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99화 (399/401)

애벌레. 번데기. 그리고. (5)

“안 간다고요?”

“안 가는 게 아니라. 상황이 변했잖아요. 이건 마하 씨의 책임도 있어요.”

“아니. 그건 그거고… 결승전 응원한다고 했었으면서….”

“야 인마! 넌 지금 이 상황에!”

“민구야 운전, 운전. 외국이잖아.”

“…….”

“어우. 저 화상을 진짜….”

주변이 뭐라고 하든, 구마하는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까지 그녀가 옆에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두 사람은 경기장 인근에서 헤어지는 게 옳은 상황이었다.

유스라는 차에서 내리기 전 처음 만난 그의 동료들에게도 사과를 건넨다.

“실례를 끼쳤습니다….”

양민구와 이길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고, 한 코치만 길게 한숨을 쉬며 답했다.

“이제와서 그런 말은 할 필요 없는데. 대체 어느나라 사람이에요?”

“중국인입니다. 한국어를 공부했습니다.”

“말 잘하시네….”

“선생님. 이분 외교관이세요.”

“외교관이든 뭐든, 알겠으니까 어서 가 봐요.”

“네.”

“저 선생님. 그러니까 이 사람은요….”

“야! 너 형이 있으라고 했지!”

“아니… 가만 있으라곤 안 했는데….”

“뭐 인마! 이 자식이!!”

“야!! 야! 운전, 운전! 외국이라고!!”

양민구가 분을 이기지 못 해 뒷좌석에 앉은 구마하를 향해 팔을 휘적휘적 거리는 바람에 무거운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질 수 있었다.

소란스런 가운데서 황 코치가 유스라를 향해 말했다.

“그래도 일단 별일 없이 이놈 데리고 와준 건, 내 고맙다고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그건“

“선생님. 제가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어이구… 어이구, 이놈아….”

유스라는 차에서 내려 구마하가 멀어지는 모습을 아련하게 보았다.

저런 명성을 가지고 있어도 혼을 낼 수 있다니. 좋은 사람들이구나.

하긴, 좋은 사람 곁엔 좋은 사람들이 모인다고들 하니까.

“…….”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된 유스라.

한번도 느껴보지 못 한 허전함에 가슴에 구멍이 난 것 같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한 남자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팀장님.”

“뭐야? 알고 있었어?”

“그럼요. 처음부터 따라오고 계셨잖아요.”

“흠.”

구마하와 한국 동료들은 모르는, 그녀만이 눈치챌 수 있는 2차 시나리오가 있었다.

아마도 교통사고나 그에 준하는 과정으로 경기장에 도착하는 걸 막거나 최대한 늦추려고 했을 것이다.

됐다. 깊이 생각하지 말자. 그는 이미 세계란 안전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으니까.

유스라는 안도하는 표정으로 긴장된 마음을 내려놓았다.

팀장은 조금 답답하단 얼굴로 구마하가 사라진 곳을 돌아보다 한숨을 쉬었다.

“갔군.”

“네.”

“자네도 수고했어. 시간 괜찮으면 조금 걷는 게 어떤가?”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먼저같이 인근에 있는 공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리 경기장에선 다른 체급 시합으로 뜨거운 함성이 울려 퍼진다.

“오늘까지 우리가 종합 순위 1위라더군.”

“메달 순위 말씀이신가요?”

“음. 처음으로 우리가 미국을 넘어선 것이지.”

“기쁜 소식이네요.”

어젯밤 그녀는 구마하와 달콤한 시간을 보낸 뒤 TV에서 나오는 스포츠 소식을 번역해 줬었다.

(금메달만 따져서 1위라고 하는 건 아무 의미 없어요.)

(외국은 안 그러나요?)

(따지는 사람들도 있는데. 요즘은 모든 메달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어서. IOC 홈페이지를 가도 그렇게 집계가 되고.)

(그럼 금메달의 가치가 희석되잖아요.)

(올림픽은 단상에 오른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무대가 아니니까요. 선수 관중 모두가 스포츠를 즐겨야지. 실제로 세리머니 끝나면 선수들 다 맨 위에 올라와서 인사하고 그러잖아요. 무엇보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스포츠 선수가 말했다.

올림픽이 국가 경쟁의 축소판을 보여 주는 자리라면, 메달보단 그 나라가 얼마나 많은 선수를 참가시켰는지가 더 의미 있을 것이다.

참가선수의 숫자는 국력과 정비례하니까. 가장 건강하고 신체 발달한 사람들을 일은 안 시키고 운동만 시킨다는 게 그만큼 나라가 여유 있단 소리 아닌가.

“저기가 좋겠군.”

“네.”

큰 나무가 주변을 둘러쌓은 곳. 이곳은 경기장의 함성 소리도 닿질 못했다.

두 사람은 그늘진 벤치에 앉아 멀리 정면을 바라보았다.

“피곤해 보여.”

“조금요.”

“구마하랑은 아침까지 뒹굴었나?”

“…….”

“보고 안 할 건가?”

“처음이라서요. 팀장님이 업무 내용을 궁금해 하신 건…”

“4시쯤 할 거 같다던데.”

“뭐가 말씀입니까?”

“자네 애인 경기 말일세.”

“애인이라뇨. 팀장님.”

“아침에… 그 일은 뭐야?”

“기자들 말씀이신가요? 구마하 본인이 불렀다고 합니다.”

“왜? 굳이?”

“저희를 믿지 못 한 것 아닐까요? 동료들이 빠르게 데리고 간 것만 봐도.”

“훗. 의심을 했다, 라….”

유스라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팀장. 그의 눈빛이 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자네가 다 말했군.”

“…….”

“대답해.”

“네. 그랬습니다.”

“왜 그랬지?”

“알려 주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상대를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겠단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계획대로 진행됐나?”

“어느 정도는요.”

“…자네한테 궁금한 게 있어.”

“말씀하십시오.”

“사랑에 빠진 건 연기인가? 진심인가?”

유스라는 긴장된 모습을 감추려 눈빛에 힘을 주었다.

팀장이 나지막히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피한다.

“아까 호텔을 나설 때 경호원들이 저한테 그러더군요. 자기들은 자기들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래서?”

“저도 제 본분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떠보는 듯한 질문은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꾸미지 말고 솔직하게 답해 봐. 나도 보고서를 올려야 하니까.”

“팀장님. 아직 결과는 나지 않았습니다.”

“무슨 결과를 말하는 건가.”

“구마하가 질 가능성도 있어요. 그는 확실히 어제 저와 있으며 많은 체력을 소비했기에 오늘 경기력에도 영향이.”

“이제 와서 양웨이가 메달을 따고 말고는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어.”

“그럼 왜 굳이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거죠…?”

“듣고 싶으니까.”

“거짓이었다고 하면 믿어 주실 건가요.”

“자네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면.”

설마 이 사람이 날?

원망 섞인 눈초리로 그녀가 아닌 먼 곳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팀장.

유스라는 그가 지금까지 자신을 부하 직원이 아닌 여자로 보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답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팀장님은 감정적으로 상황을 보고 계십니다.”

“감정적이라….”

그제야 고개를 돌려 자신을 마주보는 팀장.

그는 그 상태에서도 한참을 쳐다보며 입을 열지 않았다.

“처음이었어. 일 마치고 온 자네를 보는데 비참한 기분이 드는건.”

“왜 이러세요. 우리 일이 뭔지 모르는 분도 아니고.”

“자네를 잃을 거 같아서.”

“…….”

“바람이 부는군. 밤엔 비가 오겠어.”

팀장은 주머니에서 꾸깃하게 구겨진 담뱃갑을 꺼내며 건네줄까라는 제스처를 보이는데, 유스라는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언제는 갑 채 달라고 하더만….”

이런 작은 거절도 서운한가. 코웃음 속에 어색한 감정이 느껴진다.

유스라는 차분히 그를 보며 생각했다.

다크서클이 진하구나. 어젯밤을 뜬 눈으로 보냈다는 말이겠지.

그만큼 나를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제정신으로 버티기 어려운 일을 그나마 이어올 수 있었던 건 관리자가 바로 이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호감을 느낀 적은 없지만 늘 마음 한구석 감사함이 있었는 데….

“먼저, 준결승 때 절망감이 들었다는 것도 그런 뜻이었나요?”

“…….”

“작전의 성공보다, 제가 구마하를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는….”

“맞아. 이번에 보내면 놓치겠구나 싶었거든.”

“그러셨군요.”

팀장은 반쯤 타 들어간 담배를 멀리 던진다.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

“어떤 계획을 물어보시는 겁니까?”

“자네 말이야. 이렇게 세상에 얼굴이 팔려서야. 어디 보낼 수나 있나.”

“막기 어려우신가요.”

“온라인에 퍼진 걸 무슨 수로 막으라고.”

지금도 인터넷에선 구마하와 함께 있던 여자가 누군지 찾아야 한다는 의견이 빠르게 퍼지고 있단다.

외국인이면 상관없지만 중국 여자라면 용서하지 않겠다.

모든 상황이 구마하의 예상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신분이 알려진 건 아니지만, 앞으로 어딜가나 큰 어려움이 있겠지.”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였으니까요.”

“그렇다고 이 얼굴을 뜯어 고칠 수도 없고.”

“뭐하시는!”

“가만히 있어.”

갑자기 그가 유스라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위압하는 목소리로 그녀의 행동을 저지한 팀장은 그녀의 턱을 스쳐 어깨 그리고 허벅지까지 천천히 쓰다듬는다.

“자네 같은 인재를 사무직으로 돌릴 수도 없고….”

“…….”

“운동만 할 줄 아는 놈이라 생각했는데, 아주 분한 기분이야.”

유스라는 눈을 감고 체념하듯 속으로 말했다.

역시. 나는 이들을 벗어날 수 없어…

이것이 내게 주어진 현실이야…

“음?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만하시죠….”

“답해 봐.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하지만.

이렇게 주저앉고 포기하기엔 구마하가 보여 준 사랑이 너무 커다랗기에. 아직도 이 몸은 그의 체온을 기억하기에.

“팀장님.”

저항해 본다.

그가 말한대로. 구름판을 밟았으니. 딱 한 번만 용기를 가지고 도전해 보기로 한다.

도마를 뛰어넘고자 각오한 선수의 마음으로.

“왜.”

“손. 치워 주십시오.”

“…….”

“그리고. 이제 그만 일을 그만두고 싶습니다.”

“관두겠다, 라…”

유스라는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어제의 설렘과 아름다움이 지금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이유는?”

“그냥. 지쳤습니다.”

“지쳤다, 라….”

“…….”

손끝이 저렸다. 그늘 밑에 있는데도 땀이 온몸으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방금 뱉은 말을 취소하고 죄송하다고, 다시는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싶다.

역시 나에게 도전은 무리였어.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힘은 존재하는 법.

누구보다 그것을 빨리 알았기에 선택한 삶이었는데….

“대체 구마하랑 무슨 얘기를 한 건가?”

“…….”

“말해 보게.”

“그는….”

“음.”

“그는 저에게 사랑은 위대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 말에 팀장의 표정이 굳고 탐욕스런 손놀림도 멈췄다.

“뭐라고?”

“네. 그렇게 말했습니다.”

“자네 지금 나랑 농담하는 건가?”

“아니요. 그는… 모든 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면서 저를 용서하겠다고 했었어요.”

“…….”

유스라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하지만, 몸이 여전히 어제의 뜨거운 체온을 기억하고 있었다.

“훗. 애들 장난도 아니고.”

팀장도 자꾸만 깊은 한숨을 쉬며 그녀가 꺼낸 말을 되내였다.

“사랑은 위대하다, 라…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지….”

“…….”

“생각할수록 황당한 놈이로구만….”

새로 담배를 꺼내 물지만 불을 붙이진 않는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지만 머리는 딴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다.

결국 그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하하. 으하하하하! 사랑? 아하하하!!”

유스라는 판정을 기다리는 선수들 같이 말 없이 그를 보며 기다린다.

그리고 그 끝에 마침내 점수를 얻었다.

“대단해. 대단하다고. 자네나 구마하나. 그런 말을 꺼내는 놈이나, 그런 말을 믿고 휘둘린 자네나.”

그는 많은 요원들이 이렇게 남자에게 빠져 본분을 망각하고 조직을 떠나는 모습을 봐 왔다.

하지만 그녀만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여겨 왔었다. 그녀만은 내 옆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나, 이미 변해 버린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다.

마음이 가버린 여자를 무슨 수로 붙잡는단 말인가.

“자네가 누구보다 열심히 하긴 했지.”

“고맙습니다.”

“알았어. 그렇게 해.”

“네?”

“그렇게 하라고. 대신 보고서는 한 장 보내놓고. 나도 결제는 올려야 하니까.”

팀장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아우. 피곤해. 나도 어서 가서 자야지.”

“팀장님… 지금 무슨 말씀을?”

“뭐? 그만두고 싶다며.”

“…….”

정말 놔주는 건가? 정말로?

유스라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또 한번 눈물을 흘린다.

“왜 우나. 내가 뭐라고 한 거 같이.”

“죄. 죄송합니다…”

“한심하기는.”

“…….”

그가 유스라를 돌아보며 말해준다.

“일에 사심을 담는 요원은 변절의 가능성이 있다. 어차피 자네 같은 상황은 폐기되는 게 원칙이야.”

“그렇군요….”

“퇴직금은 없다. 상해에 있는 자네 자산들도 조직에서 압수될 거야. 대신 하루 기한을 줄 테니 저금이나 빨리 찾으라고.”

“네… 알겠습니다.”

믿을 수 없게 찾아온 현실. 자유를 갖는데, 그깟 아파트나 가구들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동안 고생했어.”

그가 손을 뻗는다. 유스라는 미소를 지으며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잡았다.

팀장은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구마하만 생각하지 말고, 내 마음도 나름 위대했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군.”

“물론이죠. 늘 감사하게 여기고 살겠습니다.”

“그래. 그럼 됐어. 가겠네.”

어디로 가야할까, 무엇을 해야할까. 빠르게 해답을 찾으면 좋겠지만, 갑작스레 변해 버린 상황에 머리만 혼란스럽다.

그저 두근대는 가슴이 그녀에게 본능적으로 다음 행선지를 알려준다.

신장으로 가자.

가족들을 만나고 다음엔 쿤륜으로 가서 그의 부모님을 찾아 주는 거야.

그래. 꼭 그렇게 하는 거야.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있는 그녀의 머리 위에서 메미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유스라는 밝은 미소로 어디서 울리는지 모를 메미를 향해 말한다.

“그래. 17년을 견딘 너도 있는데. 후후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