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웅 소녀 전쟁-3화 (3/486)

EP.3 랭커 한민국

옆집에서 공사라도 하는 것인지 쾅쾅하고 무거운 물건을 바닥에 내리치는 소리가 계속해서 귀에 들려왔다. 민국은 자연스럽게 몸을 웅크리고는 귀를 막고 소음을 견디려고 했다. 하지만 금방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소음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몇 시인데 공사를 하고 난리야?”

어젯밤 우라디우스를 잡고 카오스와 대화를 하다가 잠이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렇게까지 늦게 잔 것은 아니었는데. 대체 몇 시나 된 건지.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음에 결국 눈을 감고 혼자서 짜증을 내던 민국이 한숨과 함께 눈을 떴다. 그러자 회색 콘크리트 천장과 벽면의 거미줄이 민국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 뭐야? 여기 어디야?”

슬쩍 눈동자를 움직여 보니 이십 평 정도의 공간에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와 정체모를 기계들이 보였다. 당연하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원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장소였다.

“미친?!”

민국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찬물이라도 맞은 것 마냥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순간, 자신의 기억이 아닌 다른 기억이 해일처럼 민국의 머리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몇 초의 시간이 수십 년처럼 느릿하게 지나갔다. 압축된 기억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자리를 잡는 강렬한 느낌에 민국은 비명과 함께 자신의 머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불쾌한 두통에 민국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민국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래도 새롭게 뇌에 박힌 기억들 때문에 처음과는 달리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머리는 계속해서 웅웅거리고 어지러웠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 때였다. 창고와도 같은 장소에 한 소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쾅쾅거리는 소리는 그녀가 문을 두드리던 소리였던 모양이었다.

“어? 일어났네. 요즘 컨디션 안 좋아 보이던데.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20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어깨까지 살짝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묶었는데, 회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마치 전쟁 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제복이었다.

“현아…?”

“응? 뭐야? 아파서 내 이름도 헷갈리는 거야?”

오현아. 마나 각성에 성공한 지 반 년이 조금 넘은 1 성 영웅. 자신과 함께 영웅 학교를 졸업했고, 현재는 레이드 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해 자신과 함께 시험을 준비하는 중.

눈앞의 여자가 누구인지는 새로운 기억이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민국은 자신의 머릿속에 강제로 박힌 기억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애초에 왜 자신이 이런 곳에 있는지 그리고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심하게 혼란스러웠다. 그 때였다.

띠링

컴퓨터의 게임처럼 눈앞에 창 같은 것이 떠올랐다.

‘GGW?’

그리고 그 창은 민국에게 아주 익숙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한민국님!

갑작스러운 상황에 혼란스러우시겠지만 지금의 상황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카오스님이 찾은 이 세계는 한민국님이 알고 계시는 GGW 의 배경과 흡사한 아니, 완전히 똑같다시피 한 세계입니다. 당연히 어둠의 무리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는 세계죠.

한민국님께서는 마나를 각성한 소녀들과 함께 팀을 이뤄, 어둠의 괴물들에게서 이 세계를 지켜주시면 됩니다. 카오스님이 창조하신 제가 민국님을 서포트하겠습니다. 한민국님이 적응할 수 있도록 카오스님께서 힘을 소모해 부활석 백 개를 첨부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민국은 멍하니 눈앞에 뜬 창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상황이지?

도저히 현실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끈거리는 두통과 떠오르는 기억들은 지금의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뭐야? 내가 이름을 말하는 데 개소리라니? 한민국. 너, 너무한 거 아니야?”

“어? 아, 미안. 너한테 한 말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그래그래. 우리가 신경을 써야할 건 따로 있지. 레이드 자격시험. 일주일 남은 거 기억하고 있지?”

“…….”

기억을 해야 한다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고 말해야 할지.

어쨌든 강제로 박힌 기억에 따르면 자신과 오현아는 마나를 각성한 초보 영웅으로 지구를 침략한 괴물들을 물리치고 영웅이 되고 싶어 하는 꿈 많은 청춘들이었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힘을 지닌 어둠의 괴물들을 아무나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 영웅들의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기 위해 세계정부에서는 마나를 각성하고 영웅 학교를 졸업한 영웅들을 대상으로만 테스트를 하고 자격증을 발급했다.

당연히 자격증이 발급된 영웅의 대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 괴물들의 손에서 지구를 지키는 이들인 만큼 대우가 장난이 아니었다. 물론, 자격증을 발급받고 뛰어난 전과를 올린 영웅들만이 대우를 받았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몬스터와의 싸움에 나섰다. 당연히 영웅들은 대다수가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나 각성은 여성만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남자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주 극소수만 각성이 가능했고, 민국은 운 좋게 그 소수에 들어가게 된 남성이었다.

“설마 민국이 너 몸이 아프다고 머리까지 돌아간 건 아니겠지? 까먹은 거 아니지?”

“어. 잠깐, 잠깐만…. 머리가 아프니까 생각을 정리할 시간 좀 줘봐.”

“이 새끼. 진짜 병원가야 되는 거 아니야?”

현아의 말을 귓등으로 흘린 민국은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기억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젯밤 모바일 가상현실게임 GGW에서 월드 퍼스트 킬(WFK)을 달성한 후에 카오스와 대화를 하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뜨니 이상한 세계의 한민국이 되어 있었다. 컴퓨터 게임처럼 나타난 창은 이 모든 것이 카오스가 한 일이라고 했다.

‘만화에서 유행하는 이 세계 이동 같은 건가? 카오스가 나를 이리로 보낸 거고? 뭐, 그 자식은 신이라도 되는 거야?’

분명 카오스와 함께 GGW를 배경으로 한 세계가 있다면 좋겠다는 말을 하긴 했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지만 눈앞의 창과 강제로 머릿속에 박힌 기억은 말이 안 되는 상황을 그럴듯한 현실로 만들고 있었다.

“황당하네.”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울며불며 좌절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

새로운 세계에 대해 알기 위해 민국은 계속해서 기억을 헤집었다. 그리고 깨달은 건 이 세계가 정말로 GGW와 흡사한 아니 거의 똑같다시피 한 배경의 세계라는 점이었다.

어쨌든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그러나 막상 현실로 닥치니 머리가 멍했다.

“혹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어?”

민국이 메시지 창을 향해 중얼거리듯 물었다. 그러자 창이 젤리처럼 흔들렸다가 모습을 갖췄다.

《가능합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어둠의 괴물에게서 이 세계를 지켜내면 됩니다.》

“그래. 아예 못 돌아가는 것은 아니네.”

조건이 조금 황당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돌아갈 수는 있다고 생각을 하니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덩달아 머리의 두통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괴물들을 물리치려면 레이드를 해야 하는데…. 게임에서도 자격시험이 있었단 말이지. 실버 등급을 획득하면 되었던가?’

기억에 따르면 모바일 가상현실게임 ‘GGW’에도 이와 비슷한 퀘스트가 있었다. 제대로 된 팀을 꾸리기 위한 자격을 갖추라는 이름의 퀘스트였다.

간단히 말해 다섯 명의 영웅이 힘을 합쳐 3 등급의 몬스터를 열 번 이상 물리치면 실버 등급을 딸 수 있었다.

물론, 그냥 공략에 성공한다고 해서 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본인이 선택한 클래스에 따라 ‘공략 기여도’를 일정 부분 충족해야만 했다. 실력도 없는데 현질 혹은 소녀들에게 빌붙어 자격을 따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제였다. GGW 에서는 그랬다.

그리고 이 세계의 민국도 현아와 함께 5 인 고정팀을 이뤄 3 등급 괴물을 공략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당연하지만 다들 영웅학교를 졸업한 이들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민국과 현아를 제외한 고정팀의 영웅들이 국적이 다들 다르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괴물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인해 국가와 국경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까닭이 큰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 녀석은 여태까지 세 번 밖에 공략에 성공하지 못한 거야? 이제 고작 일주일 남았는데?’

이 세계의 한민국은 그리 대단한 재능을 지닌 녀석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클래스는 원거리 딜러로 실력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냉정하게 말하면 GGW를 즐기는 일반인들과 비교해 실력이 크게 나은 게 없어 보였다. 이런 실력으로는 괴물들의 손에 죽기 딱 좋았다.

보유한 레이드 장비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어쨌든 괴물들을 상대하려면 레이드 팀을 만들거나 소속되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격증이 필요했다.

“당장 팀을 모아서 3 등급 괴물을 때려잡아야겠네.”

“그렇지 않아도 팀원들의 불만이 장난 아니야. 자격시험이 고작 일주일 남았는데, 너 갑자기 쓰러져서 움직이지도 못한 거 알고 있지? 내가 얼마나 심장이 쫄렸는지 알아? 지금은 좀 어때? 괜찮겠어?”

“응. 괜찮아. 전부 나은 것 같아.”

머리가 살짝 지끈거리는 것을 제외하면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어 보였다.

“지금 바로 팀원들과 연락할 수 있어?”

“물론이지.”

전투에 나서겠다는 민국의 말에 현아가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슬쩍 보니 이미 다른 팀원들과 메신저로 대화를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긴 듯 키보드를 두드리던 현아가 욕설을 내뱉으며 민국을 불렀다.

“아, 루니아 이 썅년! 우릴 배신했어! 혼자서 다른 애들과 고정을 짜고 던전 돌고 있대!”

민국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문제가 될 게 있나?

“그래? 그러면 새로운 팀원을 구하면 되잖아?”

“뭐?”

민국의 말에 현아가 황당한 표정을 짓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오더를 루니아가 내렸던 거 기억 안나? 걔가 없으면 오더를 내릴 사람이 없다고! 그렇다고 당장 3 등급 괴물을 상대로 오더를 할 수 있는 능력자를 구하는 게 쉬운 것도 아니고! 그리고…”

현아가 말끝을 삼켰다. 1성인 자신과는 다르게 루니아는 태생 2 성의 영웅이었다.

“아, 그렇겠네. 오더를 루니아가 내렸었지.”

민국은 루니아가 2 성 영웅이라는 것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GGW에서 영웅들의 별 숫자는 능력의 척도를 알려주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소녀들을 이끌고 당연하게 오더를 내리던 자신과는 달리 이 세계의 민국은 오더를 받는 입장. 그리고 루니아라는 소녀는 민국이 속한 팀에서 오더를 맡았던 영웅이었다. 한 마디로 지금은 공격대가 해산된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루니아라는 공대장이 사라졌으니까.

“아, 진짜 큰일 났네. 자격증 시험이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는데….”

“현아야.”

멘탈이 무너진 듯 머리를 부여잡고 좌우로 고개를 흔드는 현아를 향해 민국이 말했다.

“다른 팀원들은? 다른 애들도 나간 거야?”

“어? 아니, 루니아 녀석만. 린 샤와 애슐린은 팀에 그대로 있어. 물론, 언제 나갈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당장은 팀원 한 명만 더 구하면 된다는 이야기네?”

“그렇지?”

민국은 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평균적으로 레이드 5 인 팀의 구성은 1 탱커, 3 딜러, 1 힐러로 구성된다. 그리고 공대장인 루니아는 힐러 클래스로 활동하는 영웅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원거리 딜러인 자신은 원래 힐러로 잔뼈가 굵다 못해 고이고 고였던 게이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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