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400화 (400/401)

애벌래. 번데기. 그리고. (6)

“그래요? 잘됐네요. 아니 그런 이유로 못 오는 건 오히려 기쁜 소식이지.”

유스라가 회사에서 쫓겨났다고 연락이 왔다.

전화번호도 곧 있으면 막힐 거라면서 이것이 마지막 통화란다.

당연히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우승하는 그 순간까지 내 옆에서 지켜 주고 싶었지만, 이것도 좋은 결말이겠지.

또 좋아하는 사람이랑 헤어지는구나 싶지만. 그동안 느꼈던 이 별과는 너무나도 다른 뿌듯함에 가슴이 먹먹한 기분이다.

-마하 씨, 경기는 어디서든 볼 수 있으니까 꼭 응원할게요.

“저도. 언제든 괜찮으니까. 전화해요. 나 번호 안 바꾸고 있을 게요.”

-고마워요.

그녀가 마침내 안 좋은 일을 관두는 것도 좋고, 이별에 절망과 자책보단 훈훈함을 느끼는 나도 너무 좋았다.

그만큼 마지막까지 이번 일을 깔끔하게 완수하고 싶었다.

황 선생님을 비롯해 감독님, 지도자 선생님들은 내가 태극마크에 어울리지 못한 행동과 그로 인해 비열한 함정에 빠진 건 백 보양보해 이해해 준다지만, 올림픽 참가국의 하나로서 주최 측이 행한 모든 일에 대해선 용납이 안 된다며 분개하셨다.

이제 문식이 형도 경기를 끝냈고, 내일이면 폐막. 더는 눈치 볼것도 없는 상황에서 어른들은 반드시 이번 문제를 짚고 가겠다고 하시는데.

“끝까지 저한테 맡겨 주실 수 없으실까요?”

“니가 뭘 어떻게 할 건데?”

“시합으로 보여주겠습니다.”

“마하야 이건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알려 주고 싶어요.”

“뭘!!”

“1등이 아니면 안 된다는 사람들한테 스포츠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 얄팍한 수로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게 왜 이렇게 부끄러운 일인지. 애초에 그런 생각을 품은 사람한테 제가 꼭 알려주겠습니다.”

“이놈 이거 진짜….”

* * *

[결과 나왔습니다! 주심 부심 만장일치로 대한민국 김문식 선수의 손을 들어줍니다!!]

[훌륭합니다! 정말 잘 싸워 줬습니다, 우리 김문식 선수!!]

복싱팀 주장 김문식의 노력으로, 88서울올림픽 이후 20년 만에 한국 복싱에 금메달이 수여되었다.

대한민국 경기도 성남. 구마하의 친구들도 구마윤의 식당에 모여앉아 메달 세레모니를 보며 함성을 질렀다.

“와 씨!! 뭔가 좋은데 저걸 마하가 했어야 하는데.”

“시끄러, 병신아. 우리나라 선수 누구든 메달 따면 좋지.”

“근데 얘는 진짜 왜 그랬다냐…. 사람들 다 지만 보고 있을 때….”

“그러니까 미친놈이 하필 오늘 같은 날. 선생님! 선생님이 좀 뭐라고 하세요.”

김태윤의 질문에 바로 옆 테이블에 있던 한상률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상률은 친구 이주영과 옛 세계선수권 때 호흡을 맞췄던 육상대표팀 제자 이동민 김진수 김진운 육상 황금세대와 함께 있었다.

“나도 아는 거 없다. 나한테 그러지 마라.”

“상률아. 너희 직원들 북경 있지 않아? 그 마하 매니저란 친구.

그쪽도 상황 몰라?”

“몰라. 양 실장한테 연락은 받았는데. 경기장 오자마자 대표팀사람들이 데리고 갔다고 해서. 진짜 우리도 아무것도 몰라.”

“에휴… 녀석. 훈장이랑은 인연이 없는가 보네.”

국제대회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고, 국민체육 증진에 이바지한 점을 높이 사 구마하에겐 이전부터 체육훈장 청룡장이 예정되었지만. 그때마다 스캔들이나 연맹과의 갈등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바람에 번번이 수여가 취소되고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번에야말로 메달획득 여부와 관계없이 나라에서 큰 상을 주는가 했는데, 체육훈장은 그들과는 연이 닿질 않는다.

훈장이고 뭐고. 또 회사가 시끄러워지겠구나. 한상률이 심심한 기분을 맥주로 달래는데. 구마윤이 다가와 묻는다.

“선생님들 뭐 부족하신 거 없으실까요? 너희는 더 먹고 싶은 거 없어?”

“형님, 그만하고 앉으시죠. 이제 곧 마하도 시작할 건데.”

“맞아요, 형. 여기 앉으세요.”

“사장님, 제가 주문받을게요.”

“괜찮아, 너 있어. 전 장사 해야죠, 선생님. 고맙다 얘들아.”

“저, 형님. 혹시 최근에 마하랑 통화하신 적 있으십니까?”

“아침 그 일 때문에 그러시죠, 선생님?”

“네. 저희도 직원들이 있는데 아직 연락이 없어서….”

“괜찮을 겁니다. 뉴스 봤는데 녀석 얼굴 건강해 보이던걸요.”

“하하…. 이놈이야 한결같이 건강하죠.”

“아니, 오히려 너무 그래서 문제가 된 거 아닌가….”

“여자만 꼬이면 애가 이성이 사라진달까….”

스캔들을 걱정하는 주변과 다르게 구마윤은 동생을 보며 다른 느낌을 받았다고 말한다.

“전 마하 보는데 뭔가 극복했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극복이요?”

“네. 아마 오늘 마하는 그동안 자신이 보여 준 것 이상의 무언가를 해낼 겁니다.”

구마윤이 그렇다니 가게 안의 모두도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이때 마하의 고교 친구 박남수가 물었다.

“형님! 그럼 마하가 또 금메달 따는 거예요?”

“메달은 지금도 땄다면서.”

“아니. 그래도 금이냐 은이냐가 있잖아요.”

“신경 쓰고 있을까?”

“네?”

“그럼요?”

“어이, 구 사장.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신경 써야지.”

“맞아요. 형님. 여기까지와서 은메달이라뇨. 그건 아쉽죠.”

“아니. 그러니까… 하하! 저도 설명이 어려운데. 보세요. 곧 시작할 거 같은데.”

무공의 경지에는 단계가 있다. 구마윤은 스포츠도 무공으로 보기에 그만의 선수들을 보는 시각이 있었다.

삼, 이, 일류의 단계. 이 위치에 있는 선수들이 국내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내거나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 같은 국제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얻는다.

그다음 단계가 바로 절정(?頂)이다.

가게에 있는 동민이나 진수 진운이 그리고 한상률이나 이주영한주 고 감독이 현역 때 일류를 넘어선 절정의 고수들이었다.

절정의 단계에 들어서면 국제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그들 가운데 정점에 오르면 메달이란 이름의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동생 구마하는 절정의 단계를 넘은 초절정(超?頂)의 영역에 있었다.

현시대 전 지구를 통틀어 초절정의 영역에 들어선 이는 70억인구 가운데 1,000명이 채 되질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 구마윤은 마하의 얼굴을 TV방송 모니터로 확인하며 그가 초절정을 넘어 조화경(造化境)에 들어선 것을 알았다.

조화경을 넘는 건 무림에서도 쉽게 볼 수 없다. 말 그대로 지존의 경지에 오른 이들이다.

무엇보다 초절정을 넘는다는 건, 고통스러운 수행만으로 되는 것이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의 그늘을 극복해야 한다는 어려운 과제를 이겨 내야만 했었다.

두려움이나 번민을 느끼지 않는, 오롯이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있는 조화경의 경지. 마하가 그것을 해낸 것이다.

[네! 여기는 다시 베이징 올림픽 노동자 체육관입니다. 이제 곧 남자 복싱 헤비급 결승. 대한민국의 구마하 선수와 중국 양웨이 선수의 시합을 중계해 드리겠습니다.]

“한다 한다! 볼륨 좀 키워 봐!!”

[해설위원엔 86아시안게임 페더급 메달리스트이자, 구마하 선수를 직접 발굴하고 육성한 최두필 관장님 나와계십니다.]

[안녕하십니까, 최두필입니다.]

[관장님, 마침내 김문식 선수의 승전보로 대한민국 복싱계에 황금빛 물결이 돌아왔는데요.]

[그렇습니다. 우리 김문식 선수 오랜 시간 너무 고생 많았구요.

정말 훌륭하다고 또 한번 큰 박수를 보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구마하 선수의 시합도 다가오고 있군요. 좋은 결과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지금 장내 분위기가 올림픽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일방적인 응원으로 흐르고 있거든요. 이 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난 준결승 때도 같지 않았습니까? 구마하 선수는 분위기에 좌우되기보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에 집중하고 있을 것입니다.]

[도하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한 양웨이 선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하죠. 무엇보다 오랜 아마추어 경험으로 경기를 유리하게 이끌 능숙함이 있고요. 3라운드 9분을 체계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선수입니다.]

[구마하 선수보다 체중이 더 나가는데, 이 점도 영향을 받을까요?]

[펀치력에 있어선 우위에 있다고 보셔도 좋습니다. KO 숫자도 훨씬 많고요.]

[관중. 그리고 상대 선수. 결승전이란 무대. 쉽지 않은 경기가 될 것이라 예상되는데요.]

[그래도 구마하 선수는 해낼 겁니다.]

[긍정적인 믿음을 보여주시는 건 역시 직접 선수를 육성하셔서 그런 걸까요?]

[그럴 리가요. 승부는 냉정하죠. 저는 단지, 구마하 선수가 누구 못지않은 땀과 노력을 쏟았다는 걸 믿을 뿐입니다. 시작 단계부터 아주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훈련이 있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안 여쭤볼 수가 없는데. 혹시 오전에 있었던 일은 어떻게 된 건지 들으신 거 있으실까요?]

[저도 우리 같이 운동했던 매니저 친구 만나 물어봤는데. 지금도 잠깐 화면에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긴장돼서 그랬답니다.]

[긴장이요?]

[구마하도 사람이라는 거죠. 정상을 노렸다곤 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오리라곤 우리 누구도 예상 못 했으니까요.]

[그렇군요. 하긴, 오늘의 도전은 그동안 유례가 없는 일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하계 동계 두 분야에서 금메달을 받은 선수는 몇 있었지만, 새로운 종목. 완전 다른 분야에서의 세 번째 정상 도전은 저도 뭐라 설명을 드리기가 어렵네요.]

[아무쪼록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구마하 선수의 승리가 인간의 발전 가능성을 넓힐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지길 희망합니다.]

TV를 시청하던 친구들이 서로를 보며 말한다.

“저렇게 말하니까 뭔가 있어 보이는데?”

“구마가 인간의 발전 가능성을 책임지고 있다, 라….”

“그건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하하하….”

다 같이 웃고 떠드는 속에서 마침내 선수들이 링에 올랐다.

스캔들이야 어쨌든 지금은 응원해 준다는 뜻으로 시민들이 자리한 거리 곳곳과 TV 앞에선 뜨거운 함성과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떨린다. 보는데도 긴장돼 미치겠네.”

“도하도 죽을 거 같았는데, 세 번째 올림픽이라. 쟤는 지금 얼마나 긴장될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왜?”

“마하 얼굴 봐 봐.”

아시안게임 남자 800m 금메달리스트 김진운의 이야기에 한상률과 이주영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녀석한테 무슨 일이 있긴 있었나 보구나….”

“그러니까. 난 저놈 저렇게 눈빛 살벌한 거 처음 본다.”

푸른 옷과 헤드기어를 착용한 구마하와 붉은 옷을 입은 양웨이.

심판이 주의사항을 알려주고, 이글거리는 선수들의 표정이 전파를 탄다.

부드럽지 않은 외모를 가진 구마하였다. 해외에서도 그는 야수.

몬스터와 같은 별명이 따라 붙는다.

상대선수를 응시하는 무표정한 얼굴은 날 것 그대로 맹수와도 같은 서늘함이 있었다.

“마윤 씨, 마하가 이기겠지?”

“모르지.”

“질 수도 있다는 거야?”

“일단 보자고.”

부모님을 찾기 위한 여행의 끝이 과연 어떻게 매듭을 지을 것인가.

구마윤도 속으론 동생을 향해 응원의 메시지를 건네본다.

경기장에서도 공이 울렸다.

양웨이가 가드를 올리며 다가가고 구마하는 주먹을 내리고 그를 바라본다.

[아, 구마하 선수. 이건 대체?]

[마하 선수, 올림픽 결승전입니다. 방심하면 안 돼요!]

양웨이의 콤비네이션 펀치가 작렬하지만, 구마하는 뛰어난 반사신경으로 모든 공격을 피해냈다.

관중들은 얼마 전 있었던 준결승의 참사를 떠올리며 저주하듯 그를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시끄러운 야유소리가 TV 화면을 통해 송출된다.

“아니 왜 욕먹을 짓을 사서 하는 거야.

“아 씨발. 왜 저렇게 여유를 부려? 병신아 좀 진지하게 하라고.”

“마하야, 자신감도 좋지만….”

친구들을 비롯, 경기를 지켜보는 시민들 모두 구마하의 불성실한 태도에 화를 내기도 하고 경이로운 운동신경에 감탄을 내지르기도 했다.

1분이 지났다. 그때까지도 구마하는 한 번도 주먹을 지르지 않았다.

그러자 양웨이도 체력을 아낀다.

경기는 다소 지루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푸른 옷의 구마하 선수. 일부러 공격을 안 하고 있단 뜻으로 보이는데요?]

[아무래도 지난번과는 다른 작전을 가지고 나온 것 같은데요.

장기전으로 갈 양상인 것 같습니다.]

“마윤 씨, 저래도 돼?”

“왜 나한테 물어. 내가 뭘 안다고.”

“그래도 같이 훈련 했으니까.”

“흠.”

물론 구마윤은 동생의 변화를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에너지가 마하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다.

금강불괴(金剛不壞). 마음과 몸이 한계를 넘어 일치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외공의 최고 경지.

지금 마하를 때린다는 건 오히려 공격한 사람에게 타격이 쌓인다.

바위를 두드려봐야 어디 아프다는 소리를 하겠는가.

“뭔가 생각이 있을 거야.”

경기장에서도 분위기가 바뀐다.

[구마하 선수 코너로 몰리고 있습니다.]

[나와야 하는데요. 일방적으로 당할 수 있어요.]

[말씀드린 순간 양웨이 선수가 주먹을 쥐고 다가갑니다!]

허탕만 치던 양웨이도 더는 조롱당할 수 없단 각오로 구마하를 코너에 몰아세운 뒤 공격을 시작한다.

구마하는 여전히 가드를 올리지 않고 있었다.

짧은 거리에서 펼쳐지는 연속 콤비네이션을 위빙으로 회피하는 구마하.

[놀라운 반사신경입니다! 믿을 수 없는 움직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도 반격을 해야죠. 계속 이렇게 피하다가는!!]

공격하는 자 앞에서 피하기만 하는 자. 결국 양웨이의 끈기가 구마하의 반사신경을 넘어선다.

[아. 점수가…]

[구마하! 뭐 하고 있습니까!? 방어를 취하든가 클리치를 걸어 빠져나와야 합니다!!]

유효타를 맞아도 공격도 방어도 하지 않는 구마하였다.

양웨이는 신이 나서 주먹을 올리고 경기장에 모인 중국 관중들은 승리를 확신하는 함성을 질렀다.

중계도 말을 잃고 TV를 지켜보는 이들은 화면에서 나오는 장면을 이해할 수 없었다.

포기하는 건가? 지금 일부러 지려고 저러는 거야?

왜지??

“마윤 씨…?”

“봐. 걱정 말고.”

그렇게 일방적인 공격이 가해지기를 30여초.

1라운드 남은 시간 40초.

이변이 찾아온다.

[양웨이 선수가 뭔가 이상합니다?]

[공격을 멈추고 멀어지고 있네요?]

세상 모든 사람들 가운데 누구보다 기이함을 빠르게 느낀 양웨이였다.

이정도로 때리는데 왜…? 아무 느낌이 들지 않는 거지…?

타격이 들어가면 때리는 쪽이 먼저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그는 혼자 샌드백을 두드리는 듯한 묘한 기분에 빠져들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먹을 멈춰 지켜보았다.

역시나 구마하의 얼굴은 방금 잠에서 일어난 사람같이 평온해 보인다.

그리고 가볍게 날아오는 원투 펀치가 양웨이의 안면을 강타했다.

[구마하 선수 처음으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양웨이의 고개가 뒤로 꺾인다.

아프진 않다. 타격이 아닌 무언가에 부딪힌 느낌이니까.

그런데 정신이 어질어질하다.

자세가 흔들리고 주먹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뭐지? 딱히 위협적인 공격은 아니었는데?

[구마하 선수 천천히 코너에서 나오며 벌려진 점수차를 만회합니다!]

그때부터 1라운드를 마칠 때까지 이상한 장면이 펼쳐졌다.

구마하는 천천히 주먹을 질렀고 양웨이는 번번이 타격에 몸을 주체하지 못해 크게 휘청이며 뒷걸음질을 쳤다.

양웨이도 당연히 반격을 걸었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운동하는 어른 상대하듯, 하나같이 구마하에겐 아무런 리액션이나 반동이 나오질 않았다.

그렇게 3분 1라운드가 마치는 종소리가 울릴 때 사람들은 알았다.

이건 공평한 경기가 아니다. 이미 승패는 정해졌구나.

급이 다른 두 선수가 지금 링 위에 올라와 있다.

역시 구마하는 구마하다….

괜히 스포츠의 신이란 칭호가 붙는 게 아니었어….

그것을 느끼자 2라운드부터는 관중들의 응원 소리도 잦아들었다.

[2라운드가 시작됩니다. 경기장엔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합니다.]

양웨이의 절망하는 눈빛과 구마하의 무표정한 얼굴이 번갈아 드러난다.

구마하는 여전히 가드를 올리지 않은 상태로 태연하게 상대방을 응시했고, 양웨이는 어디를 어떻게 공격해야 좋을지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다시 공격. 다시 회피. 그리고 짧은 반격.

빠르기는 또 어찌나 빠른지 구마하의 좌우 펀치가 양웨이의 안면과 복부에 정확하게 날아가 타격을 입혔다.

[다운! 양웨이 선수 처음으로 쓰러집니다.]

카운트를 세는 심판도 고민에 빠졌다.

상황을 봤을 때 TKO를 불러도 이상할 게 없지만, 경기 시작 전 그에겐 한 가지 지시 사항이 있었으니. 섣불리 중국의 패배를 선언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양웨이도 정신을 차리며 일어선다.

기권이란 없다. 죽으면 죽었지 이대로 물러설 순 없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사람의 탈을 쓴 괴물을 쓰러뜨릴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처절할 정도로 눈물겨운 사투가 시작됐다.

그러나 금강불괴를 익힌 구마하에게 유효타란 있을 수 없고 강한 외공으로 무장한 주먹은 힘을 빼고 질러도 맞는 쪽엔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돌아온다.

2라운드를 마칠 때쯤엔 구마하의 점수가 양웨이를 역전했다.

라운드 말미엔 양웨이는 또 한 번 쓰러져 이미 그의 몸이 한계임을 알리고 있었다.

“그냥 빨리 이겨 새끼야.”

“그래. 갖고 노는 것도 아니고 이건 아니지….”

“…왜 저러지?”

오랜 친구들이 볼 때도 그것은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한상률도 구마하의 모습을 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왜지? 이성에 대한 절제력은 없어도, 늘 운동하는 선수에 대한 존중은 잃지않던 녀석인데?

한상률이 아내와 함께 있는 구마윤을 돌아본다.

구마윤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믿어 주라는 뜻을 보였다.

[3라운드. 마지막 라운드가 곧 시작되겠습니다.]

구마하에겐 생각이 있었다.

철저하게 상대를 조롱하듯 누르는 건 그만한 상황에서 보고픈반응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양웨이의 각성도 비열한 수작을 펼친 누군가의 반성도 아니다.

바로 관중들이었다.

[양웨이 선수. 1,2라운드와 달리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실력을 느낀 만큼 조심하는 게 있겠죠.]

[올림픽 결승이니만큼 두 선수 모두 후회 없는 경기를 했으면 좋겠는데요….]

오죽하면 중계까지 자국 선수가 아닌 상대국 선수를 응원하고픈 마음이 드는 상황.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관중석에서 누군가 일어나 큰소리로 외쳤다.

“加油!!!”

짜이요! 힘내라는 중국의 대표적인 응원이다.

답답한 마음을 누르다 못해 터진 진심 어린 한 마디였다.

그 외침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일어나 큰 소리로 양웨이를 향해 힘을 보내 준다.

힘내라. 쓰러지지 마라. 끝까지 싸워라.

지금까지 응원과 야유가 6:4의 비율로 있었다면 이제는 다들 구마하에게 야유를 보내지 않고, 그를 맞서 싸우는 자국 선수의 투혼에 감동을 느끼며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는 것이다.

과연 1등만 대우받고 보상을 얻는다면 어째서 올림픽이란 무대가 존재할까?

구마하는 이에 대해 오래도록 고민하며 답을 찾고 싶었다.

1등만 대우받는 세상은 비단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도 엘리트체육이란 미명하에 수많은 가능성이 묵살되고 있는 어두운 현실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래서도 이번 일을 통해 확신을 얻고 싶었다.

올림픽이란, 국가대표를 응원하는 마음이란. 나와 대표팀을 하나로 묶어 만족감을 느끼는 게 전부가 아닐 것이다.

국가대표를 보면서 느끼는 자긍심은 이겼을 때만 오는 게 절대 아닐 것이다.

결과보다 과정. 메달보다 그에 이르는 노력.

사람들도 그를 알 것이다.

구마하의 언어에 따르면 사정보다 애무에서 더 큰 기쁨을 만끽하는 순간이 있다.

가랑이를 벌리고 누운 모습보다 속옷을 반쯤 걸치고 다리를 닫고 있는 순간이 더 설레인다.

믿는다. 15억 인구를 대표해 나선 상대방의 긍지와 용기를.

[응원의 열기에 건물이 들썩이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끝까지 포기하면 안 되죠.]

[말씀드린 순간. 양웨이 선수! 관중들의 힘찬 응원에 다시 투지를 불사르며 구마하 선수에게 공격을 쏟아냅니다.]

[조심해야죠! 구마하 선수 방심하다간 다시 점수가 역전 될 수 있어요!!]

멋지다. 역시 올림픽은 심장을 뜨겁게 만드는 힘이 있어.

반쯤 포기하고 있던 양웨이의 전신에 이글거리는 기운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주먹은 전과 달리 매서웠으며, 금강불괴로 무장한 구마하라 하더라도 마냥 쉽게 흘려 버릴 수 없을 위력이 담겨 있었다.

[구마하 선수! 가드를 올립니다!]

[맞고만 있어선 안되죠! 반격해야 합니다!!]

두 선수는 난타전을 펼쳤다.

심판조차 어떻게 말릴 수 없는 주먹이 서로를 향했다.

2008 베이징올림픽 남자 복싱 헤비급 결승.

마지막 3라운드 경기는 그렇게 복싱사에 길이길이 남을 전설이 되었다.

[판정 나왔습니다! 구마하 선수 우승입니다!! 아테네. 토리노에 이어 세 번째 올림픽에서도 또 한 번 믿을 수 없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훌륭합니다. 그래도 저는 왜인지, 권투 선수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나라 선수보단 끝까지 물러서지 않은 양웨이 선수에게 더 큰 박수를 보내 주고 싶네요.]

[그렇습니다! 구마하 선수의 도전도 중요하지만, 양웨이 선수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근성. 관중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쳐 주고 있습니다.]

중계진을 떠나 보는 사람들도 다들 마찬가지였다.

세상은 구마하란 몬스터가 평범한 영역을 넘어 새로운 신화를 이룩한 모습보다 평범한 몸으로 그에 맞서 물러서지 않은 양웨이의 도전에 더 큰 칭찬과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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