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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기로 가버렷-361화 (361/401)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 (10)

"오빠, 오빠는 그럼 진짜로 은재가 사귀자면 사귀실 거예요?"

"스무살도 안 된 애랑 무슨 연애를 해."

"에이. 그렇게 말하면 재미 없죠."

"그럼 이런 건 어때요? 어린 거 빼면은? 내가 스무 살 넘었다."

"너 지금 만나는 사람 먼저 정리하고 이야기를 해야지. 양다리는 좀 그렇잖아."

"아! 그 오빤 사귀는 거 아니라니까요!!"

"그러지 마. 니 남자 친구가 들으면 서운해 한다."

"아, 오빠!?"

"하하하~ 이 오빠 완전 웃겨."

"조용히 해 김지수! 니가 자꾸 이상한 소리 하니까 그러잖아."

숙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와도 우리의 수다는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얘네도 내가 완전히 싫지는 않으니까 이렇게 쫄래쫄래 따라와서 이야기 하겠지?

무엇보다 나로선 이 시간이 더 없이 소중하고 행복하게 느껴지는 게, 처음으로 여자들과 격정적인 행위가 없어도 좋은 기분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순간이었다.

지수와 은재. 정말 좋은 친구들을 사귄 거 같다.

물론 얼굴도 예쁘고.

"고맙습니다."

"지수는?"

"저는 이거요."

"눌러."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음료수 하나 가지고 뭘. 근데 니네 탄산은 마셔도 되는 거야?"

"원래는 안 되는데, 저희라고 막 아무것도 못 먹는 건 아니니까요."

"그날은 바로 체중 검사가 있었어요. 코치님들 몰래몰래 먹긴해요."

"그래, 먹어. 안 그럼 죽어. 살기위해 먹는 건 어쩔 수 없잖아.

뭐 먹고 싶은 거 있음 얘기해. 오빠가 사서 배달 보내 줄게."

"진짜요?"

"숙소에서 배달 받을 수 있어요?"

"아, 니네들 진짜... 너네 방 어디야? 창문 붙은 방 없어?"

운동을 시작하게 된 배경. 올림픽에서 느꼈던 성취감의 순간들.

처음엔 두 사람 다 나라는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면, 어느 순간부턴 나보다 자기들 운동했던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없고 주로 난 들어 주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그래? 진짜 어릴 때부터 했구나."

"보통 그래요. 오빠가 특이한 거죠. 몇 살 때 시작했죠? 고3이었나?"

"고2. 맞어. 친구들 봐도 내가 늦은 거긴 해."

"진짜 어떻게 그렇게 해요...? 이런 얘기 들으면 메달은 운동 오래 했다고 되는 건 아닌 거 같애."

"아이고, 은재야.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현실이 그렇잖아요."

"현실이 아무리 그래도."

"그래. 오빠도 노력 많이 했겠지. 우리 그렇게는 말하지 말자."

"아는데. 하아... 그냥 되는 사람들이 있는 건가 싶어서..."

"그럼 둘 다 경력이 얼마나 되는 거지? 10년은 훌쩍 넘었고."

"저는 이제 9년? 지수는 저보다 조금 더 오래 됐어요."

"잘 모르겠어요. 유치원 가기 전부터 무용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리듬체조로 넘어와서."

"그분은? 주영이 누나."

"언니는 대표 팀 가운데 최고참인데, 운동 경력은 그렇게 길지 않아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시작했나? 그렇고. 또 부상 있어서 한 3년 쉬다가 돌아왔으니까."

"부상이 있었어? 나이로 보면 이번 올림픽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네. 좋은 결과 있으면 좋겠다. 그분은 플레잉코치 같은 거지?"

"네. 근데 선생님들이랑 다르게 많이 봐주세요."

"코치님들 모르게 음식도 챙겨 주고, 사우나에서 물도 주고. 현역이라 그러나 확실히 큰 언니 같은 느낌이 있어요. 주영 언니 좋아요."

"진짜 세 사람 다 좋은 결과 있으면 좋겠다."

"오빠 그거 아세요? 리듬체조는 아직 아시안게임에서도 메달없는 거?"

"진짜? 아시안 게임도?"

"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메달 어려울 걸요. 주영 언니가 국내에선 제일 잘해도 러시아 이쪽 애들은 차원이 다른 연기를 펼치니까..."

"중국도 잘하지?"

"거기도 있죠."

"미국도 있고... 일본도 무시할 수 없고. 유럽 뭐..."

"흐음. 라이벌이 많네."

예전 같으면 이런 대화 끝에 메달 아무 의미 없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승패에 따라 기분이 뒤집히는 걸 너무 잘 아니까.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있게 된다.

이런 것도 내가 조금은 성장했다는 뜻일까?

"대학은 어디로 갈 거야? 둘 다 내년에 고3이잖아."

"아직 모르겠어요. 세종대 갈까, 다른 데를 갈까."

"세종대는 왜? 너네는 거기가 유명해?"

"코치 선생님들이 거진 세종대 출신이세요. 현역 선수들도 많고."

"오오~ 그래? 세종대가? 거기 건대랑 바로 붙어있지 않나?"

"맞아요. 왜요?"

"아니. 그냥."

젠장. 역시 그때 연대를 갈 게 아니라 건대를 갔어야 했어. 그럼 이대 성악과가 아닌 세종대 리듬체조가... 한수빈이 아닌 허주영이...

"오빠 연세대죠. 거기는 어때요? 좋아요?"

"우리 학교도 좋지. 근데 난 학교 거의 안 가서. 지금도 4학년에 4번째 휴학 중이고."

"진짜요? 사람들 오빠 되게 열심히 산다고 하던데?"

"맞아. 해외 나가도 수업 다 빼지 않고 듣는다고."

"하하하하!! 누가? 야, 나 교수님들 찾아가서 제발 D만 주시라고 사정하고 다녀. 안 그럼 학사 경고 먹어서."

"정말요? 오빠 영어 잘 하시잖아요."

"그것만 어떻게 조금 익힌 거지. 근데 나도 발음 구리다고 말많잖아."

"말만 통하면 발음 따위야..."

"근데 정말 알면 알수록 마하 오빠 의외지 않냐?"

"그러니까."

"왜? 대체 날 어떻게 봤길래?"

"소문이랑 완전 다른 사람 같애요."

"아니 다들 나를 어떻게 생각하길래..."

"뭔가 도도하게 자기 운동만 파는 사람?"

"음. 별로 사교성 없는 완벽 추구자? 말 걸어도 대답만 하는 사람?"

"지금은?"

"조금 허술해요."

"은근 수다쟁이?"

"하하하... 이거 뭐 어느 쪽을 좋아해야 하는지..."

결과가 빚어낸 환상과 실물의 괴리감 때문에라도 애들이 나에 대한 호감이 떨어지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그런 건 없는 것 같다.

"전 이런 모습이 더 좋은 거 같아요. 인간적이기도 하고."

"와 진짜... 그놈의 인터뷰들이 참... 다음부터 기자들 만나면 일부러 농담이라도 하고 커피라도 마시고 그래야 되는 건지..."

"오~오~ 이미지 관리."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나도 좀 그렇게 해 보고 싶다..."

"얘들아. 이런 건 진짜 쓸모없고, 운동 잘하면 돼. 아무 의미 없어."

유명해지면 좋은 게 많지만, 그만큼 힘든 것도 많다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지만, 둘 다 성향을 봤을 땐 고리타분한 얘기엔 관심 없을 거 같아 말을 삼킨다.

"보자. 슬슬 들어가야지. 잘 시간 지났다."

"맞다, 오빠. 저 부탁 하나 드려도 돼요?"

"뭐?"

"호... 혹시요. 전화번호 알려 주실 수 있으세요?"

그!! 그럼 물론이지!!

라고 너무 대놓고 좋아하면 겨우 쌓아 올린 이미지가 무너지겠지?

그러니까 여기선 최대한 근엄하고 쿨하게.

"그래."

"우와! 정말요?! 불러 주세요!"

"오. 오빠. 그 그럼 저. 저도...?"

"넌 남자 친구 괜찮겠어?"

"야! 김지수!! 너 진짜 죽여 버려!!"

"우와. 야. 오빠 핸드폰 좋다. 이거 그거죠? 스마트 폰."

"맞어. 먼저 외국 갔다가 샀어."

"와... 나도 이런 거 갖고 싶다."

"봐 봐. 우와. 이거 인터넷 돼요?"

"베이징 가서 보자. 하나 사 줄게."

"저희한테요? 이걸요? 왜요?"

"오빠, 이거 비싸요."

"얼마 안 해. 내가 그 정도 돈도 없나."

"오오... 역시 부자."

"근데 마하 오빠랑 우리가 친구? 헤헤. 친구라."

"왜? 좋아?"

"좋죠. 친구들한테 자랑할 수 있고."

"그럼 어디 가서 우리 오빠 안다고 말해도 돼요?"

"그럼. 얼마든지."

아이들과 번호를 나눴다. 핸드폰을 꺼낸 김에 같이 사진도 찍었다.

애들은 미니홈피에 올린다고 하는데, 원하는 것 얼마든지 해도 된다고 말했다.

"왜 이렇게 잘해 주시지?"

"그러니까. 조금 무서운데?"

"야. 니네가 운동 힘들다면서!! 친절하게 해 줘도 난리냐."

"그래도... 우린 오빠 잘 모르는데..."

"그럼. 핸드폰 선물은 없던 일로 해."

"아. 그건 아니죠."

"맞아요. 주신다고 한 건 주셔야죠..."

"하하하! 얘들 진짜."

지금까진 연상이나 동갑만 상대해 봤는데, 지수와 은재를 알고 나니 사람들이 왜 오빠 소리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뭔가 그런 게 있다. 둘 다 미성년자고 가만 보면 나한테 하나 도움 될 거 없는 애들이지만, 그런데도 그냥 이 두 사람이 더 예뻐지고 좋은 것만 경험하게 해 주고 싶다.

행복하면 좋겠어. 존재 자체가 감사한 애들이라고 했잖아. 함께 있는 자체가 그냥 힐링이라고.

"근데, 니네들 연락하면 막 다 씹는 거 아니냐."

"저희가요? 에이. 오빠가 그러시겠죠."

"난 문자 잘 안 하긴 해. 전화가 낫지."

"음. 전화라."

"야. 주영 언니 전화 온다. 우리도 이제 가야 해."

"오빠, 내일도 나오세요?"

"그럼. 근데 얘들아, 저기 나도 가기 전에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네."

"뭐요?"

처음으로 아무 연애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편안한 여동생들을 만났기에 예전부터 궁금했던 걸 물어본다.

늘 확신이 안 섰지만, 지금은 당사자들이 얘기를 하니까.

내가 진짜로 여자들한테 인기가 있나??

"선수들이"

"선수? 어떤 선수요?"

"음. 그러니까. 여자 선수들이 내 얘기를 많이 해?"

"..."

"...네? 오빠 뭐라고요?"

"아니. 너네도 아까 그러고. 뭐 숙소에서 나 지켜보고 있다 그런다고들 하고. 그리고 나도 들은 얘기가 있는 게, 뭐 나랑 있으면 좋은 기운을 받았다느니 뭐니 그런 건 좀 내 입장에서 부담 되니까."

됐지? 이렇게 하면 잘 둘러댄 거 맞지?

늘 조금 궁금했었다.

태윤이도 그러고, 혜정이도 학생 때 그랬다고들 하고. 지금 대학에서도 주변에선 내 얘기 많이 한다고 하는데, 난 뭐 체감되는 게 없으니까.

근데 선수촌에서도? 진짜? 여자들이 날 좋아한다고? 뭔가 긴가 민가해서리.

"오빠. 설마...?"

"야. 잠깐만! 내가 얘기할게."

은재가 나를 딱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물었다.

"오빠. 오빠 본인이 인기 있는 거 모르세요?"

"알지. 나도 팬들이 있는데. 고마운 분들이고."

"그런 거 말고요. 이성적으로."

역시. 현직 여고생들이라 그런가, 내 딴에 꾸미고 뭐하고 해도 본심이 다 들키는구나...

"허억. 이 오빠 반응 보니까 진짠가 봐...?"

"정말이세요? 진짜 모르세요?"

"아니. 저기 얘들아. 그러니까... 내가 막 여자들한테 내 인기를 실감하고 싶다는 게 아니라..."

"헉. 야, 어떡해..."

"우와... 진짜 대박이다. 정말 그걸 모르신다고요?"

어... 어떻게까지 할 문젠가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아니, 어떻게 그걸 모르지?"

"오빠 인기 장난 아닌데."

"뭐 다들 그렇다고는 하는데... 정작 난 누가 다가오거나 하지를 않으니까."

"그거는! 그러니까!!"

"못 다가가죠!! 어떻게 다가가요!!"

뭐지? 얘네 왜 이렇게 흥분해서 그러지?

"아 씨. 어떡하지... 야 우리 조금 더 있다 가면 안 돼?"

"어려울 거 같은데. 지금도 주영 언니 문자 왔어. 어딨냐고."

"오빠, 내일도 나오셔야 돼요. 꼭이요!!"

"진짜 약속이에요! 내일 꼭 오세요!"

"허허. 허허허..."

다음 날, 이상하게 들뜨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다시 산책길을 찾아왔다.

"마하 씨!"

"어우. 오늘은 주영이 누나도 나오셨네..."

"본인이 인기 있는 걸 모른다고요?"

단순하게 던진 질문이 나와 리듬체조 선수 들간의 끈끈한 유대를 만들어 준다.

"어떻게 그렇게 되지? 진짜 모르셨어요?"

"모르죠. 사람들 뭐 딱히 아는 척도 안 하고."

"그거는... 그냥 다가가기엔 너무 좀 그런 존재니까..."

"왜요? 제가 어때서?"

"이것 봐요. 이 오빠 모른다니까."

"우와... 생각이랑 다르다곤 느꼈지만. 아무튼, 마하 씨. 이렇게 얘기해 줄게요. 지금 선수촌에 애인 없는 여자 선수들 있죠."

"네."

"다 지금 마하 씨 보면서 힘든 거 견디고 있어요."

어우 씨. 그건 좀 무서운데?

"근데, 흠. 그럼 뭐 인사라도 걸든가..."

"그거야 오빠가 구마하니까 그러죠."

"맞아요. 누가 쉽게 다가가요!"

"너네는 왔잖아. 심지어 밥 먹는 거 보여 달라고 그러고."

"저흰 그날 정말 죽기 직전이니까."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내가 조금 용기 낸 건 있어."

"언니가요?"

"응. 이렇게 죽을 거. 구마하랑 밥 한 끼는 먹고 가자고 생각해서."

"하하하. 진짜요?"

"정말이에요. 저희 그날 그러고 주변 사람들한테 얼마나 시달렸는데요."

오~ 그래? 아쉽네 주영이 누나면... 에잇, 남자 친구만 없음 딱인데...

"왜지? 나 별 거 없는데?"

"뭔가. 이런 게 더 오빠에 관한 소문을 만든 거 아닐까요?"

"어떤 의미로?"

"그... 그러니까. 본인이 한 일들을 별로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고."

"그렇게 말하면서 지금도 또 새로운 종목으로 새로운 도전을 하고 계시고."

"그것도 있는데 여자 선수들은 아무래도 마하 씨가..."

"네. 말씀하세요."

"음. 아무래도 뭔가 좀 그런 기운이 있다고들 믿고 있어서."

"무슨 기운요?"

"뭔가. 잘 되게 해 주는 기운이랄까.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뭔지 알죠? 미신이라고 할 수도 있고, 징크스라고 할 수도 있는데. 잘되는 사람들 옆에 잘 되는 사람들이 모이니까."

"어... 더 모르겠는데..."

"일단, 육상 대표 팀도 잘 됐고. 그리고. 그분. 사쿠라."

"사쿠라? 사쿠라 아야요?"

"네. 피겨 선수라는 분. 그분도. 동양인 최초 피겨 금메달에."

"그 언니도 있잖아요. 빅토리아. 테니스."

"허허. 허허허허~"

"쉽게 못 다가가요. 근데 다들 엄청 친해지고 싶어들 하고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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