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134화. 축제 (5)
화려하지만 어두운 방 한가운데에 한 남성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추악하게 생긴 동상이 서있었다.
"마에스트로님… 회의 시간입니다."
"아… 알고 있어요."
남자는 눈을 뜨지 않은 채 대답했다.
천천히 눈을 뜬 남자는 자신을 부른 시종의 얼굴을 확인했다.
"당신은 이름은 뭔가요?"
"아, 제 이름은 석 돈이라고 합니다."
"으음. 석 돈. 알겠어요."
마에스트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털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기도를 방해한 시종의 심장을 손으로 뚫었다.
콰드득-
"석 돈. 감히 신님과 소통을 하고 있는데 방해를 하다니 죽어 마땅합니다. 동의하시나요?"
"끄, 아. 아악… 맞습니다. 기쁘게… 큽."
툭.
남자는 기쁜 얼굴로 눈을 까뒤집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건 제물로 삼으세요."
"예. 알겠습니다."
뒤에서 대기하던 다른 시종은 마에스트로의 앞에 쓰러진 시체를 수습했다.
더러운 피가 묻은 손을 털어낸 남자는 다시 회의실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화려한 장식이 되어있는 상석으로 향한 마에스트로는 자리에 앉았다.
둥그란 원탁에 앉아있는 판데믹의 간부들은 상석에 앉은 남자를 동시에 바라봤다.
"모두… 모였네요. 늦어서 미안해요. 마왕님과 소통 중이었습니다."
꽤 많은 시간이 늦었지만 판데믹의 간부들은 아무 불만 없이 마에스트로의 말을 기다렸다.
"제물 찾기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보고하세요."
"파리 에펠탑의 괴수를 폭주시키려고 준비 중입니다."
"으음, 나쁘지 않네요. 다음은요?"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천상제 테러를 노리고 있습니다."
"축제만큼 사람의 긴장이 풀리는 때가 없죠. 괜찮네요. 준비 중인 간부는 누군가요?"
마에스트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길스티븐입니다."
"그라면 믿을 만 하네요."
판데믹의 초기 간부 중 한 명인 길 스티븐.
믿을만한 간부의 출격에 마에스트로도 신뢰를 보냈다. 강하지는 않지만 일처리가 깔끔한 간부다.
회의는 계속 진행되었고, 마지막 안건까지 끝낸 마에스트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는 법… 저는 다시 마왕님께 기도를 드리러 가야 하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뚜벅뚜벅.
마에스트로가 회의실에서 나가고, 회의실에 있던 간부들도 하나 둘 씩 자리를 떴다.
"아오, 저 병신같은 새끼는 쓸데없는 거로 길게 끌고 지랄이네."
"레베카. 마에스트로님에게 그게 무슨 망발이냐."
"닥쳐."
레베카라고 불린 적색 머리칼의 미녀는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긴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왔다.
"인형 새끼들하고 회의하는 것도 지치네. 하아."
이놈의 회의는 언제 해도 적응되질 않는다.
말이 회의지 그냥 통보에 불과하다.
간부들은 절대 마에스트로의 말에 부정의 의견을 내지 않는다.
하지만 판데믹의 간부라면 필참이기에 어쩔 수 없이 레베카도 자리를 지켰다.
지옥의 마왕을 소환하겠다는 말 같지도 않은 목표에 협력해주고는 있지만, 어차피 안 될 거다.
은신처에서 나오자 레베카의 심복이 다가왔다.
"레베카 님. 조사 결과입니다."
"줘봐."
"1-2년 차 현역 헌터와 아카데미 고학년부터 저학년까지 쭉 훑느라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레베카 님이 말씀하신 조건에 맞는 인원이 딱 한 명 나오더군요."
레베카는 심복이 가져온 자료를 살폈다.
짧은 영상 두 개였다.
처음은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1대1 결투 결승전.
영상에서 나오는 한 남자는, 수준 높은 결계술를 구사하고 있었다.
"이건… 룬의 결계…?"
룬의 결계를 평생 익혀온 레베카의 눈에는 약간 어색한 결계였다.
기본적인 마법진은 같지만, 룬의 일족에서 내려오는 전승 교육을 받지 못한 느낌이었다.
'어린아이라면 몰라도, 성인인 아이는 교육이 끝났을 텐데….'
레베카는 약간 의구심을 가진 채로 다음 영상을 확인했다.
서바이벌 시험.
한 남자가 결계를 펼치며 텐트에 들어가는 짧은 영상이었다.
여전히 레베카가 알고 있는 결계와는 조금 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확실하게 선명한 룬의 표식을 관측했다.
룬의 일족만이 알아볼 수 있는 룬의 결계의 마나 형태다.
조금 남아있던 꺼림칙함을 이 영상으로 완전히 지워낸 레베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 드디어 찾았어."
그녀는 일족이 멸한 후부터 계속 찾아왔다.
일족을 다시 부흥시킬 '방법'을.
그리고, 다행히도 남은 한 명이 남자라는 사실에 그녀는 감사했다.
짙은 혈통의 '룬의 일족'을 다시 만들 수 있을 테니까.
*
"이건 너무 비싼데."
나는 스마트 워치로 경매장을 확인하고 있었다.
당장 급전이 필요 없어서 전에 경매에 올렸던 [장양산의 매의 탑 1권 초판본 (친필사인 포함)]은 내가 보관하고 있었다.
혹시 엘리스한테 뇌물로 줄까 했거든.
하지만 지금 진지하게 팔아야 하나 생각 중이다.
그때 분명 마지막 입찰가가 3억이 넘었었는데… 역시 희대의 명작이다.
어쨌든, 돈이 필요한 이유는 내 무장을 위해서다.
이 세계관에는 지팡이 같은 게 없다.
애초에 야겜인만큼 장비 시스템이 제대로 되어있지도 않았고, 그냥 대충대충 넘어가는 방식이었다.
게임이 현실이 되고 나서 찾아보니 그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여러 아티팩트가 있었다.
그중에서 수준이 낮은 아티팩트를 제외하고, 내게 수준이 맞는 아티팩트를 찾다보니 가격대가 꽤 높았다.
"2억… 여기도 억. 저기도 억. 최소가 몇 억이네. 이런 날강도들이 있나."
사실 릴리아나의 수입이라면 뭐, 금방 살 수 있긴하다.
몇 달 정도면 좋은 아티팩트를 내 돈으로 구할 수 있을거다.
하지만 몇 달 뒤에 내 미래를 예측할 수가 있어야지.
"일단 최고급 마석은 그만 사야겠네."
곧 있을 테러를 자각하면서 현실을 깨달아버렸다.
당장 내 목숨이 오락가락할 수 있는 상황에서 무슨 미래 대비야.
투자도 먹고살면서 하는 거다.
'사 놓은 것만 내버려 두자.'
어차피 릴리아나와 계약을 유지하려면 어느정도 필요하니까, 사 놓은 건 어차피 내버려 둬도 된다.
일단 최고급 마석은 내버려 두고 앞으로는 아티팩트를 살 돈을 좀 찾아야겠다.
릴리아나의 수입만으로 삶을 살기엔 좀 남자답지가 않잖아.
"진짜 모델 일이라도 해야 하나? 그래도 홍보부 짬이 있는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생도복을 챙겨입었다.
오늘은 임솔 교수를 만나기로 했으니 정갈한 차림으로 가야지.
릴리아나는 침대에 누워 비몽사몽 가슴을 만지고 있었다.
옷이 꽉 끼어서 가려운지, 가끔 저렇게 가슴 쪽을 살짝 들고 손을 넣는다.
볼 때마다 내가 대신해주고 싶다.
"나 갈게. 이따 밤에 온다."
"응. 갔다 와."
기숙사 밖은 슬슬 더워지기 시작했다.
세상이 망할 징조인지 이제 5월인데도 날씨가 말이 아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복장도 많이 시원해졌고, 나도 겉옷을 걸치지 않았다.
"이거 하나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보는 임솔에게 줄 뇌물로 초콜릿을 산 뒤에 마도관으로 향했다.
"이호연 생도 아닌가요?! 잠시 인터뷰 가능할까요!"
그때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내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죄송합니다."
익숙한 상황에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재빨리 달려갔다.
"이호연 생도! 잠시만요!"
"하아…."
기자는 미친놈처럼 달려서 쫓아오다가 내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걸 알고 헉헉대며 멈춰 섰다.
요즘 틈만 나면 기자들이 찾아온다.
이게 유명세인가?
최대한 피하고는 있는데 축제가 끝나면 진짜 피하기 힘들 것 같다.
지금은 사람이 워낙 많아서 숨어다니기가 편하지만, 나중엔 아닐테니까.
마도관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저 거대한 건물의 한 층계 전체가 임솔 교수의 연구실이다.
역시 우리 교수님.
'그러고 보니 전에 나한테 뭐 챙겨준다고 하지 않았나.'
임솔이 영약인지 뭔지를 챙겨준다고 한 지 거진 한 달이 되어간다.
설마 먹튀는 아니겠지?
"이호연 생도님. 확인 되었습니다. 올라가세요~."
"네. 고생하세요."
로비에서 안내원에게 출입 허가를 받은 뒤에 2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띵동-
오랜만에 오는 연구실이다.
서바이벌 시험 직전에 들렸으니 일주일만이네.
"왔어?"
"네. 교수님. 불초 제자 인사드립니다."
"이상한 말 하지 말고 앉아."
나는 초콜릿을 책상에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이번에 대련 잘 봤어."
"아, 감사합니다."
"아주 난리가 났던데… 너 진짜 각성했구나? 몸 내부가 너무 깔끔해졌어. 마나 흐름도 그렇고. 나도 그랬거든."
"네. 훈련 중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섹스하다가 각성했다고 할 순 없으니… 훈련 중에 했다고 둘러댔다.
그리고 아마 몸 내부는 엘프의 정수 효과일거다.
근데 저 사람은 왜 엘프의 정수를 먹지도 않았는데 각성하고 몸이 깔끔해지냐.
"훈련 중… 나랑 똑같네. 나도 훈련 중에 각성했거든."
"오… 역시 천재네요."
섹스 중에 각성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훈련으로 각성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건데, 극한 상황도 아닌 훈련에서 각성한다는 게 애초에 말이 되지가 않으니까.
물론 극한 상황인 훈련을 할 수야 있지만, 정신적인 면에서 그게 쉽지가 않다.
그냥 임솔이 얼마나 천재적인 캐릭터인지에 대한 증거다.
"너야말로 천재지. 나는 너보다 늦게 각성했어. 그 때는 아카데미 졸업 직후였으니까… 훈련 때 각성했다고 하니 놀라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하하… 그런가요."
"너도 조심해. 어린 나이에 질투를 받는 건 꽤 힘든 일이야."
나야 뭐… 그런 걸 신경 쓰는 친구도 없고 인터뷰도 다 거절하고 있으니 아직은 괜찮다.
"시기와 질투는 익숙하니까요. 원래 부족한 사람들이 더 그러는 거잖아요."
[뚜렷한 정신력] 때문인지, 악플을 봐도 별로 화가 나질 않는다.
그냥 얼마나 삶이 힘들면 저럴까 싶을 뿐.
나는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인데… 임솔은 안쓰러운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 그래? 다행이야, 정말."
★ 히로인 상태창
[임솔]
- [ 호감도 : 62 ]
- [ 성욕 : 25 ]
- [ 식욕 : 30 ]
- [ 피로도 : 39 ]
현재 상태 : 어린 나이부터 얼마나 상처를 받았길래….
'무슨 소리야 이게.'
또 무슨 이상한 오해를 하는 것 같다.
음… 그냥 내버려 두자. 굳이 나한테 피해가 생길 오해 같진 않네.
동정심에 뭐라도 하나 떨어지면 좋지.
"에이. 저는 괜찮아요. 그나저나 교수님 저랑 마법 박람회 가기로 한 거 기억나시죠? 그거때문에 성적 발표 나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성적은 아마 축제가 끝나고 발표할 것 같아. 채점이 늦어진 교수가 생겼거든. 축제 때는 즐기게 내버려 두자는 의견도 있었고."
"아…."
뭐, 어차피 상관은 없다. 나야 내 성적을 다 아니까.
필기 1등
실기 2등
특별 시험 1등.
그 빛나는 성적표가 내게 오는 날만 기다릴 뿐이다.
"아, 그러고보니 성적표 대신… 너한테 줄 게 있어."
임솔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책상 밑에서 내게 상자 하나를 건넸다.
"너한테 줄 영약을 계속 찾고 있었는데… 괜찮은 마법 쪽 영약이 완전히 씨가 말랐더라고. 그래서 이거라도 구했어."
"오…! 감사합니다!"
오는 길에 먹튀라고 생각한 나를 반성하며 상자를 열어봤다.
역시 임솔 교수는 날 배신하지 않아.
────[ 붉은 산삼 ]────
▶ 등급 : 상
▶ 산의 정상에서 양기를 100년 동안 모은 붉은 산삼
▶ 양기가 가득 차 있으며, 남성의 체력과 정력 증진에 매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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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요즘 피곤해 보이길래. 큼."
임솔은 살짝 붉어진 볼로 내 눈을 피했다.
이거 사심이 듬뿍 들어간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