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웅 소녀 전쟁-9화 (9/486)

EP.9 랭커 한민국

“110 이면 B – 6 난이도의 던전에 진입해도 되는 수준의 장비야. 자격시험을 통과하는 것도 문제없다고.”

애슐린이 말에 민국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격시험? 스코어가 시험과 관계가 있어?”

“응? 장비 스코어가 80은 레이드 자격시험의 기본 신청 조건이잖아?”

“……잠깐, 뭐라고?”

민국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자신이 착용한 아이템 스코어는 애슐린이 말했던 숫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뭐가?”

“아니, 마지막에 했던 말. 레이드 자격시험에 통과하려면 장비 스코어도 필요해?”

“당연한 거 아니야? 그건 상식이잖아. 영웅이 아닌 일반인들도 다 알고 있는 내용일 텐데?”

민국의 반문에 애슐린 대신 린샤가 기가 막힌 듯 어이없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다른 여인들도 다들 황당한 얼굴이었다. 농담도 이런 수준이라면 웃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에 대해 민국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자신은 이 세계의 ‘레이드’를 경험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상식이라 해도 아직 이 몸의 원래 주인이 가지고 있던 기억과 제대로 융합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민국은 빠르게 자신의 정보창을 열었다. 그리고는 장비 스코어를 확인했다.

【Gear Score – 55.9】

전 주인이 가지고 있던 힐러 장비와 경매장에서 급하게 구입한 장비까지. 총 여덟 부위에 장착한 장비 아이템의 평균값이었다.

“일단 까자.”

그리고 본인의 스코어를 확인하는 순간, 민국은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파는 것은 나중의 일. 자신이 착용할 수 있는 힐러 장비가 필요했다.

* * *

찌익.

티켓을 찢자 펑하는 효과와 함께 굴림판이 나타났다. 테두리가 은색의 마나로 일렁거리는 멋들어진 효과를 내는 굴림판이었다.

‘이런 효과 때문에 실버 티켓이라 부르는 모양이네.’

굴림판에 그려진 수많은 칸에는 90, 100, 110. 이렇게 숫자 세 개 만이 달랑 적혀져 있었다. 아마도 적힌 숫자에 맞는 스코어의 장비를 주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숫자의 비율차이가 상당하다는 점이었다.

“진짜 노 양심이다.”

굴림판에 적혀 있는 숫자의 비율은 6 : 3 : 1. 간단히 말해 110 짜리 아이템을 뽑을 확률은 10 % 정도에 불과해 보였다.

“좋아. 천호동의 럭키 걸 이 오현아님께서 나설 때 인가? 단번에 110 짜리를 뽑아주지.”

“흥! 어딜?! 이 몸의 70 – 100 짜리 티켓에서 100 짜리 아이템을 뽑아본 전설의 손을 가지고 있다. 영웅으로 활동하고 있다면 이 신의 손 린의 이름은 한 번이라도 들어봤을 텐데?”

남정네들도 아니고 여성 둘이서 굴림판을 앞에 두고 허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기억이 민국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런 굴림판은 보통 공대장이 굴린다는 기억이었다. 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적으로 공대장이 굴리거나 공대장이 지목한 영웅이 굴림판을 굴리는 모양이었다.

그래서일까? 민국은 허세를 부리면서도 힐끗힐끗 자신을 바라보는 현아와 린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선택해 달라고 삐약거리는 병아리들 같았다.

어쨌든 민국은 자신이 직접 굴림판을 굴려서 좋은 아이템을 뽑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없었다. 살면서 운이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왕 뽑을 거 110은 아니더라도 100 짜리 정도는 뽑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허세녀 두 명은 제외하고 말이다.

“아!”

문득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마침 처음으로 공격대에 참여한 유저도 있었다.

“……최유나.”

“네?”

민국의 지목에 유나가 깜짝 놀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런 유나를 향해 민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말이 있으니까. 유나, 네가 돌려 봐.”

“네! 그러면 한 번 돌려 볼게요. 브론즈는 몇 번 해봤어도 실버 굴림판을 돌려보는 건 처음인데….”

제법 돌리고 싶었던 모양인지, 굴림판을 향해 걷는 유나의 발걸음이 굉장히 서둘러보였다. 그리고 허탈한 표정을 하고 있는 두 여자를 뒤로 하고 심호흡과 함께 유나가 굴림판의 화살표를 붙잡고 돌렸다.

데구르르르륵.

익숙한 효과음과 함께 화살표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실버 굴림판이 환하게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마, 마사카?!”

현아의 놀란 목소리를 듣고 나니 왠지 모르게 느낌이 좋았다. 정말로 초심자의 행운인가? 빛이 사라지고 나면 110 짜리의 아이템이 눈앞에 쨘 하고 나타날 것 같았다.

이윽고 굴림판의 빛이 사라지고 화살표의 하나의 칸에 멈춰 섰다.

“아아….”

민국이 아쉬움의 탄식을 내뱉었다.

화살표는 90 이라는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말도 다 운 빨이지. 솔직히 그런 말이 어디 있겠는가? 다 여기저기서 가져다 그럴싸하게 붙이는 거였다. 현실은 역시 만만하지 않았다.

티켓에서 나올 수 있는 아이템 중 가장 하위의 아이템을 뽑았다는 생각인지 유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잘했어. 다음에는 더 괜찮은 게 뜰 거니까 실망하지 마.”

민국이 유나의 기운도 북돋을 겸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도 장비 스코어 90 짜리가 어디인가?

하지만 굴림판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숫자가 적혀 있던 굴림판이 사라지고 이번에는 장비의 부위가 적힌 굴림판이 새롭게 나타났다. 그리고 민국이 헛웃음과 함께 새롭게 나타난 굴림판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대체 몇 번을 돌려야 하는 거야?”

“응? 스코어 돌렸으니, 장비 부위 돌리고 마지막으로 착용 클래스까지 돌려야지. 굴림판 돌리는 거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건 왜 물어? 아마추어도 아니고? 너 아프고 난 이후로 되게 멍청해진 것 같다?”

“……아니다. 하하하.”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현아를 뒤로 하고 민국은 그만 고개를 절레 저었다.

‘뽑기는 한 번도 거지같은데, 무려 세 번이나 돌려야 한다니….’

무슨 이런 세계가 다 있는지. 진짜 해도 너무한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구르륵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두 번의 화살표가 연달아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나온 장비는 스코어 90 짜리의 힐러 갑옷이었다. 47 짜리 장비와 비교하면 두 배 아니, 그 이상으로 좋은 장비였다.

하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정리한 민국이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거 얼마짜리지? 90 힐러 갑옷이면 1300 달러는 넘을 것 같은데.”

자신이 이걸 가지려면 그만큼의 돈을 팀원들에게 나눠서 지불해야했다. 본인의 몫은 빼더라도 1000 달러 가까운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원 주인이 가지고 있는 돈은 200 달러 정도에 불과했다. 그것도 다음 달까지의 생활비가 포함된 금액이었다.

“팔려고? 지금 착용한 장비보다 훨씬 좋지 않아?”

“……그렇긴 한데 돈이 없어.”

“아.”

린샤가 낮게 탄성을 터뜨렸다. 결국 이 장비를 팔아서 돈으로 교환해야 했다. 그런데 민국의 모습을 바라보던 애슐린이 의외의 제안을 꺼냈다.

“민국이 네가 써. 우리가 돈이 급한 것도 아니고 천천히 갚으면 되잖아?”

“어? 나는 당장 급하긴 한데….”

잠깐 말을 꺼냈던 현아가 애슐린의 살벌한 눈빛을 정면으로 받고는 스르르 찌그러졌다.

“어차피 레이드 자격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우리와 함께 계속해서 3 등급 괴물을 사냥할 거 아니야? 장비를 이번만 얻을 것도 아니고, 나중의 분배금을 미리 당겨쓰는 셈 치면 되지.”

“어?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게다가 공대장이잖아.”

린샤도 깔끔하게 찬성했다. 그 모습에 민국은 멍한 기분이 들었다.

이 공격대의 파티원들은 사이가 굉장히 좋았던 모양이었다. 공대장이었던 루니아는 제외하고 말이다.

“저도 찬성이에요. 공대장인 민국이 오빠가 강해지면 우리에겐 더 좋은 거잖아요. 그리고 저는 3 등급 괴물 토벌 기록만 얻은 것만으로도 괜찮아요.”

유나의 말을 마지막으로 스코어 90 짜리의 힐러 갑옷은 민국이 사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첫 던전 공략이 끝났다.

* * *

성공적으로 던전 공략을 끝낸 민국과 일행들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다음으로 공략할 던전을 고르기 시작했다. 당연히 3 등급 이하의 괴물들만 나타나는 던전이었다.

한참의 회의 끝에 민국의 공격대는 서초구의 ‘어둠 숲’을 토벌하기로 했다. 총 세 마리의 레이드 몬스터가 등장하는 C – 2 난이도의 던전이었다. 세 마리의 괴물 중 두 마리가 2 등급인 까닭에 레드 고블린의 성채보다 위험 등급이 낮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었다.

민국이 어둠 숲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영웅 패드로 세계 정부의 한국 관리지부에서 현상금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서초구에 열린 어둠 괴물들의 던전이 계속해서 토벌되지 않은 까닭이었다.

현상금은 1000 달러. 많지도 적지도 않은 돈이었다.

정규 공격대로 활동하는 영웅들에게는 눈에 차지 않는 돈이겠지만, 자신들과 같은 예비 영웅들에게는 충분히 큰돈이었다. 다만, 어둠 숲의 공략은 오늘이 아닌 내일로 미루기도 했다. 분당까지 오갔던 시간 때문에 해가 어둑하게 내리 깔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둠 숲에 등장하는 괴물 공략은 무슨 일이 있어도 까먹지 않도록 해. 내일 다시 브리핑하면서 질문 할 거야.”

“으에에에.”

질문을 하겠다는 민국의 말에 린샤가 얼굴을 구기며 혀를 내밀었다. 그렇게 동료들과 헤어지고 이 세계의 첫 날을 마무리 한 민국은 콘크리트 벽과 정체모를 기계들이 있는 자신의 원룸으로 향했다. 문제는 원룸으로 향하는 발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흐흐흥.”

민국의 뒤로 현아가 콧노래를 부르며 따라오고 있었다. 성공적으로 3 등급 괴물을 두 마리나 토벌한 것 때문인지 기분이 굉장히 좋아보였다.

그러고 보니 민국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시끄럽게 원룸을 두드리고 있던 이도 현아였다. 심지어 벌컥 문도 열지 않았던가?

함께 레이드 자격시험을 보는 사이라 비슷한 장소에 집을 얻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원 주인의 기억은 그렇지가 않았다.

‘……뭐, 뭐야?’

자신이 현아와 함께 밥을 먹는 모습, 티비를 보는 모습, 하나의 침대를 두고 잠을 자는 모습이 머릿속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현아는 자신의 집 근처에 사는 게 아니었다. 어쩐지 침대와 기계밖에 없는 집이 굉장히 넓더라니! 민국은 침을 꿀꺽 삼켰다. 둘은 함께 동거를 하고 있는 사이였다.

‘애인 사이였어?!’

그 생각에 민국은 흠칫 걸음을 멈췄다.

“뭐야? 빨리 집에 가자. 나 배고파. 파투 잡고 번 돈으로 우리 치맥 하자. 넌 장비 사느라 돈 없을 테니 이 누님이 사준다.”

뒤따라오던 현아가 민국의 어깨를 붙잡고 앞으로 밀었다. 마나를 각성한 영웅이라 그런지 절로 몸이 앞으로 밀려나갔다.

그렇게 현아의 손에 이끌려가며 민국은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동거를 하는 사이였지만 친구 이상의 선을 확실하게 넘은 적은 없었다. 가벼운 스킨십 경험은 있었지만, 그 뿐이었다.

‘썸 아닌 썸 타는 그런 사이도 아니고. 원 주인은 대체 뭐하던 놈이었던 거야?’

혼란스러운 머리를 진정시키며 십 분 정도 걸음을 옮기다 보니 익숙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아침에 눈을 떴던 집이 있는 거리였다.

“바로 시키고 씻어야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겉옷을 옷걸이에 건 현아가 상의를 벗어 세탁 바구니에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브라만 한 채로 영웅 패드로 전화를 걸더니 치킨을 주문했다. 한, 두 번 한 게 아닌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으음.”

현아의 행동에 비해 민국은 지금의 자리가 너무나도 어색했다. 눈동자를 굴릴 수가 없었다. 남자의 본능에 따라 자신도 모르게 현아의 브라에 시선이 가고 있었다. 도무지 적응을 할래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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