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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기로 가버렷-365화 (365/401)

Monster (3)

사람들이 여기저기 사진 찍고 가이드 설명을 들을 때, 나는 주영이 누나와 스리슬쩍 빠져나와 이야기를 나눴다.

"누나, 몸은 좀 어때?"

"괜찮아. 허리 아픈 것도 많이 풀렸고."

"내가 스트레칭 하란 대로 하니까 시원하지?"

"모르겠어. 시원한 거 같기도 하고 별 느낌 없는 거 같던데."

"내가 마사지해 주면 되게 시원할 건데."

"어머... 뭐야? 니가 날 왜 만져?"

"만지려고 만지냐. 마사지잖아. 어디까지나 재활. 오해하지 말라고."

주영이 누나는 나보다 한 살 많은 85년 송아지였다.

은재나 지수같이 어릴 때 대표 팀에 발탁된 선수였는데, 부상으로 열아홉에 은퇴하고 3년간 공백기를 지나 다시 선수로 복귀해 이번 대표 팀에 승선했다.

예쁜 사람이다. 조금 한수빈을 닮은 거 같기도 하고. 수수해 보이면서 화장이 더해지면 미모가 오르는 타입이랄까.

몸매는 뭐. 리듬체존데 말할 것도 없지.

진짜 남자 친구 누군지... 참 부러운 인간이다...

"너 이따가 애들이랑 쇼핑 간다고 했다며?"

"어. 먼저 핸드폰 사 주기로 해서. 그거 사려고."

"그런 걸 왜 사 줘. 이번에 후원으로 다 받았는데."

"그건 그냥 피처폰이고. 애들이 스마트 폰 갖고 싶다고 하잖아."

"그런다고 사 줘?"

"뭐 어때. 얼마나 한다고. 누나도 사 줄까?"

"너... 혹시."

"뭐? 말해. 괜찮아."

"마하야. 너 혹시 애들 좋아해?"

"하하하! 쟤들이 날 좋아하지. 내가 무슨 애들 데리고."

"근데 왜 이렇게 잘해 줘?"

"아 진짜 오해 많으시네. 그냥 동생들이니까 그러는 거야. 잘해 주고 싶고."

"흠."

"누나가 아는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보다 인간관계가 엄청 좁아. 저런 여동생들도 처음이고. 그냥 잘해 주고 싶어."

"뭐. 남자들 그런 마음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러는 누나도 아까 보니까 태권도 선수들이랑 되게 친하게 얘기하고 사진 찍고 다 하더만. 형들인 거 같던데."

"오빠들이잖아. 시드니 때 같이 대표 팀 생활했던 사람들이고."

"그것 봐. 자기도 그러면서 괜히 나만 이상하게 만들어."

"아니. 이성적으로 좋아하면 용기 있게 다가가라고. 난 그런 말해 주고 싶어서."

"은재와 지수를 좋아하냐라? 좋아하지. 싫어할 수 있나. 둘 다 예쁘고 착하고 나 잘 따르는데. 근데 이성적으로? 그건 좀..."

"왜? 애들이 어려서?"

"어. 미성년자랑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하하? 너 은근? 이런 성격이구나?"

너무 그러지 말라고. 지금은 누나도 나한테 무서운 존재야.

남자 친구가 있든 뭐든, 그런 얼굴로 나한테 의외라는 듯 보면서 웃지 마. 미치겠으니까.

머릿속에선 주영이 누나랑 지금 어디 공중화장실이고 어디고 숨어들어 가 바지부터 벗기고 있다.

와 돌겠다. 몇 달을 제대로 못 하니 이렇게까지 되는구나.

평정심. 무념. 명경지수다. 명경지수를...

"얘. 은근 도발적이네."

"그냥 잘해 주고 싶은 사람들 있잖아. 순수하게 옆에 두고 싶은 동생 같은 애들. 나한텐 은재랑 지수가 그런 애들이라고. 저 형들도 누나 그렇게 생각할걸?"

"아니던데."

"음?"

"아까 나랑 친하게 얘기하던 태권도 오빠는 몇 년 전에 나한테 고백했었던 사람이고.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8년 전 시드니 때 나 좋아하는 사람들 진짜 많았어."

"오오... 허허허... 뭐. 일리 있는 자신감이다만..."

"아니야. 그냥. 마음이 있으면 당당히 다가가는 게 좋다고 느껴서."

"누나. 왜 이래? 어색하게."

"애들 생각하니까 그러지."

"그래 봐야 미자들. 뉴스에 다른 이름으로 나올 일 있나."

"야. 그런 것만 생각하지 말고."

"그리고. 누나가 내 동생이면 누나도 아마 똑같이 대해 줬을 거야."

"난 미성년자가 아닌데?"

어쩌라고. 뭐 어쩌라는 건데. 그런 말을 지금 왜 하는데. 남자 친구도 있는 사람이.

아니 설마...

그래. 유이 누나도 그랬었잖아.

가정 있는 여자들이라고 다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야.

주영이 누나도 어쨌든 운동 선순데. 건강한 욕구가...

"음? 왜?"

"..."

약속을 잡아 볼까? 아니. 지금 내가 너무 과민하게 생각하나?

이 누나 입장에선 친한 동생들이 한 사람을 놓고 대립하는 거 같으니까 나한테 정리해라 이런 거 아닌가?

대화만 나눠도 몸이 반응을 하고 있다.

여자 목소리만 들어도 리틀 구마하가 지 부르는 줄 착각에 빠지는 상황.

아. 그냥 주영이 누나도 다른 데로 갔으면.

"가게?"

"어. 누나는 여기 와 봤어?"

"예전에. 가족 여행으로."

"그래?"

"응. 그리고 난 별로 이런 데 보는 걸 안 좋아해서."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는데, 쫄래쫄래 따라오며 이야기를 한다.

저리 좀 가!! 라고 할 수도 없어 그냥 둘이 걸으면서 말했다.

"자금성이라. 여기가 거기지? 마지막 황제 나온 데."

"몰라. 나도. 뭐 봐도 잘 모르겠어. 건물이네 오래 됐네 이 정도만 느껴지지."

"이런 데 끌고 와서 생색낼 거면 차라리 자유 시간을 더 주는 게 낫지 않냐? 밤에 음악 소리 나는 데 가는 게 더 재밌을 거 같던데."

태릉에서도 느꼈지만, 주영이 누나랑은 은근 코드가 잘 맞는 거 같다.

우선 성인이고, 내가 좋아하는 리듬체조고.

얼굴도 예쁘고 몸매는 말 할 것도 없는데.

지금도 봐 봐. 무엇보다 대화가 자연스럽잖아.

알고 지낸 시간이 엄청 짧은데 이렇게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 흔치 않다고.

"어? 마하야. 저기 가 보자."

"그래."

그래서 마음이 쓰리다.

그냥 이 사람이 내 여자 친구였다면...

난 지성이같이 숨기지 않어. 당당하게 사귀지.

그래서 태릉에서도. 매일 밤마다 산책하면서...

숲에 들어가고 산에 들어가서...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다리 한 쪽 들고.

리듬체조니까 몸도 유연할 거 아냐.

"어후..."

"왜 그래?"

"아니. 그냥. 와, 유네스코 문화유산. 우와..."

"하하! 야, 뭐야. 억지로 그런 거 하지 마."

안되겠어. 임자 있는 여자를 자꾸 상대하니까 가슴만 더 욱신거려.

젠장, 쑤시는 건 아랫동네로 끝내자고.

이대로 가다간 내 감정에 치여서 괜히 그런 마음도 없는데 이 누나가 진짜 좋아질 거 같애.

"에이 별로다. 누나, 사람들한테 가라. 난 다시 아까 거기 가서 기다릴 테니까."

"야. 같이 돌자."

"가서 쉴래.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뭔가 짜증난 거 같은데?"

"하하하! 주영이 누나. 나 솔직히 말해도 돼?"

"그럼. 얼마든지."

"누나도 말했지만, 올림픽까지 와서 무슨 단체 관광이냐. 그것도 한국 선수들끼리. 선수촌 가면 외국인들 얼마나 많고, 파티가 얼마나 많은데. 사람들 알고 이러면 좋잖아."

"그건. 니가 좀 이해해 줘야 해."

"왜?"

"다들 이런 게 처음이니까."

"무슨 소리야? 올림픽은 대부분 처음이지."

"올림픽 말고 이런 거. 단체 관광이나 다 같이 어디 가는 거 있잖아. 아까 누가 지나가다가 그러던데. 꼭 수학여행 온 거 같다고 하던데."

"수학여행은 누구나 가지. 집안 사정 있는 애들 빼고."

"넌 갔었어?"

"응. 가선 별 거 없이 구석에 찌그러져 잠만 잤지만."

"우리는 거의 없어. 지수랑 은재는 소풍도 못 가 봤을 걸?"

"왜?"

"왜긴 왜야, 선수니까 그러지."

누나가 말하길, 선수 출신 학생들은 수학여행이나 수련회 같은 학생이면 대부분 경험해 보는 평범한 이벤트를 누리지 못한단다.

"시합 때문에?"

"맞어. 꼭 그럴 때 시합이 있어. 그리고 시합 없어도 훈련해야 되고. 놀러 갔다 몸이라도 상하면 안되니까 또 못 가게도 많이들하고."

"좀 충격이네. 그정도라고?"

"그러니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다들 재밌어 하잖아."

친구들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동민이였지. 아니 진수였나? 다 같이 전주에서 훈련하고 해외가고 이럴 때 유독 재밌어 하길래 넌 뭐가 그렇게 재밌냐? 했더니, 이런 게 처음이라고 했었다.

어려서부터 운동했던 사람들은 기본적인 걸 채우지 못하며 성장한다.

나는 부모님이 없어서 나만 결여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다들 하나씩 기본적인 것들을 놓치며 걸어오고 있었구나.

"마하야, 모이라는 거 같다."

"하여간 한국 사람들 단체 사진 진짜 좋아해."

"야! 그냥 좀 어울려. 대표 팀 기수까지 맡은 사람이 왜 이렇게 툴툴거려."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은재와 지수에게 스마트 폰을 사 줬다.

내 입장에서 큰돈이 아니지만, 애들한텐 작은 선물이 아니다 보니 조금 부담을 가지는 것 같았다.

"오빠, 진짜 골라도 돼요?"

"그럼."

"음..."

"지수는 뭘 고민해? 디자인? 메이커?"

"아니요. 그냥... 오면서 환율 알아봤는데 오빠 이거 지금 100만 원 넘는 거 아니에요...?"

"야. 니가 그러면 나만 이상해지잖아."

"아니. 그래도... 비싼 건 비싼 거니까."

"오빠, 정말 골라도 괜찮은 거 맞죠?"

"그럼. 지수야, 아무런 의미 없어. 너네 운동 열심히 했다고 주는 거니까. 그냥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받어."

"그래도 주영 언니가 이런 거 받지 말랬는데..."

"뭐 어때. 사 주는 사람이 괜찮다고 하는데. 받자."

은재는 은재대로 밝은 매력이 있고 지수는 지수대로 차분한 매력이 있다. 아마 여고가 아니라, 운동이 아니라,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진짜 얘네야말로 일찌감치 아이돌 가수도 하고 그러고도 남았을 거야.

"얘들아. 너네 혹시 소풍 같은 거 가 봤어?"

"아니요."

"..."

"그건 왜요?"

"아니, 그냥."

대체 운동이 뭐라고. 이런 애들을 이렇게 자라게 만들었을까...

그래도 나는 소풍이고 수학여행이고 다 가 보고 자랄 수 있었는데.

수학여행 한 번 못 가 보고, 소풍도 못 하고 자란 애들한테 이런 걸로 위안이 될 수 있다면.

"좋아. 둘 다 이걸로 하자. 여기요. 미스터?"

"그냥 오빠가 골라 주시는 거예요?"

"지수 봐. 쟤 오늘 밤까지도 못 골라."

"아..."

"괜찮아. 이걸로 해. 둘이 같은 거. 괜찮지?"

"전 그럼 이걸로."

"오빠, 저도 이걸로."

단체 관광은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사람을 조금 달리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들 놀 줄 몰라서 반항할 줄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다.

그냥 모르는 것 뿐.

정말 어려서 운동만 해 왔기에 다들 기본적인 것을 못하는 건 아닐까? 싶어졌다.

마침, 그날 밤 작은 술 약속이 잡혔다.

문식이 형이 형 친구들 격투기 종목 사람들을 불러 방안에서 맥주를 마시는 데 함께하게 됐다.

유도 최민우 선수도 알게 되고, 8년 전 어리고 팔팔한 주영이 누나한테 고백했다던 태권도 형도 알았다.

"이야~ 나 마하 씨 진짜 보고 싶었는데. 악수 한번 해요."

"아이고, 형님. 저도 예전부터 형님 운동하시는 거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하나 싶었어요."

"으하하하!! 진짜? 나 알았어?"

"태릉에서 최민우 모르면 간첩이죠."

원래의 나라면 피했겠지만, 그날은 그냥 이 사람들을 알고 싶어졌다.

운동만 해 온 사람들은 어떻게 노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정말 엘리트 코스를 걸어 온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품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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