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 랭커 한민국
“대단해! 원트(One Try)에 클리어라니!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넌 이해하지 못할 거야. 정말 파투를 수백 번 이상 잡아본 것 같은 베테랑의 품격이 느껴졌다니까! 대체 이런 능력을 어떻게 숨기고 있던 거야?”
“하하. 진정해, 애슐린. 아직 성채를 클리어 한 것은 아니잖아? 기껏해야 몬스터 한 녀석을 잡은 것뿐이라고.”
뜨겁게 달아오른 애슐린의 모습에 민국이 웃으며 말했다. 고작 이 정도 녀석을 잡았다고 이렇게 흥분하면, 정말 엄청난 녀석을 잡고나면 어떤 행동을 보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어라?’
순간 머릿속으로 과거의 기억들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처럼 애슐린은 난이도가 높은 보스 몬스터를 잡았을 때, 크게 흥분하는 모습을 보였다. 린샤처럼 상의를 탈의하고 거의 벗다시피 뛰어다닌 적도 있었다.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르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동양인을 비하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애슐린의 미드는 민국이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A 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민국의 시선이 애슐린의 가슴으로 향했다. 이건 남자의 본능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성이 돌아오자 민국의 눈은 애슐린의 가슴이 아닌 눈동자를 보고 있었다.
어쨌든 이런 애슐린의 반응은 축제나 올림픽, 월드컵과 같은 장소에서 선수들이 승리의 기쁨으로 미친 듯 흥분하는 것과 비슷한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콘돔이 가장 잘 팔리는 때는 월드컵과 같은 지구촌 축제가 있을 때가 아니던가?
“맞아!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난 내가 올해도 레이드 자격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공대장인 루니아가 팀을 떠난 이후부터는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올해는 다르겠네.”
“맞아. 민국이 있으니까. 올해는 꼭 레이드 자격시험을 통과하고야 말거야.”
그건 민국도 원하는 바였다.
파투의 보상 상자에서는 B 등급 스킬 스톤 하나가 나왔다. 물리 딜러용 스킬이었지만, 클래스 제한으로 인해 린샤가 착용할 수 없는 스킬이었다. 유나도 사용이 불가능했다. 그런 탓에 민국은 팀원들과 상의해 스킬 스톤을 경매장에 내놓기로 했다.
“레이드를 준비하고 파투를 잡을 때까지 세 시간 정도가 걸렸으니까 시간당 2 만원 꼴이네? 시급 괜찮은데?”
검색결과 파투가 뱉은 스킬 스톤은 시세가 300 달러 정도였다. 다섯 명이서 나누면 60 달러. 7 만원 수준의 돈이었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의 보상에 만족하기 위해 괴물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파투를 물리친 일행들은 휴식 시간을 가진 후, 성채 안으로 이동했다. 민국과 일행들을 발견한 고블린들이 녹슨 무기들을 들고 달려들었지만 어렵지 않게 처리했다. 레이드 몬스터를 제외한 일반 괴물들은 긴장감을 풀어주는 정도의 약해빠진 놈들에 불과했다. 1 성에 불과한 자신들의 실력으로도 가볍게 상대할 수 있었다.
이동을 하면서 민국은 다음으로 상대할 레이드 몬스터의 패턴과 주의할 점에 대해 반복해서 설명했다. ‘혈갑 고블린 파투’와는 다르게 다음으로 상대할 몬스터는 여러 번의 시행착오가 필요한 몬스터였다. 던전의 최종 보스답게 패턴이 약간 까다로웠다.
《피를 훔치는 쿠왈라
▷ 쿠왈라는 2 분마다 자기 주위의 넓은 범위(20M)에 광역 스킬인 피의 흡수를 사용합니다. 피가 흡수된 게이머는 중첩이 쌓이며 쌓인 중첩이 많을수록 광역 스킬에 받는 피해량이 크게 늘어납니다.
▷ 쿠왈라는 탱커가 있는 방향으로 강력한 돌진 기술을 사용합니다. 이 공격은 방어력에 따라 80 – 200 의 물리 데미지를 줍니다. 하지만 랜덤하게 목표를 선택할 때도 있습니다.
▷ 탱커는 쿠왈라의 공격을 막아내며 어그로의 상황에 따라 피의 흡수를 피하기 위해 전장을 이탈했다가 돌입해야 합니다.
▷ 근접 딜러는 피의 흡수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2 분마다 전장을 이탈해야 합니다. 딜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 타이밍을 잡고 있어야 피의 중첩에 걸리지 않습니다.
▷ 원거리 딜러와 힐러는 탱커의 좌, 우에 자리를 잡으며 언제든지 쿠왈라의 돌진 기술을 피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힐러가 쿠왈라의 돌진 기술에 얻어맞으면 장비가 좋지 않을 경우 빈사에 빠지거나 즉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레이드 경험이 풍부한 이들이라면 몇 번의 설명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보스를 잡아낼 수 있겠지만, 자신의 옛 동료와 비교해 이들은 초보나 다름없는 수준에 불과했다. 어느 정도 괴물의 패턴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레이드는 단순한 컴퓨터 게임처럼 1,2,3,4 만 눌러서 이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부활석이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만약 없었다면 공략을 포기했었을 지도 몰랐다. 쿠왈라를 잡겠다고 목숨을 버릴 수는 없었다.
“이번에도 완벽한 리딩 부탁해, 대장.”
파투를 성공적으로 물리치며 린샤는 민국의 리딩을 신뢰하는 모습이었다. 하기야 루니아 같은 애와도 공대장이라고 팀을 이뤘던 이들이었다.
“이번 레이드의 승패는 피의 중첩에 달려 있어. 중첩이 쌓이면 쌓일수록 탱커에게 받는 데미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거야.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현아 네가 3 중첩이 넘어가는 순간 힐이 밀리기 시작할 거야.”
“휘유. 발에 땀나도록 뛰어야겠네.”
“물론, 어그로도 잡으면서 뛰어야지. 너랑 린샤가 왔다 갔다 하는 동안에도 원거리 딜러들은 데미지를 계속 넣고 있을 테니까.”
“…….”
결국 이번에도 탱커의 활약에 따라 레이드의 성공이 결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전투가 그랬다. 탱커, 딜러, 힐러가 조화를 이뤄야만 강력한 괴물을 물리칠 수 있었다.
“달려! 현아 9 시! 린샤 1시!”
“우워어어어억!!!”
“원거리 딜러 딜 중지! 어그로가 불안해!!!”
쿠왈라 레이드가 시작되고, 6 분가량이 흘렀다. 팀원들 특히 현아와 포는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쿠왈라와 전투를 하면서 2 분마다 20 미터를 벌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탱커인 현아는 쿠왈라와 미리 거리를 벌릴 수도 없었다. 현아가 떨어지려고 할 때 마다 쿠왈라가 탱커를 공격하기 위해 쫓아왔기 때문이었다. 결국 현아가 피의 흡수를 피할 수 있는 시간은 쿠왈라가 스킬을 캐스팅하는 시간인 5 초뿐이었다.
그리고 5 초라는 시간 내에 20 미터의 거리를 벌리는 일은 무거운 장비를 들고 있는 현아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몬스터와 무기를 맞대고 있는 상황이었다.
“씨바아아알! 꺄아악!”
쿠왈라가 캐스팅을 시작하자마자 욕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지만, 결국 피의 흡수에 당한 현아가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1 중첩 상태에서 받은 데미지가 탱커의 생명력을 반절 넘게 날려버릴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딜러라면 즉사 수준의 데미지였다. 그리고 쿠왈라는 이제까지 피의 흡수를 세 번 사용했다.
“2 중첩!”
그동안 현아는 한 번밖에 쿠왈라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민국은 그런 현아의 모습에 실망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타이밍을 잡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경험이 쌓이면 충분히 쿠왈라의 스킬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나중의 일이고. 지금은 한 번만 더 당하면 죽을 것 같은데….’
중첩이 높아질수록 쿠왈라에게 받는 스킬 데미지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그리고 다음 번 피의 중첩에 얻어맞으면 현아는 민국이 힐을 사용하기도 전에 사망할 게 분명했다. 지금 현아의 실력과 장비로는 2 중첩을 버티기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운이 좋아봤자 3 중첩이었다. 설령 운 좋게 현아가 데미지를 버틴다 하더라도 지금 자신의 스펙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현아를 살릴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 쿠왈라의 생명력은 아직도 60 % 나 넘게 남아 있었다. 어그로가 불안한 까닭에 딜러들이 제대로 공격을 넣지 못하고 있었다. 근접 딜러인 린샤도 몸을 뺐다가 다시 달려드느라 딜로스가 심했다. 현아와는 다르게 린샤는 아직까지 제대로 된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일찌감치 백기를 던져야 할 상황이지만, 민국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레이드를 진행했다. 공략의 성패보다 경험을 쌓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죽더라도 부활석이라는 보험이 있었다.
결국 레이드는 실패했다. 힘이 빠진 현아가 쿠왈라의 피의 흡수를 피하지 못했고, 즉사한 것이다. 그리고 어그로가 돌아간 쿠왈라는 민국을 포함한 딜러들을 한 방에 쓸어버렸다. 말 그대로 푹찍이었다.
그나마 고블린의 노리개가 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제기랄! 이십 미터! 그 거리가 이렇게까지 멀었어?! 왜 못 피하는 거야!”
“그래도 처음 경험하는 것 치고는 나쁘지 않았어.”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로워하는 현아의 모습에 민국은 현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러자 현아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 그래? 괜찮았어? 계속 이렇게만 하면 돼?”
“음음.”
뭐랄까. 기분의 전환이 빨라도 너무 빠른 모습이었다.
“그래. 하지만 움직임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아. 무턱대고 몸을 빼는 게 아니라 떨어지기 직전에 쿠왈라에게 강타를 먹여서 잠시 못 움직이게 하는 식으로 일찌감치 몸을 빼도 나쁘지 않을 거야. 좀 더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루게 되면 신체를 강화해서 움직여도 될 테고.”
“아하. 강타. 스턴효과가 있는 스킬이 있어야겠네. 마나 컨트롤은 2 성은 되어야 가능하겠고.”
“스턴은 린샤에게 도움을 받아도 될 거야.”
방어에 영향을 주는 스킬을 착용하는 탱커와는 달리 근접 딜러들은 상황에 따라 기절, 침묵과 같은 효과가 달린 스킬을 착용하곤 했다.
“다음은 애슐린하고 최유나.”
그리고 이 팀으로 두 번의 레이드를 진행하면서 민국은 한 가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의외로 딜러들이 어그로를 확인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피지컬은 괜찮은데, 뇌지컬이 별로네.’
레이드가 진행되는 동안 괴물들은 탱커만 바라보고 공격을 하지 않았다. 탱커보다 위협적인 적이 있다면 최우선 목표를 바꾸는 것이다. 그것을 조절하는 게 바로 어그로였다.
탱커의 어그로가 높다면 딜러는 강력한 공격을 쏟아 부을 수 있었고, 그렇지 않다면 스킬을 사용하지 않는 식으로 딜링을 조절해야 했다. 당연히 어그로를 얼마나 잘 조절하느냐에 따라서 몬스터에게 줄 수 있는 피해량이 크게 차이가 났고, 그에 따라 실력이 좋은 딜러와 나쁜 딜러로 구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애슐린과 최유나 그리고 린샤는 쿠왈라와의 전투에서 제대로 된 데미지를 넣지 못했다. 린샤는 피의 흡수를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애슐린과 유나는 어그로가 튈 까봐 소극적으로 공격을 했기 때문이었다.
“조금 힘들겠지만, 셋 다 전투 중에도 틈틈이 미터기를 확인해서 어그로를 확인하는 습관을 가져봐. 잠시 현아가 떨어진다고 해서 당장 쿠왈라가 너희들을 보는 게 아니야. 쫄지 않아도 돼.”
쿠왈라가 피의 흡수를 사용하는 동안 딜로 인해 어그로가 춤을 춘다 하더라도 스킬 시전이 끝난 뒤라면 딜러가 공격당하기 전에 현아가 달려가서 어그로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린샤. 불필요한 움직임이 너무 많아. 괜히 왔다갔다만 하느라 제대로 딜을 넣지 못하고 있잖아. 봐봐. 장비 스코어는 78인데 초당 데미지(DPS)가 16 에 불과해. 너 정도의 장비 스코어면 쿠왈라 레이드에서 평균적으로 56 정도의 데미지를 넣을 수 있어야 한다고.”
“으으. 미안. 제대로 해 볼게. 확실히 네 말대로 너무 정신없게 움직였던 것 같아.”
“좋아. 다음은 좀 더 집중해서 해 보자.”
다음 트라이가 이어져도 자신의 충고까지 신경을 쓰면서 쿠왈라라는 괴물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난이도가 높은 몬스터를 레이드하려면 지금부터라도 레이드에 도움이 되는 습관들을 익혀야만 했다. 레드 고블린 성채는 고작해야 B – 9 난이도에 불과한 던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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