥 저를 알리고 싶어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미 유명인의 반열에 올랐는데, 여기서 누구에게 더 자신을 알리고 싶다는 거죠?"
구마하는 팀 동료들. 특히 형제 구마윤을 돌아보며 한 단어로 질문에 답했다.
"WORLD."
그날 밤 도전자의 인터뷰가 방송을 타고 흐른다.
인터넷에서 소소히 알려지던 것과 방송을 통해 알려지는 것은 파급력이 달랐다.
구마하는 이제 스파링을 뛰기 보다 그를 초대하는 체육관을 고르는 단계에 이르렀다.
"와우, 이 정도였구나..."
"왜요 민구 형? 뭐 어땠길래요?"
"한국에서 지금 길수가 자료를 보내 줬는데."
한발 늦게 소식을 접하게 된 일행들.
이제는 왜 이렇게 주변이 시끄러운지를 알게 된다.
"어쩐지... 갈수록 사람이 늘어나더라니..."
"일단, 여기저기 번거롭게 찾아가지 않아도 되는 건 좋네."
"하하! 그러게요. 그것도 은근 피곤했는데."
"근데 문제는 지금 너한테 들어오는 스파링만 다 뛰어도 올림픽까지 기한을 못 맞출 거 같은 상황이야."
"으하하! 하하하하! 정말로요?"
"일단 쉬고 있어 봐. 관장님이랑 이야기 좀 하고 올게."
그때부터 일행들은 캠핑카를 반납하고 호텔에서 머물기 시작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만 한 달을 머물렀다.
주에 두 번, 여덟 번의 스파링을 뛰었고 그때마다 체육관은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물론 그때그때마다 기대보다 더욱 강한 강자들이 나타나 힘겨운 시합을 벌여야만 했다.
"헉, 헉... 관장님. 그냥 수건 던져요..."
"역시 뭔가 이상하지?"
"저 새끼가 그냥 일반 회원이라고요? 시합 운영이 지금까지랑 완전 다른데?"
"새끼들 어쭙잖게 지들 선수 홍보하려고..."
불미스런 일들도 도전자의 자세로 감내하고 있으니, 마침내 스파링이 아닌 정식 시합 제의가 들어왔다.
"먼저보단 낫네요. 당당하고."
"이걸 좋은 소식이라고 해야 되는지. 으음..."
"코치님, 왜요?"
"일단 관장님 의견 먼저 듣고."
최두필이 상대할 선수 프로필을 훑어본다.
아마추어 경력 70전. 남미 지역 챔피언을 따내고 지금은 프로로 뛰고 있지만, 프로로서는 큰 성과는 없었다.
"이 시합 후원사가 디아다스구만. 큰 경기가 되겠는데."
"디아다스요? 어디요! 아 이 새끼들."
"왜? 너네랑 뭐 있냐?"
"먼저 마하 복싱 한다고 했을 때. 저쪽에서 손 내미는 거 거절했었거든요."
"그럼, 그런 의미에서의 복수전도 겸하는 시합이 되겠구만."
"관장님, 역시 전 반대에요. 우리 이거 하지 마요."
"음..."
"뭘 고민하세요. 민구,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어?"
"관장님 뜻은 어떠세요?"
"민구야, 아직 마하는 시합 들어온 거 모르고 있지?"
"네. 제가 따로 이야긴 안 했어요."
"관장님 생각은 어떠신데요?"
"난 솔직히 반반이라고 봐."
성장을 위해 고생길을 자처했지만, 구마하는 기대와 달리 형편없는 시합을 치르고 돌아오면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떨어지는 힘겨운 모습을 보였다.
한국의 헤비급과 세계의 헤비급은 수준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세계의 벽은 높고, 천부적인 신체 능력도 경험 앞에선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두 달간 이어진 연습경기 전적은 21전 6승 15패.
얼마 전 치렀던 스파링에서는 프로 데뷔를 앞둔 선수였다곤 하지만, 구경하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다운을 두 번이나 뺏기는 일도 있었다.
아무리 초보라고 해도, 일단 선수였다.
특히나 구마하 같이 프라이드가 강한 녀석은 아무리 배우는 단계라곤 해도 패배를 경험하는 게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하지만...
"후우... 이거 참. 고민이구만. 당사자에게 말하자니 부담만 줄거 같고."
"전 꼭 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민구야?"
"왜? 말해 봐."
"마하는 실력이 부족한 게 아니에요. 경험이 부족한 거지."
"민구야, 그 경험이 넘치는 상대가 지금 나타난 거야. 이런 싸움은 피해야지."
"그러다 이기면요?"
"어?"
"그런 상대를 이기면 지금까지 떨어진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
"자. 민구야. 들어봐. 나도 여기서 이렇게 껴 주니까 코치니 뭐니 하는 거 인정해. 근데, 내 삶의 절반을 복싱을 즐기며 살아온 눈이 있어. 이건 관장님도 인정하실 거야? 그렇죠?"
"그럼, 이 친구 자격증만 없지 우수한 트레이너야."
"프로가 된 애들은 달라. 괜히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해서 시합을 치르는 게 아니라고. 안 그래요, 관장님?"
"틀린 말은 아니지... 나도 프로의 벽을 넘진 못했으니까."
"그래도. 마한데."
"나도 마하 씨 믿어 주고 싶은데, 선수층이 두꺼운 곳에서 지역챔피언을 땄다는 건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소리야. 우린 지금 팀트레이너로 선수를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고."
"저쪽에서 아마추어 룰로 시합하자고 했다면서요. 4라운드. 헤드기어도 쓰고 나온다고."
* * *
"아이고... 다 들리는 걸 모르는 척해야 하는지."
"모르는 척해. 넌 지금 나한테 마사지 받으면서 잠든 상황인 거야."
"열려 있는 귓구멍을 닫을 수도 없고..."
"저쪽 다리나 이쪽으로 줘 봐."
구마하는 형 구마윤의 기공 마사지를 받으며 지친 몸을 회복하고 있었다.
"형은 어떻게 생각해?"
"뭘?
"시합. 해야 될까?"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하고는 싶지. 그렇지만, 막상 시합이라고 한다면 조금 무서운건 있어."
"왜?"
"먼저 그 선수도 그랬잖아. 내가 느끼는 기운 그 이상의 실력이 나오면 당황스럽기도 하고."
"내공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아니야. 그건 그냥 느낌이 그렇다 하는 정도로 받아들여야 돼."
"언제는 내공을 읽으면 사람을 볼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마라. 아버지 말씀이야."
"하하... 이런 순간에 아버지 말씀이라... 듣고 싶다. 뭐라고 하셨는지."
구마윤이 멀고 먼 과거의 한 페이지를 꺼내들었다.
"너가 태어나던 날인가 그랬을 거야."
"오~오 탄생 비화."
"혼자 마을 앞에서 별을 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찾아오셨어."
어느 깊은 밤. 곱고 귀해 보이는 아이가 별이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갖고 싶다. 저런 빛나는 것을 손아귀에 쥔다면 어두운 밤에도 글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비는 아들의 작은 뒷모습에서 그 속마음을 읽었다.
저놈이 욕망이 있구나.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그래서 대화를 나눈다.
가까운 곳, 우뚝 솟은 나무를 가리키며.
눈이 하늘을 본다고 내 손이 닿는 것은 아니니, 우선 저기 있는 나무 끝을 먼저 만질 수 있도록 해 보거라.
"오오~ 아버지."
"그리하면 어느 순간 천하가 네 녀석 발아래에 있을 거라고 하셨지."
"천하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깊은 인내가 필요한 걸 잊지 마. 마하야."
"..."
"자냐?"
"쿠울, 쿠우울~~"
"녀석, 쉬어라."
잠에 빠진 구마하를 보면서 구마윤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패배가 쌓일 수밖에 없지.
연습 때마다 한 단계씩 더 강한 상대들을 맞서고 있었으니까.
"조급해하지 마라. 너는 이미 충분히 강자의 반열에 올라섰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