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것보다 위대한 게 있다. (3)
"어머! 정말요? 축하드려요!!"
나는 원래 누구 앞에서 내 얘기를 하질 않는다.
웬만해선 다들 먼저 알고 다가오는 편이기도 하고, 또 뭐 운동좀 한다고 그렇게 으스대는 것도 별로인 거 같기도 하고. 막상 하자면 운동 잘하는 거 말곤 별로 얘기할 것도 없는지라.
하지만 어째선지, 지금 이 순간의 나는 써니 씨 앞에서 오늘 내시합이 어떻게 됐고. 내가 왜 이 호텔에서 이런 무상 서비스를 받고 있고. 과거의 내가 어떤 대회에서 어떤 메달을 받았는지 하나 하나 세세하게 떠들고 있었다.
"그럼 또 메달을 받으시는 건가요?"
"그렇긴 하죠. 근데 뭐 아직은 경기가 끝난 건 아니니까. 동메달이 될지 은메달이 될지."
"와~! 그럼 이 자리가 단순한 식사 자리가 아니었네요."
"아. 근데 지금은 그냥 밥 먹으러 온 건 맞아요."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세요? 엄청 성대한 파티를 열고 있어야 할 거 같은데."
"아. 하하… 뭐. 이것도 어쨌든 컨디션 조절에 관한 거라."
"으~ 음."
그녀는 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을 해 주고 있었다.
턱을 괴고 두 눈을 마주 보며 이야기를 들어준다.
반만 먹은 아이스크림이 녹아 버리고 있음에도 자기가 아닌 나에게 집중을 해 주는 사람.
좋다 이런 거. 관심받고 있는 거 같아.
"전 차린 음식이 엄청 많길래."
"그… 그건 제가 원체 식성이 좋아서."
"역시 운동하시는 분이라 다르긴 하네요."
"하하… 제가 좀 많이 먹는 편이죠."
"체격이 있어서 그런 건데요. 멋져요."
밥 잘 먹는 게 멋지다라.
진짜 좋다. 막 다 칭찬해 주는 거 너무 좋아.
그래서 그런가? 써니 씨는 뭔가 어렵다.
어렵지만 또 그런 모습이 자꾸만 내게 커다란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정말요? 스물다섯이라고요?"
"왜요? 제 나이가 너무 많아 보이나요?"
"아니요…. 겨우 스물다섯이라고 하시길래. 전 더 많으실 줄."
"어머? 아하! 더 어리게 보셨던 거구나. 고마워요."
서른은 아니어도, 20대 후반쯤 됐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나이가 적네.
물론 나보단 연상이지만. 그래도 그 나이에 외교관이라니. 머리 좋은 사람인 거 같다.
"외교관이 Ambassador죠?"
"그건 대사님. 저는 Diplomat요."
"아… 무슨 차이가?"
"후후. 여러 차이가 있죠. 아무튼, 전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전 스포스 선수입니다."
"어머. 정말요? 운동하시는 분이셨어요?"
"네?"
"와 그래서 이렇게 몸이 좋으시구나. 혹시, 올림픽 출전하셨나요?"
"아. 장난이시구나. 하하! 아하하~! 네. 몇 번 나갔죠."
"혹시 육상?"
"아니요. 지금은 복싱이요."
"으음. 스키 타는 분인 줄 알았는데."
"하하! 하하하!! 이것저것 합니다."
"능력이 좋으시네요."
대화가 즐거운 사람들이 좋다.
아닌가? 난 그냥 여자들이랑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건가?
뭐가 됐든, 아직은 내 안의 외로움이나 여자에 대한 그리움이다 채워지지 않은 상태다 보니, 써니 씨와는 작은 순간 순간들이다 긍정적인 메시지로 전해지는 것 같다.
"마하 씨는 생각보다 더 즐거운 분이신 거 같아요."
"제가 의외라는 말을 많이 듣죠?"
"의외? 의외가 무슨 뜻이죠?"
"아. 의외라는 단어를 뭐라고 설명해야 하냐면…"
"혹시 Unexpectedly?"
"우와 발음…."
"후후. 제 발음이 듣기 괜찮은가요?"
"저도 영어는 하지만 전 발음이 이상하단 말을 많이 들어서…."
"정말요? 저한테 한번 말씀해 보세요."
"가… 갑자기 영어를 하란들 무슨 얘기를…."
"How do you feeling today?"
"오늘 기분요? 어. 피… 필 소 굿?"
"Ah~ haha! very nice!"
그녀가 질문을 던지며 영어로의 대화를 유도했다.
"How did you feel when you won the game?(시합에서 이겼을 때 기분이 어땠나요?)"
"웬 원 더 게임? 잇 워즈 하드 게임. 히 워즈 이탈리안 가이. 베리 스트롱 맨."
"음~! 잘하시는데요?"
"그래요? 저 그럼 더 영어로 대화 할까요?"
한국 말을 잘하는 중국 외교관 여성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니 떨림이 줄고, 보다 더 용기 있게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그녀가 질문을 잘 했다.
우리의 대화는 끊기지 않고 다음으로 또 그 다음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소~ 아이 해브 어 빅 땡스 투 마이 매니지먼트 가이. 히 해즈비콤 어 베리 임폴턴트 펄슨 인 마이 라이프."
"생각보다 너무 잘하시는데요?"
"진짜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영어 공부는 정말 틈틈이 하거든요."
"후훗. 왜죠?"
"처음 아테네 갔을 때. 말을 못 하니까 답답해서…."
"그럼 중국어는요?"
"중국어요? 니… 니하오?"
"하하! ?好."
"그리고 하오?"
"好?."
"발음 이거 맞나요?"
"맞아요. 그럼 다른 거는요?"
"다른 거라. 다른 거라면 음. 워 아이 니?"
"으흐~ 음."
"왜… 왜요?"
"외국어 공부한 이유가 여자들 사귀려고 그러셨구나."
"아우. 아니죠… 그냥 그게 가장 대중적인 말이니까…."
써니 씨는 정말 짧은 시간을 나와 함께 있었지만, 그 짧은 순간에서도 걱정하는 표정. 차분한 표정. 웃는 표정과 지금같이 장난스럽고 나무라는 듯한 표정 등. 다양한 감정을 보여 주었다.
새롭다. 함께있는 시간이 즐겁다. 그녀에게 더 많은 칭찬을 듣고싶고 지적인 대화를 나눠 보고 싶어졌다.
외교관이니까 세상에 대해서도 많은 걸 알고 있을 거 아냐.
무엇보다 아까부터 자꾸 시선을 잡아끄는 저 깊은 계곡, 아니.
마음이. 나를 미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 다른 한 쪽에선 호텔 방을 생각하고 있었고. 스위트 룸인데. 황 선생님은 반대쪽에서 주무시지 않을까 하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사랑합니다."
"네? 갑자기요?"
"한국어로 I LOVE YOU가 사랑합니다. 아닌가요?"
"아. 하하하…"
"정확한 발음으로 듣고 싶어요."
"보통은 ‘사랑해요’라고들 하죠."
"으~ 음 더 부드럽게 들리네요."
아우 깜짝 놀라라. 그윽하게 쳐다보면서 사랑한다니까 심장이 진정이 안 되네.
"제 발음은 어땠어요?"
"좋아요. 역시 외교관이라 언어 수준이."
"그럼 저는요?"
"네?"
"저는 어때요?"
시그널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분명한 호감이 아닌가.
"예… 예쁘세요."
"우훗. 정말요?"
"네. 어딘가 조금. 어… 서구적인 외모가 있으신데 또 동양인이시고."
"후훗. 그래요? 자세하게 보셨네요."
"그래서 진짜 예쁘세요. 진심으로요."
"더 자세하게 보시고 싶으세요?"
눈을 마주보며 이야기를 할 때도 떨림이 있었는데, 그녀는 더 도발적인 자세로 내게 몸을 기울이며 다가왔다.
내가 이렇게까지 상대방에 압도당하는 경험이 있었던가? 그것도 여자한테?
머리 위를 흘러가는 잔잔한 음악. 약간 어두운 듯한 조명. 나보다 사회 경험이 많은 것 같은 젊은 엘리트 여성.
모든 것이 너무 완벽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고개를 꺽어 주며 점점 더 내 앞으로 다가와 코끝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멈췄다.
"어때요? 이렇게 가까이서 봐도 제가 예쁜가요?"
"네…."
"흐~ 음."
써니 씨는 은은한 미소를 짓더니 한 손으로 턱을 괴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마하 씨."
"네."
"여자가 남자 앞에서 눈을 감는 게 무슨 뜻인지 아세요?"
"어… 꼬… 꼴도 보기 싫다?"
"후훗. 그런 것도 있지만, 지금은 당신이 내게 무슨 일을 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아우 알죠. 그럼요. 제가 누군데. 알아도 사람이 기본 매너라는 게 있으니까 참죠. 안 그렇습니까? 드세요. 한다고 덥썩 아이고 쉐쉐 하면서 냅다 춥춥 거리면 추해 보이지 않겠어요?
섹스각이 떴지만, 그녀가 보여준 조심스럽고 기품있는 아우라를 지켜주고 싶었다.
멀리 보디가드들을 살펴본다. 다행히 저쪽도 여기가 무슨 상황인지 알고 딴청을 피워 주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써니 씨와 키스했다.
"으음."
그녀도 부드럽게 입을 맞춰주며 우리의 짧은 키스가 지나갔다.
"훗."
"아. 죄송합니다. 너무 아름다우셔서…"
"후훗. 고마워요."
"하하…. 하하하…."
머쓱하게 웃고 있으니 그녀가 테이블 위에 놓인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혹시. 시간이 더 있으실까요?"
"저요? 저야 뭐. 시간 충분하죠."
"그럼 우리 장소를 옮길까요?"
"근데 처음 뵙는 분한테 이래도 되는 건지."
그녀가 내 손을 끌어다 자신의 가슴 위에 놓았다.
"물론이죠."
"꿀꺽…."
"저도 마하 씨가 유명한 사람이라고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니에요. 대화가 즐거웠고. 처음 보는 자리지만,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있었으니까."
"고… 고맙습니다."
"너무 가벼운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 그럼요! 써니 씨가 가벼우면 저도 가벼운 놈인 건데요. 누가 누굴 나무랍니까. 똑같은 사람끼리."
혹시나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일이 되지는 않을까 막 당황해서 그랬는데, 갑자기 그녀가 우두커니 멈춰 내 눈을 바라본다.
"같은 사람요…?"
"왜… 왜요?"
"으음. 아닙니다. 일어나요."
* * *
"알겠네. 수고들 했어."
국가체육총국 위원장은 구마하가 써니와 장소를 옮겼다는 보고를 받았다.
"후우. 이제부터 시작이구만."
이기는데 더러운 수단이란 없다.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법.
그는 그러한 비뚤어진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도 일말의 불안감이 가슴을 초조하게 만든다.
"으음…"
이 여자가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막상 구마하의 체력을 빼라고 했는데 바뀌는 게 없다면? 그래서 구마하가 차례차례 자국 선수들을 무너뜨리고 포디움에 올라서게 된다면??
베이징 올림픽을 위해 인생 후반기를 전부 걸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어떠한 실패도 용납하고 싶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를 어떻게든 무너뜨려 우리가 옳았다는 증명을 해내고 싶었다.
결국 위원장은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안전국에 전화를 걸었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체육총국의…"
-알고 있습니다. 용건을 말씀하시지요.
"흠. 크흠."
주석도 지금은 나에게 커다란 의지를 하고 계시는데, 기껏 암약이나 펼치는 것이 말을 자르다니…
위원장은 불쾌한 심정을 숨기지 않고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믿을만한 사람으로 보내 준 거 맞습니까?"
-누구를 말씀하시는 걸까요.
"오늘 이쪽으로 보냈다는 당신네 요원 말입니다."
-그럼요. 왜 그러시죠? 그녀가 무슨 실수라도?
"아니. 뭐. 아직은 그런 건 없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위원장 동지. 지금 저에게 어떤 핸드폰으로 연락을 거셨습니까?
"나야 우리 조국의 제품을 구매해서 사용하고 있죠."
-그러한 기술력이 나올 수 있게 만든 사람이 바로 오늘 보내 준 그녀입니다.
일본과 한국 등에서 활약하며 그녀가 들여온 기술로 얼마나 많은 인민들의 일자리가 창출되었는지 모른다.
"음."
-더 말씀을 드리자면 그녀는 신장 출신입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있죠. 정말 많은 의미가.
이런 미인계 스파이를 만드는 과정을 전부 밝힐 순 없지만.
위구르 출신의 여성 요원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실수하는 법이 없다고 해 줬다.
위원장은 호기심이 동해 물었다.
"왜죠?"
-희망을 가지기 때문이죠.
"무슨 희망이길래…"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희망입니다.
"……."
-갑자기 말 수가 줄어드시네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 지역을 잘 알지 못해서…"
-모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더 이상 아신다고 하셔도 별 의미도 없고요.
"그… 그렇군요."
-그녀는 최고 중에서도 최고의 요원입니다. 우리도 나름대로 사안의 중대함을 깨닫고, 예우를 갖춰 최고의 인물을 선정해 보냈습니다.
"하긴, 오늘 한국 대사관을 움직인 것도 그녀라고."
-그 정돈 그녀에게 일도 아니죠. 전화 몇 번 돌린 게 전부일 겁니다.
"크흠…"
-그럼. 답변이 되셨을 거로 알고 저는 이만.
통화를 마친 위원장은 어두운 방 안. 홀로 보이지 않는 두려움에 맞서 몸을 작게 떨었다.
올림픽을 준비하며 사람을 움직이고 보고를 받다 보니, 나도 모르게 거만한 생각에 빠졌나 보구나.
권력의 맛을 본 줄 알았는데… 내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었나보다.
뭐 실패할 일은 없단 뜻이겠지…
적어도 기적이 벌어지지 않는 한.
그는 그렇게 혼자 마음을 다잡으며 불안함을 떨쳤다.
하지만, 위원장이 간과하고 있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그들이 더러운 암약을 펼치는 인물이 기적의 산증인과도 같은 존재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