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90화 (390/401)

나를 사랑해줘요(3)

아마 올림픽을 과거로 대입하면 천하제일 비무대회정도 되겠지.

그런 대회의 마지막 경연을 앞둔 자라면 엄격한 수행을 거쳐 마음 체력 정신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했을 것이다.

빈틈을 용납하지 않고, 끝까지 냉철하게 자신의 욕망을 다스려.

그렇게 진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승리자가 되겠지.

반면 나는 어찌 이리 한심한지…

그냥 내공을 쓸 줄 알고 몸을 강하게 단련했을 뿐…

나는 철부지 좆밥인데…

분노와 실망감에 뜬눈으로 밤을 보낼 거 같았는데, 이상하게 혼자 침대에 누워 있으니 졸음이 쏟아졌다.

“씨발, 지금 이 상황에 잠이 오냐. 어! 잠이 와!!”

마치 잠들면 모든 것을 잃기라도 하는 듯 억지로 정신을 부여잡으며 혼잣말을 되뇌고 또 되l다.

개새끼들. 메달? 그래 줄 게 이것들아.

금메달이 목적이라면 준다고.

니들은 금메달이 엄청 귀할지 몰라도 난 뭐 이미 많아서 별로 아쉬울 것도 없거든.

무엇보다 애초에 내 목적은 부모님을 찾을 수 있는 명성이지 메달이 아니었어.

그런 각오로 올림픽 결승까지 올라왔다고.

여기까지 온 것만도 충분히 목적을 달성한 거야.

내가 지금 여기 있어 모르지, 세상은 이미 나에 대한 이야기로 시끌벅적 떠들고 있을 테니까.

그런 더러운 메달 따위…

“어우 씨!! 아니지!! 그건 아니야!! 메달이 왜!!!”

라고 또 덥석 다 내주는 건 자존심이 용납이 안 된다.

침대를 퍽퍽 때리면서 기합을 넣었다.

놈들한테 아무것도 안 준다.

금메달만이 아니라 은메달. 동메달. 그냥 다른 체급까지 다 내가 뺏어오겠어!!

내가 가진 힘. 재능! 능력! 그 모든 것을 써서!! 이 자식들을!!

“…….”

갑자기 후두부로 강렬한 라이트 훅이 날아와 때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 재능과 힘. 내공을 볼 줄 안다는 자만이 결국 이 사태를 초래했으면서… 뭘 또 이렇게 잘난 듯 큰소리를 치는 걸까…

“하아….”

진정하자. 아직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어.

그저 코치와 선수가 나뉘었을 뿐.

선생님 말씀대로 아침에 다시 침착하게 상의를 하면 된다.

어찌 됐든 난 구마하니까.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데 놈들도 이 이상 나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할 수는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팀에 부담 주는 짓은 하지 말자.

올림픽은 나만이 아닌 다른 선수들에게도 최고의 무대니까…

그렇게 모쪼록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조용히 올림픽을 마친 뒤.

조용히 한국에 돌아가서…

“돌아가서 그 뒤엔… 그리고….”

정말 어떡해야 하는 걸까…

부모님의 문제를 떠나도 내가 남았다.

어떠한 경험을 하고 난 다음엔 그것이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데 있어 판단 기준이 되는데. 이런 일을 겪고 난 뒤 내가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그 사람은 또 무슨 목적을 가지고 다가올 줄 누가 알아…

성공한 사람들이 연애고 결혼이고 쌩까고 싱글로 지내는 게 괜히 그러는 게 아니구나.

그 사람들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할 깊은 상처가 있는 거야. 사랑하는 만큼, 좋아했던 만큼, 아픔이 깊이 남으니까….

이제는 누군가를 만나기 전 긴장부터 해야 하는 건가.

평생 그런 두려움을 안고 살라면 진짜 혼자 사는 것도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도….

젠장, 그렇지만 난 외로운 건 죽기보다 싫은데.

그렇다고 사랑을 의심하고 싶지도 않고.

외롭고 싶지 않아…

상처받고 싶지도 않고…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제발 아무나 날 좀 사랑해 줘.

그럼 정말 나도 당신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줄 수 있는…

“헉! 헉…! 허억 허억….”

뭐야? 언제 잠이 들었지?

눈을 뜨니 아침 8시. 고요함만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맞다. 선생님도 안 계시는구나….”

거실로 나오니 어젯밤의 분위기가 새삼 온몸에 닭살을 일으킨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보았다.

어제와 다른 보디가드들이 있었다.

“…….”

“Good morning. Mr. KOO.”

굿모닝은 씨발 것들…

빨리 가서 황 선생님이나 모셔오라고 아침 먹으면서 이야기 나눌 거라고 하니. 새로운 경호원들이 정색하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 젖는다.

“왜? Why not!!”

보안상의 문제란다.

자세한 건 설명 드릴 수 없으니 방으로 들어가 있으면 식사는 자기들이 가져다 주겠다는데.

“하하하. 크하하하하!!!”

“What…?”

“오케이 오케이 알았다. 알았어. 개새끼들.”

황당해서 웃음만 나오네.

바로 옆 방에 영국인가 어디 VIP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럼에도 이렇게 주저 없이 지들 의견을 고집한단 말인가.

이게 감금이지 무슨 특별보호대상이야.

상황이 이렇다면 선생님도 나랑 똑같이 감금 상태라고 보는 게 맞겠지.

모쪼록 아무 일도 없어야 할 건데…

“돌겠네.”

팀에 폐를 끼치지 말자고 했지만, 이런 상황을 가만히 지나가는 것도 아닌 거 같고.

어차피 오늘은 오후 훈련이 잡혀 있으니.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감독님이나 다른 코치님들이 먼저 알고 연락을 할 거야.

그럼 대한체육회든 어디든 도움을 주겠지.

징계는 그때 가서 받자…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는 거다.

모든 잘못은 내가 했으니까.

“…….”

무슨 잘못을 했냐고…?

글쎄다. 사랑을 갈망한 죄라고 해야 하나…

젠장 이 와중에 존나 카리스마 느껴지네.

상처받은 남자의 마음을 이보다 더 표현하기 어려운 좆같은 말이 또 있을까 싶어진다.

그래도 그게 사실이니까…

내가 실수한 건 써니란 사람을 믿었던 것뿐이고.

그녀의 모든 행동을 너무 의심 없이 받아들였을 뿐이고…

“나 진짜 상처받았나 보네. 어떻게 이러냐.”

써니 씨 생각에 꼴림이 없다.

그녀를 떠올리기만 해도 움찔거리던 리틀 구마하가 미동도 하지 않아.

지금도 눈만 감으면 6시간 다이렉트 섹스가 생생하게 펼쳐지는데.

설마 이런 일로 발기부전이라도 오진 않겠지…?

그건 그거대로 무서운데…

대체 그녀의 목적은 뭐였을까…

지금 전화를 해도 안 받으려나?

“아 액정이….”

어제 냅다 집어던졌다고 핸드폰 액정이 박살 나 있었다.

그거 조금 충격에 액정이 깨지냐… 백 만원 넘게 주게 샀는 데…

연락처 모르는데. 이제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다는 뜻인가…

“뭔가… 이것도 내 잘못 같네.”

그래 모든 게 내 잘못이다.

엄밀히 나는 주영이를 만나고 있었다. 그녀도 나에게 호감이 있었다.

만약 내가 헛짓거리만 안 했다면 우리는 올림픽이 끝남과 동시에 평범한 연인이 됐겠지.

내가 이주영에 대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선수촌을 나와 호텔로 왔어도 써니 같은 사람을 애초에 거절했다면…

“좆같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문제라는 데 이견이 없어.”

사람을 너무 쉽게 보았다.

사람의 내공을 읽기 시작한 뒤부터 더 그런 걸 과신하고 있었다.

형은 늘 내면을 읽을 수 있어도 함부로 상대방을 판단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이것도 수행 부족인가…

가만히 있다간 마음이 무너질 거 같아 TV를 켰는데, 듣기에도 짜증 나는 중국어만 주구장창 흘러나왔다.

어차피 공짜. 포르노 채널이나 켜 둘까 싶지만, 그것도 뚜렷한 해결책은 아닌 거 같아 핸드폰을 든다.

그냥 형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아 씨 액정이….”

박살난 액정 때문에 전화 걸기가 어렵다.

그나마 형이 아니라면 형수님인데. 이쪽도 연락은 안 되고.

가족들 아니면 내가 전화번호 기억하는 사람은 현재 딱 하나.

“정석이 새끼도 전화 안 받으려나.”

어제 경기로 또 한바탕 뒤집혔겠지. 먼저도 새벽 4시까진가 일했다고 했잖아.

그래도 정석이 목소리를 듣고싶다.

이 말도 안 되는 감옥 속에서 소중한 놈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야!!

“누… 누구세요?”

―너 내 목소리 몰라?

낯선 여성이 전화를 받길래 설마설마했지만, 상식적인 선에서 정석이 전화를 아무렇지 않게 받고 나한테 대뜸 ‘야!’라고 할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는가.

“선아냐?”

―그래!!

“니가 왜 정석이 전화를 받어?”

―정석이 지금 자고 있어.

“…니네 어딘데?”

―얘 자취방.

“하이고… 선아야… 그런 걸 그렇게 막 얘기해도 돼?”

―뭐? 너도 이혜정이랑 동거 했었잖아.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역시나 어제 하루 가게는 난리가 났고, 거기에 남수랑 태윤이까지 휴가를 나와 해가 뜨는 아침까지 모여 마시고 떠들었단다.

그냥 그런 이야기를 듣는 자체가 나에게 힐링이 되는 것 같다.

“새끼들 술 좀 작작 마시지.”

―사장님도 같이 드셨는데?

“사장님? 우리 형?”

―응.

“근데 왜 너까지 사장님이야??”

―나도 지금 가게에서 알바하고 있거든! 아하하!

“하하하! 그래? 안 힘들어?”

―괜찮아. 올림픽 때문에 잠깐 하는 거니까. 재밌어.

그랬구나.

내가 지옥같은 밤을 보내도 한국은 다들 행복한 시간을 보냈구나.

다행이다.

그런 소식들 하나하나가 너무 나를 안심시켜 준다.

“그럼 오늘은 쉬겠네.”

―쉬어야지. 그래야 또 결승 때 불타오르지.

“그렇구만. 잘 됐네.”

―넌 좀 어때?

“난 뭐. 난 그냥 있어.”

―그렇구나. 아 참. 어떻게? 정석이 깨워 줘?

“아니야. 됐어. 새벽까지 마셨다면서. 깨우면 지랄만 할 거야.”

―그럴 거야. 와 어제 진짜 재밌었는데.

“선아야, 근데 그런 자리를 니들끼라만 즐기냐? 나도 불러야지.”

―아하하하! 얘도 웃겨. 널 어떻게 불러!

선아의 쾌활한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친구 여자친구지만 딱히 가깝게 대화를 나눈 적은 별로 없는데, 그냥 통화를 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절로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솔직히 툴툴대는 이정석 새끼보다 더 큰 의지가 되는 기분이었다.

“넌 안 졸려? 너도 좀 자야지.”

―난 어제 일찍 들어와서 잤어.

“다 같이? 거기 방 좁잖아.”

―아니. 김태윤이랑 박남수는 자기 집 갔고.

“오오….”

―뭐! 너도 동거했던 애가 왜 우리한테만 그래!!

“하하하…. 내가 뭐랬나.”

―와 근데 신기하다. 내가 구마하랑 통화하고 있다니.

“뭐라는 거야. 새삼스럽게.”

―그래도. 국민 영웅을 이렇게 일대일로 마주하긴 쉽지 않으니까.

성남 놈들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애들끼리도 한참 그런 얘기를 했었다며, 이놈들이 내가 멀어지지는 않을까 아쉬움을 느끼고 있단다.

“미친놈들. 지랄한다. 내가 뭐 죽는 것도 아니고.”

―너 그거 알아? 정석이는 먼저 너 시합 보면서 울었었다?

“크하하하! 병신 지가 왜?”

―야. 병신이 뭐야….

“어이고, 그래. 미안하네. 니 남자 친구 욕해서.”

정석이 뿐만 아니라 부대에 있던 남수나 태윤이도 내 경기를 보며 다들 그런 마음이 들었었단다.

“왜?”

―몰라. 복싱이라 더 뭔가 울컥했었대. 무대에 너만 있는 거 같았다나?

“새끼들 오버하기는….”

―니네 보면 남자애들 우정이 이런 거구나 싶어. 보기 좋아.

“그럼. 우리 넷은 끝까지 갈 거야.”

―어제 김태윤도 계속 그러던데. 니가 자기들 배신하면 사람 아니라고.

“지나 그러지 말라고 해. 맨날 뒷담이나 까는 새끼가….”

기대도 안 했던. 심지어 둘이 어울릴 거라 단 한번도 상상조차 못 했던 정석이와 선아.

어떻게 보면 우리들 가운데 가장 안주인에 어울리는 존재가 아닐까 싶어진다.

“근데 선아야.”

―응.

“이렇게 통화하니까. 나도 전부터 너한테 궁금한 거 있었는데 물어봐도 돼?”

―뭐? 니가 나한테 궁금할 게 있어?

두 사람은 어떻게 이런 튼튼한 연인이 될 수 있었던 걸까?

늘 정석이가 아닌 선아에게 그 답을 듣고 싶었다.

―너도 친구가 맞긴 맞구나….

“왜?”

―어제 박남수도 계속 그런 거 물어보던데.

선아는 오히려 친구인 우리가 봤을 때 자기가 정석이랑 있어서 이상하냐고 되묻었다.

“무슨 소리야. 니가 어디가 어때서.”

―그냥 너네가 자꾸 그렇게 이상하게 보니까….

“아니. 그게… 이상한 건 아니지.”

―근데 왜 맨날 볼 때마다 그래.

“그게… 어쨌든 정석인 이정석이고. 너는 대학도 갔고 인기도 있을 거 같은데.”

―와 소름… 정석이 말이 맞았어….

“뭐? 걔가 뭐라고 했는데?”

―니네들. 자기들은 다 대학 갔는데, 자기는 대학생 아니라서 무시한다고. 특히 너가 연대 다닌다고 자기 깔볼 때 많다면서.

“아. 야!! 넌 진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너도 니 남자친구 닮냐?!!”

우리가 보는 친구 이정석과. 선아가 함께하는 남자친구 이정석은 다른 사람이란다.

―잘해 줘. 되게.

“그러니까. 뭘 어떻게 잘해주길래. 우린 그런 게 궁금하다는 거지.”

―음. 니가 혜정이한테 한 정돈 아니지만.

“하하하… 근데 왜 자꾸 걔 얘기를….”

―뭐. 내 친구잖아.

정석이를 보통의 여자들같은 시선으로 보면 확실히 키도 작고, 좋은 대학 다니는 것도 아니고 직업도 마냥 멋진 일이라고 할 순없단다.

조용히 듣고 있는데 은근 냉정한 시각도 있구나 싶어진다.

―근데 그렇게 말하는 나도 뭐 잘난 건 없잖아.

“니가 왜 잘난 게 없어. 너도 매력이 있지.”

―무슨 매력?

“친구 여자친구를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혜정이나 민혜에 비하면 난 평범한 애였지.

“에이. 아니라니까. 너도 남자애들한테 인기 좋았어.”

―누구. 누가 있는데.

“어… 그러니까….”

누가 봐도 예쁜 친구들 사이에서 지내다 보니 선아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됐단다.

나는 예쁘지도 않고 분위기가 있지도 않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누구보다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존재가 있으니.

“그게 정석이다?”

―응.

“…….”

―이상해?

“아. 아니… 그냥. 뭔가 멋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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