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해줘요(5)
―마하, 너 근데 진짜 이렇게 나랑 계속 통화해도 되는 거 맞지?
“그럼. 물론이지. 너는?”
―나도 뭐. 여기까지 얘기했는데….
“아직도 정석이네 옥상이야?”
―응. 여기서 성남시청 보이는 거 알지? 저기 니 사진 보여.
민혜가? 나를? 정말로? 그런 거 한번도 못 느꼈는데?
민혜는 조용한 아이였다. 실제로 몇 번 얘기를 나눠 본 적도 없긴하다.
그저 긴 생머리가 어울리는 차가운 미녀란 이미지.
하지만, 나는 언제나 한 사람을 보고 있었으니까.
그 친구는 정적인 얼굴로만 기억이 남아 있었는데.
―안 그래도 나도 한 번쯤은 너랑 이런 얘기를 해 보고 싶었어.
“뭐? 민혜 얘기?”
―아니. 그냥 너가 뭐랄까….
저 멀리 성남시청에 대문짝만하게 걸린 당사자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본인도 지금 여러 생각이 밀려와 말이 선뜻 안 나온다는 선아였다.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지고 있어.”
―저런 건 세금이겠지?
“아이고. 그 세금 내가 니네가 낸 건 돌려줄게. 참 나….”
다 괜찮으니. 하고 싶었던 얘기가 뭔지 그거나 마저 말해 보라고 했다.
―조금 성급하다는 생각 해 본 적 없어?
“어떤 면에서?”
―연애에 있어서.
“모르겠는데….”
―어제 애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봐도 그렇고. 니가 지금 하는 얘기를 들어도 그렇고. 난 내 생각이 맞는 거 같아.
선아는 나를 보며 연인 관계에 있어 조금만 참고 넘어가도 될 문제를 너무 급하게 마음을 접고 움츠리는 것 같단다.
“어….”
―나 지금 너한테 선 넘고 있는 건가?”
“아니. 그건 괜찮은데….”
―기분 나쁘면 얘기해. 바로 사과할게. 그리고 정석이한테 내가 이런 말 했다고 절대 말하지 말고.
“아냐 아냐. 정말 괜찮아. 얘기해 줘. 오히려 듣고 싶어.”
나에 대해서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이렇게 둘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는 솔직히 내가 여자를 쉽게 만나고 마구잡이로 갈아치우는 카사노바인 줄 알았단다.
하지만 주변 이야기를 들어봐도 그렇고, 정석이나 만남을 가졌던 혜정이 말을 들으면 또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해 어떤 인지부조화가 있었다는데.
―확실히 느껴져. 넌 그냥 조금 성급한 거 같아.
“내가 내 마음을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다는 건가?”
―응….
“나 그렇게 쉽게쉽게 사람 안 만나는데….”
―사람을 쉽게 보는 게 아니라 감정을 빠르게 닫는 게 있지 않나 싶어.”
처음 듣는 말이다.
성급하다, 라… 난 늘 내가 부족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성급이라.
성급한 마음으로 연애에 있어 내가 빠르게 마음을 닫는다.
그 말이 그럴싸하게 들린다.
“맞아. 나 그런 거 있는 거 같아.”
―이번에 너랑 혜정이랑 싸우고 깨진 얘기를 들어도. 걔는 어떻게든 다시 잘해 보려고 하는데. 니가 마음을 완전히 닫아 버렸단 말도 그렇고.
“아니. 근데… 그건 걔가 먼저 깨자고 했어서….”
―상처받기 싫었던 거 알아. 이해해. 물론.
“아까 하던 민혜 얘기나 더 해줘 봐.”
―민혜는 뭐….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이 끝나고. 내가 170 언저리에서 10cm가 훌쩍 커지고 나타났을 때. 그때부터 민혜가 혜정이한테 나에 대해 많은 것을 물었다고 한다.
기억난다. 나도 혜정이 만날 때 물어봤었어.
학교 다닐 때 여자애들 누가 나 좋아했었니까 대충 얼버무리고 지나갔는데. 그게 민혜였구나.
―난 그래서 너가 최다빈 만났던 것도 성급하다고 생각했었어.
“그건 왜…?”
―그때도 넌 혜정이를 만나고 있었잖아.
그랬었지. 하지만 그때는… 그때도…
“내가 다빈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혜정이는 내 옆에 있었을 거다?”
―충분히.
“…근데 그때도 걔가 나랑 연애는 안 한다고 했었어.”
―고3이잖아. 무엇보다 바로 옆에 널 좋아하는 친구가 있고.
그런 사정이 있었더라면.
바로 어제 일 같이 기억이 난다.
나랑 파트너 관계는 가져도 연애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이 혜정.
하지만, 행동은 충분히 두 사람의 만남을 허락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때도 난 그녀의 말에 또 용기를 잃고,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을 찾아 다빈이를 만났지.
―혜정이는 그때 사귀던 오빠랑 막 깨진 상태였어. 옆에는 널 좋아하는 친구가 있고. 너한테 호감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을 바로 받아 줄 수는 없는 거야.
“그래서 기다렸다… 그 기다림을 내가 견디지 못하고 성급하게 다른 사람을 만났다.”
―이상하게 듣지 말고. 내 말은.
결론은 역시 나의 조급함에 있다.
그래 그렇게 따지니까 내 행동도 이해가 돼.
늘 나는 왜 이렇게 사랑을 갈구하나 했었는데, 외로움도 외로움이지만 마음이 그 대기 시간을 견디지 못했던 거야.
난 병신이 아니라 그냥 겁이 많을 뿐이었던 거야.
겨우내 잡은 행복을 다시 놓칠까 봐.
정석이와 선아같이 서로를 위한다곤 하지만 으르렁거리며 싸우다 보면 상대방이 나를 또 싫어하게 되면 어쩌나 하면서…
늘 상처받는 게 두려워 빠르게 결론을 내리면서…
그저 좋은 사람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 세상 고통 없이. 어찌 성장이 있겠는가.
그 말을 몸소 체감하여 여기까지 걸어 온 내가…
온몸을 찢고 발기며 살을 붙이고 근육을 키워 온 내가…
“선아야….”
―왜?
“…너 진짜 너무 고맙다.”
큰 깨달음을 얻는다.
스승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더니. 대뜸 이정석 여자 친구한테 진리를 듣게 되는구나.
―어. 아니 나는 그냥….
“오늘 너랑 통화해서 너무 좋다.”
―…….
“내려가서 정석이 좀 깨워 봐.”
―지금?
“어.”
―응. 잠깐만.
퉁퉁퉁. 계단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조용한 방 안으로 들어온 거 같다.
쿨쿨거리는 정겨운 놈의 소리가 들려온다.
“잠깐만.”
정석이가 뭐라 우물우물 하더니 전화를 받았다.
―뭐야? 왜? 누구야?
“어이. 이정석.”
―어? 뭐야 씨. 구마냐?
“너 니 여자 친구한테 진짜 잘해라.”
―어???
“선아 상처 주면 나한테 뒤지게 맞는다.”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선아야 얘 뭐야?
옆에서 선아가 몰라 나도 라는 소리에 혼자 피식 미소를 지었다.
―뭐야 병신아. 왜 전화로 지랄인데…?
“그리고 니네 두 사람 결혼하면 내가 진짜 거 선물해 줄게.
―…선물?
“응.”
―야 이 새끼 뭐야…? 뭐라는 거야 지금?
선아가 전화를 바꿨다.
―정석이 잠이 안 깨는 거 같은데.
“아무튼 너도 들었지?”
―대충?
“이 자식 너 속썩이면 꼭 나한테 말해. 내가 뒤지게 혼내 줄테니까.”
―…….
“고맙다. 선아야. 오늘 통화해줘서.”
―어? 어….
“한국가서 보자.”
통화를 마치고 쭉 그동안의 내 행적을 돌아보았다.
혜정이를 떠올리며.
다빈이를 만났을 때.
수빈이를 만났을 때.
아니 그냥 모든 여자들을 만났던 순간을.
“…기회는 늘 옆에 있었구나.”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없는 게 아니다.
늘 옆에 있지만 내가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을 뿐.
만약 처음 혜정이를 만날 때. 내가 성급히 다빈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정석이 못지않은 커플로 쭉 한결같은 만남을 가져올 수 있었을 것이다.
민혜가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해도, 내 마음은 혜정이를 향하고 있었으니까. 그 친구도 중간에 감정을 접고, 혜정이나 민혜의 교우관계가 깨질 일도 없었겠지.
다빈이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다빈이는 부상에서 막 회복한 현재가 불안한 고교 선수였어.
운동 외 다른 것에 마음을 주지 않던 다빈이를 성욕에 미치게 만든 것도 결국 나의 성급함이었다.
그저 남들 같은 연애가 하고 싶어서…
운동에 그렇게 치열한 다빈이를 조금만 더 이해했다면 같이 훈련을 하든가 얼마든지 즐길 거리는 많았을 텐데.
한수빈은 또 어떤가. 혜정이를 만난 뒤 그녀가 불안해하는 걸 조금만 달래 줄 수 있었다면…
그 마음을 버거워하지 않고. 내가 상처 입을 걸 두려워 않고 차분히 어루만져 줬다면… 나는 한수빈도 사랑했었으니까.
연인 간의 싸움은 피를 말린다.
실제로 몇 번 경험을 해 봤기에 그 프레셔가 운동의 데스포인트못지않은 압박감을 준다는 걸 느꼈다.
무서웠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싫어하게 되는 것이.
하지만 아까도 생각했듯이.
고통없는 성장이란 없는 법.
그 단계를 지나 서로를 향해 한발씩을 내디딜 수 있었다면.
나도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 아닐까?
만약 이런 사랑 방식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그렇게 수많은 싸움을 하면서 서로를 맞춰 왔다면…
정석이와 선아같이 서로가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는 관계가 될 수 있었다면…
“성급이라….”
아쉬워도 지난 것은 지난 일.
조용히 눈을 감고 흘러내리는 짧은 물방울 하나에 모든 감정을 담아 버린다.
“지금이 중요해….”
운동을 시작하며 나는 세 가지 각오를 굳혔다.
포기하지 않는다.
지지 않겠다.
옳은 것은 바른 길을 간다.
거기에 오늘 한 가지를 더한다.
이제는 성급하게 굴지 않겠다.
마음도 행동도.
앞으로 만나게 될 나의 사랑을 위해서.
“그동안 잊고 있었구나.”
그러고보니 오랜만에 곤륜의 정신이 떠올랐다.
늘 그 말이 어려운 결정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었는데.
이런 생각을 잊고 살았다는 것에서부터 난 자만에 빠져 있었다는 거야.
“함정에 안 빠지는 게 이상하지….”
나태, 교만 그런 문제가 아니다.
언제 어느때고 수행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무도인의 자세.
지금도. 생각지도 못한 선아와의 통화에서 나는 큰 깨달음을 얻지 않았던가.
만약 내가 이런 문제에 처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마음에 큰 균열이 가지 않았다면. 나는 선아가 하는 얘기도 그냥 남의 사정 모르는 친구의 간섭 정도로 생각했겠지.
하지만 내가 부족하다고, 절박하다고 느끼고 있기에. 그 말이 큰 메시지를 남길 수 있었다.
진짜 형 말대로 언제 어느 때고 수행의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구나.
그런 난데.
내가 뭐라고 성남시청에 사진을…
태극기면 몰라도 내가 뭐라고…
“…….”
그래. 내가 부족한 걸 떠나. 어쨌든 구마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자부심이 되어야 하는 존재다.
국가 대표가 아니던가.
나라를 대표하는 새끼가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순 없지.
* * *
호텔방을 나가 복도 로비에 있는 경호원들을 마주보았다.
한참 전에 식사가 도착했는데 반응이 없어 기다리고 있었다는 그들에게 나는 식사는 됐고 사람이나 불러달라고 말했다.
“미스터 구. 보안상의 문제로 미스터 구와 외부와의 만남은.”
“당신들. 저기 옆방에 영국 사람들 있는 거 알지?”
“…….”
“왜 그러십니까?”
“10초 주겠어. 안 그럼 당신 두 사람 다 내 주먹에 쓰러지고 난 영국 언론을 만나 중국이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다 까발릴 거야.”
경호원 두 사람 중 하나가 앞장서는데, 다른 한 사람이 말린다.
“미스터 구. 우리는 지금 당신을 지키기 위해.”
“어허. 잠깐만.”
“10, 9.”
“…….”
“미스터 구.”
“8, 7, 내 말이 장난 같지.”
두 눈을 부릅뜨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두 사람의 경호원이 움찔거리며 행동이 멈춘다.
“당신들이 살인병기로 훈련을 받았든 뭐든. 지금 이 거리에선 나한테 안 돼.”
“…….”
“진정을….”
“3초 지났다. 4, 3, 2.”
올림픽 결승까지 오른 복싱 선수가 우습게 보이더냐.
폭력 사건으로 IOC에서 제명을 당하든 뭐든, 나라를 대표해 이런 추악한 함정에 더는 못 놀아나겠다.
주먹을 불끈쥐고 빠르게 눈을 돌리고 있으니.
“누!!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
“누구를 부르라는 건지 말씀을 해 주셔야….”
됐어. 흥분을 가라앉혀.
성급하게 굴지 말자고 방금 맹세를 하고 나왔잖아.
“써니. 날 함정에 빠트린 여자.”
* * *
구마하가 다시 스위트 룸으로 돌아가자 복도에 있던 경비원 두 사람이 작은 실랑이를 벌였다.
“왜 말리셨습니까.”
“…자네는 그 눈빛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그래도. 제압하는 정도면….”
“제압? 후후후.”
그나마 조금 더 관록 있어 보이는 보디가드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만약 그가 움직였다면 우리는 평생 장애를 달고 살았을 수도 있어.”
“설마요. 아무리 운동선수라고 해도. 훈련받은 요원 두 사람을….”
“요원이라고 해도 우린 결국 인간이지.”
“…그럼 그는?”
“그건 스포츠 선수의 눈빛이 아니었어… 말 그대로 짐승… 우린 지금 목숨을 지킨 거네.”
침을 꿀꺽 삼켜 넘기며 긴장감을 내려보낸 한 사람이 핸드폰을 들었다.
“네. 구마하가 직접 요청했습니다. 아니요. 그런 모습은… 겁먹거나 하는 건 없었습니다. 오히려 기백이 당당하달까… 오실 때도 각오를 하고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