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58화 (358/401)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 (7)

"뭐야? 운동하는 사람이 이렇게 먹어도 돼?"

"태주 왔냐. 앉아라."

"진짜 왜 이렇게 밥이 많어? 어이구? 돈까스까지? 형, 식단 조절해야 되는 거 아냐?"

"이게 조절이야. 난 살 빠지면 대표 팀 박탈당해."

"진짜? 왜?"

"체급이 헤비급이니까 그러지."

"헤비급은 밥 많이 먹어야 되는 거야?"

"아, 진짜 말 많네. 그러는 넌 왜 그렇게 밥이 많냐. 지는 불고기를 주걱으로 퍼 온 주제에."

"나는 수영이잖아. 고기는 먹어야 하니까 먹는 거고."

"복싱도 똑같애. 야, 잔소리할 거면 저리 가."

"오~ 짜증까지? 장난 아니게 열심히 하나 보네."

태릉에 들어와 좋은 것 한 가지. 바로 밥 먹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것.

선수촌에 별로 아는 얼굴이 없다보니 주로 수영 선수 김태주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주 만난 사이는 아니어도 그럭저럭 아테네나 도하에서 인연이 이어져 현재로선 제일 가깝게 지내는 것 같다.

"사람들이랑은 좀 어때?"

"아직도 어색하긴 한데, 그래도 짬 대우를 해 줘서 선수 경력으론 막내지만 대표 팀 경력으론 내가 넘버 2가 되더라고. 지금 있는 사람들 중에서."

"메달 개수로 따지면 형이 넘버 1이지. 아니, 태릉 전체를 통해서도 넘버 1인가?"

"야. 밥 먹어. 쓰잘데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올림픽 메달이 몇 개였지? 3갠가? 4갠가?"

"태주야, 진짜 왜 이러냐? 나 힘들어."

"아, 왜? 물어볼 수 있잖아. 누가 그런 걸로 눈치 줘?"

눈치 주는 건 없어도 나름 조심해야 하는 건 있지.

복싱은 88 서울 올림픽에서 마지막 금메달을 받았다.

그것도 메달 중 하나는 미국과 소련의 알력 때문에 벌어진 불미스런 배경이란 아픔이 있다.

그때 이후로 복싱의 인기가 한풀 꺾인 채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는데, 이런 상황에 떡 하니 여기저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놈이 대표 팀이라고 자랑질이나 하고 있음 다들 불편하게 쳐다볼 것 아닌가. 나도 이제 그 정도 염치는 가지고 있다고.

"야, 먹어. 그냥. 맛있네. 팍팍 먹어."

"으음. 다음 주에 지성이 온다는데 같이 족발 먹으러 가자. 육사 앞에 맛있는 가게 있어."

"됐어. 세상에서 제일 밥 잘 주는 곳에 있는데 왜 나가서 돈을써."

"지성이가 산다던데?"

"너 걔 잘 아냐?"

"알지. 같은 학교. 먼저 술도 마셨는데."

"그리고 나 다음 주에 시합 있어서 외국 나가야 돼..."

"또? 이번엔 어디?"

"마닐라에서 국제 아마추어 대회가 있어. 아우. 올림픽 준비하랴 시합 준비하랴, 죽겠다..."

"오오~ 형도 운동을 힘들어 하는구나."

"그럼 나도 힘들지, 난 뭐 안 힘드냐!!"

"이런 걸로 성질을 낸다고...? 스트레스 너무 쌓인 거 아냐?"

이놈 말대로 스트레스가 장난 아닌 상황이었다.

나는 얼마 전까지 남자 넷과 7인용 캠핑카를 타고 이역만리 타국을 떠돌아 다녔는데, 그때보다 지금이 더 힘든 상황인 것 같다.

운동은 재밌어. 힘든 것도 참을 수 있다. 다만, 이곳이 태릉이라는 게 문제다.

여긴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기에 조금의 일탈도 허락되지 않는 엄격함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곳이니까.

무슨 소리냐고? 그냥 딸딸이가 지겹다는 소리야.

아, 여자 만나고 싶다...

"나가고 싶다... 젠장..."

"또 그런다. 지성이나 사람들은 태릉 오고 싶어도 못 오는 상황인데. 공간 없다고."

"너 걔랑 많이 친해?"

"얘기했잖아. 쉬는 날 같이 놀러 다닌다고."

"권지성이? 그 새끼 존나 까칠하지 않나?"

"안 그래. 형들이니까 그러겠지. 우리랑 있을 땐 애 괜찮아."

"사람 진짜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

"지성이가 형 얘기도 많이 해 줬어."

"내 얘기 뭐?"

"좋은 얘기도 있고, 안 좋은 이야기도 있었고."

"이 새끼가 내 뒷담을 까??"

"뒷담은 아니고. 그냥 좋아하는 여자랑 형 때문에 깨졌다고 그러던데."

"하하! 새끼. 그게 왜 나 때문이야. 근데, 그건 뭐 이해할 수 있다."

"왜? 뭔 일이 있었는데?"

"다빈이. 너도 알잖아. 나랑 잠깐 사겼던 거. 지성이가 옛날부터 좋아했다고 그러고."

"아~ 그 누나 알어. 예뻤지."

그래도 태주가 이런 소소한 대화라도 걸어 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진짜 이런 잡담이라도 없으면 내가 사람인지 운동하는 기계인지...

"넌 좀 어떠냐? 기록 괜찮게 나오고 있어?"

"컨디션은 좋은데, 나도 죽을 거 같애. 어제는 그냥 물속에 가라앉고 싶더라니까..."

"수영 선수가 물에 빠지면 그건 그거대로 웃기겠다."

"하하하! 뭐지? 피곤한가? 왜 이런 게 웃기지?"

태주는 지난 도하 아시안 게임에 이어 이번 올림픽에서도 가장 유력한 금메달 후보 중 하나였다. 언론의 관심도 높고 수영 대표팀의 기대도 엄청난 상황이다.

4년 전 긴장감 때문에 부정 실격당한 녀석이 이렇게 여유 넘치는 선수가 되다니. 만만치 않은 고통스런 시간을 이겨내 왔겠지.

"족발은 다음에."

"그래. 가."

"너도 물 조심하고."

"하하하! 으하하하! 아 나도 지쳤나? 왜 웃기지?"

올림픽 날짜가 다가올수록 다들 미쳐가는 거 같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4년마다 한 번 오는 기회가 흔치 않으니까 모두가 최선을 다하는 거지.

나도 덩달아 미친다.

운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샌드백을 붙잡고 펀치볼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두드리기 시작했다.

"훅! 훅!!"

"저런... 어이, 구마하!"

"네!! 코치님!"

"너 지금 땀 너무 흘리고 있는 거 아냐?"

"으음. 몸무게 한번 재 볼까요?"

복싱. 정말 미친 운동이 아닐 수 없다.

아까 그렇게 먹었는데 또 살이 빠져 있었다.

체중 관리 진짜 빡시게 하는데, 우와...

"87kg라..."

"잘해라. 넌 헤비급 대표 선수야."

"네."

"아이고. 이놈 운동량을 줄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쉬라고 하자니 아직 할 건 많고..."

"코치님, 그냥 기름을 마셔 볼까요?"

"할 수 있겠냐? 지금도 힘들어하는 거 같은데."

"괜찮습니다. 외국에선 일부러 뿌려 먹기도 하는데요, 뭘."

아무튼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한다.

태릉이고 자시고를 떠나 나에게 주어진 태극마크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 * *

"아우 느끼해. 어우 씨, 부대껴라..."

저녁 먹고 소화도 시킬 겸 선수촌을 돌아다녔다.

숲이 많은 곳이라 그런가, 여름의 무더움도 태릉의 밤공기를 이겨 낼 수 없는 것 같다. 여기저기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걷다 보니 2년 전 도하 때가 생각났다.

"그래도 다 같이 있을 때가 재밌긴 했지."

운동 끝나면 동민이, 진수, 진운이 다 같이 산책 겸 여기저기 할 일 없이 돌아다니던 시간이 그리워지는 것 같다.

동갑내기 친구들이라 그런가, 별로 하는 거 없어도 같이 있는 그 자체가 좋았는데.

마침 태주와 지성이가 가깝다는 말에 전화기를 꺼내 보았다.

오랜만인데 어색하면 어쩌지? 걱정이 됐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빈이가 쪼르륵 내 욕을 하고 난 다음인지라 오랜만이고 자시고 별다른 거리감이 느껴지질 않았다.

"걘 꼭 그런 얘길 너한테 하더라."

"그러니까 왜 또 연락을 했어... 사람 피곤해지게."

"왜 했겠냐? 나도 보고 싶으니까 그랬지."

"형은 여자 필요해서 누나 찾는 거 아니야?"

"새끼야, 니가 뭘 안다고."

"그러지 말고 그냥 사귀라니까."

"야, 다빈이가 지 입으로 나 찼다는 소리는 안 하디?"

"그런 말은 없던데."

"그럼 다음에 한번 물어 봐. 도하에서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아. 그때 얘기는 하지 말라고..."

"하하하! 이 새끼!"

"진짜 잔인한 거 아니냐? 나한테 그런 짓까지 시켜 놓고..."

"뭐가 인마. 다 지난 일을 가지고."

"참고로 나 지금 여자 친구 사귀고 있어."

"오~ 누구?"

"탁구 선수 송하진. 형은 누군지 몰라."

"송하진. 송하진이면. 아아~~ 혹시 그?"

"아 형! 진짜 아는 척 하지 마. 나 진심이야. 형 하진이 건드리면 나 진지하게 가만히 안 있어."

"장난이지, 새끼야. 누군지도 몰라. 혼자 지랄이야."

송하진. 알어. 잘 알지. 그나마 지금 태릉에서 제일 눈길을 끄는 존재가 있다면 그게 송하진인데 내가 왜 몰라.

운동하는 여자애들 다 그렇지만, 송하진도 머리는 단발에 화장도 잘 안 하는 수수한 외모지만, 키도 적당하고 무엇보다 몸선이 예쁘다. 본판도 괜찮아. 화장하면 엄청 예뻐질 애지.

언제 인사라도 한번 해 볼까 했는데... 하필 아는 놈이랑 사귀다니. 쩝. 아쉽게 됐군.

"여자 친구 사겼구나. 축하한다."

"아무도 몰라. 그쪽 코치님도 모르고,"

"그런 비밀스런 관계를 나한테 밝힌다고? 너, 보기보다 나 많이 의지하는구나."

"하하... 이게 의지일까? 경고일까?"

"만약 저쪽이 먼저 나한테 인사하는 건?"

"아, 형. 진짜..."

"하하하! 알았다고. 넌 요즘 어떠냐?"

"난 잘 있지."

"기록은?"

"먼저랑 비슷해."

"근데 왜 다들 연락들이 없어?"

"음. 그건... 뭐."

먼저 대표 팀을 은퇴하면서 일부러 애들과 거리를 둔 것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연락이 없을 거라고는.

지성이를 통해 친구들 소식을 들었다.

단거리의 이동민과 김진수, 중거리의 진운이. 7종 경기의 다빈이뿐만 아니라 육상의 황금세대라 불렸던 동년배 친구들이 전부 올림픽 대표 팀에 합류하지 않았단다.

동민이는 올 시즌 시작과 동시에 부상이 왔다고 전해 들었고, 진운이는 예전부터 국제 대회 금메달 따면 운동을 그만둔다고 했었다.

놀라운 건 진수였다. 대한민국 200m 최강자 중 한 사람인 김진수가 실력으로 졌단다.

"진수가? 누구한테?"

"형, 요즘 다 잘 해. 고등부가 10초 초반이 평균이고. 상무 갔다 온 형들은 피지컬 장난 아니야. 20대 후반에 9초 96 나온 선수도 있어."

"우와~ 하하하! 진짜로? 기쁜 소식이네."

"육상에도 관심 좀 가져. 복싱 한다고 진짜 인연 끊은 거야?"

"야, 인마. 나도 정신없었다니까."

"형은 좀 어때?"

"얘기했잖아. 정신없다고..."

"뉴스 보니까 다들 엄청 기대하는 거 같던데. 잘 한다고."

"그래서 정신없게 열심히 하고 있어. 갑자기 끼어들어서 왜 민폐냐 소리 안 들으려고."

"마하 형, 애초에 은퇴한 사람이 복싱은 왜 시작했어? 스키도 아니고?"

"으음. 집안 사정이 있어서."

"집안 사정이 뭐길래 종목을 바꿔?"

따지고 보면 나랑 동서지간이 되는 녀석이 아니던가. 가족 형제라 생각하고 솔직한 사정을 들려주었다.

"형이... 탈북자였어?"

"몰라. 그랬다고 하더라고. 나도 고2 때 알았어."

"부모님이... 그래서 일부러 이슈를 만들었구나..."

"더 좀 뭔가 확-! 하고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싶어서."

"그럼, 더 형들한테 전화해서 오해를 풀어. 진수 형이나 동민이 형은 지금 형이 돈독 오른 줄 알고 일부러 쇼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하하! 새끼들. 괜찮아. 나중에 결과 나오고 얘기하면 돼. 이놈들이 나랑 그렇게 멀어질 사이도 아니니까."

"나도 이야기는 전해 놓을게. 부모님 꼭 찾으면 좋겠다."

"그럼. 반드시 찾아야지."

맞다. 그랬지. 혼동해선 안 돼. 내가 복싱을 진지하게 시작한건 다른 이유가 아니야. 아버지 어머니를 찾기 위한 과정이라고.

복싱은 나의 어떤 목표 달성과 성취감을 위한 게 아니야.

"후우. 아닌데. 아닌 걸 알면서도..."

이 미친 승부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상 훈련이 시작되고 링 위에 올라가면 물러서고 싶지 않으니까.

난 어쩔 수 없이 선수가 내 천직인 걸까?

아이고, 내일도 운동하면 또 살 빠질 건데 얼마나 먹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그동안 먹고 싼 똥이 아까워서라도 끝까지 가야지.

다음 날 아침.

새벽부터 불암산을 달리고 어제와 똑같이 접시 다섯 그릇을 깔아놓고 밥을 먹었다.

태주 녀석이 지나가다가 아침부터 그렇게 먹냐고 놀려 대는데도 무시하고 식사를 하는데, 한 무리의 여성들이 내 앞에 자리를 잡는다.

"음...?"

"안녕하세요. 저희 여기 앉아도 될까요?"

"아 네. 그... 그럼요."

뭐... 뭐지? 봤을 땐 체조 선수들 같은데?

다른 테이블에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왜 여길?

"아.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 그냥 너무 배고파서."

"네? 그게 무슨..."

"그냥 드시는 것만 보고 있을게요."

"...제가 밥 먹는 걸 본다고요?"

"네. 그냥 대리만족이라도 느끼고 싶어서..."

"죄송해요. 저희도 이러고 싶진 않은데, 매번 볼 때마다 너무 잘 드시니까."

"아. 저, 그건 저기... 저도 체중을 유지해야 돼서..."

"알아요! 저희도! 이야기는 들었어요!!"

"운동하실 때마다 살이 빠지신다니 진짜 대단하세요."

"그건 그거대로 힘드시죠?"

"..."

"진짜 대단하세요. 육상 스키에 이어서 복싱까지."

"하하~ 그냥 어쩌다 보니까."

"저희 여기 있어도 되는 거죠?"

"그!! 그럼요!! 혹시 종목이?"

"저희 리듬체조요."

누구야? 어떤 새끼가 태릉이 싫다고 했었어. 누가 여기가 지옥이라고 했냐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태릉은 천국이야.

태릉 선수촌 만세!! 국민 체육 진흥 공단 영원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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