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401화 (완결) (401/401)

새로운 세상으로 (完)

-아. 그래서 맞아도 안 아팠구나.

“몰랐어?”

-모르지. 내가 어떻게 알아.

메달 수여식과 세리머니 기자회견. 정신없는 일정을 마치고 선수촌으로 돌아와 형이랑 전화했다.

여기서 겪은 일, 만난 사람들, 사건. 모두를 알려 주자 형은 내가 문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또 한 번 성장했다고 말해 준다.

“신기하네. 어떻게 그렇게 됐지? 별로 잘하려고 한 것도 없는데?”

-무너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발전이 된 거지.

“뭔가 부끄럽구만….”

-니가 그러니까 확실히 낯선걸? 구마하 성격이 이런 일로 부끄러움을 느꼈나?

“아니 그냥 뭐… 여기저기 민폐를 끼친 건 사실이니까.”

-어른들은 뭐라셨어?

“그냥 좋은 결과 냈으니까 됐다고….”

-아직 누구한테도 제대로 혼나질 않았구나.

“응. 민구 형도 처음에나 막 화냈지. 기자회견 끝나고 보니까 고생했다고 다독여 주더라고. 그래서 형한테 전화한 것도 있어.”

-내가 널 뭐하러 혼내냐. 들어보니까 기자들 부른 것도 다 생각이 있어서 한 행동이라는데.

“그게. 실은 형. 내가 지금 뭔가 조금 이상해.”

-왜?

“그냥 아무 감정이 느껴지질 않아. 메달을 봐도 시큰둥하고. 기자들이 물어봐도 다 끝나서 그런가, 그냥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고개 숙이 고 지나가고.”

-그러니까. 그게 성장을 했다는 거야 마하야.

조화경의 경지에 들어섰기에 나는 앞으로도 기쁜 일이 있어도 크게 좋아하지 않고 나쁜 일을 겪어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란다.

“아 뭔가 싫은데….”

-왜 싫어? 좋은 거지. 사람이 평정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데.

“그래도 난 역시 감정에 솔직해지고 싶다고. 좋아하면 좋아하고 싫어하면 화내고.”

-그럼 그렇게 살면 돼.

“너무 내 일 아니라고 대충 말하는 거 아냐?”

-하하하! 나보다 몇 곱절은 강한 녀석한테 내가 무슨 말을 하라고.

“아니 그래도. 이건 진짜 말 그대로 도인이 되는 거잖아. 구마윤 같이.”

-난 너 정도 발전은 못 했어.

“진짜 궁금했는데. 형 단전 파괴되기 전 내공은 어느 정도였던 거야?”

-얼마 안 돼. 어렸잖아.

형은 앞으로 나에게 조언이나 충고를 해 주기가 어렵다고 했다.

진작부터 그랬지만, 조화경의 경지를 넘어선 순간부터는 무슨 말을 건네기가 조심스럽단다.

“그런 게 어디 있어. 형은 형이지.”

-그래도. 내가 하는 말 한마디가 너의 좋은 상황을 깨트릴 수도 있고.

“됐어. 조화경이고 뭐고. 난 그냥 구마윤 동생 할 거야.”

-마하야. 먼저 얘기해 줬지만. 넌 충분히 멋진 어른이야.

“어른 까짓거 뭐라고….”

-곤륜의 정신을 잃지 않는 한, 니가 가고자 하는 길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거야. 무엇보다 조화경에 접어들었으니까. 밖에서 답을 구하지 않아 도 스스로 길을 찾게 될 거고.

“정말 그럴까?”

-그럼. 그러자고 힘든 수행을 이겨낸 건데.

아이고 양심 간지러운 거 봐라. 내가 그러자고 운동했나… 뻘쭘하구만…

“알았어. 한국 가서 봐.”

-그래. 끝까지 마무리 잘하고.

“어.”

감정이 무덤덤한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역시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희로애락을 벗 삼아 사는 게 맞는 거 같은데….

잠깐만. 설마. 혹시? 이제는 여자를 봐도 별 느낌이 없는 건가?

다급한 마음으로 선수촌 창밖을 기웃거렸다.

여자. 지나가는 여자가…

“어. 있다.”

아니네. 감정은 살아 있어. 이성을 보며 느끼는 두근거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구나.

그래. 그래야지. 사람이 씨발 뭐 얼마나 신선같이 살겠다고 감정을 넘어서고 슬픔을 덤덤하게 받아들여.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그러는 거 지.

변한 건 없다. 구마하는 언제나 구마하인거야.

“이게 형이 말한 내 안의 정답인가…?”

그래도 좋다. 더는 사랑에 실패하더라도 나 자신을 깎아내리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래. 유스라도 떠났고.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지.

대신 이제부터 만나는 사람이 진짜 나의 사랑이다.

목숨을 걸고 가는, 실패하지 않는, 성급하지 않은 그런 사랑 말이다.

“어?”

마침 또 하늘이 나의 시그널을 들어주시는가 전화기가 울렸다.

그러나 이 신호가 좋은 건지 아닌지는 냉정히 말해 잘 모르겠다.

“응. 주영아.”

-…….

“뭐지? 잘 못 걸었나?”

-아니. 내가 건 거 맞아. 너 어디야?

“아. 나 지금 선수촌.”

-호텔에선 나왔어…?

“응. 그게 실은 그 호텔이 말이야.”

-알았어. 그럼 잠깐 나 좀 봐.

목소리가 싸늘한데…

하긴 어떻게 목소리가 따뜻하게 나오겠냐. 얘도 건너건너 들은 소문이 있는데.

지난번 그 옥상에서 보기로 했지만, 폐막 전날이라 그런가, 사람 없는 곳이 없다.

그래서 돌고 돌아 헤매고 헤매다 마침내 인적 드문 장소에서 서로를 만났다.

“우선 금메달 축하해.”

“어. 그래. 고마워.”

“대단하긴 하다… 한 종목도 아니고 세 종목이나.”

“넷인데….”

“응?”

“아. 그게 육상은 단거리랑 중거리가 엄밀히 다른 분야라.”

“그래. 네 종목. 올림픽 다섯 번째 금메달이지.”

표정과 말투가 싸늘하다 못해 피바람이 부는 것 같다.

역시 얼굴이나 보고 축하 인사나 건네자고 부른 게 아니구나.

“잘못했어.”

“…뭘?”

“그게. 그러니까….”

“잘 말했다. 안 그래도 나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 여자는 누구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주영이.

이제 와서 누구한테 들었어? 라는 건 별로 좋은 질문이 아니겠지?

유스라에 대한 애정이 아직 남아는 있다만. 그래도 그녀는 내 곁을 떠났고. 그 사람도 내가 새로운 사랑을 만나는 걸 반길 거니까. 그러니. 확 신을 갖고 사실대로 입을 열었짝!!

“…….”

“나쁜 새끼….”

“아니 그러니까. 이건… 그래! 중국 측이 스파이를 붙여서.”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진짜야!!”

“정말 너 답 없는 애였구나….”

아니… 어. 그. 그…

형 가슴이 아픈데?

덤덤해지지 않는걸?

상처받으니까 쓰려.

조화경이라며 왜 이러는데???

* * *

“그래서 그런 소문이 돌았구나.”

“어떤 소문요?”

“니가 사람들 다 있는 데서 여자한테 무릎 꿇고 그랬다고.”

“감독님. 무릎은 안 꿇었고요. 그냥 화난 거 달래 주려고 따라가다가 보니까….”

베이징 올림픽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것도 어느덧 두 달이 지났다.

이제는 회사 사람들도 어느 정도 자초지종을 알 정도로 주변에선 유스라와의 스캔들을 걱정하지 않는데. 대중들에겐 그날 아침에 기자들한테 사진이 공개되고 저녁에 선수촌에서 이주영한테 뺨 맞고 빌었다는 말이 와전돼 내 이미지는 어쩔 수 없는 바람 존나 피는 새끼가 되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건 아니지. 니 행동의 결관데.”

“감독님?”

“그러니까요. 별로 달라진 것도 없잖아?”

“아. 민구 형. 그게 무슨 소리세요. 제가 언제 그렇게 함부로 여자들 만나고 다녔다고.”

“너 내가 클럽에서 취해서 쓰러진 거 데리고 나온 게 몇 번인 줄 알아?”

“양 실장. 그랬었어?”

“네, 대표님. 이 녀석 이거. 그래서. 제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마윤이 형 찾아가고.”

“에이 에이! 다 끝난 일을 가지고 왜 또 이제 와서….”

올림픽을 마치고. 나는 일부러라도 조용히 지내는 삶을 택했다.

물론, 베이징에서의 승전보로 셀 수 없이 많은 행사와 광고 기획이 잡혀있었지만. 회사 운영에 있어 필요한 일들 말고는 거의 다 쳐내고 다음 행보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이제는 결정했냐?”

“저기. 그게요. 감독님. 아직 잘 모르겠어요.”

“뭘 몰라?”

“그게 제가 프로로 가는 게 맞는지 아닌지….”

“뭔 소리야 인제 와서?”

“그러니까 방금 감독님도 결정하셨냐고 묻길래 제 진심을.”

“내 질문은 미국으로 언제 갈지 결정했냐 이 뜻이었어.”

“실은 말입니다. 대표님. 이 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그게… 마하가….”

민구 형이 슥 돌아보길래 고개를 끄덕끄덕해 준다.

차마 내 입으로 꺼내지 못한 고민을 형은 전담 매니저의 책임으로 회사 대표님께 전해 준다.

“이제 와서??”

“조금 늦은 감이 있을까요….”

“야 이 녀석아. 이건 늦고 자시고가 아니라….”

나는 스포츠를 사랑한다.

나라는 멍청한 놈을 여기까지 발전시키고, 사람 만들어 주고, 세상에 인정받게 해 준 스포츠를 나는 평생 아끼고 사랑할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마하는….”

하지만 스포츠엔 종목이 나누어져 있었다.

어느 한 종목을 선택해 평생 해가자니, 다른 종목들이 눈에 걸리고…

그 종목을 한다면 또 저걸 더 잘할 것 같고… 물론 내가 선택한 것도 최선을 다 할 테지만.

그렇다. 여자와 마찬가지였다.

나는 사랑하는 운동에서도 하나를 선택할 수 없는 참으로 안타까운 지경에.

“야 인마! 그게 뭐가 안타깝다는 거야!! 니가 우유부단할 뿐이잖아!!”

“아! 아니에요!”

“뭐가 아니야!!”

“대표님… 진정을….”

“어떻게 진정이 돼! 지금 다시 육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근데 유진이가 제 기록을 깬 것도 뭔가 좀… 가만 놔두는 것도 그렇고….”

“마하야. 기록이란 건. 누구든 깰 수 있고. 또 깨져야만 하는 것이고.”

“그… 그래도 세계신기록은 안 깨지면 영원한 거잖아요….”

“니 기록은 2007년에 이미 유진볼트가 따라잡았다니까!?”

“저도 이야기는 해 줬습니다….”

“그때는 제가 은퇴한 상황이었고요….”

“아이고 머리야 어이고….”

육상은 모든 스포츠의 근본이자 내가 뭘 도전해도 기본 이상 해낼 수 있게 만들어준 바탕이다.

비유하자면 모든 여자를 만나는 데 있어 ‘이렇게 세심하고 좋은 사람일 줄 몰랐다.’라는 소리를 듣게 만들어 준 혜정이 같달까?

그렇다고 육상으로 돌아가자니. 이왕 컴백하는 거 단거리 중거리로 갈 게 아니라, 육상에서도 아직 못 해 본 종목들 많으니까.

높이뛰기도 해보고 싶고, 원반이나 투창도 은근 자세가 간지나고.

“그래서 내가 데카트론을 도전하라고 했잖아. 철인 10종.”

“양 실장?”

“죄송합니다 대표님….”

“아 왜 형한테 뭐라고 그래요. 감독님 성격 이상하시네?”

“니 녀석 때문에 그런 거잖아!”

스키도. 나는 알파인 스키 다운힐을 했지만, 엄밀히 노르딕이란 북유럽 스키가 따로 존재하고 있다.

복싱도 프로로 나가면 한 곳이 아닌, 4대 기구가 나뉘어 있다.

심지어 복싱은 체급을 바꿔도 돼 몸이 허락되는 한 네 체급 제패 같은 미친 짓도 가능하다.

그냥 이것도 저것도 다 하고 싶다.

다 하고 싶지만,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종목이 서운해하고 아쉬워할까 봐 고르지를 못하겠다.

“2004 아테네 100m, 200m, 800m 금메달. 2006 토리노 동계 올림픽. 활강 금메달.”

“저요?”

“가만히 들어! 그리고 2008 베이징 올림픽 남자 복싱 헤비급 금메달. 너는 이걸로도 만족이 안 됐다는 거냐?”

“어… 네.”

“허허허. 허허. 참 나 이 녀석 이거….”

“와… 하하하 근데 이렇게 들으니까… 마하 너 진짜 대단하구나….”

“하하! 감독님이 고생 많이 하셨죠… 형도요.”

“나야 뭐. 내가 한 거 있나.”

“이봐 양 실장….”

“네! 죄… 죄송합니다, 대표님.”

“지금 이 상황에 가장 날 짜증 나는 만드는 게 뭔지 알어?”

“모…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멀뚱멀뚱하고 있으니 감독님이 손가락을 척 들면서 말씀하신다.

“세상 어떻게 되든 지 좋을 대로 하겠다는 이 녀석보다. 그런 놈을 말리지 못하고 부추기는 자네보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감독님 자신을 가리키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마하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내가 참… 나까지 덩달아 미치는 건지 뭔지….”

답이 없는 문제로 씩씩거리기를 잠시.

갑자기 경리 누나가 회의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감독님을 불렀다.

“대표님! 아. 마침 마하 씨도 같이 있었구나.”

“왜요? 누가 저 찾아요?”

“무슨 일 있어?”

“저기 그게… 방금 급하게 연락이 왔는데요….”

국정원이었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우리 부모님을 찾았다고 내일 비행기 편으로 보낼 테니 신병 인수 바란다는 연락이 들어왔단다.

“장난 전화라고 생각했는데… 먼저 대표님께 들었던 이야기가 있어서….”

“마하야…?”

“야. 설마….”

“…….”

유스라가 해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확신하냐고?

키르기스스탄이라니까.

신장 바로 옆에 있는 곳이잖아.

* * *

“후우….”

“형. 왜 그래.”

“아. 어우. 마하야 아직 도착 안 하셨지…?”

“저기. 봐 봐. 1시간 남았다고 나오고 있어.”

“허우. 후우….”

“마윤 씨. 진정 좀 하고.”

“가슴이… 가슴이 가라앉지를 않아….”

며칠 뒤 인천공항에서 비밀리에 가족들을 상봉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원래는 형과 형수님. 그리고 나 세 사람만 올 수 있는데. 사정을 부탁해 민구 형과 감독님까지는 함께 있어 달라 부탁했다.

“근데.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찾았을까요? 이 넓은 세상에서?”

“국정원이라… 이놈 인맥도 참.”

“아까 살짝 직원분한테 여쭤봤는데, 국정원도 원래라면 미친 소리라고 치부하고 넘기겠지만, 정확하게 외부에 밝힐 수 없는 라인으로 들어온 정보라면서 혹시나 해 확인을 해봤답니다. 대단하지 않으세요?”

“외부에 밝힐 수 없는 라인이라. 양 실장은 그 여자 봤다고 그랬지?”

“저는 짧게만 봤죠. 심지어 운전하고 있어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습니다.”

“…양 실장.”

“네.”

“어떻게 생각해?”

“뭐를요? 그때 그분요?”

“아니. 마하 진로 말이야.”

“아. 네.”

“정말로 저 녀석 원하는 대로 들어주면 다 가능할까?”

“그게. 대표님. 제 생각은.”

“두 분이 뭘 이렇게 속닥거려요?”

“너 얘기했다, 이놈아.”

“알고 있어요, 민구 형. 대표라고 막 다 들어주고 그러지 마요. 형은 내 편이어야지.”

“어이고, 어이고….”

“마하야. 근데 이러면 그때 그 여성분도 같이 오는 거야?”

“아니라는 거 같던데요. 부모님만 따로 인계받았다고.”

“근데 너 왜 여기서 있어. 형님 옆에 있어 드려야지.”

“형수님 있잖아요.”

“그래도. 형제가 다르지.”

“후우. 몰라요. 저도 우리 형 저렇게 무너지는 모습은 처음이라.”

“대표님. 마하도 긴장되겠죠.”

“아니. 전 솔직히 뭐… 그냥? 음? 같은 기분이라서.”

부모님 소식을 들은 뒤부터 형은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지만. 나는 반대로 크게 이렇지도 저렇지도 않은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론 이것도 조화경 효과인가? 엄청 냉정하구만 조화경이란 거. 싶었는데.

딱히 그렇게 내가 매정한 인간이 됐다고 보는 것보단, 그냥 나에게 있어 부모님이란 의미와 형한테 있어 부모님이란 의미가 달라서 그렇다고 이해하고 지나갔다.

“전 오히려 부모님보다. 형이 걱정이 드네요. 멘탈이 버틸 수 있을지 없을지….”

“그래. 그래도 두 분이 무사히 오셔서 다행이다.”

“그러게요.”

부모님보다 옆에 있는 감독님이아 민구 형. 그리고 형이랑 형수님이 더 가족같이 느껴지는 상황.

그런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시곗바늘이 한 바퀴 반을 돌았다.

“들어오십니다.”

깔끔한 정장의 신사분이 오셔서 문을 열자 저벅저벅 하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

“흑. 으으윽.”

“마윤 씨. 어른 들 뵙기도 전에 왜 이래…?”

“아. 형? 뭐 죄 지었어? 고개 좀 들어.”

“마하야. 그런 게 아니라….”

무너지는 형을 부축하다가 부모님이 방으로 들어오시는 장면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도 바로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들어보니.

‘얘들아….’

“….”

어? 뭐지? 방금 목소리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눈앞에 있었다.

4년 전 형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모습부터 별로 크게 변하지 않은 듯한, 50대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고 건강한 외모로 나타나신 두 분.

형은 잠깐 눈을 뜨더니 부모님께 가 안겨 통곡을 했고. 그런 형을 안아 주느라 아버지도 어머니도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시는데.

‘마하도 잠시만.’

또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누가 대체 이런 마술을 쓰는 건지 놀라서 당황하고 있으니, 어머니가 형한테서 멀어져 나에게 와 얼굴을 쓰다듬어 주셨다.

‘놀랐구나. 아버지셨어. 괜찮아. 전음(傳音)이라는 거야.’

“어… 아. 네….”

‘아직 우리는 너희의 언어를 모르니까. 조금만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와우. 무공. 우와우!!!

그것으로 부모님에 대한 확인은 끝났다.

그러고 보니 형이 말했던 대로 아버지는 태극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고 있었고, 어머니는 40대 후반이라곤 믿을 수 없는 미모를 가지고 계셨 다.

진짜 이럴 때 할 말은 아니지만…

나도 곤륜에서 유년기만 보내지…

셋 다 왜 이렇게 멋있고 예쁘냐…

* * *

부모님이 돌아오시고 또 잠깐 시간이 지났다.

신원도 보증되고, 대한민국 국적도 얻으셨다.

원래는 조금 복잡한 상황이 될 수도 있었는데, 내가 원체 명성이 있다 보니 어려운 서류작업을 우야무야 넘긴 것도 있었다.

두 분은 생활 습관이나 환경이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오신지라, 도심에 있기보단 깊은 산 속에 거처를 마련해 드렸다.

“그래도 좋지 않냐?”

“뭐가요?”

“어쨌든 부모님이 있으시니까.”

“뭐. 그냥 뭐….”

“아직도 어색해?”

모르겠다. 형은 두 분이 같은 땅에 계셔서 없던 힘도 솟아나는 거 같다는데. 그건 끊어진 단전을 치료해서 내공이 샘솟아 그런 거 아닐까 싶고. 나는 부모님이 있어서 좋냐고 물으면.

싫은 건 없지만… 딱히 좋은 것도. 그닥 잘…

아무튼, 오늘도 시간이 되길래 민구 형이랑 부모님을 만나러 태백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러니까 너랑 형님은 탈북자가 아니라 고려인이었다는 거지?”

“하하하! 형. 좀 넘어가요.”

“아니. 넘어가는 게 아니라. 신기하잖아 나도.”

1000년 전 사람들이 현대에 정착하는데, 이 정도 구라는 그냥 두루뭉술 넘어가자고.

왜 태백산을 골랐느냐 하면, 형이 말하길 그곳이 가장 곤륜과 비슷한 풍경을 가지고 있고, 고도도 높고. 또 없지 않아 부모님도 문명과는 아직 잘 어울리지 못하고 계시기에 편한 환경으로 해 드린 것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편의는 갖춰 드렸는데.

“어휴. 이건 또 뭐야?”

“허허허….”

부모님은 그런 현대문명도 아직 어색하신가, 따로 나무를 베고 흙을 퍼 가지고, 집을 짓고 두 분께 익숙한 환경을 꾸미고 살고 계셨다.

대체 이 나무는 어떤 무공으로 자른 걸까? 한두 그루가 아닌데…

“마하 왔구나. 어서 와라.”

“아 네. 잘 지내셨어요…? 어머니.”

“그럼. 덕분에 잘 지내고 있지.”

“오늘은 사형께서도 같이 오셨군.”

“예. 아. 안녕하셨습니까… 아버님.”

부모님을 알게 되면서 또 하나 배운 게 있으니. 내공을 사용하면 언어도 남들보다 빠르게 익힐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젠장. 난 그것도 모르고 단어 책만 죽어라 읽었는데…

“수련은 잘하고 있느냐.”

“뭐. 운동은 꾸준히 하고 있어요.”

“그래. 늘 기본이 중요한 것이지. 들어가자.”

언제 봐도 신기한 분들이 아닐 수 없다.

1,000년 전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아버지는 분명히 50대 초반이고 어머니는 40대 후반인데. 두 분 다 봤을 땐 30대 후반 어른들 같은 게…

물론 어른들이 형을 낳은 나이가 열아홉 열다섯이라 젊을 수도 있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그때 결혼하고 아이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는데.

잠깐만 그 와중에도 네 살 터울을 맞춘 거야?

“조금 적응은 되셨나요?”

“그럼요. 사형과 사부님의 세심한 배려엔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하하… 전 그냥 매니전데….”

“근데 이런 집은 또 언제 지으셨어요…?”

“그냥. 아버지가 심심하다고 하셔서.”

“그래도 화장실은 저쪽으로 쓰시지.”

“미안하구나. 또 걱정을 끼쳤나보다 우리가.”

“아니요. 뭐… 걱정이랄 것까지는 아니고….”

오늘은 혼자 온 것도 아니고 민구 형이 같이 있으니 조금 더 어색함을 이겨내고 긴 시간 있을 수 있겠다.

아니 그냥 자고 갈까? 그래도 되지 않나? 어쨌든 부모님 집인데?

“그럼. 물론이지. 어른들도 좋아하실 거야.”

“그렇죠? 그래도 형 우리는 저쪽 집 가서 자요.”

“나는 왜? 너 혼자 자고 와.”

“에이 무슨 소리세요. 매니저가 왜 나만 따로 두려고.”

“마윤이 형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

“아 진짜….”

처음엔 형네 부부랑 함께 왔었고, 그다음엔 감독님과 민구 형이 다 함께. 지난번에 한번 혼자 왔었는데 어색해서 금방 도망쳐 나갔고. 그건 좀 아니지 않나 싶어 오늘은 민구 형이랑만 왔는데.

“진짜 나 혼자 두고 가려고요…?”

“그래야지. 마하야. 이럴수록 부모님이랑 더 친해질 계기를 마련해야 해.”

“차는요?”

“난 요 아래 숙소 잡고 있을게. 끝나면 전화해.”

“뭐하러 쓸데없는 데 돈 써요!! 멀쩡한 집 놔두고.”

“너가 어른들이랑 더 가까워지라고 배려해 주는 거잖아.”

“아니. 친하다니까요. 그냥 나도 어색하니까 그러지.”

“편하게 잘 이야기해봐. 고민도 상담하고.”

“아. 진짜….”

결국 민구 형은 밥만 먹고 가 버리고 부모님과 셋이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뻘쭘하네… 진짜로. 차라리 기자 회견을 가지는 게 낫지…

“사형은 가셨나 보구나.”

“네. 일이 있어서….”

“배려가 깊은 분이시다. 따듯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

“하하… 화나면 뒤끝 장난 아니긴 해요.”

“그래도. 마하가 좋은 분들을 알고 있어서 참 다행이다.”

“아. 네.”

“그래. 들어갈까?”

“여보.”

“음?”

“좋은 시간인데. 아들이랑 같이 산책도 다녀오시고 하세요.”

“그럴까?”

어… 어머니… 아니. 엄마…?

형한테 들은 이야기가 워낙 많아서 그런지 어머니보단 아버지가 더 어색한 편이었다.

아니 어색하다기보단 솔직히 무섭다랄까?

“뭘 그렇게 긴장하고 있느냐.”

“네? 아. 그냥….”

“우리는 구면이지?”

“네?? 어. 무슨 뜻이신지???”

“그날. 너의 기를 읽었단다.”

“오. 우와! 그럼 그때 그게 그냥 꿈이 아니었어요?”

“후후. 꿈이라.”

“오… 진짜 아버지. 저 아버지 만나면 하나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뭐냐? 말해보거라.”

“진짜로 하늘을 날 수 있으세요?”

“하하하! 아하하하!”

어쨌든 아버지와 산책을 나왔다.

나랑 있는 게 싫지는 않으신가, 많은 이야기에 큰 웃음을 보여주셨다.

물론, 하늘은 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으셨지만.

“강하구나.”

“네? 아. 저요?”

“음. 보통 사람은 이렇게 거친 길을 쉽게 가지 못하는데. 마하는 아주 당당하게 걷는 것 같아.”

“하하… 그냥 아버지 따라가다 보니까.”

“마윤이한테 들었다. 마을 뒷산을 매일같이 뛰어올랐다면서.”

“네. 그때는 뭐 그냥… 뭐라도 하고 싶어서요.”

“아비도 없이 이렇게 번듯하게 자라주다니. 마윤이도 마윤이지만, 널 보면 참… 면목이 없구나.”

“어휴. 무슨 말씀이세요. 저보다 형이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저는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서 괜찮았어요.”

“그래도 너희 둘을 보면 정말이지….”

“어쨌든 이렇게 오셨잖아요. 차원을 넘어서. 그럼 됐죠. 뭐.”

“그리 생각해 주면 고맙구나.”

내가 어색해 하는 만큼 부모님도 그런 게 있으시겠지.

자식들 외딴 세상에 홀로 두었다는 죄책감.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시켰다는 미안함.

흠. 근데 그렇게 보면…

“아버지. 혹시. 마음도 읽으세요?”

“아쉽게도 그런 무공은 없단다.”

“어휴 다행이다….”

“왜? 들키기 싫은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느냐?”

“아니요. 한편으론 어머니도 어색해서 그냥 절 아버지한테 떠넘긴 건 아닐까 싶어서요.”

“하하! 그런 면도 부정할 순 없겠지.”

역시 동서고금 낯선 사람끼리 친해지는 데는 자리에 없는 사람을 씹는 것만큼 탁월한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아버지도 어머니랑 싸우고 그러세요?”

“많이 다투지. 하지만 늘 이기지를 못해.”

“우와. 옛날 분들도 그러시는구나?”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게 다를 것 있겠느냐.”

“어떠세요? 여기 생활은?”

“놀랍지. 아무리 긴 세월을 넘어섰다곤 해도 이런 세상이 펼쳐지리라곤. 상상의 범주를 뛰어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하늘을 올려다보시는데, 저 멀리 비행기 하나가 선을 그리며 날아가고 있다.

아버지는 자신이 가지고 계신 무공으로도 할 수 없는 일들을 척척 해내는 현대인들을 보며 인간의 가능성이란 참으로 무궁무진하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서운하진 않으세요? 무공이 큰 의미가 없는 세상이 됐는데.”

“自知之明이라 하였다.”

“네? 아. 네.”

“무슨 뜻인지 모르니?”

“아직 그… 원음을 다 알아듣기엔….”

“이곳 말로 풀어주자면 자지지명이라 하던가. 자신을 아는 자가 가장 현명한 법이라는 뜻이지.”

이 와중에 특정 단어가 유독 익숙하게 들린다면 내가 진짜 개쓰레기 같은 놈이 되겠지?

“조… 좋은 이야기네요.”

“무공을 익힌다는 건 누굴 넘어서거나. 세상에 나를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다. 自勝者强(자승자강) 모든 건 나를 극복하기 위함이니. 세상이 날 필요로 하지 않더라도 아쉬울 건 없지.”

“어… 아… 네….”

“왜 그러니?”

“아니요. 그냥 뭔가 깊으셔서.”

“겸손하구나. 마하도 고수의 반열에 들었으면서.”

“그게. 아버지 기대와는 다르게… 저. 저는 운동선수가 된 게….”

“욕망이 첫걸음이다.”

“네?”

“모든 일의 시작은 정의나 뜻에 움직이기보단 내 안의 욕망이 기본이 된다는 것이다.”

형한테 들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간략하면서 깊이감 있는 시선으로 삶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

이래서 형이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구나.

그때부터 한참을 이곳저곳 다니면서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를 하다 보니 내 얘기도 많이 건네드릴 수 있었다.

여자한테 인기를 얻고 싶었다는 마음부터, 미친 승부욕으로 달성했던 많은 일들까지.

“그래서 현대에선 천하제일비무대회를 올림픽이라고 하는데. 제가 거기서 지… 지존같은 뭐… 그런 존재가 되어 있어요.”

“하하하! 그럼! 지존의 아들은 언제나 지존이 되어야지!!”

“물론이죠. 당신 아들인데요.”

“어찌 내 아들만 되겠소. 당신도 고생하셨지.”

그렇게 인자하고 신선 같은 아버지나 어머니도 막상 자식 자랑 듣는 걸 싫어하진 않는구나.

정말 사람이란 건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구나.

“어… 어머니도 무공을 익히셨죠?”

“네 어미 손에 검 한 자루 쥐여줘 봐라. 천하에 당해 낼 자가 없을 것이다.”

“애 앞에서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부끄럽게.”

“우와… 아! 그때 봤어요. 막 이렇게 휘릭휘릭 하시면서 싸우시는 거.”

“마하는 검술에 관심이 있니?”

“어… 음. 올림픽에도 펜싱이 있긴 하지만. 그건 저기 프랑스 검술이라.”

이야기가 술술 나오는 가운데, 두 분께 내가 가진 가장 큰 고민을 털어놓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한 길을 선택해야 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어려운 고민이구나. 나도 처음 무공을 시작할 땐 많은 것을 익히고 싶었단다.”

“아버지는 어떻게 곤륜 무공을 익히셨어요? 형한테 듣자 하니 원래 곤륜 분이 아니셨다면서.”

“네 어미가 자기와 맺어지려면 사람다움을 갖추고 오라고 했거든.”

“아. 우와….”

“지금은 이렇게 보여도. 아버지도 한때는 말릴 수 없는 광인에 가까우셨단다.”

“하하하… 진짜요?”

“거, 애 앞에서 소싯적 이야기를….”

인간의 몸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전성기가 있다.

훈련하지 않아도, 자연히 나이를 먹으며 정점을 찍는 순간이 오는데 그 뒤로는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아버지는 절정의 순간을 놓치기 싫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다니셨단다.

그것이 강한 것이라 믿으셨단다.

그러던 어느 날. 명성이 드높은 고수에게 도전했다 완전히 깨지곤. 무림에서 더는 가치를 못 느껴 어머니를 찾아가 가정을 꾸리려고 했는데. 곤륜에 들어가 수행을 하고. 무당에 가 또 배움을 얻고,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깨우침과 진리를 느끼고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해 주신다.

“그게 아버지 몇 살 때 일이셨어요?”

“니 형을 낳기 전의 일이지.”

“하하하… 아 네….”

어떻게 보면 우리 집안 남자들이 일찌감치 사회 진출 하는 건 특별한 것도 없는 그냥 가풍이구나.

열아홉에 깨우침과 진리라…

하긴 나도 그때 금메달 땄어. 한국식 나이 아니라 세계 공용으로 따지면 열일곱이었고.

“세상이 어떻게 되든, 남자를 성장시키는 건 여자의 힘이 아니겠느냐.”

“그쵸!! 와. 아버지. 역시.”

“마하는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이 많구나.”

“네? 어머니? 네? 뭐라고요?”

“후후 뭘 그리 놀라고 그러니.”

“아니… 아버지가 마음은 읽을 수 없다고….”

“이건 읽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란다.”

이왕지사 마음까지 다 들킨 거. 더 솔직하게 내 고민을 털어놓게 됐다.

“사랑을 하고 싶어요.”

“음.”

“좋은 생각이구나.”

“근데, 매번 미숙하고 부족했던 만남을 단지 지난 인연이라고 내치고 싶지가 않아요….”

“흠.”

“그 아이들 생각은 너랑 같니?”

“글쎄요. 모르죠. 누구를 만나고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래도. 매듭을 깔끔하게 짓고 싶은 게 있어요. 만날 땐 다 그 친구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저도 만만치 않게 실수한 게 많다 보니까….”

한 종목을 택할 수 없는 마음같이, 한 사람을 택하기도 어렵다.

모든 걸 갖겠다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이쁨받고 싶다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만났던 여자들. 내가 도전했던 운동들. 모든 것이 다 너무 사랑스럽고 고마워서.

“전… 저는요. 진짜. 두 분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정말 너무 외로웠거든요. 그런데 그런 날 이렇게 멋지게 만들어 줬는데. 그 마음을 어떻 게 하나만 선택할 수 있냐고요. 인간 된 도리가 있지. 은혜를 입었는데….”

“그래. 그렇지….”

“미안하구나….”

눈물을 흘리며 진심을 고백했다.

육상도 스키도 복싱도. 다 정말 고맙다.

아니 그냥 운동이라는 자체가 나에게 평생을 보답하고 사랑해 주고 싶은 그런 존재다.

물론 여자도 마찬가지야.

혜정이나 다빈이. 가능하다면 한수빈도 다시 만나서 잘 이야기를 해 보고 싶어.

빅토리아도 잊을 수 없지. 생각할수록 얼마나 고마운 사람이냐. 애정이 뭔지도 모르는 금발미녀한테 펄떡거리는 어리숙한 놈. 그녀가 사랑이 란 진지한 것이라 알려주지 않았다면, 내가 이렇게 여자들에게 진실하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됐겠냐고.

생사가 어떻게 됐는지 모를 유스라. 베이징 올림픽에서 본의 아니게 큰 상처를 주고 만 주영이.

그 외에도 나를 조건 없이 응원해 주고 좋아해 준 리듬체조의 은재나 지수도 한번 이야기를 해 보고 싶고.

좋아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고.

그래서 한 종목을… 한 사람을…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나는 선택할 수 없다.

그것만은 내가 우유부단하고 선택 장애가 있다고 비난을 들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마하야.”

“훌쩍. 죄송해요. 못난 모습을 보여서….”

“은공을 갚고 싶다는 건 훌륭한 마음이다.”

“네….”

“애정을 은혜로 갚겠다는 너의 선택은 존중받아 마땅하나,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니?”

“물론이죠. 저도 그래서 고민하는 거잖아요.”

“여보.”

“음.”

어머니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두 분이 서로를 보시며 뭔가 결정하셨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하신다.

“왜요? 뭔데요?”

“功遂身退(공수신퇴)라는 말이 있다. 능히 해낸 다음엔 물러남이 옳으나. 너의 고민은 더욱 많은 욕심을 갖겠다는 것이 아니니.”

“하늘과 땅은 크고 영원하며 최상의 선이란 물과 같은 것이란다 마하야.”

“어. 네….”

“너의 고민을 우리가 들어 주마.”

“마음을 비우고 원하는 바를 떠올리며. 우리의 손을 잡아 보겠니?”

“잡으면요…?”

두 분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셨다.

“그래도 마윤이는 우리 손으로 기르고 가르친 세월이 있지만. 마하는 그런 게 없었으니.”

“우리 두 사람의 내공을 너에게 주마.”

“네? 아니 왜요?”

“그럼 넌 천하로. 아니지. 우주의 넓은 세상으로 네 고민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원을 넘어왔듯, 나 역시 차원을 넘어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될 거라고 하셨다.

“잘 이해가….”

“하나의 세상에서 너의 갈등과 고민을 풀어내거라.”

“…….”

“한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그 세상의 끝을 보면 된단다.”

“두 분은요? 아버지랑 어머니는 어떻게 되시는데요?”

“글쎄. 다시는 하늘을 날 수 없게 되겠지.”

“검으로 나무를 자를 수도 없을 것이고.”

“…….”

“준비됐으면 우리의 힘을 받거라.”

“자! 잠깐만요! 이 통나무를 다 어머니가 자르신 거였다고요?”

“마하야. 집중해야지.”

두 분의 기운이 나에게 들어온다.

눈이 뜨겁다. 몸이 터질 것 같아.

환골탈태를 다시 겪는 것 같지만.

아니야. 이건 내가 가질 기운이 아니다.

이런 현대에 하늘을 날고 검으로 통나무 베어서 뭐 하냐고.

비행기 타면서 마일리지 쌓고, 벌목 아저씨들 불러서 삼겹살 구워 먹으며 나무 자르면 되는 거지.

이건 내가 가지는 힘이 아닌 나 자신을 넓은 우주로 보낼 힘.

평행세계의 저편으로 나아가는 기적!

“으으윽!”

“집중하거라.”

“조금만 기운을 내. 할 수 있단다.”

두 분의 애정과 내공으로 나는 새로운 세계의 나아간다.

지금까지의 기억을 가지고, 갈라지는 놀라운 곳으로.

그래. 길이 보인다.

형이 말했던 내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각각의 길이 크고 작은 빛으로 이어져 있다.

저것은 애정. 내가 사랑하고 아꼈던 존재들.

“으으읍!!!”

이럴 수가. 그게 전부가 아니었잖아.

내가 만났던 인연 말고도 내가 해왔던 길 말고도 저렇게 많은 것들이 있었단 말이야?

이거 고민인걸.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에잇 몰라. 나는 이 길을 택하겠어. 넌 저 길을 가 봐.

구마하야. 즐거웠다. 그곳에서도 행복하고 뜨겁게 잘 살고.

피임 잘하고. 아니.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우리 모두 각자의 세상에서 각자의 마음을 가지고 해내자!

가자! 세상으로.

간다!!

가. 가버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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