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것보다 위대한 게 있다 (6)
구마하는 오늘 하루 3라운드에 걸친 올림픽 시합을 치뤘고, 이 주영과의 밀회를 즐기다 숙소를 옮겼으며 써니란 여인을 만나 그동안 느끼지 못한 쾌락의 절정을 맛봤다.
아무리 신에 가까운 능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일단은 인간인지라 더는 체력이 버티질 못하는 상황에 도달해 있었다.
알몸의 여성을 마주 보고 누운 상태인데도 자꾸만 눈이 감겨 왔다.
“써니 씨… 아음… 으으음. 나 진짜 평소엔 절대 안 이러는데…
어으음.”
“피곤하신가 봐요. 주무세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잠 깼어요.”
“아하하. 고집부리지 말고. 어서.”
“어으으… 와 진짜 돌겠네. 체력은 자신 있는데.”
“충분히 자신 있는 거 보여 주셨어요.”
“근데 저 써니 씨보다 어린데 왜 이렇게 극존칭을 쓰세요. 저보다 누나세요. 말 편하게 해요.”
“싫어요. 전 이게 좋은 걸요.”
“와. 우와아… 진짜 써니 씨는… 어우… 근데 진짜 잠깐만 눈좀 붙이고 일어나서….”
“네.”
“잠깐이면 되거든요. 그냥 짧게 한 5분만 쉬었다 일어나서 바로 써니 씨도 기분 좋게… 크어어. 커어~”
체력의 한계에서 정력의 한계까지 쏟아 낸 구마하는 천둥소리 같은 코골이를 시작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무리하기는….”
써니는 기절하듯 곯아떨어진 그의 얼굴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가져온다.
―목표 잠들었습니다.
마치 사람이 바뀐 듯, 다정다감하던 그녀는 사라지고 냉정하고 차가운 여인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화기 밑을 들춰보기도 하고 액자 옆을 살펴보기도 한다.
“역시 도청기도 없고. 카메라도 없어.”
보통 이런 임무를 맡으면 상대방의 약점을 잡고자 함정을 설치해 두는데, 여긴 그런 것이 없다.
구마하를 만나기 전, 그녀에겐 두 가지 임무가 전달됐었다.
하나. 한국 대사관을 움직여 작전이 원밀히 수행되도록 하라는것.
둘. 목표와 접근해 최대한 이른 시간 안에 신뢰를 쌓아둘 것.
본부의 의도를 이해하기 어려운 지시였다.
하지만 늘 그렇듯 뭔가 할 게 있으니 일단 작전부터 수행하고 본다.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스포츠 스타 구마하.
철두철미하게 준비한 각본에 비해 그는 너무 쉽고 어리숙하게 함락되고 말았다.
그래서 써니는 자꾸만 생각이 많아진다.
이번 작전은 목표가 뭐지?
그를 유혹해 우리가 얻을 게 뭐가 있지?
이 사람 자체를 포섭하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답신을 기다리는 그녀에게 마침내 전화가 들어왔다.
“네. 팀장님.”
―혼자 있나?
“아니요. 옆에 그가 같이 있습니다.”
써니가 핸드폰을 가져다 구마하의 코골이를 들려주자 팀장이 먼저 긴장된 듯 목소리를 바꾼다.
―볼수록 자네는 대담한 구석이 있어. 이렇게 대놓고 알려도 되는 건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있거든요. 팀장님이 직접 들어오셔도 될 겁니다.”
―자네도 꽤 고생했겠군.
“아닙니다. 쉬운 일이었어요.”
―흠. 다음 만남은 언제로 잡았나?
“아직 못 정했습니다. 일이 끝나자 그가 바로 곯아떨어지는 바람에.”
―그럼 연락처 하나 남겨 두고. 나오게.
“지금요?”
―음. 오늘 일은 끝났어.
“…….”
―왜 그러지?
“알겠습니다. 준비되는 대로 가겠습니다.”
* * *
“팀장님.”
“어. 수고했어.”
“아닙니다. 조금 전 통화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일은 수월했습니다.”
“그렇군. 잠깐 걸을까? 근처에 좋은 공원이 있는데.”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장소를 옮겨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멀리서 볼 땐 마치 오랜만에 만난 부녀 사이 같았다.
“북경엔 오랜만에 오는 거지?”
“한국 가기 전이니. 3년 된 것 같습니다.”
“어떤가? 많이 변한 거 같나?”
“모르겠습니다. 크게 신경 쓰질 않아서.”
“하긴, 상해에 비하면 이런 변화 정도는.”
멀리 야경이 반짝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팀장이 시원하게 기지 개를 펼친다.
“으음~ 올림픽. 처음엔 별로 달갑지 않았는데 지금은 매일이 올림픽이면 좋겠어.”
“왜요?”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고. 또 일도 많이 없으니까.”
“팀장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가? 말하게.”
“방금도 언급하셨습니다. 올림픽이라고. 지켜보는 눈들이 많으니 이 기간엔 작전은 없다고 하지 않으셨었나요.”
“그랬지.”
“그런데 왜 갑자기.”
“우리가 아닌 체육총국에서 의뢰가 들어왔네.”
“체육총국요…?”
“음. 뭐. 넓게 보자면 국가를 위한 일이기도 한데.”
“왜죠? 구마하의 정체가 뭔가요?”
“별거 없네. 그는 보다시피 알다시피 운동선수가 맞어.”
“…….”
다음 질문을 주저하는 써니에게 팀장이 먼저 운을 틔워주었다.
“자네가 진짜 알고 싶은 건, 왜 갑자기 이런 일을 나에게 맡겼는가 하는 거겠지?”
“맞습니다.”
“연락처는 두고 왔나?”
“침대 머리맡에 쪽지를 남겼습니다.”
“그가 또 연락할 거 같나?”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아마 지금이라도 눈을 떴다면 전화가 들어올 것입니다.”
“잘했어. 가서 푹 쉬고, 또 만나서 좋은 시간 가지라고.”
“…….”
“왜?”
“그게 전분가요?”
“일단은 그렇네.”
“팀장님.”
“음.”
“본부에서 저를 버리시는 겁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절대 아니야.”
“절대라고 하시기엔 제 처우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자. 자. 그러니까.”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저는 산업 요원이지. 창녀가 아니라 고요.”
“이봐.”
“그에게선 아무것도 얻을 게 없습니다. 왜 자꾸 저를 그에게 보내려고 하시는 거죠?”
“흠. 잠깐 어디 앉는 게 좋겠군.”
가까운 벤치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 납득과 해명이란 문제 앞에 누가 먼저 입을 열지 못하는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생각이 정리된 팀장이 먼저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자네답지 않군. 갑자기 감정적으로 나오다니.”
“팀장님이 보신 저 다운 건 뭘까요.”
“구마하랑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도 있었다면 특별 수당을 신청해 주겠네.”
써니도 길게 한숨을 쉬며 팀장을 돌아본다.
“방이 좋더군요. 환경도 시설도 그런 곳은 처음이었습니다.”
“음.”
“따로 설치된 함정도 없고. 타깃은 순진무구하더군요. 어떠한 리스크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건 자네가 일을 잘하니까.”
“결국 마지막에 가서야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혹시 나는 단지 이 사람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투입된 것 아닐까 하는.”
“어허… 상황을 그렇게 받아들이지 말고.”
“제 자존심을 상하게 한 건 구마하가 아니라 본부고, 팀장님이 죠.”
내내 점잖은 태도를 보여 주던 중년의 사내도 이쯤 되니 답답함에 머리 한쪽이 간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가 자세를 바꿔 담배 하나를 꺼내 무는데, 써니가 먼저 그의 손에서 담배를 빼 하나를 물었다.
“뭔가 지금….”
“불 좀 주세요. 답답해서 피워야 할 거 같아요.”
“그러니까 진짜 몸 파는 여성들 같군.”
“팀장님.”
“스스로의 가치를 그렇게 모르겠나.”
“네…?”
“흐음.”
일단 불은 붙여 준다. 팀장도 담배 끝에 빨간 불빛을 띠며 말했다.
“자네는 올림픽이 뭐라고 생각하나.”
“…….”
“대답해 보게.”
“국제 행사요.”
“딱딱하기는. 그럼 자네는 올림픽에 무슨 의미를 두고 있지?”
“없습니다. 누굴 응원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누가 메달을 따든 관심도 없고요.”
“그럼 이렇게 질문해 볼까. 조국이 이번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쓰인 돈이 얼마일지 생각해 봤나.”
“팀장님. 질문에 질문으로 답을 해 주시는 건 당사자에게 별로 유쾌한 기분이 아닙니다.”
“후후후. 자네도 참. 알았네. 천문학적인 돈이 쓰였어. 공사비하며, 행사비하며, 로비 자금도 무시할 수 없고. 왜 그런 천문학적인 돈을 써서 이런 쓸데없는 행사를 할까.”
“…….”
“그것을 명예라고 한다.”
“올림픽을 유치하는 게 명예인가요?”
“명예지. 재력이 없으면 애초에 누굴 초대하는 것도 그들을 대접하는 것도 할 수 없으니까.”
팀장의 시선이 저 멀리 펼쳐지는 도심의 야경으로 향했다.
“멋지지 않나? 마치 미국이나 유럽 같잖아. 이런 모습을 보여 주려고 해도 사람을 불러야 보여 줄 수 있어. 올림픽은 그런 면에 있어서도 의미가 있지.”
“좋은 이야기를 해 주시고 계시지만 아직 제 질문엔 답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자네 작년까지 한국에 있었지.”
“네. 맞습니다.”
“한국 있을 때 구마하의 시합은 본 적 없나?”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처음 한국을 갔을 때도 그는 이미 스타였습니다.”
“한국인들이 구마하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나?”
“국민 영웅이라고 하더군요.”
“역사를 보면 타국에서 영웅이 탄생할 때 우리에겐 재앙이 되는 셈이지.”
팀장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그의 눈빛 저 안쪽으로 음모와 계략의 불빛이 이글거린다.
“아까 구마하가 곯아떨어졌다고 했었지.”
“네.”
“3일 뒤 준결승전이 시작된다. 우리 선수와 맞붙을 거야. 다음에도 그렇게. 또 기력을 있는 그대로. 최대한 체력을 소모시키도록. 알겠나.”
“…….”
“버리는 거냐고? 아니. 지금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네밖에 없네. 이쯤 하면 질문엔 답을 줬겠지.”
결의에 찬 사내와 달리 여인의 눈빛은 서글픔이 묻어나온다.
“팀장님….”
“왜? 아직도 뭔가 더 물어볼 게 남았나.”
“그냥 정정당당하게 붙어 결과를 받아들이면 안 되는 건가요.
꼭 이런 일까지 해야만 하는 겁니까….”
“세상에 정정당당한 게 있다고 생각하나.”
“하지만 이런 건 명예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자네 생각이지. 위에선 그렇게 보지 않네. 인민들도 마찬가지고.”
“…….”
“세상은 오직 결과만이 남는 법이야.”
“그를 이길 방법이 없나요?”
“안타깝게도. 많은 전문가들은 구마하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네.”
할 말을 마쳤다는 듯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구겨진 옷 주름을 펼쳤다.
“일을 떠나 나도 개인적으론 자네와 같은 생각이긴 해. 정면승부로 그를 이길 수 있다면 더 신나고 좋았겠지.”
“…….”
“하나 그런 아쉬움은 우리끼리 품고 가자고. 세상 모두가 이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 필요는 없으니까.”
“그냥 평소 하던 일과 똑같은 거네요.”
“그럼. 그러니 자네도 휴가라고 생각하라고. 즐기면 돼. 오늘같이.”
“…고맙습니다.”
“더 있다 갈 건가?”
“팀장님.”
“음.”
“담배 저 주시고 가시면 안 되나요.”
팀장이 주머니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건네주었다.
“몸에 안 좋은 거 너무 피우지 말고.”
“상심하지 않으려고요. 미안해하는 감정도 버리고.”
“뭐가 미안하다는 건가?”
“구마하요.”
“…그가 왜?”
“오늘 직접 만나고 느꼈습니다.”
그의 몸을 만지고 그의 반응을 보면서 알 수 있었다.
남자의 신체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산업 스파이로 만나던 뿔테 안경의 연구원이나 배 나온 중년의 정치인들과는 다르다.
솔직히 일정 부분은 그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흥분과 희열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구마하는 결국 이용당하는 거니까요.”
“우리 일이 그렇지 뭐.”
“미안해요. 착한 사람인데.”
“그 마음을 담아. 더 기쁘게 하도록 노력해 보자고.”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