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18 318화. 켄타우로스
"이호연.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네. 얼마든지요."
스칼렛은 내 뒤에 서있었고, 세바스 찬과 엘리스는 아직 길드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이린까지 저기 서있는 걸 보니 길드원의처우를 정하고 있는게 아닐까.
아이작은 스칼렛이 서있는 걸 신경쓰지 않고 내게 말을 걸었다.
"붉은 머리의 여자. 알고 있나?"
"붉은 머리의 여자요…?"
붉은 머리의 여자가 한 둘이어야지.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
'어?'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스쳐지나갔다.
분명 레베카 씨가 날 도와준다고 했는데, 아직 나한테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작이 저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볼만한 여자는 몇 명없다.
그 중 내 지인은 당연히 한 명 뿐이고.
"혹시 그 분이 결계를 쓰나요?"
"그래. 이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더군. 뭐하는 사람이지?"
맞구나.
레베카가 아이작한테 들킨 모양이다.
룬의 결계의 강함을 알기때문에 걱정하지않았는데, 설마 걸릴줄이야.
"으음. 그냥 지인인데요."
"… 자세한 건 묻지않으마. 하지만 너와 내 관계를 위해서 확실하게 해야할 게 있다."
"네."
나는 침착하게 표정을 관리했다.
'이거 좀 큰일이네.'
아마 주변에서 날 지원해주려했던 것 같은데, 하필이면 아이작한테 걸려버렸다.
게다가 지금 태도를 봐서는 엄청난 강자라는 것 까지 들킨게 확실한데… 이거 괜찮나?
괜히 이상하게 엮이면 귀찮아질지도 모른다.
그녀는 일단 판데믹 소속이기도 하고, 솔직히 나도 레베카가 그렇게 강할 줄은 몰랐으니까.
아이작의 입장에서는 그런 숨겨진 강자가 내 지인이라는 걸 이상하게 느끼겠지.
혹시라도 아이리스 길드에 레베카에 대한 정보가 있다면 낭패다.
"그 여자…."
꿀꺽.
나는 침을 삼키며 조용히 아이작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남자친구는 있나?"
"… 네?"
"아니, 엄청 예쁘더라고. 연락처라도 주면 좋겠는데. 우리가 그 정도 관계는 쌓지않았나? 이호연?"
"…."
이 남자는 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심지어 아이작의 뒤에 서있던 스칼렛마저 아이작을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아빠. 진짜 미쳤어?"
게다가 길드원의 처우 결정도 끝났는지, 엘리스와 세바스 찬도 근처에 와있었다.
엘리스는 아버지의 이상행동을 보고 입술을 깨문 채 이 쪽으로 다가왔다.
"엘리스. 잠시만. 아빠는 이상한 생각을 가지고 연락처를 물어본 게 아니야. 만나서 건설적인 얘기라도… 아악…."
"… 하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고, 아이작은 엘리스의 주먹을 맞으며 도망쳤다.
- 레베카가 와줬구나! 역시 착한 사람일지도 몰라!
"착한 사람맞다니까."
난 릴리아나의 말에 짧게 대답해줬다.
세바스 찬 마저 엘리스를 말리러가자, 스칼렛이 다가왔다.
"다행입니다. 호연 님."
"그러게."
"그래도 방심은 하지마세요."
"무슨 방심?"
"길드장 님은 미인에 눈이 돌아갈 정도로 바보가 아니니까요. 어쩌면 알면서 넘어가준 걸지도 모릅니다."
스칼렛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고, 나는 얼굴이 붉어진 엘리스가 휘두르는 검을 피해 도망치는 아이작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 아닌 것 같은데."
"저 꼴을 보니 이번엔 호연님의 생각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
잠시 투닥거리는 사이에 추적팀의 멤버가 다 모였다.
아까 나한테 덤비던 놈의 얼굴이 안보이는 걸 보니 진짜 제명한 건가?
조금 불쌍하네.
난 나름 좋았는데.
"다 모였으니 바로 켄타우로스에게 간다. 놈의 위치는 공장지대의 거주지역. 민간인은 대피가 끝났지만 언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지 모르니 빠르게 놈을 내쫒아야한다."
아이작은 추적팀의 모든 얼굴을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대 테러 지원 작전에 엘리스와 이호연 생도도 참여했는데… 켄타우로스를 추적할 때도 데리고 가기로 했다. 시간이 없으니 자세한 건 가면서 통신으로 전하지. 출발한다!"
파앙-
아이작은 마력을 이용해 빠르게 달려나갔고, 추적팀은 군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내가 같이 간다고 해도 불만 한마디 없는게 역시 에이스들인 것 같다.
어쩌면 아까 한 명이 제명당한 걸 보고 조용해진 건가?
나와 엘리스도 대열의 마지막에서 뒤를 따랐다.
아이작은 중심에서 꽤 빠른 속도로 이동했고, 추적팀 전원이 그 속도에 맞춰왔다.
옆에서 달리고 있는 엘리스의 호흡을 보니 그녀에게도 살짝 빠른 속도인 듯 했다.
엘리스가 말도 안되는 먼치킨 히로인이라는 걸 생각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의 수준이 꽤나 높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힘들진 않아?"
"… 할만 해."
"오케이. 말 안시킬게."
괜히 말 시켰다가 욕만 먹을라.
엘리스는 달려가는 것 자체가 체력소모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아직은 선천적 마력 장애를 가지고 있으니 이해해야한다.
"… 너는 괜찮아? 이제 진짜 켄타우로스를 만날건데."
하지만 엘리스는 내 배려에 자존심이 상하는 걸 느꼈는지, 오히려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응. 완벽한 플랜이 있거든. 우리 체력을 아껴야 하니까 대화는 그만하자. 나 힘들어."
"… 그렇다면야."
엘리스는 내 배려를 아는 지 모르는 지 조용히 달리는 것에 집중했다.
지이잉-
사실 내가 힘든 건 달리는 게 아니었다.
지이잉-
저 옆에서 날 보고있는 여자.
아이린.
'… 부담이네.'
아까 모이는 장소에 있을 때 부터 엘리스랑 대화를 할 때마다 은신한 채 날 지켜봤다.
나도 이제 꽤 강해져서, 저렇게 가까이에서 은신하면 쉽게 꿰뚫어볼 수 있다.
그렇다고 아는 척을 할 순 없으니 조용히 가려는데… 이게 참 부담이었다.
약 10분 후.
- 거의 다 도착했다. 모두 전투 준비.
콰앙-!
나는 통신을 들으며 눈 앞에 나타난 마인의 머리를 박살냈다.
가는 길목에 마인들이 꽤 많다보니 시간이 지체되었다.
지이잉-
'아이 씨. 모르겠다.'
저 미친 여자는 언제까지 날 볼 생각이야.
심지어 한 손으로 마인을 잡으면서 눈은 날 보고 있었다.
이러다가 켄타우로스에 집중을 못하겠어.
결국 나는 고개를 돌려 아이린을 똑바로 바라봤다.
아무 걱정없이 날 바라보던 아이린은 내가 정확히 눈을 마주치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길드원 뒤에 숨어버렸다.
"…."
세상엔 정말 이상한 사람이 많구나.
그래도 얼굴이 되니까 나름 귀여워보이긴하네.
- 공장지대 도착. 모두 내게 모인다.
아이린의 시선은 사라졌고, 우리는 곧 공장지대에 도착했다.
- 여기 공장이 어딨엉?
"… 무슨 폭탄이라도 떨어진 것 같네."
"그러니까 추적팀 까지 만들어서 쫒는거지. 재해가 도시 한 가운데에 떨어지니까."
일대의 건물이 다 파괴되어있었고, 근처에 깔려있는 수많은 마인들의 마력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강대한 마력 하나가 존재했다.
"…."
"…."
멀리서도 느껴지는 말도 안되는 기세에 추적팀은 천천히 마인들을 정리하며 거리를 좁혔다.
켄타우로스는 우리가 접근하는 걸 알텐데도 그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긴장하지마. 켄타우로스는 우리가 가까이 가는 순간 도망갈거야."
"… 응. 언니."
아이린은 어느새 엘리스에게 다가와 엘리스의 긴장을 풀어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를 슬쩍 흘겼는데, 내가 바라보자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우리는 서서히 강한 마력의 압박감 속으로 진입했고, 곧 발견할 수 있었다.
"목표 발견."
마치 핵폭탄이라도 떨어진 듯 폐허가 되어버린 공장 일대.
그 매캐한 연기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있는 거대한 몸체의 반인반수.
켄타우로스.
상체는 인간, 하체는 말이라는 이상한 조합이지만 왠만한 트럭보다 큰 거구를 가진 그 괴수는 보기만해도 압도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대지를 밟고 우뚝 서있는 네 개의 다리와 그 뒤에서 흔들리는 꼬리.
켄타우로스는 엄청나게 짙은 지옥의 마력을 내뿜고 있었고, 목에는 F라고 쓰여있는 용병패가 달려있었다.
저게 그 F급 용병패라는 거겠지.
- 찾았어. 찾았다고! 찾았어!
"…."
릴리아나는 신난 듯이 소리쳤고, 켄타우로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추적팀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천천히 눈알을 굴리던 놈은 곧 입을 열었다.
- [호오….]
마치 귀에 직접 대고 말하는 것 같은 소름돋는 목소리.
켄타우로스는 우릴 지켜보는 걸로도 모자라 아예 몸을 이 쪽으로 돌렸다.
… 근데 추적팀을 마주치면 바로 도망친다고 하지 않았나?
"도망치지 않아…?! 전투! 전투 준비! 젠장!"
이상함을 느끼기도 전에, 아이작이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내 옆에 있던 엘리스의 앞에 아이린이 나타났다.온 몸에서 흐르는 마력은 겉으로 보일 정도였다.
"어, 언니?"
"가만히 있어 엘리스. 저 놈은… 진짜 괴물이니까."
다른 추적팀들의 긴장감이 내 피부에 전해지는 와중에,나는 놈과 눈을 마주쳤다.
아니. 놈의 시선이 날 향하고 있었다.
그것도 정확히 내 목에 걸린 목걸이에.
- [익숙한 얼굴이구나.]
- 뭐라는거야! 저 놈 우리 보고있는 거 같은데?!
"… 그런 것 같아."
켄타우로스의 목소리에 추적팀은 더욱 혼란스러워했다.
"마, 말을 걸다니. 이런 적은 처음입니다!"
"긴장 늦추지마! 움직이는 순간 바로 대응한다."
아이작은 마치 전투를 피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분명 켄타우로스를 이길 수 있는 전력을 데리고 다녀야 켄타우로스가 도망친다고 했으니, 싸움에 승산은 충분할거다.
전투를 피하는 이유는 아마 엘리스 때문이겠지.
지금도 내 옆에 서있는 엘리스는 켄타우로스의 마력에 압도당한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 [서큐버스인가. 이제야 내가 인간들에게 계약당한 이유를 알겠군. 끌리게 만드는 게 있었어.]
"서큐버스…? 그게 무슨 개소리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판데믹의 새로운…."
다른 사람들이 켄타우로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와중에 나와 릴리아나, 그리고 스칼렛만이 켄타우로스의 말을 이해했다.
- 나 얘기하는 거 맞지? 무슨 소리야 저거!
"…."
나는 조용히 켄타우로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쩌면 전투가 일어날 지도 몰랐으니 긴장을 놓치지말아야 했다.
"사도님…! 후퇴할 시간입니다."
그때, 켄타우로스의 곁에 마인 하나가 나타났다.
느껴지는 기세는 간부급.
아마 저 놈이 켄타우로스의 테러를 지원하러 온 놈이겠지.
"지금 전투는 절대 금지라는 마에스트로님의 명령입니다. 사도님."
- [흐음.]
켄타우로스는 마지막까지 내 가슴에 있는 목걸이를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주변을 압박하던 마력도 사라졌고, 길드원들에게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 상황 종료. 목표물이 도망쳤다."
"엘리스. 괜찮아?"
"으, 으응. 언니."
동시에 추적팀에게서 느껴지던 마력들이 하나 둘 씩 사라졌다.
아마 평소에도 저런 식으로 도망쳤겠지.
"릴리아나. 마력 읽었어?"
나는 조용히 릴리아나에게 속삭였다.
- 으, 으음. 혹시 가까이 가볼 수 있어? 마력의 잔재가 남아있을 것 같은데.
"오케이."
타악-
"이, 이봐!"
갑작스러운 행동에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땅을 박차고 켄타우로스가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