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것보다 위대한 게 있다. (11)
“민구 형! 결승전 축하드려요!!”
준결승을 기다리며 코치님들과 대기실에서 민구 형의 시합을 지켜봤다.
판정까지 끌고 가 형의 승리로 마친 경기.
함성이 크길래 오늘 관중들은 호응이 좋구나 했는데, 형이나 감독님. 세컨드를 섰던 창수 형. 다들 말하길 그게 응원이 아니라 야유 소리였단다.
“왜요? 형은 엘살바도르 선수랑 붙었는데??”
“왜일까? 하하하!”
“야. 너도 각오 단단히 하고 들어가. 중국 새끼들 존나 살벌해.”
헤비급만 중국 선수가 두 사람 출전이 예정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중국 측에 기울기는 하겠다 싶었지만. 상상이상으로 아우라가 과격한가 보다.
감독님도 오늘은 올림픽이 아닌, 아폴로의 복수를 하기 위해 러시아로 떠나는 록키의 심정으로 경기장에 오르라고 하신다.
“그게 뭐예요?”
“뭔 소리야. 너 록키 안 봤어??”
“로… 록키요? 람보는 어렸을 때 TV에서 보긴 했는데…”
“이 자식이! 권투 선수라는 놈이!!”
황 선생님이 침착하게 설명해 주시길. 적 홈그라운드에서 챔피언 벨트를 뺏는 시합이라고 생각하라셨다.
“챔피언 벨트라.”
“물론, 우리는 마하가 이런 걸로 쫄거나 하는 성격 아니라고 믿지만.”
“걱정마세요.”
“진심이냐?”
“아우 그럼요. 제가 누군데요.”
“록키도 안 본 놈이… 큰 소리는…”
누가 그랬더라?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보다 미워하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진가를 느낀다고 했었는데.
지금까지는 늘 응원받던 입장이었으니, 오늘은 그 반대가 되는구나.
“마하야, 준비해라.”
“네!!”
대기실을 나서 경기장으로 향하는 복도.
벌써부터 우리 시합을 맞아 야유 소리가 들려온다.
올림픽 평화의 제전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아니다. 올림픽은 전쟁이다.
“와. 이거 참…”
“어이구야… 이 정도라고…?”
“…….”
“수길아, 뭐 하냐?”
“네! 감독님. 마하야, 너 괜찮겠어?”
복도 양옆 관중들이 우리를 보며 소리를 지른다.
인상을 구기고 이해되지 않을 중국 욕을 쏘아 대며 어떤 이는 침까지 뱉었다.
아니. 침은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뱉을 거면 그 옆에 젊은 여성분이 뱉든가.
링에 오르는데, 상대편 중국 선수가 국기를 몸에 걸고 있었다.
“선생님. 저래도 돼요? 프로 경기도 아닌데.”
“뭐 어떠냐. 맘대로들 하라고 해라.”
“흠.”
감독님과 다른 코치님들은 앞서 민구 형 시합 때 한번 겪어서 그런가 대수롭지 않아 하셨고. 수길이 형은 확실히 성난 군중들의 반응에 조금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황 선생님이 침착하게 말씀하셨다.
“오늘 시합 끝내고 다시 호텔로 갈 거지?”
“네.”
“그래. 그럼 우리 비싼 거 먹자.”
선생님의 그 한마디가 어찌나 유쾌하게 들리는지.
저들이 아무리 나를 저주하고 미워해도. 결국 우리는 중국 사람들이 내는 세금으로 초특급호텔에서 머물며 밥도 공짜 술도 공짜숙박비도 공짜로 지내고 있다.
이렇게 따지면 어느 정도는 원망을 듣는 것도 이해가 되네.
“하하하! 알겠습니다.”
“어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경기 앞두고.”
“별 거 아닙니다. 감독님 말씀하세요.”
“후우, 마하. 내 눈 봐 봐.”
“웁!”
“눈빛 좋다. 우선 1라운드 잘 지켜보고.”
“웁 웁!!”
“그래도 네가 할 수 있는 건 최대로 보여 주고 와!!”
고개를 돌려 상대편 선수를 보았다.
이름이 리슈 뭐라고 했는데… 아무튼.
나를 보는 눈에 투지를 넘어 살기가 느껴진다.
무엇보다 저 선수 온몸에 이글거리는 비상식적인 투기.
“…….”
도핑한 선수는 저렇게 보이는구나.
새끼들. 그렇게도 나를 이기고 싶었더냐.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눈빛을 마주치는 관중들의 시선이 증오심으로 가득하다.
“훗.”
뭐 먹지? 뭐를 먹어야 저 이글거리는 시선을 역설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까.
그런 유치한 상상을 해가며.
땡!
상대편 선수와 글러브를 터치하며 인사를 나눴다.
* * *
“후우, 끝났다.”
“…….”
“…….”
“아. 그래도 결승은 가네요.”
“뭐 인마? 결. 승. 은. 가. 네. 요?”
감독님 이하. 모두들 걱정을 많이 했었는가 보다.
혹여나 내가 위축되고 주늑들어 제 실력을 내지 못할까 초조했었단다.
그러나 결과는 1라운드 3분 TKO 승리.
체격이 좋은 선수라 그런가, 여기저기 맞추기 좋은 것도 있었지만, 나도 무지하게 때리긴 한 거 같다.
“마하야!!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네? 어. 그냥 뭐 연습대로 한 게 다죠.”
“수길이 나와 봐라. 이놈아. 너 내가 시합 전에 뭐라고 했어.”
“1라운드 잘 지켜보라고…”
“그래. 근데 왜 그렇게 초장부터 돌격을 하다 말아.”
“감독님. 마하가 잘 못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뭐라고 하십니까.”
“황 코치는 내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 같아! 칭찬하는 거야!!!
움하하하!!”
도핑을 한 선수였다.
무엇보다 내공을 읽어 보니, 관중들의 열성적인 응원이 점점 그에게 에너지를 심어 주고 있었다.
빠르게 시합을 결정지을 필요가 있어 인사를 나누자마자 얼굴로 펀치를 지르고. 3분 동안 쉬지 않고 계속해서 주먹을 질러댔다.
말 그대로 연습대로 했다.
연습대로 양손을 번갈아 가며 썼고, 연습대로 스텝을 빠르게 움직여 몸을 피했다.
나는 핵주먹이 아니다.
스치기만 해도 치명타 같은 건 어렵지만, 지대공 미사일 정도의 펀치를 연속해서 쏟아부으면 제아무리 강한 맷집을 가진 상대라해도 방어막을 뚫는데 어려울 건 없었다.
그렇게 은메달을 확보하며 마침내 결승을 바라보게 된다.
“감독님, 오늘은 애들 다 데리고 호텔로 가시죠.”
“왜? 민구랑 마하 미리 축배라도 들게?”
“아니요. 그런 걸 떠나서. 호텔 밥이 비싸잖아요.”
오늘 시합을 치뤘으니, 결승까진 또 3일이란 시간이 주어진다.
하루 정도는 호사를 누려도 좋지 않겠냐는 황 선생님 의견도 나쁘진 않지만. 감독님을 비롯 다른 코치 선생님들은 미리 그러다 부정 탄다고 호텔 잔치는 결과를 보고 난 다음에 하자고 하신다.
“단, 민구가 가고 싶다면 가도 괜찮고.”
“후훗. 저도 결승까지는 그냥 선수촌에 있고 싶어요.”
“어….”
“왜? 니네는 가고 싶으면 가.”
“아니요. 주장이 그러신다는데…”
“네…. 선수촌 밥도 맛있어요….”
민구 형이 어깨를 다독이며 말해 준다.
“마하야, 솔직히 난 니가 오늘 질 줄 알았다.”
“어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뭔가 복싱은 헝그리 정신이 있어야만 잘 한다는 믿음이 있었거든. 근데 오늘 너 보니까 그런 생각도 버려야 되겠더라.”
“형… 저 호텔로 빠져서 싫으세요?”
“싫긴. 각자 좋은 방법이 있는 거지.”
내용으로 보여 주었으니, 주장은 얼마든지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지내라고 하신다.
감독님도 다른 코치 선생님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해 주셨다.
“금메달만 따.”
“그래. 이래 놓고 결승에서 양웨이한테 지지 말고.”
“하하. 알겠습니다.”
저녁. 호텔에서 민구 형과 길수 형. 그리고 회사 응원단을 만났다.
다들 미리 축배를 들어선 안 된다고 하지만, 분위기는 이미 엘도라도를 발견한 탐험가들같이 들떠 있었다.
“마하야, 근데 이러다 진짜 금메달 또 따는 거 아니냐???”
“형, 왜 이래요. 방금까지 길수 형한테 부담 주지 말라고 하던 사람이.”
“아니 그래도. 야 이건 뭔가…? 뭔가…??”
“뭔가 뭐요? 뭐? 빨리 얘기해요.”
“그냥 모든 게 너무 놀랍잖아.”
나의 승리가 오롯이 나 한 사람의 축복이 아니다.
같이 했던 동료. 최 관장님, 정 코치님, 우리 형과 나를 복싱으로 이끈 민구 형, 그리고 태릉 식구들 모두에게 커다란 의미가 된다.
물론, 내공이란 존재가 그만큼 일상적인 세상관 동떨어지는 강한 힘을 가진 것도 있지.
그걸 아니까. 이번 승리는 오롯이 실력이 아닌 모두의 공이 크다는 걸 잊지 말자.
그리고 써니 씨. 정점을 찍어 준 마지막 인물.
그녀와의 불타는 사랑이 아니었다면 오늘 나는 축하가 아닌 위로를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하야, 그럼 우린 갈게.”
“네.”
“야. 몸 관리 잘하고. 밥도 조심해서 먹고.”
“아우 그럼요.”
“마하 씨, 끝날 때까지 힘내시고요.”
“고맙습니다. 우리 한국 돌아가서 제대로 파티해 봐요.”
회사 식구들을 보내고 황 선생님과 또 단 둘이 남았다.
“사람들이 오가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네.”
“고생하셨습니다.”
“씻고 우리도 뭐 좀 먹으러 가야지?”
“레스토랑으로 가실까요? 아니면 룸서비스?”
“방에서 먹는 게 좋긴 하던데.”
“그럼 또 먼저 들어가서 선생님 것까지 같이 시킬게요.”
편안한 이야기를 나눴다.
황 선생님은 시합이나 양웨이 결승전 같은 단어를 일부러 안 쓰시는 것 같았다.
오히려 올림픽 이후의 계획에 대해서 많은 걸 물어보신다.
“아까 니네 회사 사람들 얘기 들어보니까. 올림픽 끝나도 정신없겠더라.”
“보통 그렇죠. 그게 또 회사 굴러가는 이야기기도 하고요.”
“국가 대표는 또 은퇴하는 거지?”
“네. 근데. 음… 모르겠어요.”
“뭘 몰라?”
“목표했던 게 있었거든요. 그게 이뤄지지 않을 땐 다시 또 돌아와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부모님 이야기가 나왔다.
지금은 올림픽에 전념하느라 어떻게 액션을 취하지 못하지만, 부모님을 꼭 찾고 싶다는 생각에 황 선생님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해주신다.
“그런 이유로 명성이 필요하다면 국가 대표보단 프로로 가는 게 낫지.”
“정말요? 전 프로는 직업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우리나라 현실에서나 프로 선수가 국가 대표보다 인지도가 낫지. 세계로 보면. 뭐. 타이슨을 봐도.”
“제가 타이슨 같은 스타일 복서는 아니잖아요.”
“알리는 될 수 있잖아.”
“어우 선생님. 그쪽은 Great란 수식어가 붙는 분이세요.”
“그럼, 마하 넌 뭐가 되고 싶은 건데?”
“전 그냥 구마하죠, 뭐.”
“으하하하! 야 인마! 세상 사람은 그걸 더 어렵게 생각할걸?”
선생님은 일부러 시합에 관한 이야기를 배제하고 계셨지만, 난 준결승에서의 감상을 털어놓고 싶었다.
“선생님, 아까요. 저희 경기장 입장하기 전에 어떤 사람들이 우리 쪽 향해서 침 뱉었었잖아요.”
“못 배워먹은 놈들이지. 그런 시민 정신으로 무슨 올림픽을 치르겠다고.”
“전 좋았어요.”
“…그게 뭐가 좋아?”
“그냥 제가 이 정도 존재감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었거든요.”
“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절 싫어하는 걸 보고 나니까. 이제는 오히려 많은 분들이 날 좋아해주는 게 진짜였구나 하는 확신이 생겼어요.”
나의 지난 시간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눠지는 것 같다.
외롭고 적적한, 세상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못 생기고 볼품없던 꼬마에서. 감정을 알게 되고 누구보다 간절하게 사랑을 갈구했던 학생.
그리고 마침내 운동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해. 많은 시간을 거쳐 그 사랑을 손에 쥐었지만, 그것이 정말 내 것이 맞는지 확신을 할 수 없었던 20대의 청년기.
물론 아직도 20대 청년이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하루 더 나이를 먹었으니까.
“이제는 의심하지 않을 수 있어요, 선생님.”
“뭘 의심했는데?”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의심요.”
돌이켜보면 난 늘 누군가를 사랑할 때. 행복보다 불안함이 컸던 것 같다.
이 행복이 사라지면 어쩌나. 이 사랑을 놓치게 되면 어쩌나.
내가 부족하면 어쩌나. 원치 않은 실수로 이 사람이 날 싫어하게 되면 어쩌나.
세상에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어떻게 되나.
아니야. 이제는 그런 불안을 느끼지 않아.
불특정 다수의 누군가가 내 앞에 침을 뱉었다고.
그것이 현실이야.
누군가의 침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것도 현실이었던 거야.
“그래서요. 전요 선생님. 오늘 관중들이 너무 좋았어요.”
“하하하! 이 녀석아. 그게 뭐가 좋아? 매너 없는 거지.”
결승전은 더 매너 없고 더 크게 화내고 더 소리를 질러 주길.
그런 경기를 보여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