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96화 (396/401)

애벌레. 번데기. 그리고. (2)

“며. 몇 살 때… 그런 생각을?”

“열 셋? 넷? 그쯤이었던 거 같아요.”

“…….”

한국으로 따져도 열다섯에서 열여섯 정도다. 하긴 중학교라고 그랬지….

말문이 막힌다. 먼저도 한족 소수민족 뭐라 뭐라 하길래 안 좋은 일이 있었구나 싶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심정은 이해 가지만, 너… 너무 어린 나이지 않나요?”

“나이는 어려도 보기엔 이른 성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전 그때도 발육이 빠르던 때라.”

“…….”

“그저 뭐든 나에게 있는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싶다는 결심만 섰었거든요.”

“아니. 그래도 학생인데… 써니 씨가 그러더라도 저쪽이 참아야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소유하고픈 욕망이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그가 원하는 대상에 가장 들어맞는 존재였죠.”

어리면서 순종적이고 영특한 머리를 가진 아이.

희롱과 노리개의 대상이 되는 걸 주저하지 않고 마침내 손에 쥐기 어려운 권력을 얻는다.

그때부턴 모든 일이 수월하게 흘러갔다.

담임부터 시작. 학교장과 자식 교육에 실패한 부모들. 모두를 그의 손을 빌려 처벌하는 데 성공했다.

왜 당사자가 아닌 주변을 먼저 그랬냐 물으니, 힘의 근원을 지우지 않는 한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없어서라고 답한다.

그녀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묻지 않았다.

말하면서 몸의 떨림이 사라지고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는 걸 보아 당한 것 그 이상의 고통을 안겨 줬구나 혼자 이해해 본다.

“아무튼, 그렇게 원하는 바는 다 이뤄냈는데.”

“또 뭐가 있었어요?”

“사건도 있었고… 무엇보다 그 사람이 마냥 저를 위해 힘 쓴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애인은 이미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주변을 정리하면서 더 많은 재산과 힘을 비축했단다.

그렇게 점점 더 탐욕에 취해가더니 무서울 게 없는 안하무인이 되어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하는데.

보다 못한 상급 기관에서 나서 칼을 빼 들었고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그때 저도 잡혔죠.”

“써… 써니 씨는 왜요?”

“어쨌든 그 사람 옆에서 호의호식하던 것도 있고. 나름 인과응보라는 거겠죠?”

애인은 사형. 그녀도 중죄를 받을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지금 함께 일하는 상사가 그녀를 찾아왔단다.

“만나서 뭐라던가요?”

“묻더군요. 정말 이 모든 일에 제가 관여된 게 맞냐고.”

“아니라고 하죠.”

“그러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그때는 정직하고 싶었어요.”

조사과정에서 그녀는 숨김 없이 자신이 행한 일들을 밝혔다.

그러자 그는 다시 묻는다.

“왜 애들 일에 어른을 끌어들여 문제를 크게 키웠냐고 하더군요. 교우 관계는 스스로 해결할 생각을 해야지.”

“그거야… 해결이 안 되니까….”

“저도 그렇게 답했어요.”

죽음의 위기 앞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진 힘. 내가 가진 능력. 내가 할 수 있는 노력. 모든 것을 더해도 그들이 가진 배경을 넘어설 수 없었다.

어떻게든 개개인의 약점을 잡아 보려 해도, 약점이란 숨기려 드는 성질이 있어 파악하기가 쉽지 않기에 뜻을 다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진 매력을 이용했을 뿐이다.

인간은 약점은 숨기려 하지만, 욕망은 드러내려고 하니까.

난 그저 내게 주어진 환경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렇게 답하고 며칠 뒤. 그분이 저에게 찾아와 사면을 조건으로 조국을 위해 일을 해 보지 않겠냐 물었어요.”

“그래서 이 일을 택했다고요?”

“네.”

이야기는 다 마쳤다는 듯, 그녀는 다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죄송해요. 유쾌한 내용이 아니라 별로 말씀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저기… 써니 씨. 근데 그거는… 그건 선택이 아니죠. 그냥 죗값을 받고 있는 거지.”

“뭐가 됐든, 제가 선택했다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요.”

개인적으론 꽤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단다.

업무 내용이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는 남이 아닌 자기 손에 권력이 주어져 있고,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도 많이 안다.

“상해에 집도 있고. 무엇보다 색다른 경험을 꽤 많이 해요. 사람이나. 여행. 가끔 외교 관련 업무를 보는 것도 정말이고요.”

“그런 건. 써니 씨 머리면 얼마든지 무슨 일을 해도 다 할 수 있어요.”

“달라요. 어쨌든 난 권력의 성질을 몸소 겪은 사람이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건….”

“오히려 전 그때 그 제안을 들었던 걸 기쁘게 생각했어요.”

“왜요…?”

“처절한 몸부림이 인정받았단 기분이 들어서요.”

이런 것도 인정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자기합리화가 아닌가…

“걱정 마세요. 말씀드렸다시피 보기보단 만족하는 부분이 많아요.”

“저기. 써니 씨…?”

“네.”

“정신 차려요.”

나는 내공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그녀 스스로 흡족한 듯 말하지만, 내 눈엔 보여. 가슴 저 한 곳에 미약하게 빛나는 후회의 불꽃이…

“당신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에요.”

“마하 씨. 전 이미 어른이에요. 제 행동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요.”

“당신은 그때도 어렸어.”

“…….”

“중학생에서 몇 년 지난 이야기라고 해도 많아 봐야 고등학생이잖아. 미성년자라고. 그 나이에 택한 결정이 어떻게 지금까지 만족을 할 수 있는데.”

“그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건 인정이 될 수 없어. 상사인지 뭔지.

결국 그 사람도 당신을 이용한 것에 불과한데.”

“마하 씨, 그만하세요. 마음 쓰지 말고. 전 괜찮으니까.”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뭐가 걱정이야 하고 넘어가면 그만일까?

그럼 그녀 가슴 속 희미한 불꽃이 점점 더 커지는 건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그래서 그랬어요?”

“뭘요…?”

“부모님. 가족들. 그때 나한테 그랬잖아요.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산다고.”

“…….”

“써니 씨 가족들은 지금 써니 씨 상황을 알고 있어요?”

“모르죠….”

“왜요?”

“우리 가족은… 제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끝으로 따로 연락을 받은 건 없어요.”

“그것 봐요. 그냥 이용당하고 있는 거라니까.”

“어차피 제 일은 정보부 관련이라. 보안의 문제도 있어서.”

“써니 씨.”

너무 안타깝다…. 사람이 딱해 미치겠다.

만약 이 사람 주변에 하나라도 좋은 어른이 있었다면….

우리 형이나 한상률 감독님 같은 진짜 어른이….

좋은 재능이. 좋은 머리가 왜 이런 쪽으로….

“마하 씨….”

“아 씨….”

“왜 이렇게 울어요. 남자가….”

“후우. 와 돌겠네….”

도와주고 싶다. 진심으로. 그녀를 다른 밝은 세상으로 끄집어내고 싶어.

하지만 어떻게? 무슨 수로? 우리는 살아가는 국가도, 환경도, 하는 일도. 너무 달라 어떻게 손을 뻗기가 어려워.

무엇보다 이 씨발 안전부니 뭐니 지랄 같은게….

“그럼 만약에 정말 만약에요.”

“네.”

“써니 씨가 일을 관두고 싶다면 하면, 그만둘 순 있는 건가요?”

“그럼요.”

“진짜로요? 진짜죠.”

고개는 끄덕여 주지만, 눈빛이 자기는 그럴 마음이 없다는 것을 또 한 번 주장한다.

“하아….”

“마하 씨. 우리 식사해요. 맛있는 음식이 눈앞에 있잖아요.”

밥맛이 뚝 떨어지는 기분으로 뭘 먹으란 말인가.

그래. 하다못해 말이라도 건네보자.

이 사람은 어쨌든 나와는 달리 진짜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까.

그러니. 나에게만 보이는 꺼지지 않은 불꽃이여.

그대의 영특함을 믿고 이 말을 건넨다.

“써니 씨. 이런 말이 있어요.”

“어떤 말이죠?”

“옳은 것은 바른길을 간다고 해요.”

“좋은 말이네요. 누가 한 명언인가요?”

“곤륜이요.”

“…….”

“우리 형이 얘기해 준 건데. 형은 부모님한테 들었다고 했어요.

곤륜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간다고.”

“좋은… 이야기네요. 네.”

“황당한 거 아는데. 나도 처음 들을 땐 해는 동쪽에서 뜬다. 배가 고프면 밥이 땡긴다. 그런 비슷한 뻔한 얘기라고 생각하긴 했거든요.”

“그 얘기를 왜 지금 갑자기 저에게…?”

“과거엔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앞으로는. 이 말을 기억하고.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스스로 후회되지 않는 선택을 해 달라고.

그런 마음에서….”

키스가 내 입을 막는다.

이 사람도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그만하세요. 제발 부탁이니까….”

그저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 가장 힘들긴 할 것이다.

억울하겠지. 애초에 잘못된 인간들을 만난 건 그녀 잘못이 아닌데.

그래도 바뀌어야 돼.

그래야 살아.

할 수 있어. 변할 수 있다.

흔히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아.

내가 변했으니까.

“써니 씨.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변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

“물론 힘들겠죠. 하지만 그 힘듦도 노력과 훈련이 있으면…”

“옳은 것… 바른길….”

“미안해요. 나도 과도한 참견인 건 아는데….”

“역시 당신은 좋은 분이세요. 알았어요. 앞으론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 볼게요.”

“거짓말 마요.”

“뭐가 거짓말이죠…?”

“지금 이 순간만 잘 넘기자고 얼버무리는 거 내가 모를 거 같죠.”

작고 희미하던 불빛이 이제는 그녀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의지는 살아나지만, 용기가 안 나는 것인가?

“써니 씨. 설마 싶지만 혹시 이런 얘기 지금까지 아무도 안 해줬나요?”

“누가 해 줄 수 있을까요. 사정을 모르는데.”

“그럼 나한테 고백한 게 후회되나요?”

“버거움은 느껴지지만… 후회는 없어요.”

“좋아요. 그럼 진짜 내 말 흘려듣지 말고. 한 번만 노력해봐요.”

“어떤 노력을…?”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 용기를 가질 수 있는 방법.

그런 데 딱 좋은 운동이 있지.

“혹시 도마라고 아세요?”

“그럼요. 기계 체조잖아요.”

“뛰어봤어요?”

“아니요. 한 번도.”

이번에 체조 선수들이랑 친해지면서 훈련장을 구경하러 갔었다.

그때 도마, 링, 평행봉, 철봉 등등을 봤는데. 쫄쫄이 타이즈를 입어서 그렇지. 기계 체조 선수들의 담력은 모든 스포츠 종목에 있어서도 으뜸이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우리는 운동하다 다쳐도 염좌나 탈골. 이렇지만, 그쪽은 목숨이 오가거든요. 착지 잘 못 하면 발목 날아가는 거고. 끔찍하면 목 부러지고 이러니까.”

“그래서 저한테 그런 위험한 운동을 추천하신 이유는?”

“두려움을 넘어 보라고요.”

“…….”

우선해야 할 것은 환경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의 불꽃을 꺼트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 스스로 이런 위험한 직업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저도 이번에 보고 알았어요. 도마 이렇게 정면에서 보면 엄청 높은데. 인간이 저걸 넘는다고? 그 자체가 도전이구나 싶었어요.”

“그건 구름판이 있어서 가능한 거잖아요.”

“제가 써니 씨의 구름판이 되면 되죠.”

“네…?”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런 말 들어봤어요?”

“…이번엔 또 무슨 말이죠?”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라는 말.”

“그건 말이 아니라 한국에서 유행했던 노래로 알고 있는데.”

“뭐가 됐든요. 써니 씨. 정말로 결승 때까지 내 곁에 있을 거 죠?”

“그럼요.”

“그래놓고 오늘 밤 갑자기 사라지거나 그러지 않는다고 맹세할 수 있어요?”

“안 그래요.”

운명 같은 만남. 운명 같은 다툼. 운명 같은 화해.

그리고 운명 같은 구원.

우리의 만남은 절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마지막 날까지 꼭 내 옆에 있어요. 그럼 당신은 구름판을 밟고 날아갈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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