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 (3)
태풍도 작은 날갯짓에서 시작되고, 창세기도 태초에 빛이 있었다고 하지 않던가.
너무 거창한 비유를 들었지만, 나도 남수의 정신빠진 헛소리를 진지하게 믿었기에 여기까지 왔다.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
이곳에서 나에게 작은 시험의 무대가 열린다.
"컨디션은 어떠냐?"
"괜찮습니다."
"니 형은 대체 뭘 하길래 이렇게 효과가 좋은 거야?"
"그냥 형제의 정이라고 생각하시죠."
"얼씨구. 형제 없는 놈은 서러워서 살것나."
"관장님, 외동이세요?"
"누이가 있지."
"관장님, 누나 계셨어요? 전혀 안 그렇게 보이시는데?"
"왜? 내가 뭐 어때서?"
"뭔가, 거칠잖아요. 여형제 있는 사람들은 좀 순하던데?"
"시끄럽고. 전달 사항이 있다."
알면서도 모르는 듯 관장님을 통해 시합 얘기를 전해들었다.
"프로 선수라고요?"
"프로도 프론데. 일단, 잘하는 놈이다."
"시합 영상 같은 거 있을까요? 보고 싶은데."
"우선, 니 녀석 생각을 먼저 듣고 싶구나."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관장님은 코치님과 민구 형의 의견을 적절하게 섞어 답변해 주신다.
"객관적으론 무리지만, 아주 못 당해 낼 상대는 아닌 것 같애."
"왜 그렇게 보시는데요?"
"일단, 파워는 몰라도 주먹이 느려. 그래서 이겼을 땐 그만한 보상이 따라온다고 보는데."
"도전이네요."
"암! 도전이지."
"그럼 더 해야죠. 복싱은 도전이니까!!"
"자식. 아무거나 갖다 붙이지 마, 인마. 그건 내 꺼야."
많은 것이 사소한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면 큰 변화는 나를 얼마나 바꾸게 될까?
아마, 이 경기로 지금까지의 육상 스키 선수의 구마하가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을 연습 시합이 아닌, 나를 세계 복싱으로 안내해 줄 공식 데뷔 무대가 될 경기니까.
시합을 결정하고 다 같이 상대편 프로필을 보았다.
"어우, 키가 크네."
"키도 크고 신장도... 마하보다 큽니다."
"그래도 몸무게는 비슷한 상황인데, 감량을 한 건가?"
"그럼 시합 날짜는 어떻게 되는 거냐? 민구야?"
"한 달 뒤로 했어요. 저희도 준비하고, 그동안 계속 이동하면서 마하 컨디션 떨어진 것도 회복해야죠."
"한 달이면... 바로 귀국 아닌가? 마하 괜찮냐?"
"네. 아르헨티나서 더 훈련할 수 있으면 저도 좋죠."
"그럼,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해 봐야 하는데..."
"아, 그거. 관장님. 회사에서 지금 대사관이랑 연락 중이라고 아까 전달받았습니다."
"대사관?"
"한인회에 도움을 요청중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무래도 보안문제도 있고, 정식 경기라고 하면 괜히 여기저기 시끄러울 것도 있으니까요. 숙소도 그쪽 가까이로 옮길까 싶어요."
"호텔이 호텔 같지가 않으니, 그건 좋네."
"이야~ 허허허~ 대사관까지 나서다니. 마하 씨, 대단하긴 대단하네."
"저놈 명성을 따지면 이상할 것도 없지 뭐."
모두가 시합을 앞두고 차근차근 준비를 시작하는 게 보인다.
그렇다면 나 역시 큰 책임을 맡아야지.
"저는 뭘 더 해야하죠, 관장님?"
"정 코치."
"기술적으로 당장 뭘 익히는 건 무리가 있으니까. 지금까지 해왔던 거, 그리고 그동안 여기 와서 시합하면서 느꼈던 것, 부족했던 것 종합해서 프로그램을 짜 보자."
"네, 코치님."
"관장님도 한 말씀 하시죠?"
"됐어, 뭘. 정 코치가 다 얘기했는데."
"에이, 그래도 해 주세요."
"맞아요. 관장님이 선생님이면서. 은근 코치님 들어오고 권위적으로 변하셨어."
"이것들이..."
체력은 준비됐다. 맷집도 있고. 몸도 문제 될 건 없다.
기술도 굳이 현란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하신다. 이미 스위치 히터로서 지금까지 익힌 것만 잘 써도 평생을 쓸 수 있을 테니까.
"정 코치가 말한 대로 기술적인 문제를 당장 익힌다는 건 무리야."
"근데요, 관장님. 왜 제 주먹이 안 맞죠? 우리나라에선 그래도 잘 맞았는데... 여기 선수들이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니고."
"그만큼 여기 선수들이 경험이 풍부하다고 봐야지. 시합 운영을 잘 한다고 보면 돼."
"경험이라..."
"마윤이는 형으로서 뭐 해 줄 얘기 없어?"
"제가 의견 낼 게 있나요. 훌륭하신 분들이 계시는데."
"아냐. 너도 이제 우리 팀인데, 뭐든 얘기해."
"그래. 마윤 씨도 그동안 옆에서 본 게 있잖아. 느끼는 게 있었을 거 아니야."
"음. 연습 경기 마치고 돌아왔을 때. 마하 피로도가 집중되는 곳이 있었어요."
"그래!! 그런 걸 얘기하라고!! 이것 봐. 좋잖아."
"마윤 씨, 나도 알려 줘. 프로그램에 넣게."
회의를 마치고 저녁. 형과 단 둘이 방에 누워있었다.
"형이지?"
"뭐가?"
"숙소 옮기자고 한 거."
"아니야."
"진짜? 돈 아끼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하하하~! 야. 넌 진짜 날 어떻게 보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형은 상대방의 모든 조건이 나보다 뛰어나니까 지더라도 이상하지 않다고, 편하게 경기를 하라고 했다.
"알았어."
"건성으로 듣지말고."
"알았다니까. 자, 형."
마음 같아선 나도 편하게 경기하고 싶다.
존중하는 마음으로 배운다 하는 자세로 임하고 싶다고.
하지만, 그게 그렇게 안 되는 걸 어떡하란 말인가.
"후우..."
민구 형 말이 맞다.
이기면 그동안 연습 시합에서 뺏긴 거 다 되돌려받는 거야.
아무리 연습이래도 분한 게 있어.
나도 좀 뭔가 반등을 치고 싶었다고.
복싱을 하면서 나는 전과는 다른 승부욕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승패의 가치를 떠나 운동은 운동으로 의미있는 것 아니냐, 그것이 내 주장인데. 물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은 없지만.
다만, 복싱이란 운동은 뭔가... 언젠가 관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승자 아니면 패자만 남는 게임이라는 걸 절실하게 느낀다.
이겼을 때 오는 성취감보다 졌을 때 오는 패배감과 분함이 육상이나 스키 때와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이겨야 한다. 꼭 반드시 이겨야만 해.
지면, 모든 게 사라지는 것 같다.
이겨야 내 노력과 고생. 스텝들의 헌신과 희생이 인정을 받는다.
아무리 땀을 흘렸어도, 아무리 그것이 연습이라 하더라도. 지는 순간, 뭔가 노력을 덜 한 거 같고, 땀이 부족했던 거 같고, 내가 나 자신을 너무 편하게 대해 준 것 같다.
우리가 단체로 이런 고생을 하고 있어서 더 그런 걸 느끼는 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일단 관장님이나 민구 형, 정 코치님, 그리고 우리 형까지.
이겼을 때 표정이 더 밝아지는 건 사실이니까.
"형."
"...왜?"
"안 자고 있지?"
"옆에서 그렇게 한숨을 쉬는데, 어떻게 잠이 오냐."
"형, 솔직히 말해 봐. 나 국내 아마추어 대회에서 챔피언 먹고 트로피 들고 왔을 때 기분 어땠어?"
"그건 왜?"
"솔직히 말해 봐. 좋았어, 싫었어."
"좋지. 다만, 그때는 정말 널 조금 오해하고 있었고."
"알았어. 그거면 됐어."
"후후, 마하야."
"잘 거야. 진짜로. 말 안 걸 게."
"마음 편하게 먹어."
원래는 남은 한 달. 브라질을 거쳐 멕시코까지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공식 경기에 맞춰 스케줄도 변화가 생긴다.
다음 날 대사관과 한인회 회장님을 만났다.
아르헨티나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도 만났다.
몇 개는 내가 한국에서 광고를 맡았던 기업도 있어, 주재원분들의 커다란 환영 인사도 같이 받을 수 있었다.
환경이 바뀌고 연습실도 생겼다.
집도 한인 거주지 한 쪽에 작고 깔끔한 곳으로 임시 거쳐가 생겼다.
모두가 발 벗고 나서 주는데, 그게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관장님, 오늘 저녁에 마하 훈련 뺄 수 있을까요?"
"저녁요? 뭐 있어요?"
"왜? 민구, 뭔데?"
"아, 여기 한인회에서 마하 환영 행사를 해 주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먼저 했잖아?"
"그건 기업에서 조촐하게 마련한 자리고요. 이번엔 주민들이 제대로."
"어우! 그럼요!! 물론 가야죠!!"
"가는 거냐?"
"당연하죠! 관장님. 이런 기회 흔치 않아요!"
"하하! 그래. 어디 배에 기름칠 좀 해 보자."
* * *
"자, 이렇게 국민 영웅을 모시게 된 것도 영광인데! 다 같이 높게 잔을 들어 봅시다!"
아르헨티나 정통 바비큐 아사도로 마련된 파티였다.
꽤 많은 교민 분들이 오셨는데, 오랜만에 내가 하는 운동이 국가와 민족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에게 이번 경기는 성장을 위한 발판이었다.
하지만, 교민분들한텐 대한민국 선수 구마하가 세계 무대 데뷔전을 어웨이 경기로 치른다는 게 못내 마음이 쓰이셨단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날 회사에서도 단체로 휴가 내고 응원가기로 했습니다!"
"친구들한테도 지금 다 마하 오빠가 이길 거라고 했어요!"
"허허허... 이거 참..."
어떻게 보면 응원은 선수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다.
그러나, 막상 이런 이야길 들으면 이상하게 기운이 난다.
절대 질 수 없겠구나. 새삼 의지가 생겨난다.
"마하 씨도 한 마디 하시죠."
"음, 이렇게 먼 땅에 저를 응원해 주시는 분들이 많은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멋진 시합 내용으로 꼭 보답하겠습니다."
분명히 시작은 단순했었다.
하지만, 복싱 팬들의 관심과 승리를 바라는 교민들. 아르헨티나 현지인과 무엇보다 뒤늦게 냄새를 맡은 기업이 참가하게 되니.
"마하야."
"네. 민구 형."
"NICE에서 온단다."
"하하! 정말요?"
"저쪽이 디아다스를 입고 오는데, 우리도 우리 스폰서를 입어줘야지."
포스터도 찍고, 아르헨티나 방송국의 두 번째 인터뷰도 땄다.
아마추어 선수에게 이정도 관심을 준다는 게 영 이해가 안 가지만.
다들 좋아하니 트집 잡을 건 없겠지.
그렇게 나의 데뷔전은 쉽게 지나갈 수 없는 빅 이벤트가 되고 말았다.
"후우."
"천천히 호흡하고."
"후우우~ 우우우~~"
"장난치지 말고."
"누가 장난을 쳐. 진지한 명상 시간에."
"집중해."
그럴수록 나는 명상의 시간을 많이 가지기 시작했다.
그날도 혼자 체육관에 남아 명상을 하고 있었는데, 형이 찾아와 옆에 앉았다.
"원래도 이런 걸 해?"
"하지."
"그래? 언제?"
"큰 경기를 앞두고 있을 땐, 몇 시간이고 가만히 앉아 감정을 누르는 편이야."
"후후. 왜?"
"명경지수. 언제나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고."
"정말 보기와는 많이 다르구나."
"형이 보는 나는 어땠는데?"
"그냥. 동생이지 뭐."
기분좋은 칭찬이 나오길 바랬는데, 퉁명스럽기는.
"아, 누가 자꾸 말을 걸어, 명상 중에. 집중 안 되게."
"자식."
떠들어도 된다. 중요한 건 마음을 진정시키는 거니까.
마음만 차분해질 수 있다면 그것이 꼭 명상이 아니더라도 상관은 없다. 딸딸이를 치든, 섹스를 하든. 중요한 건 정신에 있으니까.
그런 의미로 봤을 때 형과의 조용한 대화는 명상보다 더 좋은 마음의 수련이었다.
"괜찮아. 잘 할 거야. 긴장하지 마."
"그럼. 안 쫄아. 내가 누군데."
"쪼는 게 문제가 아니라 꼭 이겨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지."
"그걸 형이 어떻게 알어?"
"다 알어. 니가 매일 밤 창밖에 여자들 보면서 음흉한 마음 품는 것도 다 알고."
"아!! 뭐야! 무슨! 내가 언제?!!"
"마하야."
"..."
"대답해, 마하야."
"누구세요? 저 지금 훈련중인데, 여기 아무나 들어오시면 안 되거든요. 매니저 뭐야. 왜 이렇게 보안 관리를 허술하게 하고 있어?"
"후후후. 녀석. 마하야. 넌 부모님 만나면 무슨 말을 제일 먼저하고 싶어?"
"부모님이라..."
"생각 안 해 봤어?"
"그러게... 뭐라 해야 되지? 생각 안 해 봤는데. 일단 말이 통할까?"
"그럼. 부모님은 전음을 쓰실 테니까."
"그건 또 뭐야?"
"텔레파시 같은 거야. 직접 목소리를 머리로 전달해 주시니까.
굳이 언어를 몰라도 소통하는데 어려움은 없어."
"오오~ 역시."
"그래도 다음에는 곤륜 말을 가르쳐 줄게. 배워 봐. 한자 같은 거 읽을 때도 좋아."
"...허허, 한자라. 자신 없는데."
"내가 너랑 몇 달간 지내면서 느낀 게 있어. 그게 뭔지 알어?"
"나의 성실함? 근성? 인내심?"
"그런 것도 있는데. 이 녀석 이렇게 필사적으로 살고 있었구나, 하는 거."
"뭐, 그런 면이 있지. 나 열심히 산다니까."
"정말. 이렇게까지 하는 줄은 몰랐는데.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그게 나 때문이냐? 형 때문이지..."
"나?"
"그래, 형."
"지금까지 너가 육상을 하거나 스키를 탈 때도 그랬어?"
"비슷해. 따지고 보면 언제나 형 기쁘게 해 주려고 운동한 거야."
"자꾸 거짓말할래."
"진짜라니까!"
"정말?"
"어!! 아테네 결승 때도 그랬고, 토리노 때도. 운룡대팔식 보여주고 싶어서였고."
"흠. 난 너 여자들한테 인기 얻으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에이... 인터뷰에서 떠든 립 서비스를 진심으로 믿으면 안 되지."
물론 그것도 있긴 하지만, 형을 기쁘게 해 주고 싶었던 마음도 분명히 있다. 비율로 따지자면 8:2 정도? 7.8:2.2 정도?
"아버지는."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아버지의 한 마디. 이쯤 되니까 진짜 아버지가 그냥 옆에 있는 거 같네."
"하하하~! 그럼 하지 말까?"
"아니야, 해 줘. 나 아버지 말씀 듣는 거 좋아."
우리 아버지는 무도가이자 목숨을 놓고 겨루는 승부사였다.
그런 분이 말씀하시길, 이기는 승부도, 지는 승부도 다 배우는 것이 있단다.
"그래도 이기는 게 좋지. 이기는 게 남는 것도 많고."
"생이 멎지 않는 한, 모든 건 흐름이 있다."
"그 흐름은 어디로 가는데?"
"그건 너만이 알겠지."
"뭐야. 자기가 질문해 놓고 왜 대답을 나한테 찾어..."
"난 정말이지, 너가 이렇게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고 사는 줄 모르고 있었어. 또 그렇게 많은 이들의 환영을 받는 줄도 잘 몰랐고. 그리고 그 많은 열망을 들어주는 존재인 줄도. 난 정말 몰랐어."
"으하하하! 형, 먼저 한인회 그거 얘기하는 거야?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진짜로 사람들 달려들면 미쳐."
"주변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언제나 결국 너는 너니까. 중심을 잡고 궁극적으로 가고자 하는 길을 잘 돌이켜 봐."
"중심이라..."
"그럼 또 여자 친구랑 헤어지거나 다른 길을 찾지 못하더라도 먼저같이 방황하는 일은 없을 거야."
"좋은 이야기네. 고마워."
그렇구나. 모든 건 과정에 불과하구나.
혜정이와의 이별도 어떻게 보면 날 복싱으로 안내하는 길이었던 건 아닐까?
혜정이가 없었다면, 그렇게 괴로워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민구형이 날 보면서 스트레스 받는 일도 없고. 형의 한 대 콱 쥐어박아도 된다는 말을 오해해 관장님이나 지금의 정 코치님을 만날 일도 없었겠지.
이번 공식전을 지더라도 그것은 내가 가야 할 길의 또 다른 계기가 되어 줄 뿐이다.
져도 좋다.
아버지 말씀대로 이기는 승부도 지는 승부도 다 배울 것이 있으니까.
"좋다."
"뭔가 도움이 됐어?"
"어. 괜찮다고 하긴 했는데, 그래도 속에 작은 불안 같은 게 있었거든. 그게 사라진 거 같애."
"다행이네."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이미 챔피언이다.
육상 세계 신기록 보유자고. 하계 동계 올림픽 메달리스트였다.
돈도 많이 벌었어. 뭐, 어때. 부모님은 언젠가 찾겠지.
나라는 놈의 몸짓은 언제나 나비의 날갯짓이면서, 늘 태풍이 됐고, 빛이 됐으니까.
여자도, 뭐. 이제 와선.
흠흠...
"흐음..."
그래. 사랑도 언젠가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을 편안하게 먹고.
"형, 먼저 들어가라."
"왜? 오늘은 명상만 할 거라면서?"
"원래 그러려고 했는데. 지금 기분 같아선 10라운드도 다이렉트로 뛸 거 같애."
"저기, 마하야. 근데, 너 아까 운룡대팔식 얘기하던데. 그거 아직 기억해?"
"그럼. 하늘을 밟고 뛰진 못해도 기억은 하지. 왜?"
"보여 줘 봐."
"여기서?"
"어."
"그래. 뭐. 어려운 일이라고."
스키를 타면서 익혔던 곤륜의 무공. 운룡대팔식.
그때는 다리가 묶인 상태로 강한 스핀을 주기 위해 펼쳤던 무공이었다.
"이렇게잖아."
"잘하네."
"표정은 아닌데? 왜? 뭔가 이상해? 아니야?"
"아니. 잘 하는 건 맞는데, 마하야. 운룡대팔식이라는 건 본래 경공술이야. 지금 너는 허리만 가지고 용의 움직임을 보여 줬어.
다리를 같이 써 봐."
"다리?"
"다리."
"다리를 같이 쓰라면. 이렇겐가?"
형의 지시대로 움직이자 슥- 삭- 휘릭--!! 하는 바람을 끄는 소리가 발 끝에서 울린다.
"어라...?"
"전부터 옆에서 볼 때, 복싱의 스탭이라는 것에 우리 무공을 더하면, 시합에서 맞는 일이 조금 줄어들지 않을까 싶었거든."
"우와... 우와아~! 형!!"
쉭쉭 지금도 그렇게 느린 몸짓은 아니지만, 어딘가 경직되고 초보 티를 벗어 던지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그것이 고향의 맛이 더해지며 내 몸을 한층 더 자유롭게 만든다.
"우와! 우와~!! 이것 봐!! 주먹이!!"
"하하하~! 먼저 들어간다. 연습하고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