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해줘요(4)
선아는 이정석이 누구보다 본인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자기가 제일 볼품없을 때 아무 조건 없이 잘해 준 게 있으니 언제든 편안하게 본 모습을 내려놓을 수 있단 믿음이 있다는데.
“니가 볼품없을 때가 언젠데?”
―나 반수 할 때.
“야. 그게 무슨….”
―너 그렇게 말하지 마라. 나한텐 힘든 시간이었어!
“하하… 알았어. 왜 화를 내….”
그런 믿음을 바탕으로 하루하루를 함께 나아가다 보니, 즐겁고 소중히 대해 준다는 걸 느낀다.
“정석이 재밌는 건 우리가 인증할 수 있지. 난 놈이긴 해.”
―응. 난 뭐. 그런 거면 충분하니까.
스무살에 만나 어느덧 3년 차 연인이 된 두 사람.
매일 보는 건 아니지만, 이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당연하게 곁에 있는 사람같이 느껴진단다.
“그럼 너 이정석이랑 결혼할 거야?”
―큰 문제 없으면 그러지 않을까?
“…….”
―딱히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한들. 음― 응. 그럴 거 같은데?
“우와… 허허… 선아야….”
―물론 얘가 갑자기 바람을 피운다거나. 잠깐 싸웠다고 딴 여자 만나고 하면 나도 용서하진 않겠지? 당연히?
“저기. 왜 갑자기 잘 나가다가….”
아직도 혜정이 일이 마음에 걸리는 건지.
뭐 여자는 여자 편이라고 하니까.
“걔는 잘 지내?”
―너 연락 안 했어?
“별로. 이삿짐 날라 주고 난 다음부터는 뭐….”
―혜정이 춘향이 된 거는 알아?
“알지. 기사도 봤어. 그거 내가 나가라고 한 거야.”
―안 그래도 얘기하긴 하더라.
혜정이 이야기를 꺼내고 싶진 않아 서둘러 주제를 바꿔 본다.
“그럼 너넨 안 싸워?”
―싸우지. 왜 안 써워. 세상 안 싸우는 커플이 어디 있다고.
“오. 뭐로 싸워?”
―이정석 도박하는 거?
“…뭔 소리냐 이건? 이 새끼 도박해?”
―먼저 상점가 어떤 형들이랑 친해졌다고… 한 번 갔었다면서.
사십만 원인가 잃었다고 그랬어.
“야. 깨워 봐. 미친 놈 정신 빠졌지. 뒤질라고.”
한 소리 해 줄라고 했더니, 그 와중에도 남자 친구라고 옹호를 한다.
“그리고? 또 뭐?”
―없어. 그냥 집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고 하는데, 나 없을 때 계속 피우는 거라든가.
“…근데 그건 싸우는 게 아니잖아. 니가 어긋나지 말라고 잡아주는 건데.”
―그치? 니가 들어도 그렇지?
그럼 보통 누가 먼저 화해하냐니 그런 거는 없단다.
그냥 다음부터 서로 조심하고. 화 안 내게 주의하고. 그러다 보면 하나하나 마음에 안 들던 행동들이 바뀌는 모습에 점점 더 신뢰가 쌓여 간다는데.
“하긴 그렇겠구나….”
―뭐가?
“그런 게 있으니까 이렇게 올 수 있는 거지.”
두 사람을 보면서 이게 진짜 커플의 연애구나 싶었다.
상대방을 나에게 맞추려 하지 않고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되, 잘못되는 일은 싸움을 해서라도 바로 잡는다.
진짜 사랑이란… 내가 바라던 사랑도…
선아는 자기들은 특별할 거 없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나한테 있어선 오히려 그 특별하지 않은 평범함이 대단하게만 느껴져 자꾸만 부러움이 느껴졌다.
“아. 나도 정말 니네들같이 연애하고 싶었는데.”
―그런 애가 그렇게 행동하냐.
“야. 진짜… 너 왜 자꾸….”
어쨌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이 친구는 아직까지 우리 사이가 틀어진 게 내 잘못인 줄 알고 있다.
오해를 바로잡고 싶어 몇 가지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는데.
―나도 알아.
“아는 애가 나한테만 뭐라 그러냐.”
―그래도 이혜정이 너한테 막 화를 낼 때 그때 니가 달래 줬어야지.
“어떻게. 걔가 먼저 끝내자고 발악발악 거리는데.”
―그것도… 후우… 마하야 잘 들어.
여자는 늘 불안함을 안고 살고 있단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냥 행복할 거 같지만, 불안이 커져 행복을 넘어서는 순간들이 온단다.
예전에도 한번 들었던 이야기긴 하지만.
“뭔 소리야. 행복하면 불안함을 느끼지 말아야지.”
―있어. 그런 거.
“말도 안 돼. 그리고 너 혜정이 이야기 하지 마.”
―왜?
“그냥… 하지 마. 부탁이니까.”
그 이름은 나에게 있어서도 가볍게 덮을 수 없는 깊이가 있다.
특히나 지금같이 새로운 인연에 큰 상처를 입은 순간엔 겨우내덮어 둔 뚜껑을 열고 우물 깊이 몸을 던지고 싶다.
―음. 근데 너 이렇게 나랑 통화하고 있어도 돼?
“괜찮아.”
―이제는 내가 좀 부담되는데….
“야. 야. 그러지 마. 나도 지금 시합 있어서 뭐든 정신을 풀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정말?
“그래. 그래서 정석이 전화 해 본 거고….”
―오, 확실히 그런 걸 느끼는구나. 뭔가 멋있다.
“뭘 멋져. 그냥 하는 거지….”
―올림픽은 어때?
“오고 싶으면 얘기해. 표 보내 줄게. 애들이랑 다 같이 와.”
―…….
“음? 선아야? 끊겼나?”
―표를 보낸다고?
“어. 너네들 다 오면 네다섯 자리 뭐.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 표를 보낸다는 게 베이징으로 오라는 거야?
“물론 비행기 표도 보내 주지. 며칠 있을 거면 숙박도 알아봐주고.”
―아. 혜정이가 말한 게 이런 거구나….
“허허. 야. 너 하지 말라니까. 왜 자꾸 걔 얘기를.”
―아니. 아니. 화내지 말고. 그냥 뭔가 나도 방금 그런 느낌을 받아서.
나와 친구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개념이 다른 거 같단다.
아무리 가까운 중국이라 하더라도 어쨌든 해외가 아니던가. 그걸 그렇게 선뜻 제공한다는 말을 꺼내는 게 쉽지 않다고.
―물론 니가 돈도 잘 벌고 하는 일도 다르다는 걸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그걸 막상 접할 기회가 잘 없었는데. 이렇게 직접 들으니까 조금 놀랐어.
“아니. 나는 그냥. 애들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다들 고마우니까.”
―나쁘단 건 아니야. 가고는 싶어. 단지 여권이 없어서… 시간도 너무 갑작스럽고.
“하하. 그래.”
―고마워. 나 진짜로 여기서 너 엄청 크게 응원할게.
“그래. 고맙다.”
편안하고 또 부담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상대방을 깊게 이해해 주는 사람.
선아가 착하단 건 알고 있었지만, 제발 부탁이니 정석아. 넌 진짜 얘 놓치지 말고 평생 가라. 꼭.
소중한 친구 두 사람의 미래에 행복만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했다.
“아… 나도 진짜 니네들 같이 연애하고 싶었는데….”
―무슨 소리야. 너 인기 많잖아.
“에이… 그런 거 다 쓸데없어.”
―왜?
“그냥. 인기 좋아 봐야. 결국 혼자고.”
―혜정이랑 헤어지고 아무도 안 만났어?
“없다곤 할 수 없는데… 별로 좋은 결과가 아닌지라….”
―무슨 일이 있었구나….
“응….”
상황 이렇게 된 거 그냥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다.
―정말? 호텔에서?
“어.”
―우와….
진솔한 고백이 이 친구에게 내가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스포츠 스타가 아닌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동창 친구로 만드는 것 같다.
말투가 조금 더 편안하게 들린다.
―그런 일이 진짜 있구나. 영화같다….
“나도 이런 건 처음이라 당혹스럽긴 해.”
―여자지?
“그럼 여자지. 내가 뭐 남자 만나고 고민하겠냐….”
―아니. 큰일 앞둔 애가 왜 그런 사람을 만나.
“…그건 뭐. 어쨌든 외로우니까.”
―운동에 집중하든가.
“하하! 그거랑은 다르지.”
―뭔가 몰라도 되는 비밀을 들은 거 같은 기분인걸.
“괜찮아. 주변에 얘기해도 돼. 어차피 며칠 뒤면 세상이 떠들썩하게 알 건데.”
―…….
“뭐지? 끊기나?”
―저기, 마하야. 잠깐만. 잠깐만 있어 봐.
선아랑 얘기한 덕에 답답한 속내가 조금 뚫리기도 했고, 슬슬 통화 종료해야겠다 싶을 때 갑자기 바람 소리와 계단 소리가 쿵쿵 거리고 울렸다.
―잠깐만. 있어 봐. 나 지금 옥상 가는 중이라.
“옥상은 왜?”
―있어 봐. 허억 헉.
기다리라니 기다리는데 그때 이 친구가 말했다.
―후우. 후우. 아 숨 차.
“야. 넌 고거 조금 움직였다고 헐떡 거리냐?”
―내가 운동하는 사람이냐. 잔소리야!
어쨌든 다시 상황을 되돌려.
―마하야. 그냥 혜정이를 다시 만나보는 건 어때?
“뭔 소리야… 우리 깨졌다니까….”
―니 마음도? 이제는 좋아하는 감정도 없어?
“그런 걸 물어 봐….”
―아니지? 맞지? 너 방금도 아닌 거 같았어. 내가 보니까.
“아 됐어. 끝난 건 끝난 거야.”
―그렇게 선 긋지 말고.
“선아야, 그런 얘기는…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야. 니가 이상한 사람 만나서 상처받았다고 하니까 그러지.
걱정되니까.
감정이야 뭐… 있지. 당연히.
이혜정이 나한테 어떤 존잰데… 그게 쉽게 지워지나.
“왜? 혜정이가 나 보고싶다고 그래?”
―보고 싶어 할 걸?
“할 걸이 뭐야 그건 그냥 니가 아쉬워서 그러는 거지.”
―그게 아니라. 먼저 나 만났을 때 그랬단 말이야.
당당히 미스 춘향 美에 선정 된 우리의 자랑 이혜정.
타고난 미모 덕분에 이번에 작은 화장품 지면광 고를 하나 찍었는데, 그 일을 하고 와서 그러더란다.
평생 살면서 예쁘다는 칭찬을 들을 땐 민망하긴 해도 그게 나쁘게 들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외모가 일로 바뀌어 돈을 벌어보니,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이해가 된다.
사진 하나 공개되는 일도 이렇게 부담이 되는데. 나는 오죽했을까.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그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게 정말 미안해 진다.
“걔가 그랬어?”
―응! 그러니까 지금은 혜정이도 조금 달라졌고.
“그래. 그랬다고….”
아쉬움. 진작 서로 달래 주지 못 했던 마음들.
그래도 결국 지나간 건 지나간 게 아닐까 싶지만…
―큰일 아닌 이런 일도 그렇게 부담이 되는데, 널 너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
―그래서 더 잘해 줄 걸 그랬다면서. 진짜 그랬다니까.
“그러니까 그런 거. 그냥 걔 성격상….”
―혜정이는 너랑 헤어지고 잠깐 누구 만나는 그런 것도 없었어. 그건 내가 알아.
“하하하… 야 걔가 누구 만나도 내가 뭐라고 할 건 없어.”
왜 이렇게 자꾸 이혜정을 꺼내드냐 물으니, 자기가 봤을 땐 그래도 나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혜정인 거 같단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친구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적어도 먼저 봤던 그 재벌 언니 보단 혜정이가 낫지 않아?
“맞다. 니가 수빈이를 봤구나.”
―참고로 나 그 언니가 준 가방 팔았다. 그거 짭도 아니었어!
무서워서 들고 다닐 수 있나….
“하하! 잘했어. 내가 가면 새로 사 줄게.”
―됐어. 이정석 알면 또 난리 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랑 정석이랑 깨지면 너네는 안 그러겠어?
“그건 문제 원인이 누구한테 있는지를 따져 봐야….”
―아. 정떨어지는 소리 하지 말고!
혜정이나 나나. 둘 다 새로운 사람 만나 잘 지내고 있으면 자기도 이런 말을 안 한단다.
하지만 봤을 땐 둘 다 미련이 남아 보이고. 아직 못다 한 둘만의 이야기가 있는 것 같단다.
―정석이가 그러던데. 너 클럽 다니고 이런 것도 방황하는 마음 잡을 수 없어서 그랬다면서.
“맞아….”
―그럼 다시 시작해 봐. 이번엔 다르게.
“안 돼. 또 만나 봐야 나만 상처 주고 끝날 거야.”
―왜 그렇게 단정해?
“그냥… 내가 모자란 놈이니까 그러지.”
―마하야. 니가 어디가 모자라. 지금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람이.
“아냐. 진짜로. 사랑에 있어서 만큼은 이제 솔직히 자신감이 없어….”
―혜정이를 좋아해도?
“응….”
―왜?
“왜가 어딨어. 못 하는 건 못 하는 거지.”
―왜 못 해?
“못 하지. 사귀다 깨진 커플이 어떻게 다시 만나.”
―왜 못 만나? 서로 좋아하면 다시 만날 수 있지.
“진짜 니가 이정석 여자 친구가 맞긴 맞구나… 둘이 똑같은 얘기를 하네….”
커플은 닮는다고 하더니.
선아도 정석이 못지않게 날카로운 시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너도 아쉬움은 있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나 아쉬운 거 달래자고 걔가 내 말을 들어주겠어?”
―니네 원래 그랬잖아.
“우리가 뭐…?”
―혜정이랑 너랑. 원래 그렇게 만났다 헤어졌다 하던 사이 아니었어?
“…….”
―나, 다 알아. 너랑 이혜정이랑 그때 노래방 안 오고 둘이 있었던 것도 알고.
“언제를 말하는 거야…?”
―처음 너네 집 놀러갔을 때. 그때가 고2였나? 크리스마스 파티하던 날.
세상에 비밀은 없다는 듯 선아는 나랑 혜정이의 모든 관계를 까발린다.
―원래 그러던 애들이 이제 와서 굳이 만나지 않겠다는 건, 난 결국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해.
“…….”
―한 사람만 용기를 내면 되는데.
선아의 이야기는 상처 입은 가슴에 너무나도 따듯하면서 뜨거운 빨간약을 바라는 거 같아 생각지도 못한 통증을 일으켰다.
“근데 왜 나한테만 그래.”
―뭐?
“이혜정한테 얘기해. 왜 나만 용기를 내야 하냐고.”
―마하야.
“걔한테 말해. 나 보고 싶으면 지가 전화하라고. 지가 연락할 수도 있고. 지도 핸드폰 있고. 내 번호 모르는 것도 아니고.”
―…….
연애가 두 사람의 드라마를 써내려 가는 이야기라면.
왜 나만? 남자니까? 내가 주인공이니까?
이제야 말하지만, 정말 많이 기다렸었다…
끝내자고 한 건 나니까… 끊겨 버린 이야기를 다시 써내기 위해 그녀가 한 발만 다가와 주길 바랬다.
하지만 그런 연락은 없었고. 서로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 버렸다.
“미안. 갑자기 답답해서….”
―괜찮아. 강요한 건 난데….
“알면 이제 그만 얘기 해.”
―그치만, 마하야. 너도 이건 알아줘야 해.
혜정이가 날 만나기 위해 무엇을 포기했는지. 그 친구가 무슨 용기를 냈는지 모를 거라는데.
“혜정이가 포기한 게 있어?”
―있어….
“뭐??”
―친구….
“친구 누구?”
―민혜….
선아가 말하길. 민혜가 나를 많이 좋아했었단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걔가 나를? 언제부터?”
―언제부터긴. 우리 고등학교 때부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