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것보다 위대한 게 있다. (2)
"먼저 그 아가씨는 여자 친구냐?"
"풉!! 네!?"
"이 녀석아 뭘 놀라고 그래."
"하하~! 선생님?"
호텔 레스토랑에서 황 선생님과 근사한 식사 중이었다.
선수촌 음식도 맛있고 좋지만, 호텔은 호텔다운 럭셔리함이 있구나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받았다.
"어른한테 그런 질문 처음 받아 봐서요."
"그래? 예쁘게 생겼더만."
"예쁘죠. 리듬체조 선수에요."
"우리나라 사람인가?"
"네. 이주영이라고. 낼 모레 경기 있어요."
"응원 가 줘야겠네."
"오지 말라고 하던데요…."
"왜?"
"잘 모르겠어요."
"여자 친구 아니었어?"
"아직은… 확실히 그렇다고 말하긴 조금 애매한 사이였죠."
아까의 당황스런 경험이 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됐는가, 호텔에 도착해 주영이한테 문자를 보냈는데 ‘응 그래.’라는 단답으로 오고 끝이었다.
뭐라 할 수는 없다. 당사자 마음이 그런 거니까.
유이 누나가 그랬다. 여자는 어떤 상황이 닥쳐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지 않는다고. 그 말은 반대로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면 붙잡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모르겠다. 지금은 그냥 주영이가 만족스런 시합을 했으면 하는 마음만 있다.
"마하는 어떤 애들 좋아하냐?"
"우와. 선생님…."
"왜? 이런 거 불편해?"
"아니요. 선생님도 그런 걸 여쭤보시나 해서요."
"이 녀석아 나도 낭만이 있지."
"복싱 선수는 다 우리 최두필 관장님 같은 줄 알았어요. 형들도 모여있으면 맨날 운동 얘기만 하고 그래서."
"하하하! 두필이 형이 단백한 맛이 있지."
"솔직히 과격하시죠…."
"으하하~!"
이야기를 나누다 황 선생님 웨딩 스토리를 듣게 되었다.
운동하다가 주변 어른들 소개로 만나셨다는데, 사람이 듬직해서 좋았다고. 어디 가서 맞고 다닐 걱정은 없다고 그러시면서 결혼까지 가셨단다.
"그럼 연애를 얼마나 하신 거예요?"
"연애가 어딨어. 반년? 그렇게 만나서 그냥 결혼했어."
"우와… 근데 사는 데 문제없으셨어요?"
"문제 많지. 근데 부부라는 게 다 그런 거니까. 아하하~!"
황 선생님은 맞을 걱정은 없지만 때릴 걱정이 많은 복싱 선수였다.
벌이는 시원찮은데 챙겨야 할 사람들도 많고, 뭔 놈의 경조사는 그렇게 벌어지는지.
선수를 관두고도 평생 운동만 해서 평범한 직장을 버티질 못해 그만두기 일쑤고. 자존심은 강해 어디 가서 머리 굽히기가 쉽지 않았단다.
살면서 정말 힘든 때가 많았다고 하셨다.
"그런데 말이야…."
"네."
"사내로서 비참한 그런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이상하게 옆에서 잔소리 해 주는 여편네가 어느 날 고맙게 느껴지더라고."
"와… 뭔가 울컥하는데요."
"그렇지. 나도 그때 그랬어. 아. 이래서 아내라고 하는 거구나.
이 사람이 내 가족이구나. 그때 깨달았던 거 같아."
"사랑이네요."
"암. 사랑이지. 그런 게 사랑 아니겠냐?"
선생님은 그냥 단둘이 있는 시간. 조금이라도 어색함을 풀려고 이런 주제를 꺼내셨겠지만, 나한텐 엄청 깊이 있는 대화 시간이었다.
정말 유익한 순간이다.
갑자기 황 선생님이 달리 보인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사랑의 형태도 그렇게 힘든 순간 늘 함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긴다.
"저도 그런 사람 만났으면."
"넌 좋은 여자 만나야지. 능력도 되는 녀석이."
"좋은 여자요. 좋은 여자라…."
내가 바라는 스타일은 누굴까? 내가 원하는 여자는 어떤 사람이지?
솔직히 다 좋았던 거 같은데… 생각해 보면 안 좋았던 사람이 없잖아.
아픔이 강해도, 좋은 장면을 떠올리면 그만큼 좋은 시간들이 잘없었어.
혜정이나 다빈이. 한수빈. 이번에 알게 된 주영이도 그렇고. 비키. 그 외에 정말 짧지만 아름다운 순간을 함께 해 주었던 수많은 여성들.
"예전에 어떤 친구가 그랬었어요. 사랑을 정의할 순 없는 거라고. 그냥 좋은 감정이 있으면 그런 게 사랑이라고."
"그렇지."
"제가 바라는 여자요. 흐음."
"얼씨고? 이렇게까지 고민할 문제야?"
"그럼요 선생님. 저한텐 진짜 중요한 문제에요."
"하하하! 이거 내가 벌집을 쑤셨구만."
나는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 걸까?
모르겠다.
그냥 예쁜 애들이 좋았는데, 외모가 전부는 아닌 것 같고.
착한 거? 다들 착했잖아.
한수빈이 질투심이 강했지만, 나한테만은 선녀 같았고.
뭐가 됐든, 지금까지는 받기만 해야 하는 줄 알던 위치에서, 이제는 돌려줘야 할 때가 된 것 아닐까 싶은 지금이라 한 사람을 고를 수는 없는 것 같다.
어렵다. 이 사람의 장점과 저 사람의 장점이 한 곳에 있으면 좋겠지만.
그동안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이 사람의 장점과 저 사람의 장점이 섞이면 단점도 섞이게 된다.
어떤 조건으로 사람을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황 선생님 말씀대로, 누구를 만나든 다 그만한 문제가 벌어지고. 또 그만한 문제를 겪으니 더욱 깊어지는 감정이 생기는 걸 테고.
상대방한테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나한테도 문제가 있는 거니까.
알고 보면 나도 그만큼 부족한 사람이니까.
"어? 음식 나왔다."
"네? 아…."
"근데, 이걸 다 먹을 수 있는 거냐?"
"그럼요. 선생님 저 오늘 3라운드 다 뛰고 왔잖아요."
"허허. 하여간 대단한 먹성이다."
일단 먹자.
확실히 호텔 식당이라 그런가, 맛은 있는데 먹어도 먹어도 배가 채워지질 않는 기분이다.
"흐음."
"선생님 피곤하시죠?"
"어? 아니야. 괜찮아. 먹어."
"저, 그럼 이거 그냥 방으로 보내 달라고 할까요?"
"아니야, 아니야. 먹어. 괜찮으니까."
"아니면 먼저 돌아가 계세요. 저 아무래도 지금 한 시간은 더 먹어야 할 거 같은데."
"허이고… 그렇게나…?"
"쉬고 계세요. 선생님도 오늘 우리들 시합 다 보시느라 힘드셨잖아요. 저기 보디가드들도 있는데 걱정하지 마시고요."
"흠. 그건 그렇지만…."
"선생님. 스위트 룸이에요. 욕조에 몸이라도 푹 담그시면 좋잖아요. 무릎도 안 좋으신데."
"정말 그래도 될까?"
음식은 찔끔찔끔 나오고 주방은 풀로 돌아가지만 어쨌든 나오는 속도가 있다 보니 피곤하신 선생님을 먼저 방으로 보내 드렸다.
"함께 계시던 분은 돌아가셨습니까?"
"네."
"그러시군요. 그럼 저희가 같이 있어 드릴까요?"
"아니요. 저 혼자 먹을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기다릴 수 있죠?"
"그럼요. 얼마든지요."
솔직히 나도 호텔 레스토랑 돈 걱정 안 하고 먹는 경험이 얼마나 되겠어. 느긋하게 즐기자고. 뭐 어쩌라고? 지들이 이렇게 해준다고 한 건데.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푹신한 테이블에서 고상하게 스테이크를 썰고 또 썰고 파스타와 샐러드를 먹고 또 먹었다.
그렇게 한참을 먹다보니, 슬슬 배가 불러오는 것 같다.
"보자. 디저트를 그럼 뭐로…."
"실례합니다?"
"음?"
"구마하 선수 맞으시죠?"
"아. 네."
나는 어디를 가도 알아보는 얼굴들이 있다. 아까 황 선생님과 이곳 호텔 레스토랑에 왔을 때도 일하는 분들이나 먼저 식사 중이던 몇몇이 알아보고 사인을 요청하거나 했었다.
그래도 역시… 이런 매력적인 여성이 아는 척을 해 오면 조금은 경직되는 게 있다.
"어…."
"맞구나! 반가워요!"
"하… 한국 분이세요?"
"아니요. 전 외교 쪽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래서 한국어 공부를 많이 했어요."
"아. 그러시구나…."
확실히 듣고 보니 발음이 조금 어색한 거 같기도. 생김새도 동양인이라기보단 조금 서양 외모가 있는 것 같기도.
그래도 말 잘한다. 외교관이라….
그나저나 뭐지? 사인인가? 아니면 사진? 그것도 아니면 악수?
악수면 좋겠다. 포옹이면 더 좋고.
"유명한 분이 왜 혼자 계세요?"
"네? 아. 저기 그게…."
혼자가 아니라 저기 뒤에 보디가드들도 있고 방금까지 코치 선생님도 함께 계셨다고 대충 서둘러서 알려 드렸다.
"그러시구나. 보디가드라. 근데 왜 여기 호텔에? 지금 올림픽출전하고 계신 거 아니세요?"
"맞는데. 그게. 그거참. 제가 뭔가… 흠…."
"왜요? 뭐 어려운 일 있으세요?"
"네? 어어. 아니요! 그런 건 절대 아니고요."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어이고. 저런…."
뭐지? 이 사람? 걱정해 주는 표정이 예사롭지 않구나.
무엇보다 마음이 참 넓은 사람 같다.
마음이.
"마음이…."
"네?"
"아. 저기 도움이 필요하긴 한데요."
"뭐가 필요하신데요?"
"하하! 아… 그게. 디저트를 시키려고 하는데, 메뉴를 잘 모르겠어서…."
"그래요? 뭐가 드시고 싶으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렇게 낯선 외교관 여성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깐. 메뉴 좀. 제가 볼 수 있을까요?"
"네? 어. 그럼요. 여기."
우와… 가까이서 보니까 더 마음이… 저 아름답고 깊은 계곡이…
"으음. 흠. 외국 분들이 이해하기 어렵게 적어놓긴 했네요."
"제가 영어를 할 줄 알긴 하지만…."
"미안해요. 아직 우리 조국이 외국 분을 많이 상대해 보질 않아서, 이런 서투른 부분이 있어요."
"어어. 아니요. 그런 말씀은 굳이 안 하셔도…."
호텔이라 그런가? 아니면 이분의 존재감 때문에 그런가? 왜 이렇게 긴장이 되지?
무엇보다 옷이 일상적이면서 은근 가슴이 강조되는 디자인이라 자꾸 시선이 가.
불편하면서 자꾸만 보려고 하다 보니 더 뭔가 어려운 거 같은…
"보자. 아이스크림?"
"아. 찬 건 조금."
"그럼 과일은 어떠세요?"
"좋지만, 밤이라…."
"흐음. 뭐를 좋아하시려나."
친절한 분 같다. 처음 보는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 자기 시간을 아끼지 않다니….
그나저나 되게 조심스럽다. 뭔가 처음 보는 스타일 같긴 해.
운동하는 애들은 편하다. 클럽에서 만나는 애들도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여성들은 조금 어렵다.
행동이나 말투에 기품이 있는 사람들. 그래서 내 음흉한 속마음을 들이대는 게 실례가 되는 그런 분들.
가슴골을 쳐다보는 게 죄악인 거 같은 사람들.
하지만 깊은 곳이… 저 풍만하면서 가지런히 모인 계곡이…
"이런 건 어떠세요?"
"어… 어떤 거요?"
"차요."
"차…? Tea는 제가 잘 몰라서."
"우리 조국은 차 문화가 유명하죠. 제가 추천해 드릴까요?"
단정한 머리카락. 옅은 화장기. 화려하지 않지만 분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귀걸이나 목걸이 등등.
중국 사람 같으면서도 그런 걸 하나도 못 느끼게 만드는 수려한 한국어 실력까지.
외교관이라. 엘리트 여성이란 이런 건가?
"저. 그럼 같이 한 잔 하시겠어요?"
"네? 제가요?"
"저기 그게. 제가 지금 호텔에서 무상 서비스를 받는 중이라…."
"하하하~! 아~ 정말요?"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심 드셔도 돼요."
"어머. 그런 호의까지."
그녀는 밝게 웃는 얼굴로 그럼 거절하지 않겠다며 다시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흐음. 뭐를 먹으면 좋으려나."
"저랑 같은 차 하시죠?"
"미안해요. 전 단 걸 좋아해서."
"하하. 그러시구나."
"아이스크림 먹을까?"
아이스크림이라. 봤을 땐 엄청 지적인 사람 같은데, 그런 건 또 조금 귀엽게 느껴지네.
그녀의 손가락이 메뉴판을 천천히 훑어 내려간다.
손도 예쁜 거 같다. 반지는 없네. 기혼은 아니라는 뜻이겠지?
조용히 그녀의 손가락이 어디서 멈출지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보디가드들이 찾아왔다.
그들이 위협적인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뭐라 뭐라 중국말을 건넸다.
"아. 저기! 잠시만요. Excuse me for a second!!"
중국말은 하나도 이해를 못 하지만, 대충 누구냐고 왜 여기 있냐고 뭐라 하는 거겠지.
그래서 서둘러 이분은 이상한 분이 아니라, 내가 도움을 요청해 메뉴를 골라 주고 계신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녀도 곧 작은 핸드백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여 주니 보디가드들도 별다른 걱정 없이 자기들 위치로 돌아갔다.
"죄송해요…."
"죄송하긴요.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인 걸요."
"제가 지금 무슨 VIP니 뭐니 이상한 상황에 놓여서…."
"아닙니다. 제가 실례를 한 거 같네요."
그녀가 미안한 표정을 짓는데, 왜 이렇게 몸 둘 바를 모를까.
무엇보다 가방에 신분증을 챙겨 넣는 게. 이대로 갈 건가?
"저! 저기! 그 그래도 아. 아이스크림은 드시고 가세요"
"훗~."
"어?"
"그게 그렇게 말까지 더듬을 정도로 중요하세요?"
"그… 그럼요. 중요하죠. 도와주셨는데요…."
짧은 순간이지만, 보디가드들이 나서서 그러는 모습이 나를 지켜 준다기보단, 나의 평범한 일상을 누군가 터치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굉장히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그녀의 소소한 웃음이 스트레스를 사르륵 녹아 사라지게 만들었다.
"마하 씨는 엄청 유명하신 분이 잔잔한 매력이 있으시네요."
이 사람 뭐지? 신기하다. 지금까지 만났던 그 누구와도 다른 느낌이야.
연상 같은데, 비키나 유이 누나. 그 외 누구한테서도 받지 못했던 감정이다.
"그쪽도."
"음?"
"아이스크림 좋아하시잖아요."
"그게 왜요?"
"귀엽다고요."
"아하? 하하하! 그래요? 고마워요."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반가워요. 써니라고 해요."
"써… 써니요?"
"어릴 때 미국에서 자랐거든요."
"아. 그러시구나."
써니라.
햇살이란 뜻이잖아.
알면 알수록 반짝반짝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