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 (5)
모두가 잠든 시각. 혼자 정좌를 틀고 앉아 몸 상태를 체크했다.
좋아. 근력도 체력도 완벽해.
준비를 잘했어. 어디 아픈 곳 없이 여기까지 폼을 끌어 올린 건 칭찬해 주고 싶다.
다만, 우려한 대로 풀리지 않는 스트레스가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올라 있어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후우우..."
안다. 나도 이런 내가 답답해 미치겠다고.
무슨 섹스 못 해 죽은 귀신 붙은 것도 아니고...
일상은 아무런 트러블이 없지만 문제는 시합이라...
경기는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키고, 흥분 상태에 빠지면 몸에 무리가 온다.
특히나 복싱은 더 막 그런 상태에 빠지기 쉬워 부담을 크게 느끼는데.
이런 긴장 상태를 내려 주려면 형 같은 사람이 옆에서 기를 안정시켜 주든가, 아니면 바로 섹스 한판 하면서 몸이 평정심을 갖춰야만 했다.
그래서 섹스가 스포츠란 말도 있지 않던가.
뭐? 그런 뜻으로 쓰는 말은 아니라고?
여하튼, 내가 가진 빠르고 날렵한 풋워크와 강철같은 주먹을 사용하려면 그만한 내공을 소모해야 돼.
지금은 안 돼. 어려워. 현 상태를 잘 유지해 봐야 16강? 운 좋으면 8강 정도 가려나?
음양 조화가 어우러지지 않는 몸으로 격정적인 시합을 연거푸치르다 보면 또다시 아테네 때 같이 주화입마에 빠지게 된다.
그럴 바엔 시합을 포기하는 게 낫지. 난 몸이 재산인 사람인데.
준결승까지는 가고 싶었는데...
선생님들한텐 뭐라고 해야 되냐... 엄청 기대하고들 계시던데...
"하아... 쩝..."
아니야. 다른 걸 떠나서 왜 메달에 욕심을 내고 있어 나답지 않게.
올림픽 금메달 없는 거 아니잖아.
그저께 민우 형이나 문식이 형. 모두가 메달을 가지고 싶어 하고 있어.
형들도 알 거야. 눈이 있고 귀가 있는데 선수촌 재밌는 거 모르겠어?
알면서도 참는 거지. 할 게 있으니까.
그래. 이게 보통인 거야.
정말 보통의 운동 선수들. 평범하게 태릉을 거친 대한민국 선수단 그 누구도 나같이 방탕하게 즐기는 사람 없잖아. 박상택 정도면 모를까.
평범한 걸 뭐라 하면 안 된다.
그동안 내가 이상한 환상과 기대를 즐겼던 것뿐이지. 실제로 여자를 놓친 만큼 사람을 얻었잖아. 아테네나 토리노 때, 태주 말고 우리나라 운동선수. 누가 나랑 이렇게 친해진 사람 있었냐고.
"후우..."
"야...? 너 뭐해?"
"어? 형님. 왜 일어나셨어요."
"마하야. 안 자고 거시서 뭐 하고 있어."
"아 그냥 답답해서 잠깐 명상 좀 했어요."
"자. 이 녀석아. 몸 생각해야지."
"알겠습니다. 왜 일어나세요. 그냥 주무시지."
"깬 김에 오줌이나 누고 오려고."
잠에서 깬 문식이 형이 배를 벅벅 긁으면서 물어보신다.
"몇 시냐?"
"2시 조금 넘었습니다."
"자. 조급해하지 말고. 너 여기까지 온 것만도 대단한 거야."
"고맙습니다. 형님."
"아. 화장실."
그래. 욕심을 비우자.
문식이 형 말대로 여기까지 온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우리 형도 그랬고. 코치님들도 다들 그러고 있어. 최 관장님도 이미 목표는 달성했다고 하셨다고.
아마, 팬들도 많은 기대 안 할걸?
부모님 찾기 위한 이슈도 나름 잘됐고. 나 복싱 한다고 기사도 많이 났는데.
마음을 비워. 한 경기라도 멋진 시합 보여 주면 되는 거지. 내가 뭐라고.
"너 아직도 그러고 있냐?"
"아이고 자야지. 자자. 어이고 졸리다. 주무세요."
"그래. 내일 보자."
그러나. 조용해질수록 창밖 파티 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온다.
새끼들 저것들은 잠도 없나? 아니 맨날 술 처먹고 무슨 운동들을 하겠다고.
"후우..."
씨발 존나 부럽네...
지금 저기는 막 취해서 인사불성 되어 가지고, 내가 누구랑 뽀뽀하는지. 얘기 걘지 걔가 쟨지 자기들도 모르고 있을걸?"
아니야. 비워. 강물을 생각해. 흘러가는 물을 머릿속으로 그리는 거야.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사타구니에서 흐르는 맑은 물방울이...
아 씨!! 왜 거기서 사타구니가 나오냐고!!!
부드러운 물결에 잔잔히 떠다니는 나뭇잎 하나를 떠올리는 거야.
곡선을 그리며 흘러가는 나뭇잎이 허리와 엉덩이 라인을 따라서.
"으으윽."
"야."
"..."
"왜 그래 너?"
"그냥 시합이 가까워지니까..."
"후우. 조용히 하고 자라. 형 잠귀 밝다."
"죄송합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먹어. 다 잘될 거야."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요 형님...
미치겠네 진짜...
* * *
다음 날 오후. 오전 훈련을 마치고 식당으로 가는 길이었다.
"마하야. 너 아까 보니까 멕시코 애들이랑 인사하던데. 스페인어도 할 줄 아냐?"
"인사말 정도죠. 먼저 남미 갔을 때 대충 배웠어요."
"새끼. 은근 머리 좋아. 영어도 하고 스페인어도 하고. 3개 국어네."
"형님들이랑 있으니까 이런 소리도 듣고. 정말 좋네요."
"야. 다른 언어는 모르냐? 너 그 누구지? 러시아 모델이랑 잠깐 만난 적 있었잖아."
"그쪽은 저보다 영어를 잘해서. 심지어 한국말도 할 줄 알고요."
"근데. 그 사람이랑 진짜 사귄 거야? 아니면 그냥 잠깐 뭐. 그런 거냐?"
"하하하~ 형. 사생활은 노코멘트 해 줘요."
"형님. 가만 보면 얘 은근 우리랑 벽 치는 거 느끼지 않으세요?"
"수길아. 자격지심을 버려. 마하는 마하고 우리는 우리니까."
"새끼... 어? 야?"
"아 형님. 그냥 하는 말이죠. 그리고 빅토리아는..."
"그거 말고. 저기 누가 너한테 오는 거 같은데?"
"네? 누구요?"
설마 빅토리아가? 하는 마음에 황급히 고개를 돌려봤는데.
늘씬하고 아름다운 금발 머리 여신은 없고, 웬 커다랗고 시커먼놈이 성큼성큼 다가와 덥석 끌어안는다.
"Hey~~!! Brother!!!"
"아이고... 이 새끼..."
유진 볼트였다.
반갑긴 하다만 겨드랑이에서 나는 어두운 냄새는 여전하구만.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왜? 니가 와서 안긴 거 아녔어?."
"복싱이라니!! 갑자기 다 무슨 소리야 대체??"
그렇군. 외국 친구들은 내 소식이 늦을 수밖에 없지. 브라운도 많이 신기해했었는데.
유진이랑 형님들이랑 인사를 시켜 주고 짧게나마 이러저러하다가 은퇴하고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고 알려 주었다.
"진짜로! 또!!? 스키도 타면서?"
세계 신기록도 세운 녀석이 별걸 다 궁금해하네.
그나저나 실력이 붙어서 그런가? 애가 전보단 표정에 관록이 붙은 거 같기도 하고. 자신감도 있어 보이고.
"오케이. 알았어. 시합이 언제야? 내가 꼭 갈게!!"
"너랑 비슷할걸? 아닌가? 우리가 좀 더 늦나?"
"그럼 내 시합 반드시 보러 와!!"
"야. 나도 스케줄 있다니까."
서로 반갑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둘 다 워낙 바쁘다 보니 짧게 인사만 하고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Promise!! Brother!!!"
"그래. 또 보자. 형제야."
흑흑. 폐막 전에는 볼 수 있겠지. 흑흑 친구야.
멀리 사라지는 유진이를 지켜보았다.
가까이 있을 때도 그랬지만 애가 전신에 기운이 충만한 게 느껴진다.
내외공이 어우러지고 특히나 음기와 양기의 조화가 아름답다.
새끼. 저쪽이야말로 지구인의 축제구나... 보나 마나 올림픽 제대로 즐기고 있겠지...
하긴 자메이카니까.
미국 애들도 혀를 내두르는 흥의 민족 아니겠냐고.
"마하야. 이번엔 또 누구냐?"
"아. 유진 볼트라고요. 자메이카 국가 대표 선수에요. 육상 단거리."
"이름이 볼트야?"
"마하랑 볼트라. 너네는 친구끼리 이름들도 빠르게 생겼냐."
"아하하하! 저는 성은 평범하잖아요."
"근데 단거리 선수는 원래 이렇게 다 커? 저쪽은 너보다 더 큰 거 같던데??"
"그러게요... 쟤도 원래 몸이 많이 가늘었는데. 운동 많이 한 거 같네요."
"야. 진짜 넌 여기저기 아는 사람도 많다. 먼저 그 NBA 선수들도 그렇고..."
"자. 자. 얘들아. 메달리스트랑 비교하지 말고. 어서 밥부터 먹자."
유진 볼트. 분명 이번 올림픽에서 큰 사건 일으키겠지?
새끼. 지랑 잤던 우리 학교 여자애는 기억해 주려나.
"슬슬 육상 경기도 시작하는구나."
"이미 결과 나온 종목들도 있어요."
"마하는 친구들 안 보러 가도 괜찮냐?"
"시간이 있어야죠... 한 녀석 있긴 한데."
"다녀와. 동료들인데 응원 한마디 해 줘야지."
"진짜요? 저 혼자요?"
"그럼. 어차피 우린 누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정말? 진심으로? 갑자기 이런 기회가 온다고?
"아... 안 그래도 지성이가 혼자 왔다고 신경 쓰였는데."
"권지성이 그 친구지? 도하에서 너랑 같이 뛰었던."
"네... 애가 실력은 좋은데 멘탈이 약해서."
"그럼 더 얼굴 보고 와야겠네. 그쵸 형님?"
"음. 마하도 어제 보니까 잠도 못 자고 심란한 것 같던데. 사람들 보고 오면 좋겠지."
이래서 세상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는 거구나!!
지성이는 잠깐 얼굴만 보고 바로 파티장으로 갈 수 있다면?
"다들 맛있게 먹었냐?"
"네. 선생님."
"그럼 오후 스케줄 알려 준다. 우선 체크 할 거 몇 개 있고."
"아 선생님. 오늘 저녁에 마하 외출 좀 시켜 줄게요."
"마하는 왜?"
"육상 경기 시작하는데. 전 대표 팀 선수 하나가 혼자 있다고 그래서요."
"그래라. 최 감독님한테 인사도 전해 드리고."
"네!! 알겠습니다."
괜찮아. 최 감독님 잠깐 얼굴만 보고 빠져나오면 되니까.
아 신난다. 갑자기 몸에 기운이 막 도는 거 같애.
오후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형들은 훈련 중간, 우리나라 양궁 선수들 시합 보느라 잠깐 빠졌지만, 난 그때도 내가 해야 될 것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와 미친놈들. 올림픽을 무슨..."
"아니. 저렇게 이기면 기분 좋나?"
"우리도 시합에서 중국 애들 상대할 땐 조심해야겠어요."
"형님! 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어? 뭐야. 너 벌써 끝났냐?"
"마하야 너 우리랑 양궁 안 봤어?"
"네!! 이따가 뵐게요!"
뭐? 한국 여자 양궁이 중국이랑 붙었는데, 편파 판정 같은 일이 있었다고?
중국 선수가 활 쏠 땐 관중들이 조용하고 우리나라 선수가 나오니까 시끄럽게 응원을 했다고?
저런 안타깝네. 얼마나 화가 날까.
"보자. 지성이가? 육상 대표 팀 건물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내 코가 석 자란 말이 있지 않던가.
안타까운데, 같이 화내 주고 싶은데 나도. 지금은 내 꼬추가 더 급해.
지성이. 권지성. 잠깐이면 돼. 최 감독님도 인사만 드리고 오면 되는 거야.
아직 7시도 안 됐어.
저녁은 길다. 시간은 충분해!!
"야!! 지성아!!"
"깜짝이야. 뭐야 형?"
"헉! 헉! 너 괜찮지? 컨디션 문제없지?"
"...어. 난 뭐. 왜? 누가 나까지 이상하데?"
"아니. 최 감독님은?"
"지금 자리 없으신데."
"그래? 바쁘신가 보네. 그럼 다음에 인사드리고. 야 나 간다!"
바쁘다. 바뻐. 이제 자유시간이야. 내 시간이라고!! 프리덤!!!
뭐!! 왜? 나도 국위 선양 하고 싶어! 포디움 오르고 싶다고!
나도 잘하려고 이러는 거야.
여자만 만나면 지금보다 더 멋진 시합 보낼 수 있어 나도!!
"형! 형! 잠깐만!! 이렇게 왔다가 그냥 가는 게 어딨어?"
"아! 왜?"
"알고 온 거 아니야?"
"뭐가?"
"태주."
"걔 뭐?"
"..."
"뭐? 왜? 어디 다쳤데?"
"진짜 알고 온 거 아니었어??"
또 뭔데? 태주가 뭐? 왜? 걔 운동 잘하잖아. 대한민국 수영의 아이콘. 물개. 태릉의 물귀신이 무슨 문제가 있는데??
* * *
"하아... 씨발... 또 왜 그런다냐..."
"태주도 긴장해서 그러겠지. 왜가 어딨어."
"알아서 잘하겠지... 뭐든 결승 앞두고 긴장하는 건 당연한 건데."
"아니 그래도. 연락이 왔는데 한번 가 보든가 해야지."
잠깐 지성이만 보고 가려던 일이 어떻게 태주까지 신경 쓰게 되고 말았다.
괜찮아. 아직 시간은 충분해. 이제 7시니까.
잠깐 얼굴만 보고 빠지면 늦어도 7시 반. 9시까지는...
"그래서 지금 어떤 상태라는데?"
"집중이 안 된데. 예선도 겨우겨우 끝냈다고. 저녁도 안 먹으러 나왔어."
"보통 그러지 않나? 나도 시합 앞두고 밥 잘 안 먹히는 때 많어."
"세상 사람이 다 형같이 강심장이 아니잖아."
"내가 무슨 강심장이냐. 나도 지금 얼마나 큰 심리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데..."
"아무튼, 그래도 이렇게 남 챙길 여유는 있으니까. 가 보자. 어떤 상탠지는 봐줘야지."
"넌 여자친구는 안 챙겨도 괜찮냐?"
"아. 그쪽엔 관심 끊으라니까."
"미친놈아 시합 앞둔 놈이 남 챙기고 다니니까 궁금해서 그러지."
"어쨌든 가 봐. 다 왔어."
투덜투덜 궁시렁궁시렁 떠들다 보니 어느새 수영 팀 숙소 앞.
빨리 끝내고 놀러 가야지 하고 있는데 지성이 놈이 문 앞에서 멈칫하더니 긴장한 얼굴로 돌아본다.
"뭐? 왜 다 와서 멈춰?"
"형. 참고로. 태주 보기보다 되게 순한 애다. 그러니까 먼저 나한테 했던 그런 방법은"
"꺼져 새끼야. 나 하나 챙기기도 버거운 마당에..."
"아무튼, 그런 거 하지 마."
"닥치라고. 넌 탁구소녀나 만나러 가."
"하아... 진짜 내가 말을 말았어야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함이 커진다.
태주도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며 수영 팀 숙소에 들어섰다.
먼저 코치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자, 저쪽도 우리를 보며 조심스레 물어보신다.
"마하는 지성이 니가 불렀니?"
"아니요. 형이 찾아왔어요."
"아이고. 마하야... 와 줘서 너무 고맙다."
"선생님 뭐가 그렇게 심각한 상황인가요?"
"그게. 예선은 어떻게 잘했는데... 이놈이 지금 결승 앞두고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밥 먹으러 가자고 해도 응답이 없단다.
선생님이 조심히 방문을 열어 주신다.
그러자 커다랗고 뭉뚱그려진 무언가가 침대 위에서 이불을 덮어쓰고 덜덜 떨고 있었다.
"뭐야...? 왜 이래...?"
"야... 태주야?"
"태주야. 마하랑 지성이 왔다."
코치 선생님이 불러도 친구인 지성이가 다가가 흔들어도 이불속 웅크린 무언가는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4년 전 긴장감에 두 번의 부정 출발로 실격패한 수영의 간판스타 김태주.
가만히 지켜보는데 이불 위로 어둑어둑한 아우라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본다.
7시 10분...
파티는 못 간다고 보는 게 마음이 편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