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563화 (563/648)

< 563화 > 아이리스 길드 (2)

메시지를 보내도 역시나 답장이 오진 않았다.

이호연은 스마트워치를 종료한 뒤 고개를 숙여 노트를 바라봤다.

"엘리스랑 아이린도 보고 싶었는데. 쩝."

루시퍼와 전투가 끝난 뒤, 이호연은 히로인들을 찾아다니며 사실을 고백했다.

뺨을 맞든 무릎을 꿇든 히로인들에게 사과할 생각이었지만, 그녀들의 사랑은 이호연의 생각보다 훨씬 두터웠다.

이 세상과 히로인들을 지켜야 하는 이호연에게 확실한 동기부여였다.

"진짜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이것도 어떻게든 잘 됐네."

이호연이 한 행동은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어이없는 짓이다. 갑작스럽게 찾아가서 다 자기가 한 일이라고 고백했으니, 얼마나 웃겼을까.

이렇게 쉽게 넘어간 것은 전부 히로인들이 이호연을 신경 써줬기 때문.

그리고 그 기반에는 이호연에게 걸린 '저주'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상황이 잘 풀리긴 했지만….'

'저주'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린다.

이호연이 히로인들을 저주 때문에 만나는 건 아니니까.

혹시나 오해라도 생기면….

"또 쓸데없는 생각이네."

이호연은 고개를 저으며 쓸데없는 생각을 머리에서 지워냈다.

평소라면 이런 부정적인 생각에 매몰되었을 텐데, 그래도 오늘은 빠르게 끊어냈다.

히로인들을 직접 만나서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기 때문이겠지.

"내 멘탈이 이렇게 약했구나."

상남자인 줄 알고 살아왔건만 내가 이런 찌질이였다니.

악몽을 꾸는 것도 그렇고, 뚜렷한 정신력을 억제하는 게 꽤나 힘들었다.

쯧.

혀를 찬 이호연은 주변을 살피다 덩그러니 놓여있는 약봉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영 씨가 준 약 먹어야겠다."

이호연은 책상에 올려놨던 약봉지를 까서 입으로 집어넣었다.

식후 30분 같은 말 없이 하루에 한 번 먹으라고 했으니 아마 비타민 같은 게 아닐까.

까먹기 전에 지금 먹어놓자.

이호연은 약봉지를 입에 털어넣었다. 왠지 머리가 잘 돌아가는 기분이다.

"오케이. 일단 먼저 해야 할 일은…."

- 아이리스 길드로 가야 함.

일단 아이리스 길드와 접촉해야 한다.

검은 기둥에 대해 도움을 요청할 것도 있고, 케이론과 알베도에게 물을 것도 있다.

'엘리스랑 아이린도 있으면 좋겠는데.'

운이 좋다면 엘리스와 아이린에 대한 것도 들을 수 있으려나.

탁-

노트를 덮은 이호연은 다시 한번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답이 없는 스마트워치를 든 채 스칼렛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나 : 스칼렛. 바빠?

답장이 오기 전까지 마법 연구라도 해볼까.

임솔과 대련했던 기억을 되짚어서….

띠링-

- 스칼렛 : 예.

"뭐야 이건."

스마트 워치 화면에는 달랑 '예.' 한 글자만 떠있다.

잠시 기다려봤지만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었다.

바쁜 와중에 급하게 보내준 건가?

- 나 : 한가해지면 연락해줘. 일이 있어서 아이리스 길드에 방문하고 싶거든.

띠링-

- 스칼렛 : 아이리스 길드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겁니까. 그리고 저는 이제 아이리스 길드원이 아닙니다. 당장 아이리스 길드의 두 딸과 사귀고 있으시면서 왜 저에게 그런 부탁을 하시는 거죠.

"… 얘 안 바쁜 거 같은데."

이호연은 곧바로 울리는 스마트워치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스칼렛은 아이리스 길드에 있을 때부터 인정받던 엘리트다. 그녀가 정말 바빴다면 답장을 하는 게 아니라 일에 집중했겠지.

게다가 저 쓸데없는 사족들까지.

한가하다에 손목까지 걸 수 있다.

- 나 : 스칼렛. 바쁜 거 아니면 나 좀 도와줘. 아이리스 길드에 가야 하는데 혼자 가기 뭐해서 그래. 내가 너 믿는 거 알잖아.

사실 첫 방문은 아니다.

저번에 직업 체험을 구실로 아이리스 길드에 간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때 이용한 이동수단은 엘리스의 전용기.

즉 이호연은 아이리스 길드에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

아이린 엘리스 자매가 연락두절인 상태에서 그를 도와줄 수 있는 건 스칼렛뿐이었다.

"왜 갑자기 답장이 없지?"

귀찮아 보여서 다시 일하러 간 건가.

그럼 조금 아쉬운데.

똑똑.

"그래. 들어와."

"오랜만입니다. 호연 님."

"어제 봤으니 그렇게 오랜만은 아니잖아."

이호연은 방으로 들어오는 스칼렛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 부터 스칼렛인 걸 알았다.

그래. 일이 끝나고 오고 있었구나.

또 스칼렛에게 놀아났다.

"아이리스 길드는 왜 가시려는 건가요?"

"조사할 게 있어서 그래. 할 말이 많으니까 앉아봐."

숨길 필요도 없다.

이호연은 레베카에게 말한 것처럼 스칼렛과도 정보를 공유했다.

지옥의 마력에 대한 정보를 들은 스칼렛은 팔짱을 낀 채 고민했다.

"지옥의 마력이라. 저도 조금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 정도로 스케일이 큰 줄은 몰랐는데요."

역시나 스칼렛도 제대로 모르는 눈치다.

릴리아나와 이호연이라는 힌트가 있는데도 이상함을 못 느꼈다니.

'이 정도면 아이리스 사람들도 못 느꼈겠다. … 아니지, 걔들 훈련실에서 길드원들 도와주는 일한다고 하지 않았나?'

훈련실에서 같이 움직이다 보면 지옥의 마력을 당연히 접할 텐데.

잠시 고민해봤지만, 역시 직접 보는 게 훨씬 빠를 것 같다.

"쯧. 아무튼 아이리스 길드에 가고 싶은데 같이 가줄 수 있어?"

"왜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연 님이 도와달라고 하신다면 움직여야겠죠."

"고마워. 스칼렛. 최대한 빨리 갔으면 좋겠는데 언제쯤 갈래?"

"바로 가시죠."

"지금 바로?"

"예. 일어나세요."

"잠시만. 잠시만 스칼렛."

곧바로 비행기를 탈 기세로 방에서 나가는 스칼렛을 붙잡았다.

"그래도 인사는 하고 가야지. 릴리아나랑 다은이가 집에 없잖아."

"일만 금방 처리하고 오면 되는데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아니… 공항까지 가는 시간도 있고 비행기 시간도 생각하면 오늘 안에 오긴 힘들 것 같은데?"

"비행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애기 아빠! 꺄악! 저게 뭐야!]

문 밖에서 들리는 레베카의 비명소리.

이호연은 재빨리 바깥으로 달려 나왔다.

후두두두두-

쓸데없이 넓은 마당을 채우는 거대한 그림자.

고개를 들자 소형 비행기 한 대가 마당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법이 담겨있는 비행기는 깔끔하게 착륙했고, 스칼렛은 익숙한 듯 비행기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타시죠."

"야. 너 아이리스 길드원 아니라면서."

이호연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스칼렛을 바라봤다.

이 비행기는 그의 기억에 분명히 남아있다.

엘리스와 함께 아이리스 길드에 갔을 때 탔던 비행기였다.

"아이리스 길드원은 아니지만 비행기 정도는 빌릴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개 같은…."

"사회생활을 워낙 잘해서 아직 인맥은 남아있거든요."

스칼렛과 대화를 하는데 오른 팔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레베카가 다가와 팔짱을 낀 것이다.

"애기 아빠. 이건 뭐야. 깜짝 놀랐잖아."

"미안해요. 레베카 씨. 근데 저도 지금 처음 봤어요."

"바로 떠나는 거야? 생각보다 일정이 빡빡한가 봐."

"… 지금부터 그렇게 됐어요. 릴리아나랑 다은이 오면 말 좀 해주세요. 늦어도 내일까진 올게요."

메시지도 보내 놓겠지만, 레베카에게 부탁도 해놔야지.

"알겠어. 애기 아빠. 빨리 와야 해."

그녀의 붉은 머리를 살짝 쓸어내린 이호연은 스칼렛을 따라 비행기를 탔다.

*

"도착했습니다. 스칼렛. 이제 내려."

"고마웠어요. 빅터."

"다음부터 휴일에는 부르지 말아 줘. … 그리고 옆에 계신 분과는 그렇고 그런 관계라고 생각해도 되나?"

"성희롱이라면 고소하겠습니다. 길드에 있는 법무팀 에스엔의 성격을 모르시는건가요."

"여전히 쌀쌀맞네. 아, 이호연 마법사 님. 만나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마법사 학회에서 발표하신 마법의 핵심 술식과 대(對)마법사전 비기가 너무나 인상 깊어서 언젠가 보고 싶었는데 스칼렛 덕분에 이런 좋은 기회가 생겼네요."

"아, 네. 그렇게 말해주시면 영광이죠."

살짝 고개를 숙이며 빅터라고 하는 남자의 악수를 받았다.

비행기처럼 생기긴 했지만 사실 이 기체는 마법 도구나 마찬가지였다.

운전사도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할 뿐 직접 운전을 하진 않았으니 오는 길에 대화를 좀 나눴다.

마법사인 것 같길래 마법에 대해 몇 마디 해줬더니 굉장히 기뻐해서 뿌듯했다.

"이제 가볼게요. 빅터. 나중에도 일이 있으면 연락하겠습니다."

"그래. 아이리스 길드를 뛰쳐나갔을 때는 무슨 생각인가 싶었는데, 애인이 세계 최고의 마법사라면 나라도 길드를 때려치우겠어."

"크흠."

이호연은 괜히 헛기침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저 사람 아부에 재능이 있네. 자존감이 쭉쭉 올라간다.

"아이리스 길드가 언제부터 남 연애사에 그렇게 신경 썼나요."

"미안 미안. 휴일에 나왔으니까 한 번만 봐줘."

"쯧. 휴일이면 연락을 안 받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아무튼 고마웠습니다. 이제 다신 보지 말죠."

이호연은 불편한 심기의 스칼렛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평소라면 다른 남자가 스칼렛을 놀리는 걸 내버려 두지 않았겠지만, 휴일에 스칼렛을 돕기 위해 나온 것도 그렇고 이호연을 존중하는 모습이 보이기에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항상 자신을 괴롭히는 스칼렛이 당하는 모습이 재밌었다.

그녀도 빅터를 휴일에 불렀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스칼렛. 저번에 왔던 곳 하고 다른데?"

"그때는 엘리스 아가씨와 같이 왔으니까요."

비행기에서 내린 뒤.

이호연은 처음 보는 숲 속을 둘러봤다.

아이리스 길드 부지에 내릴 줄 알았는데 숲 한복판에 내렸으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저번엔 아카데미의 공식 행사인 데다가 엘리스 아가씨도 있었으니 곧바로 아이리스 길드의 부지로 향했지만, 평상시에는 이곳에서 암호를 내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 게 있어?"

"당연하죠. 아이리스 길드는 세계 최고의 정보 길드니까요. 미리 허가를 받지 않고 부지에 내렸다가는 무슨 꼴을 당할지 모릅니다."

듣고 보니 그렇네.

개나 소나 아이리스 부지에 착륙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이호연 같은 경우엔 갑작스러운 방문이니까.

"오케이. 가자. 앞장서."

"예. 가시죠."

몇 분 정도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니 머리 위에 빽빽하게 찬 나무 때문에 햇빛이 보이지 않았다.

앞장서서 걷던 스칼렛은 슬쩍 뒤를 바라봤다.

"왜?"

긴장을 놓치지 않고 주변을 살피던 이호연이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 얼굴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눈이 죽은 동태 같았는데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루시퍼와 전투가 끝난 뒤부터 달라진 것 같은데 전투에 흥분하는 전투광이라도 되는 걸까요."

"그런 거 아니야. 난 세상에서 싸움이 제일 싫다."

"예전의 총기를 되찾은 것 같아서 보기 좋습니다."

"네 덕분이야 스칼렛."

스칼렛처럼 툭툭 직구를 던져주는 사람이 있어야 나 같은 사람이 정신을 차린다.

진지할 때는 장난스럽게 풀어주고 정신을 다잡아야 할 때는 진지하게 말해주니까.

"저도 제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앞을 보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참나.'

그래도 저런 모습이 귀엽긴 하지.

앞서 나가는 스칼렛의 뒷모습을 보며 이호연은 속도를 높였다.

약 십 분 정도 더 안 쪽으로 들어가자, 마력의 흐름이 조금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스칼렛이 걸음을 멈췄다. 아마 이 주변에 암호를 말하는 공간이 있는 것 같다.

"혹시 모르니까 룬의 결계라도 펼치시죠."

"결계는 펼치고 있었어."

"더욱 강하게 펼치라는 말입니다. 사실 암호가 안 통해서 공격당할 가능성도 조금 있습니다."

"무슨 개소리야 그게."

이호연은 스칼렛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기껏 왔더니 저런 말을 하면 어떡해.

"아이리스 길드원은 각자 암호를 부여받습니다. 임무를 끝내고 돌아오면 이곳에서 암호를 댄 뒤 신원을 확인하고 워프 게이트를 이용해 길드로 들어가는 구조입니다."

"근데 뭐가 문제야?"

"저는 탈퇴한 길드원이다 보니 제 암호는 데이터 베이스에서 지워졌을 겁니다."

"……."

스칼렛의 말을 들은 이호연은 잠시 고민한 뒤.

그녀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야. 그럼 여기까지 왜 온 거야. 응? 장난하냐?"

"괜찮습니다.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뭔데. 얘기해봐."

"아이리스 길드원들도 사람이에요. 제가 이래 보여도 길드에서 이미지가 꽤나 좋았습니다. 엘리트였고 두루두루 친했죠. 그러니 저라면 받아줄 겁니다."

"…… 진심이냐? 그게 최선이야?"

"가시죠."

이호연은 자신만만하게 걷는 스칼렛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가, 한숨을 내쉬며 그 뒤를 따라갔다.

그녀도 무언가 생각이 있겠지. 스칼렛은 아무 생각없이 움직이는 릴리아나 같은 사람이 아니다.

물론 룬의 결계에 마력을 때려 박는 건 잊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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