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 랭커 한민국
“탱커는 원래 현아 너였고, 린 샤가 근딜, 애슐린이 디버퍼 겸 원딜러. 그러면 당장 버프가 가능한 원거리 딜러 한 명 구할 수 있겠어?”
“…무슨 소리야? 그게 너잖아? 우리는 힐러를 구해야 되는 거 아니야?”
“…….”
이걸 대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잠시 아팠던 시간동안 내 영혼이 힐러의 재능을 각성했다고 말해야 할까? 어쨌든 길게 해명을 늘어놓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설명을 늘어놓는다고 해서 현아가 알아들을 리도 없었다. 그냥 밀고 나가야만 했다.
“이제부터 힐러는 내가 볼 거야. 오더도 내가 내릴 거고. 장비는 너랑 나랑 1, 2 등급 괴물들에게서 얻은 힐러 장비를 모아놓은 것이 있으니까 그걸 사용하면 돼. 모자란 것은 경매장에서 돈을 주고 살 거고.”
돈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험상 3 등급의 괴물을 상대로 하는 것이라면 적당한 수준의 장비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현아의 입장에서는 민국의 말이 허황되게 들릴 뿐이었다.
“님 미침? 팀원들이 그걸 납득할거라고 생각해?”
“일단은 루니아가 나간 자리를 메꾸고 내 오더 능력도 시험할 겸 3 등급 괴물들 중 쉬운 놈들을 먼저 상대해보자. 레이드 자격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 어때?”
민국의 재촉에 현아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렇다가 큰일이 나면 어떻게 해?”
그리고는 머뭇거리며 민국의 눈치를 슬쩍 보며 말했다. 아무리 마나를 각성한 영웅이라 해도 까닥하다가는 죽을 수 있는 게 레이드였다.
“걱정 마. 나한테 부활석이 있어.”
“……그 비싼 건 대체 어디서 났대?”
부활석을 언급하는 민국의 말에 현아가 졌다는 듯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다행히 그녀는 알고 있는 인맥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렇게 삼십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거리 딜러 구했어. 자칭 미소녀 궁사래. 공격 강화(B), 얼음 화살(B), 번개 속사(B) 이렇게 스킬 가지고 있대.”
“나쁘지 않네.”
민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GGW의 소녀들은 각자 세 개의 스킬 스톤을 착용하고 전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게이머들은 자신들이 상대할 몬스터의 상성에 따라 소녀들에게 각각의 스킬들을 준비시켜 레이드를 진행했다. 당연하지만 각각의 스킬에는 클래스와 등급이 제한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1성, 2성이라 불리는 등급과 관계가 있었다.
이렇게 전투 때 마다 스킬 스톤을 이용해 스킬을 교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GGW의 게이머와 소녀들은 잠재력을 소모해 자신들의 클래스 또한 교체를 할 수 있었다.
본인이 가진 스킬과 장비 그리고 능력에 따라 탱커가 딜러가 될 수 있고, 딜러가 힐러로 변신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너 힐러 한 번도 해 본적 없잖아. 힐을 캐스팅하는 방법은 알고 있는 거야? 아이씨. 불안한데….”
현아는 민국이 힐러를 한다는 것에 대해 굉장한 불신을 보내고 있었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이제까지 민국은 원거리 딜러만 팠던 딜러 유저였다. 영웅학교를 다녔을 때도 힐은커녕 힐러들이 사용하는 무기인 지팡이조차도 들어본 경험이 없었다.
아무튼 현아의 불평을 뒤로 한 채 민국은 빠르게 자신의 스킬을 세팅했다. 힐(C), 광역 힐(C), 디버프 해제(C). 전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기본적인 스킬들이었다. 그래도 급하게 구하느라 돈을 좀 쓰기는 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스킬 등급은 C 에 불과했지만, 새로운 기억과 GGW의 경험을 살린 결과 이 정도라면 충분히 레이드를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직업 또한 힐러 계열의 B 등급 클래스인 세인트로 전직했다. 강제적인 전직으로 인해 딜러의 잠재력이 상당량 소모되었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이 몸의 딜러 재능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다만, 전직에 사용되는 클래스 스톤을 구입하느라 현아에게 돈을 좀 빌려야만 했다.
“너 그거 관절 인형 살 돈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보름 내에 갚아야 돼. 예약도 해놨단 말이야.”
“알았어. 자, 그럼. 출발하자.”
그렇게 준비를 끝낸 민국은 투덜거리는 현아를 끌고 팀원들을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로 향했다. 황당하기는 했지만, 막상 이 세계를 즐기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절로 발걸음이 움직였다. 그렇게 민국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띠링하는 소리와 함께 메시지가 민국의 눈앞에 나타났다.
《민국님의 이 세계 첫 도전을 카오스님이 창조하신 뿌우가 응원합니다! 첫 퀘스트를 받아주세요!
[목표] - ‘레이드’ 자격증을 획득하라!
[기간] - 이번 시즌! 고작 일주일 남았습니다!
[보상] - 브론즈 티켓 3 장 !
실패할 경우? 패널티는 없습니다. 그러나 레이드 자격증 시험은 1 년만에 한 번만 통과할 수 있다는 거! 불필요하게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죠?》
‘뭐야 저건?’
민국은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의 내용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퀘스트의 등장에 비명을 지르거나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이미 GGW의 경험을 통해 이와 비슷한 메시지는 수도 없이 받아본 적 있었다. 또한 판타지 소설을 통해서도 여러 번 간접경험도 했었다.
“그런데 대체 저게 무슨 보상이야?”
브론즈 티켓.
민국이 즐기던 GGW내에서 사용되던 아이템은 아니었다. GGW 내에는 뽑기 시스템과 같은 티켓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민국은 브론즈 티켓이 뭐에 쓰는지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았다.
* * *
GGW는 칙칙한 분위기의 미래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게임이었다.
이 세계도 똑같았다. 괴물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괴물들을 피해 도시를 요새화 시켰다. 그리고 마나를 각성한 영웅들을 앞세워, 괴물들을 공격을 막아내거나 괴물들이 점령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민국이 밖을 나서니 회색의 진눈깨비가 추적이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느껴지는 축축함이 왠지 모르게 민국에게 씁쓸한 느낌을 주었다.
민국은 주변의 광경을 하나하나가 눈에 아로새겼다. 앞으로 자신이 살게 된 이 세계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 몸의 주인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 머무르고 있었다. 몬스터들의 침공을 버텨낸 몇 안 되는 대도시 중 하나였다. 민국과 현아가 팀원들과 주로 모이던 아지트는 펍 노비스.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여러 주점 중 한 곳이었다.
“오랜만이야. 아프다고 들었는데, 몸은 좀 어때?”
민국이 펍 노비스에 들어서자 20대 후반? 30 대 초반으로 보이는 금발 여성이 아는 척 말을 걸었다. 미국에서 영웅 학교를 졸업한 애슐린이었다. 다만, 애슐린은 학교를 졸업한 지 6 년이 넘은 영웅이었다.
“괜찮아.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나 때문에 던전 공략도 제대로 못했잖아.”
“어쩔 수 없지. 아픈 게 죄도 아니고. 하지만 지금부터는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아. 자격시험이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으니 쉴 시간이 없다고.”
애슐린이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말을 저렇게 해도 시험이 일주일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니 속이 타들어갔을 거다.
민국은 애슐린의 뒤를 따라 펍의 구석으로 이동했다. 이미 현아를 포함한 세 명의 여성이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기억 속에 있는 얼굴이었다.
린 샤. 중국 저장성 출신으로, 자신과 현아와 동갑내기의 영웅이었다. 영웅 학교도 서울에서 같이 졸업했다. 2 년간 함께 생활한 경험에 따르면 왕성한 호기심으로 인해 말썽과 사고를 일으키는 게 주특기였던 소녀였다.
그리고 그 옆은….
‘자칭 미소녀 궁사라고 했던가? 이름이 최유나라고 했지.’
그 말이 거짓은 아닌 듯. 새롭게 합류하기로 한 유나는 굉장히 예쁜 소녀였다. 앳된 티가 많이 나는 것이 확실히 성인은 아니고, 고등학생 정도로 보였다. 아무래도 일찍 마나를 각성한 것으로 보였다.
자신과 눈이 마주친 유나가 꾸벅 고개를 숙이자 민국 역시 손을 흔들어 준 후, 오랜만에 만나는 동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녕, 린샤.”
“하이 민국! 아픈 거 나았으니 이제부터 달려야지? 그런데 공대장 그 년이 배신을 했네? 빌어먹을! 같이 못하겠다는 한마디도 없이 다른 영웅들하고 팀을 짜서 던전에 들어가 있다니! 배신자 년!”
애슐린과 민국이 자리에 앉는 동안 린샤는 쉬지 않고 입을 열었다. 팀을 나간 루니아에 대해 불만이 상당했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기억속의 루니아는 그리 매너가 좋은 공대장은 아니었다. 상황 판단에 따른 리딩도 별로인 데다가 레이드가 풀리지 않을 때 마다 욕설과 시비 그리고 남 탓을 패시브로 장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근접 딜러인 린샤가 루니아에게 가장 욕을 많이 먹었다. 근접 딜러가 힐러에게 힐을 받는 게 수치라고 했던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종종 늘어놓았던 친구였다.
“하도 짜증이 나서 욕을 한 바가지 해줬지. 그 프랑스 년, 오크들한테 윤간이나 당했으면 좋겠다. 분명 큰게 좋다고 헬렐레 거리겠지? 리딩도 제대로 못 하는 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끼하고 재수가 없더라니.”
“난 이미 그 녀석. 친구목록에서 삭제했어.”
애슐린도 공감하며 말했다. 그녀도 린샤처럼 공대장이었던 루니아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중요한 것은 루니아는 팀을 나갔고, 남은 이들은 레이드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 일주일간 3 등급의 몬스터 일곱 마리를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니, 새로운 팀원이 합류했으니 처음부터 시작해서 열 마리인가?
“아,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손을 내미는 유나의 모습에 민국의 시선이 현아에게 향했다.
“오현아. 도우미로 구한 거야?”
“아니야. 본인이 그러는데 시간이 빠듯해서 내년에 자격시험을 본다고 하더라고. 나이가 어리기도 하고. 지금은 3 등급 몬스터에 대한 경험을 쌓을 겸 함께하기로 한 거야.”
“그게 말이 돼? 일곱 번이나 열 번이나. 이왕 시작한 거 같이 통과해야지.”
민국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GGW를 플레이하며 수많은 소녀들과 만나고 헤어짐을 경험했었다. 당연히 그 시간동안 깨달은 것이 적지 않았다. 그 중 하나가 함께 고생했다면 보상도 함께 나눠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단순한 인공지능이 아니었다. GGW내에서는 살아있는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몬스터와 전투를 벌이는 레이드는 생각보다 굉장히 피로한 일이다.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 괴물을 상대해야 하고, 그 상황에서 한 치의 실수도 없어야 했다. 몬스터의 수많은 공격 패턴에 자유자재로 몸이 움직일 정도로 훈련을 거듭하는 것은 물론이고, 장비 또한 좋아야 했다. 공대장의 오더(리딩)에 따라 적재적소에 스킬을 사용해야 하는 것은 덤이었다.
당연히 같이 고생을 하는 만큼 레이드로 얻을 수 있는 보상 또한 함께 나눠야만 했다. 버스를 타거나 엄청난 실수를 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래야만 불화 없이 레이드 팀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만약에 우리가 자격시험을 일찍 통과하면 좀 더 시간을 내서 얘도 이번 기회에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 그렇지 못하게 되면 돈을 걷어서라도 보상을 해줄게.”
“아…. 저는 괜찮은데요. 3 등급 몬스터 경험을 쌓은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업적도 얻을 수 있고요.”
“아니야. 초행이라고 그렇게 따지면 안 돼. 고생을 했으면 보상도 함께 나눠야만 해.”
민국의 강한 어조에 유나가 머뭇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민국의 행동에 다른 팀원들도 놀란 모습이었다.
어쨌든 분위기를 휘어잡은 것은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이들에게는 해야 할 말도 많았다. 판을 완전히 새로 짜야 하는 상황이었다. 겸사겸사 평범한 원거리 딜러라는 과거도 세탁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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