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 (6)
세계인의 축제 올림픽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고대로부터 이어진 가장 화려하고 명성 있는 행사. 올림픽은 국가 프로파간다를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위치에 놓인 무대였다.
오랜 침묵의 시간을 지나 지구촌에 자신의 위치를 표명하려는 중국에게 있어, 2008 베이징 올림픽은 다른 무엇보다도 중대한 선별 과제로 여겨지고 있었다.
자국 수도에서 처음 열리는 국가 행사인만큼 그들은 미국을 넘어 종합 순위 1위를 목표로 잡았다.
이 모든 움직임을 총괄하는 것은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체육총국.
메달이 유력한 종목과 선수의 능력 및 컨디션을 면밀하게 관찰해 온 그들에게 있어, 지구 반대편 이웃 나라 선수의 등장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좋습니다. 이렇게만 준비한다면 올림픽의 성공은 아무 문제없이 진행될 것입니다!!"
"저, 위원장님..."
"네, 뭡니까?"
"그게... 급하게 보고드릴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뭐죠? 말씀하십쇼."
"복싱 쪽에서..."
"복싱이 왜요? 복싱은 주석께서도 관심 있는 종목이라고, 내가 늘 면밀히 챙기라고 했을 텐데요."
"그러니까 그게... 선수 하나가 나왔는데 말이죠..."
복싱엔 11개의 금메달이 걸려 있었다.
특히나 주석이 즐겨 보는 경기라 우수한 성적을 내야만 했었는데.
"구마하면, 한국 선수 아닙니까?"
"그 사람 육상 선수 아니었나요?"
"난 진작에 은퇴했다고 들었는데?"
"그러니까 그게... 작년부터 복싱을 시작했는데요."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구마하의 공식 데뷔전이 연일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전 세계 복싱 팬과 협회들이 그의 다음 행보를 주목하고 있는데.
"이겁니까?"
"네. 한번 보시죠."
"흠, 보라고 한들. 뭐가 진행이 되어야."
"네. 그겁니다. 시작함과 동시에 바로 시합이 끝났습니다."
헤비급의 파워와 경량급 선수의 스피드가 어우러진 경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어딘가 상식과는 결여된다는 느낌을 전해 준다.
그래서도 위원장은 구마하의 존재감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여기 멍청하게 일어서서 기절한 선수는 누군가요?"
"그게, 남미 지역에선 나름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프로 무대에 와서는 아직 큰 효과를 못 봤다는 것 같습니다."
"그럼 문제없겠네요. 싸운 선수가 약하다는 거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혹시나 하는 불안 요소가 있는지라."
"음. 다른 경기 영상은 없나요?"
사람들은 부랴부랴 구마하의 연습경기 영상들을 보여 주었다.
"훗. 형편 없구만."
"실력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봐요. 선수 출신으로 금메달도 목에 걸어 봤다는 사람이 이렇게 보는 눈이 없습니까."
"저... 저도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선 보고를..."
"그리고. 괜찮습니다. 뭐, 어찌 보면 좋은 소식 아닙니까?"
"네? 어떻게 그런 말씀이?"
"우선, 명성 있는 선수가 나온다면 흥행에 도움이 되겠죠. 그리고 그런 명성 있는 선수를 우리 국가의 선수가 이긴다면 더할 나위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 선수라 하더라도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이."
"그게 무슨 소립니까!!"
당에도 깊게 관여되어 있는 위원장에게 있어 의심이란 불충과도 같은 것.
그는 큰소리로 호통을 쳐 반대 의견을 묵살시켰다.
"보자. 우리 헤비급에는 누가 출전합니까?"
"양웨이라고, 마침 지난 도하 아시안게임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둔 선수가 있습니다."
"좋군요. 아주 좋아요!!"
위원장은 상식적인 범위에서 상황을 결론짓는다.
"명성에 지레 겁을 먹어선 안 됩니다. 구마하란 이 선수. 신체적인 능력이 좋다는 건 저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싱은 아니에요."
"위원장님, 혹시나 그러다 메달을 뺏기기라도 한다면..."
"어허, 거 자꾸..."
"죄. 죄송합니다."
"음하하하~!! 됐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중국은 모든 종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다.
특히나, 종합 순위 1위를 달성하기 위해선, 서양인들이 주로 활약해 온 종목의 메달을 가져올 필요성이 있었다.
베이징이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이후. 어떤 이들은 태어나 그 한순간만을 위해 길들어진 자들도 있다.
복싱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승리. 국가와 민족의 영광, 그리고 당의 우수함을 전파하기 위해선 격투기 종목에 있어서도 물러섬과 타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시합이 워낙 짧아서..."
"그렇지. 나도 이것만 봐선 뭐라고 말을 하기가..."
그럼에도 만에 하나라는 위험요소를 덜기 위해 위원장은 회의를 마치고 복싱 관계자들과 가까운 동지들을 모아 구마하의 영상을 면밀히 분석했다.
"구마하 이 친구가 한국 헤비급 챔피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고요."
"한국 헤비급이라 해 봐야, 작고도 작은 그들만의 시합이었겠지."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거둔 성과랍니다."
"흠. 약물을 쓴 건?"
"구마하는 아테네 때부터 도하까지 수많은 도핑 테스트를 받았습니다. 약물에 있어서 정직한 선수라고 할 수 있죠."
"뭐. 아까도 말했지만, 걱정하지 말자고. 보니까 이 상대방 선수도 프로에서 답이 없으니까 아마추어 선수를 상대로 시합을 벌였다면서?"
"하지만 이겼죠. 그것도 본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양웨이의 메달 가능성은?"
"반반입니다."
"그래? 어떻게?"
"러시아와 동구권 선수들 기량이 조금 떨어지는 편이었습니다.
대신 미국이 확실한 우승 후보였죠. 유럽도 있고요."
"미국이라. 그럼 이겨야지."
"심판은 현재 접근 중에 있습니다."
"..."
"그래서 구마하의 등장이 우리의 계획에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심판들은 명성 있는 선수에게 양보하고 들어가는 게 있으니까요."
"가능성이 아주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말이구만."
"그리고 또 하나. 이건 아직 정확하게 확인된 사항은 아니지만..."
"뭔가?"
"...구마하가 북한 출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외로군. 조선 사람이었을 줄이야."
"신분은 별로 주의하지 않으셔도 좋지만. 문제는 구마하와 그 형제가 어릴 적..."
"뭔데 이렇게 뜸을 들이나? 분명하게 말을 하게."
"자치구에서 생활을 했었다 합니다."
"어느 자치구?"
"티베트."
"그건..."
"아시다시피. 현재 나날이 시위가 격해지고 있습니다. 정보국에 물어보니 얼마 전 구마하의 형제라 하는 사람도 자치구를 들렀다 하고요."
"이 친구. 메달을 떠나 각별히 주의해야 하는 내용이 있었군."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국가체육총국은 구마하의 승리를 허락할 수 없다.
"그 정도의 스타라면 한국에서도 각별히 챙길 것이고."
"접근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혹시나 판정에 시비라도 붙었다간 세계의 비난을 들을 수도 있고요."
"알면 알수록 귀찮은 놈이구만. 다른 약점은 없나?"
"하나 있습니다."
"뭔가?"
"..."
"뭐냐고? 왜 말을 안 해?"
"그게. 저도 이만한 선수가 그리 가볍게 행동할 리 없다 싶지만... 토리노에 참가했던 선수들 가운데 그런 말이 돌았다고 합니다."
구마하는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쓴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위원장은 말 그대로 뒤집어지게 웃느라 의자가 뒤로 넘어갈 뻔했다.
"어이고, 어이고."
"조! 조심하십쇼."
"하하하. 음하하하!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나. 세상에 약점 없는 인간은 없는 거라고!"
"무슨 해결책이 있으십니까?"
"그런 문제라면 아주 손쉬운 방법이 있지. 보자. 안전부에 사람을 문의를 해 봐야겠군."
위원장이 모니터를 돌려 구마하를 보며 말한다.
"그 친구, 참으로 영웅일세."
"..."
"영웅에 걸맞는 대우를 해 드려야지. 으하하하하!!"
* * *
"아, 진짜... 에잇 씨... 와, 나 미치겠네..."
"왜 그래? 너?"
"아, 태릉 가기 싫어서..."
"마하야. 이야기 끝난 거잖아. 이제 와선 빠져나갈 수가 없다니까. 대표팀 소집이 걸렸어."
"알아요. 아, 그냥 여기 들어가면 또 아무 것도 못하는데..."
"휴학 신청은 했어?"
"...맞다. 그거 안 했다."
"야, 형이 얘기했지! 한국 오면 바로 학교 가서 휴학 신청부터 하라고. 너 진짜 학고 맞는다니까!!"
"민구 형, 형 뭔가 남미 갔다 와서 저한테 엄청 뭐라고 하시는거 아세요?"
"마윤이 형이 그래도 된다고 했어. 너 씨, 이제 안 봐줘."
"언젠 뭐 봐줬나..."
"암튼. 너 학사처에 전화라도 걸어서 휴학 신청이랑 빨리 다해. 선수촌 입촌이랑 훈련 때문에 늦었다고 하면 그쪽도 이해는 해 줄 거야."
"..."
"아! 안 할 거면 학번 부르든가. 내가 가는 길에 해 줄 테니까!!"
"형, 그냥 지금 신촌으로 가요. 가서 우리 휴학 신청도 하고. 딱 하루만 더 있다가 들어가요."
"야!! 너 진짜 마윤이 형한테 전화한다!! 국가 대표라는 자식이!!"
국가 대표는 사람 아니냐? 국가 대표는 놀지도 말고 운동만 해야 돼?
에잇. 민구 형은 적당히 거리감이 있을 때가 좋았어... 어째 잔소리하는 인간만 하나 더 생긴 기분이야.
"후우... 아이고..."
4월, 태릉 선수촌. 다시 또 이 무시무시한 곳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씨버럴 거, 벚꽃 피면 뭐하냐고. 선수촌에선 딸 치기도 어려운데.
상황이 그렇다는 것도 알고, 입촌을 해야만 한다는 것도 아는데.
근데 내 사정도 조금 들어보라고.
몇 달이냐고, 지금.
마지막 섹스가 벌써 년으로 작년에 있었어.
"미치겠네, 진짜... 와 나, 정말 돌겠네."
하고 싶어 돌겠다. 진짜 미치도록 여자가 그리운 상황이다.
한국에 오자마자 또 시합, 시합이 끝나자 관장님 코치님 민구형과 환송회, 환송회가 끝나니 군바리 새끼들 휴가 맞춰 나왔다고 이틀 삼일 술판, 그거 끝나니 형이 집에 불러서 훈계.
나는 라틴 아메리카를 다녀왔다.
라틴 아메리카 하면 뭐야. 쌈바와 탱고. 음악과 춤. 그리고 섹스잖아!! 축구 뭐? 뭐!!!
심지어 그쪽은 겨울이 여름이라 복장이 꽤나 자유분방했었다.
노브라로 다니는 여자들이 절반이 넘었다. 가슴은 또 어찌나 큰지, 엉덩이는 왜 그렇게 탐스러운지. 그 자연스런 무빙이란. 그것이야말로 남미 대륙의 뜨거운 햇살을 상징하는...
그나마 남미에 있을 땐 형이 회복과 치유를 위해 내 안에 생성되는 음기와 양기를 뽑아라도 썼기에 흥분을 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정말...
흑... 흐윽. 하루만 시간을 좀 달라고... 딱 하루만... 하루면...
"아니, 잠깐만. 여긴 다빈이가 있지?"
저벅저벅 숙소를 향해 가는데 운동장에 땀 흘리는 선수들을 보며 다빈이가 떠올랐다.
다빈이. 최다빈, 그녀가 있었다. 다빈아~ 보고 싶다~~!!
"저, 저기요?"
"어? 어어!! 구마하!!"
"하하. 아 네. 안녕하세요."
"우와. 진짜 복싱으로 온 거 맞아요?"
"네. 맞습니다. 합류가 조금 늦어졌지만."
"이야~~ 우와! 악수 한 번만."
"어우. 별말씀을."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육상 선수들 지금 어디 있느냐 물어보는데.
"네?"
"그러니까 육상 대표 팀은 지금 장소가 부족해서 전원 대한체 대에 가서 훈련 중으로 알고 있어요."
"아... 그래요?"
"저 진짜 구마하 선수 꼭 보고 싶었어요. 저는 하키 팀이에요.
저희 연습할 때도 한번 놀러 오세요."
당신이 여자라면 가겠지...
하지만 남자잖아. 운동 열심히 하세요.
"후우. 육상이 없다라..."
괜찮아. 침착해. 대한체대면 훈련 끝나고 찾아갈 수 있으니까.
연락하고, 약속 잡고, 그리고.
"어?"
"너 뭐야? 나 몰라?"
"뭐가?"
"나 대표 팀 선발 안 됐잖아."
"니가...? 왜?"
"왜는 무슨 왜야. 선발전에서 떨어졌으니까 안 됐겠지!!!"
작년 가을 선발전에서 기량이 떨어지는 바람에 대표 팀에 발탁이 안 된 다빈이. 그런 소식도 모르고 전화를 걸었느니 뭐니 제대로 미운털이 박히고 말았다.
"진짜 짜증나, 너!!"
큰일이네... 다빈이가 날아갔다.
그럼 다음은? 어떡하지? 누가 있지, 나한테?
혜정이한테 전화를 하는 건 말이 안 되고. 그나마 알고 있던 유학생들은 이제 다 갔을 것이고...
"섹스 못 해 돌았구나. 정말로... 미치지 않고서야 지금 여기서 훈련이 아니라 여자를 찾다니..."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나에게 좋은 시간은 없다.
이곳에 들어온 이상 앞으로 내가 흘릴 건 오줌도 아닌 눈물도 아닌 정액은 더더욱 아닌 오직 땀. 땀! 노력과 훈련!!!
"크윽... 역시 그곳밖에는..."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반년 뒤 열리는 세계인의 축제.
꿈의 무대.
베이징 선수촌은 무슨 콘돔을 주려나?
콘돔까지 메이드 인 차이나 써 있진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