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것보다 위대한 게 있다. (1)
"뭐지? 누가 왔나?"
"그러게… 무… 문 안 열리지?"
"내가 일단 잠그긴 했어."
"어… 어떻게?"
"이런 옥상은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잠그는 장치가 있거든."
"머… 머 먼저는 그런 말 없었잖아…?"
"그날은 나도 정신이 없었던 거고. 저기 일단 이럴 시간에 옷부터 입자."
갑자기 찾아든 정체불명의 누군가 때문에 나나 주영이나 혼비백산해서 옷을 챙겨 입었다.
어찌나 정신이 없던지, 나는 팬티에 발이 걸려 깽깽이를 뛰고 주영이는 속옷을 뒤집어 있었다. 다시 벗어 제대로 입고, 난리도 아니었다.
아무튼, 주변은 정리했고. 대체 누가 온 거지??
"다 입었지?"
"어! 어? 어."
"……."
안 되겠네. 지금 밖의 누군가보다 얘가 더 걱정이야.
나도 놀란 가슴 진정되질 않는 상황인데, 주영인 표정이 거의 패닉에 빠져 있는 것 같다.
큰 경기 앞두고 이런 일로 컨디션이라도 깨지면 어떡하라고.
"누누누… 누굴까? 우리 어떻게 되는 거지?"
"주영아, 괜찮아. 진정해."
"지… 지금 어떻게 진정을 하라고…."
"왜 이렇게 떨어. 무슨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그그 그래도…."
형이 잘 쓰는 타인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방법을 써 보기로 했다.
될지 안 될지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남미 여행 때 대충 원리는 배웠으니까. 일단 주영이의 손을 잡고.
"나 봐.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그그… 그 그럴까?"
"그럼. 침착하라니까. 우선 느리게 숨을 뱉어 봐."
먼저 상대방의 내공을 읽어야 한다고 했었지. 그리고 맥박과 심장 박동을 바로 잡으면서 손에서 손으로 기를 전해 주면 된다고 했는데.
"옳지 그렇지. 내쉬고 뱉고."
"후. 후. 후우. 후우우~"
"천천히 더 천천히. 심호흡하듯이."
"후우우~ 후우우우~"
됐나? 봤을 땐 놀란 게 가라앉는 것 같긴 한데.
"어때? 좀 진정됐어?"
"응…."
"아니야? 아직도 좀 두근거리는 게 있나?"
"아니. 그렇진 않아."
와 이거 놀랍네. 효과 좋은걸?
주영이의 표정이 평상시보다 더 차분하게 변한 것 같다.
당사자도 방금까지 날뛰던 감정이 사라지자 그거에 더 이상함을 느끼는 것 같다.
"너 지금 나한테 뭐 했어?"
"하긴 뭘 해. 그냥 진정하라고 손 잡아 준 게 다지."
"어. 으음? 뭐지??"
아무튼, 이쪽은 해결됐고. 이제는 밖의 누군가를 정리할 차례.
그때까지도 문밖의 누군가는 노크 소리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알았다고. 간다고. 대체 뭔데? 지들은 섹스 안 하고 사나.
"뒤에 있어."
"응."
‘서로 좋아하는 건강한 남녀가 있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마음으로 당당하게 문을 열었는데.
정말 예상도 못 했던 존재를 마주하며 다시금 심장이 두근 거린다.
"미스터 구?"
"누구세요?"
"공안입니다."
"…공안이 왜요?"
우리가 모르는 대한민국 코치님이나 아니면 선수 관계자 일 줄 알았는데…
공안이 왜?? 공안이면 중국 경찰 아냐? 공산주의 사회는 야외섹스도 불법인가??
혼자 머리에 물음표 다발로 띄우고 있으니 그들이 능숙한 영어로 말을 건넸다.
"찾았습니다. 저희와 같이 가 주시죠."
"어디를요? 왜요?"
"모셔오라는 전갈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왜요? 제가 뭐 잘못이라도 했나요?"
"그런 게 아닙니다. 특별 보호 대상자가 되셔서 그렇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천천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우선 짐부터 챙기시죠."
* * *
처음 올림픽에 올 때부터 중국국가체육총국은 구마하의 모든 행동거지를 체크하고 있었다.
일정. 훈련 모습. 경기 장면들. 그리고 만나는 사람과 먹는 식사까지.
"위원장님."
"왔군. 구마하는 어떻게 됐어?"
"일단 숙소에서 빼 오는 덴 성공했습니다."
"잘했네. 반발은 없었고?"
"처음엔 당연히 반발했지만, 팀 전체를 호텔로 이전시켜 주겠다니 오히려 좋아하고 나섰습니다. 한국 대사관이 나서서 더 의심없이 따랐고요."
"좋군. 아주 좋아."
올림픽 헌장 50조 2항에는 올림픽에선 그 어떠한 정치나 종교, 인종적 선전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현실이 늘 그렇듯 규율이란 언제나 묵살되기 마련이다.
특히나 그 주체가 올림픽을 개최한 국가라면.
그 국가가 체제의 안정과 인민의 결집을 원하는 곳이라면.
그러한 목적을 위해 금메달이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이라면.
중국은 이번 올림픽에서 압도적인 성과를 거두어야만 했다.
특히나 미국을 넘어 종합순위 1위란 과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성해야 하는 목표였다.
그런 와중에 남자 헤비급 복싱에서 중국 측 선수 두 사람 류이 쥔과 양웨이가 나란히 4강에 진출하게 됐다.
특히나 양웨이는 8강에서 거구의 미국 선수를 이기고 올라와 인민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원대한 과제 앞에 구마하란 존재가 위기감으로 다가온다.
처음엔 그저 화제나 끌어 줄 줄 알았지만, 그의 실력은 진짜였고. 한 경기 한 경기 토너먼트가 진행될수록 세계인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이미 동메달이 확정된 상황. 현재로서도 그는 과거와 미래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스포츠 스타가 된 것이다.
우선은 류이쥔이 구마하를 먼저 상대하게 된다.
혹시나 구마하가 나란히 중국 선수들을 이기고 올라서게 된다면,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주석을 비롯한 모두의 관심이 남자 복싱에 몰리고 있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 선수들이 결승전을 붙어야만 해. 알겠나?"
"저… 그런데 현재 해외 도박 사이트에선 류이쥔과 구마하의 승률 배당에서 구마하가 더 높은…"
"무슨 소린가!! 부정 타게!!"
"죄! 죄송합니다."
위원장도 알고 있다.
류이쥔은 구마하의 상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양웨이라면. 그리고 그런 양웨이의 승리를 위해서라도구마하의 힘을 조금이라도 뺄 수 있다면.
준비해 둔 시나리오가 움직일 차례였다.
어떻게든 그를 지치게 만들어야만 한다.
아니나 다를까, 혼자가 되자마자 여자를 만나고 돌아다닌 구마하였으니, 작전은 쉽게 성공할 것이다.
"그래서 상대는 누구로 정해졌나?"
"저도 모르겠습니다. 안전부에서 나오는 사람이라고만…."
"이 친구 보통 여색을 밝히는 게 아닌 것 같던데…."
"저. 근데 듣기론 이번에 한국 대사관을 움직인 것도 이 사람이라고 하던데요?"
"그래?"
"네. 주로 한국과 일본에서 활약하는 요원이라고 합니다."
"후후후~ 하하하하! 그렇군!!"
"왜… 왜 그러십니까?"
"아니야. 영웅에 걸맞는 여성이라니 기뻐서 그러네."
위원장은 다시금 구마하의 사진을 돌아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은 선물을 보내주니. 대신 이 정도로 만족하라고.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잖아."
* * *
"와…."
"이햐아~~ 뭔 방이…."
"허허허. 가구가 무슨…."
"마하는 왜 놀라냐?"
"저도 놀라죠. 저도 이런 데 처음 와 봐요."
"야, 너 인마. 특별 보호 대상이잖아."
"아니, 형, 저도 이런 건 처음이라니까요."
"근데 여기 진짜 옆방에 영국 대통령 있나?"
"수길아, 영국에 대통령이 왜 있어. 총리가 있겠지."
"뭐든 보안은 자비 없긴 하겠구나."
한참 섹스 중에 날아든 중국 공안들.
나중엔 한국 단장님이랑 대사관 직원까지 함께 찾아와 이러저러하니 숙소를 옮기자고 말했다.
선수촌도 충분히 보안 철저하고 안전한 거 같은데. 여기는 국빈들이 오는 곳이라면서 거기보다 더 좋다라나 뭐라나.
"와 선수촌도 보이네."
"그러게요. 마하, 너 밥은 여기서 먹을 거냐? 선수촌에서 먹을 거냐?"
"당연히 가서 먹어야죠."
"아니던데. 아까 대사관 직원이 룸서비스 그냥 시켜 먹어도 된다고 하지 않았어?"
"제 식사량을 호텔 밥으로 먹으라고요?"
"우와. 그것만해도 돈 장난 아닌 거 아냐?"
선수촌 바로 앞에 있는 5성 호텔. 그곳에서도 최상층 스위트 룸을 내줬다.
룸서비스고 뭐고 다 무료란다.
밖에 나갈 땐 공안들이 차를 대절해 주고 훈련을 가거나 어디를 가도 늘 보디가드가 따라온다고 한다.
모든 건 내가 또 메달을 딸 수 있는 단계에 올랐기 때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해 준다는 건 어딘가 흐음….
"역시. 난 선수촌으로 돌아가야겠다."
"문식이 형?"
"왜요? 여기 있지."
"부담돼서."
"형님, 그럼 저도…."
"야. 너도 이제 나한테 부담 돼."
"……."
"그런 표정은 짓지 말고. 내가 말하는 부담은 내 안의 열등감이 너무 크게 피어난다는 소리야."
"아… 그건…."
"아니야, 마하야. 괜찮아. 고개 들어. 이건 나의 문제니까."
문식이 형은 숙소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환경이 너무 좋은데, 그 좋은 환경을 자신의 힘으로 구축하지 못했다면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역시 주장님. 그럼 나도 돌아갈래."
"나도."
"형? 아니 형들은 왜요?"
"마하야. 우리 오늘 졌어."
"그래. 우리 마음도 문식이 형이랑 똑같지. 내 능력으로 이런데 와야지. 능력 좋은 동생 따라서 오니까. 좋다기보단 힘들다야."
"아니… 그래도… 이 넓은 방에 저 혼자…."
있으면 감사하지만.
근데 형들이 이러면 오히려 내가 거리감을 느끼는데.
"마하야."
"네 형님…."
"고개 들어. 넌 인마. 지금 내 목표야."
"제가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여기 와 보고 또 한 번 느꼈어. 난 이번 올림픽에서 꼭 금메달을 딸 거야."
"……."
"그리고 다음엔 프로에 나가서. 챔피언 벨트를 따고. 체급을 올리고. 그래서 나중에 이런 장소에 와도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고 말겠어."
그렇게 문식이 형은 선수촌으로 돌아갔다.
창수 형 수길이 형 다들 체육관에서 보자며 잠시 나랑 멀어졌다.
코치님들은 형들이 이런 결정을 미리 알았는가 일찍부터 감독님과 황 선생님 위주로 두 팀을 나누고 계셨다.
"내가 문식이랑 있을 테니까. 마하는 황 코치랑 같이 움직이고."
"네. 알겠습니다."
"아우. 나는 좋죠. 덕분에 이런 곳에서 호사도 다 누리고."
"그러니까. 황 코치. 호강 좀 누리라고."
아무튼, 환경은 좋다 못해 부담될 지경이다.
특별 보호 대상이라….
"이야. 마하야, 침대 누워봤냐? 비싼 방이라 그런가 침대도 푹식푹신하다야."
"선생님… 제가 뭘 잘못한 건 아니겠죠?"
"무슨 소리야 이 녀석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형들이랑 좀 떨어져 있고 싶다고 생각했던 게 잘못인가 싶기도 하고…."
"흠. 이리 와서 좀 앉아 봐라."
황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다.
"권투 선수라는 게 그렇게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 아니다."
"네…."
"애들이 그런 기분을 가졌다고 해서 니가 어떤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나는."
"알겠습니다."
"나도 아까 문식이 하는 얘기 들었다."
"챔피언 되고 한다는 얘기요?…."
"그래. 오히려 아까 문식이 녀석이 그런 말을 하는데, 고맙더라."
"왜요?"
"스승된 입장에서 더 높은 곳을 가겠다는 게 고맙지, 그럼."
"그럼 되는 걸까요?"
"그렇지. 이 녀석아. 넌 운동하는 놈들한테 희망이자 목표야.
움츠리지 마. 자부심을 가져. 넌 이미 전설이니까. 야 이놈아. 현역 선수가 어디 국빈들이나 머무는 호텔을 받아. 안 그래? 으하하하!!"
"……."
"웃자. 마하야."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어쩌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대우, 이런 환경. 정말 쉽게 주어지는 게 아니니까.
늘 부족하고 어딘가 채워지지 않는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도 이제 받기만 할 게 아닌 돌려줘야 하는 사람이 된 걸까?
"자부심이라…."
모르겠다. 너무 어려워.
아까 주영이랑 하다가 중간에 끊긴 것 때문에 기분이 찝찝하다는 것만 남을 뿐.
에잇 배고파. 밥이나 먹어야지.
"선생님, 식사하시죠. 우리 뭔가 시켜 먹어요."
"좋지. 근데 마하야."
"네."
"나도 이런 델 처음 와봐서 그러는데. 우리 호텔 레스토랑 같은데 가서 먹으면 안 될까?"
"하하하! 안 될 거 뭐 있어요. 가세요."
그래. 이렇게 된 거 뽕이나 뽑자.
우리 형 생고생 시켰던 중국이니까.
새끼들 내 밥량 대려면 호텔 주방장 총출동 시켜야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