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것보다 위대한 게 있다 (7)
“대체 몇 시간을 잔 거야….”
눈을 뜨니 아침 10시.
당연히 나 혼자 누워 있고 써니 씨는 집에 가고 없었다.
젠장 나 같아도 간다. 잠깐 쉬겠다는 새끼가 8시간을 내리 곯아떨어졌는데 어쩌라고.
“휴우, 연락처는 두고 갔구나.”
끝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다행이다만. 구마하 섹스 라이프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3초… 내가 3초라니…. 흐??허. 돌겠네….
피곤해서, 환경이 바뀌어서, 시합이 끝나서, 그녀가 너무 매력적이라서 등등. 이것저것 핑계를 대 봐도 핵심은 한 번 싸고 난 다음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원래 그러면 더 오래 하는데, 이건 뭐 그런 게 아예 없었으니….
친구들 술자리에서 가끔 듣고 웃기나 했지만 내가 그럴 줄이야.
“와. 체력 더 키워야지. 자존심 상해서….”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럴 만한 만남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섹스란 비쥬얼과 리액션이라고 믿었는데, 어젯밤 써니 씨는 나에게 남자도 여자 못지않게 촉감과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걸 알려 주었다.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다고나 해야 할까.
이래서 섹스는 인류의 축복이라고. 아직도 이런 멋진 세계가 있었다니.
그래도 3초 컷. 허??허.
“또 볼 수 있을까….”
연락처를 보고 있는데. 온갖 감정들이 밀려왔다.
좋은 기분만큼이나 어젯밤 보였던 민망함에 이불 킥을 차며 혼자 침대에서 쿵쿵거리고 있으니 밖에서 황 선생님이 부르신다.
“마하, 일어났냐?”
“네! 선생님.”
호텔 거실로 나가 보니 선생님이 머리에 까치집을 한 채 멍하니 창밖을 보고 계셨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깨우시지.”
“그렇게 자는데 어떻게 깨우냐. 너 방금까지 코 골고 있었어.”
“선생님은 푹 주무셨어요?”
“음. 마하 니가 어제 나 침대에 눕혀 줬니?”
“조금 편하게 해 드렸죠. 저 오기 전에 이미 주무시고 계셨어요.”
“얼마나 잔 건지… 야 여기 침대 좋긴 좋다. 난 눈 떴을 때 내가 왜 이런 데 누워 있지? 하는 혼란이 오더라.”
“피곤하셨죠. 무릎은 좀 어떠세요.”
“기절하듯 자서 그런가, 오늘은 좀 낫네. 너는 어제 시합 뛴 거 어때?”
“저도 괜찮아요.”
깊은 숙면을 취하고 참기 힘든 허기짐이 밀려왔다.
선수촌으로 갈까 아니면 그냥 여기서 공짜 호텔 밥을 먹을까 하는데 선생님이 선수촌으로 가도 우리끼리 밥 먹어야 할 거라도 하셨다.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으음 별 건 아니고. 어제 문식이 친구들이 왔었다고 하더라고.”
“민우 형네요?”
“유도 최민우랑 태권도 애들이랑. 일어나서 전화하니까 감독님 핸드폰을 수길이가 받았어.”
“감독님까지요? 큰 자리였네요.”
“거기 다 용인대잖아. 교수니 학생이니 신나게 먹고 마셨겠지.”
“우와… 그런 술자리는….”
“그렇지. 수명 갈아먹는 자리는 안 끼는 게 좋아.”
라고 하기엔 나도 만만치 않은 시간을 보내긴 했었지.
대표팀도 뻗은 상태라면 점심은 느긋하게 룸서비스로 가야겠다.
선생님도 호사는 누릴 수 있을 때 누리는 게 좋다며 찬성하셨다.
시합 다음 회복 식단인 만큼 호텔측에 신경 써서 주문을 넣었더니 양도 많고 종류도 다양한지라 차리는 데 시간이 걸린단다.
“1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네요.”
“오래도 걸리네.”
“점심이랑 걸려서 그런가 봐요.”
“근데 보통 이렇게 먹으려면 돈이 얼마냐?”
“몰라요. 저도 처음이라. 저도 이렇게 돈 못 써요.”
“생각할수록 뭐랄까… 중국 놈들이 마냥 친절을 배풀 거 같진 않은데….”
“설마 음식에 약 같은 거라도 탈까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지들이 잘 있는 선수 데리고 나와서 대접을 개떡같이 하다니!! 그랬다간 우리가 가만히 안 있을 거야!!”
확실히 그러지는 않겠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자.
“그럼 난 밥 준비될 동안 욕조에 몸이나 담가 볼까.”
“어? 선생님. 오늘은 일정 없어요?”
“없어, 없어. 감독님도 아까 오늘은 쉬는 게 일정이라고 하셨으니까. 앞으로 남은 시간이 있는데 하루 정돈 푹 쉬자고.”
“와 진짜요?”
“녀석. 그렇게 좋냐? 표정이 이겼을 때 보다 더 밝아 보인다.”
“하하하. 좋죠.”
이미 모든 시합을 마친 종목들도 있지만, 우리는 폐막 전날까지 시합이 잡혀 있으니, 장거리 전에 잠깐 쉬어가는 날이 됐구나.
이런 날 써니 씨가 같이 있다면, 온전한 체력으로 함께하는 순간은 얼마나 환상적일까.
“아 참. 마하야. 너 어제 어디 나갔다 왔었니?”
“네? 아니요.”
“그래? 자는데 누가 왔다 가는 소리를 들은 거 같은데. 꿈인가.”
“제가 선생님 눕혀 드리고 신발 벗겨 드리긴 했어요.”
“으음. 그때 말고 2시 정도였던 거 같은데.”
“그냥 바… 방이 커서 그랬던 거 아닐까요?”
아슬아슬한 상황에서의 만남이라 그녀의 흔적이 더욱 진하게 느껴진다.
써니 씨를 생각만해도 불끈불끈 해지는데. 전화라도 해 볼까.
“안 받네.”
한참 업무 중이겠지. 일단 번호는 저장해 두자.
아침 샤워를 하는데 뜨거운 물이 그녀의 따뜻한 입술 같았다.
비누칠을 하며 여기저기 문지르는데 부드럽던 손길이 떠오른다.
그런데 3초. 아 씨발 3초 젠장…
돌겠네. 딸딸이라도 칠까?
보고 싶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잘 들어갔는지 아닌지 걱정도 들고.
씻고 나와서 또 핸드폰을 들었다. 역시나 연락은 없다.
아쉬운 마음에 지난밤 들어온 부재중 전화나 문자들을 확인해 봤다.
꽤 많은 연락이 들어와 있었는데, 성남 놈들. 한상률 감독님.
정준이 형이나 운동하며 만난 인연들. 광고 계약된 기업 마케팅담당자들까지. 다들 어제 시합 결과로 축하 인사를 남겨 주었다.
[멋지다, 마하야. 결승까지 가서 또 역사를 만들어 주라.]
[축하드립니다, 구마하 씨. 끝까지 힘내 주세요.]
[마하야, 나 태윤인데 이거 사단장님 핸드폰이거든. 반드시 금메달 따라고 전해달라신다. 답장할 수 있으면 꼭 고맙다고 전해 드려. 니 답장 여하에 따라 내 휴가가 결정돼.]
[구마 개새끼야, 우리 너 때문에 4시에 퇴근했어. 적당히 해.]
[동메달 축하해. 마하야. 너 언제 한국 오냐?]
[마하야 기자들한테 니가 선수촌에서 나왔다는 말을 들었다.
양 실장이랑 회사 사람들 북경에 있으니까 메시지 확인하는대로 연락 바란다.]
아 맞다. 회사 사람들은 아직 모르지.
감독님 문자를 보고 바로 민구 형한테 전화를 건다.
“형!”
“어. 너 지금 어디있어?”
“감독님 연락받고 그러시는 거죠?”
“그래. 무슨 소리야? 선수촌을 왜 나와?”
“형 어디세요? 아직 점심 안 드셨으면 이리로 오세요.”
“어디길래?”
호텔 위치를 알려 주니, 바로 민구 형과 길수 형이 찾아왔다.
다만, 보안이 보안인지라 내가 로비까지 내려가 직접 형들을 데려와야 했다.
“형!!”
“어이고. 야 뭐야…? 너 괜찮아?”
“괜찮죠. 그럼. 왜요? 누가 저 뭐 다쳤데요?”
“다쳤다는 건 아니지만. 이분들은 누구셔?”
“제 보디가드요. 길수 형도 안녕하셨어요? 일단 올라가요.”
“보디가드가 있어??”
방으로 돌아와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이야길 들으니 형들도 대충 상황은 납득하는 거 같다.
“언론에서 널 찾는데, 회사도 위치를 모르니까 걱정했지.”
“에이 뭘 걱정해요. 내가 무슨 뭐 앤가.”
“특별 보호 대상이라면서 데리고 왔다고?”
“네. 기자들이 눈에 불 켜고 다녔다는 걸 보면 한편으론 이쪽 생각이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음. 그래도 이건 좀 이상하지 않나?”
“이상할 거 없는데. 보셨잖아요. 저 안전해요. 경비원도 있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민구가 걱정 많이 했어. 뭐가 됐든 나쁜 상황은 아니라 다행이 네.”
“정말요? 미안해요. 바로 연락할걸.”
“뭐 너도 시합 마친 다음이라 피곤하긴 했겠지만… 그럼 혼자 있는 거야?”
“아니요. 코치 선생님 같이 계세요.”
“어어.”
민구 형이 호텔 방을 둘러보며 말한다.
“이런 방을 줬다고?”
“네.”
“대단하네. 역시 구마하. 무료로 스위트룸이라니.”
“길수야 잠깐만. 마하야 식사 같은 건 그럼 어떻게 하는 거야?”
“어제는 레스토랑에서 먹었고. 지금은 룸서비스 시켰고요.”
“돈은?”
“지들이 공짜로 준다고 했는데.”
“…진짜로?”
“그래야죠. 자기들이 끌고 나왔는데. 밥은 어떻게 먹으라고.”
“그래도 되는 건가…?”
“몰라요. 우리도 해 준다니까 받고있어요.”
“민구야 왜? 뭐가 걸려?”
“걸리지. 이상하잖아. 다른 유명한 선수들도 많은데 왜 굳이 얘만. 그것도 올림픽 중간에. 넌 안 이상해?”
“글쎄다. 나는 올림픽 시스템을 몰라서. 보통 선수촌 들어가면 못 나오는 건가?”
“그건 아니고요. 상황 따라서 선수촌 힘들다고 하면 호텔 잡는 애들도 있고 그래요. 미국 어떤 선수단은 자기들만 따로 건물 전 세 낸 사람들도 있고.”
민구 형 길수 형과 있는데, 황 선생님이 말끔한 모습으로 등장하셨다.
“대화 소리가 들리길래 밥 온 줄 알았더니, 누구시냐 마하야?”
“아. 선생님. 우리 회사 형들이요.”
“회사?”
“한구 스포츠.”
“어~ 어.”
형들도 선생님을 보며 꾸벅 인사를 건넨 뒤 명함 한 장씩을 꺼내들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먼저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아아. 아니야. 씻고 있었는데. 반가워요.”
“감독님이신 거죠?”
“감독님은 지금 다른 선수들이랑 선수촌에 계시고, 나는 수석 트레이너지.”
“어… 그럼 팀이 쪼개진 건가요?”
“상황이 상황인지라 일단 그렇게 하기로 했어.”
팀이 쪼개졌다는 말에 민구 형의 걱정은 더 깊어진다.
“괜찮아. 팀이 갈라졌다고 해도 우리는 원래 개인 종목이라.”
“태릉에서도 감독님이 형들 전담하셨고, 전 황 선생님이랑 다른 분들이랑 주로 같이 훈련했었어요.”
“그래도… 다 같이 있는 게 조금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형이 지금 걱정이 많아요. 제 매니저라.”
“어어. 일단 대사관도 나서서 그래도 된다고 하니까.”
“대사관이 나섰다고요?”
“음. 우리도 처음엔 반발을 했지. 보안 문제도 있고, 이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니까.”
“흠… 대사관이면….”
“너무 신경쓰지 말자 민구야. 대표팀 일은 너가 또 모르는 거잖아.”
“그렇지. 죄송합니다, 선생님. 제가 주제넘게 나섰네요.”
“아니야. 신경 써주면 고맙지.”
“맞아요. 형. 내가 애도 아니고 뭘 그렇게 사서 걱정을 해요.”
“사서 걱정이 아니라 이놈아. 세상에 조건 없는 호의란 없으니까 그러지.”
대사관 이야기까지 나오니 민구 형도 조금 안심이 되는 것 같다.
그때 형이 물었다.
“너 뭐 누구 이상한 사람 만나거나 한 건 없지?”
“…….”
“없어 없어. 어제 나랑 있고 오늘 나랑 있었는데.”
“그럼 다행이고요.”
있긴 한데… 근데 그걸 말하자니 으음…
“띵동“
어? 밥 왔다. 휴우 다행이다.
식사가 도착해 분위기를 바꿀 수 있었다.
식탁 가득 차려지는 접시들을 보니 민구 형도 마음이 풀리는 거 같았다.
“이렇게가 공짜라고?”
“설마 맨날 이렇게 먹는 거야?”
“오늘 처음이에요. 우리도 어젯밤에 왔다니까요.”
“어제도 근사하긴 했었지.”
“와… 민구야. 이건 걱정이 아니라 고마운 상황 같은데?”
“자. 자 일단 들자고. 앉아요. 거기 그쪽도 앉고.”
“어이고야. 이걸 경비로 처리하면 돈이 얼마야?”
이상한 사람이라. 써니 씨를 이상하다 봐야 하나?
아무튼, 형의 걱정과 관심에 또 한 번 감동을 받는 순간이다.
대표팀 형들도 좋지만, 역시 민구 형의 존재감을 따라잡을 순없어.
“양 실장은 몸이 좋아. 운동했었나?”
“네. 육상 했습니다.”
“어? 그럼 혹시 이 친구가 그 친구? 마하 너 정신 차리라고 때렸다는?”
“으?하! 선생님. 제가 마하를 때린 게 아니라요!”
“와 진짜 그날… 뒤지게 맞았죠.”
“흐하하하! 마하야. 이럴 거면 그냥 깔끔하게 고소장을 보내.
맨날 민구 얘기 이상하게 말하고 다니지 말고.”
“그래도 돌이켜 보면 참 고마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야, 이 씨! 넌 인마 말을 그렇게 하면!!”
너스래를 떨며 민구 형한테 장난을 치고 있는데 황 선생님이 벌떡 일어나 손을 내미셨다.
“아이고!! 이야. 반갑네! 나랑 악수 한번 해요. 보고 싶었어!!”
“아하하…. 제가 뭐라고….”
“뭐긴. 잘 때렸어. 덕분에 한국 복싱이 아주 큰 은혜를 입었지.”
“허허… 선생님….”
즐거운 식사 자리였다.
민구 형과 스파링. 모두가 함께한 남미 트레이닝. 선생님도 이야기마다 큰 웃음과 리액션으로 화답을 해 주시고, 우리가 모르던 최두필 관장님의 선수 시절도 들려주시며 대화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정말 오랜만의 휴일에 이렇게 가까운 사람들과 편안한 시간을 보내니 여자랑 있는 것 못지않게 즐겁고 행복하단 기분이 차오르는 것 같다.
“그럼 마하는 처음부터 프로를 염두하고 있었구나.”
“아무래도. 직업으로 운동을 할 수 있으니까요.”
“고맙지. 너 같은 선수가 프로가 돼 준다면.”
“선생님. 마하가 프로가 되는 게 한국 복싱에도 좋은 이야긴가요?”
“아, 그럼. 물론이지. 좋다마다. 스타 플레이어의 등장은 생태계가 달라지는데.”
선생님이 나를 훈훈하게 보시며 허벅지에 꾸욱 힘을 실어 주신다.
“프로도 프로지만 일단 올림픽부터. 음!”
“네!”
마침 형들이 있다 보니 한국 상황도 전해 들었다.
“어제 이겨서 난리가 났었다면서?”
“저희도 연락만 받아서 잘은 모르지만, 엄청났었다고 하더라고요.”
“아이고. 그런 걸 직접 느꼈어야 하는데.”
“선생님은 현장에 계셨잖아요.”
“대단했지. 일단 경기내용 자체가 박진감이 넘쳤어.”
“저도요. 2라운드 끝날 때는 제가 지는 줄 알았어요.”
“다음은 좀 수월할까요?”
“모르지. 이제부턴 주최국 선수를 만날 거라.”
선생님은 준결승을 지나 결승까지 중국 선수를 만날 거라 예상하셨다.
“그럼 저쪽은 양웨이가 올라오는 건가요?”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지.”
“그 선수도 잘하는 선수죠?”
“도하 아시안게임 챔피언이야. 그냥 올라온 게 아니라 카자흐, 우즈벡. 피지컬 좋은 중동 선수들을 실력으로 꺾으며 메달을 땄어.”
“카자흐 우즈벡이면 그냥 러시아라고 봐야 하죠?”
“역시 민구가 잘 아네. 운동을 해서 그런가.”
“되게 큰 거 같던데.”
“키 저랑 똑같아요. 몸무게는 조금 더 나가는 거 같고.”
“체격은 동급. 파워는 동구권을 넘는다고 봐야지.”
“주먹 스피드는 제가 더 빠르지 않나요?”
“빠르긴 할 건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
“혹시 판정?”
“으음. 마하 상대로 판정에 장난질 할 수는 없을 것이고. 이놈명성이 있으니까.”
황 선생님이 비어있는 접시들을 쭉 훑어보면서 말씀하신다.
“시합 뛸 녀석 앞두고 이런 말 어떨지 모르지만, 뭔가 함정이 있을 거라는 게 우리의 예상이긴 해.”
“무슨 함정이요?”
“선생님. 그냥 말씀해 주세요. 저도 알아 두면 좋잖아요.”
“음.”
모든 운동선수에게 올림픽은 커다란 의미가 있지만, 그런 우리보다 올림픽에 더 큰 의의를 두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러시아 중국 같은 공산 국가들이다.
그들은 승리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냉전 시대 이후 쭉 그래왔고, 아마 지금도 버젓이 눈 뜨고 비겁한 짓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약물이요.”
“아마 나올 거야. 그래서 예상을 해도 그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 줄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도핑은 다 걸리지 않나요?”
“걸리지. 근데 러시아나 중국 약물은 뭐랄까… 늘 IOC의 예상을 넘어서는지라.”
“옛날엔 미국도 그랬었죠?”
“그랬지. 미국은 그래도 어느 순간부터 정신을 차렸는데.”
“결국 다 걸리지 않을까요? 혈액 보관한다고 들은 거 같은데.
맞지 마하야?”
“맞아요. 2005년부터 피 다 뽑아 가는 걸로 바뀌었어요.”
“그래도. 당장 시합에서의 승패를 바꿀 순 없으니까.”
길수 형이 나랑 민구 형을 보며 묻는다.
“나는 운동을 안 해서 모르는데. 약물이 그렇게 위협이 돼?”
“되지. 결과를 바꾸는데.”
“마하는 그걸 압도하는 실력이 있잖아.”
“에이. 형. 제가 뭐라고. 올림픽 본선까지 온 선수는 누가 메달을 따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긴 해요. 실력이 고만고만해서.”
“그래?”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봐야 해. 특히 복싱 같은 격투 종목에 있어서는.”
“그래서 저도 매 시합마다 가서 오줌 누고 오잖아요.”
“야. 그거 안 쪽 팔리냐?”
“아테네 땐 미칠 거 같았는데. 이제는 뭐 별 신경도 안 쓰인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난 마하면 상대방이 무슨 짓을 하든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엄청난 확신이 담긴 길수 형의 목소리에 모두들 얼굴에 큰 웃음이 지어졌다.
“와. 길수 믿음이 대단한데?”
“대단하지. 마하는 괴물이야. 약물이 괴물을 어떻게 이겨.”
“하하하! 형? 그건 칭찬이 아니잖아요.”
“다 덤비라 그래. 치졸한 짓 해 봐야 그런 승리가 무슨 영광이 있어.”
황 선생님도 물잔을 높이 들며 말씀하셨다.
“그래! 나도 길수 이 친구 의견에 찬성한다.”
선생님 모션에 맞춰 우리도 주스니 물이니 잔들을 높이 든다.
“맞습니다. 제가 보여 주겠습니다!!”
“어우. 뭔가 길수 덕분에 뜨거워지는데?”
“하하! 그럼 길수가 건배사 해 봐.”
“건배사요. 음. 구마하는 지지 않는다!!”
“아… 형….”
“하하하!! 야 그건 좀 별론데?”
“별로야? 어 그러면. 이건 어때?”
별로라는 말에 길수 형이 자기 가슴을 쿵쿵 두드린다.
“이길수 있다!!”
“뭐야? 무슨 뜻이야?”
“설마. 형?”
“어. 단순하게. 여기 나 있으니까. ‘이길수 있다’는 뜻으로.”
센스는 부족하지만 사람을 웃음 짓게 만드는 데는 충분하고 넘치는 응원이었다.
선생님도 흡족하시는지 길수 형을 보며 목소리를 크게 높여 주신다.
“좋다! 우리는 ‘이길수 있다’!!”
“하하하! 너무 억지 아닌가요?”
“뭐 어때. 세상 억지스러워도 이겨 나가는 거지.”
“좋습니다. 그럼 가겠습니다!!”
큰 소리로 따라 외쳤다.
“우리는 ‘이길수 있다’!!”
“진짜 있다!”
“정말로 여기 눈앞에!!”
“하하하하!!!”
그렇게 즐거운 점심을 마칠 무렵 핸드폰에 부재중 연락이 하나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