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 초보 영웅들
“안 먹어? 입 맛 없어? 이거 미스릴 올리브 치킨인데….”
“아?! 머, 먹을 거야.”
현아의 말에 민국은 반사적으로 치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연스럽게 쇼파에 기대어 TV를 보고 있었다. 현아는 여전히 브래지어와 팬티만 한 속옷 차림이었다.
앞에 놓인 앉은뱅이책상에는 조금 전 현아가 시켰던 치킨이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었다.
“‘우리 둘이 산다’네. 나는 저 예능 재미있더라. 나 봐도 되지?”
리모콘을 돌리던 현아가 자신이 원하는 채널을 고정시켰다. 프로그램 이름이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짝퉁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예능? 재미있는 프로그램이야?”
“아, 너는 이거 안 좋아 했었나? 다른 채널로 돌릴까?”
“아니, 괜찮아. 그런데 이거 인기 많아?”
“응. 남자, 여자 같이 사는 모습이 알콩달콩하잖아. 뭐, 전부 설정이겠지만.”
예능프로그램에 나오는 두 남녀를 보며 현아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녀의 말에 민국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민국은 그에 대해 의문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이 몸의 원주인이 있는 이 세계는 자신의 상식은 맞아떨어지지 않는 외계와 같은 세상이었다. 한 때 유행했던 이세계물 같은 상황인 것이다. 다행히 치킨의 맛은 늘 먹던 것과 비슷했다.
‘우리 둘이 산다’라는 예능 프로그램은 남녀가 동거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이 주 컨텐츠인 방송이었다.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둘 다 미남, 미녀였다. 남자의 직업은 잘 모르겠지만, 여자는 어둠의 괴물들에게서 이 세계를 지키는 영웅이었다. 그것도 무려 5 성 영웅으로 유명한 정규 공격대의 팀장이었다.
치킨와 함께 곁들이는 맥주 때문인지 현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우리 둘이 산다는 예능 프로그램 중 인기가 가장 좋은 프로그램으로 보였다. 일어날 수 없는 판타지를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이유라고 했다.
‘남녀가 동거하는 게 그렇게까지 판타지로 취급 될 일이었던가?’
잠시 고민을 하던 민국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누군가에게 여자 친구는 상상에 불과한 존재이긴 했다. 인터넷의 게시판에는 아직 자신의 짝이 태어나지 않아 울부짖는 남자들을 하루가 멀다 하고 볼 수 있었다. 그건 이 세계도 마찬가지인 모양….
“확실히 설정 티가 확 나긴 하네. 결혼도 아니고 저렇게 자연스럽게 동거를 원하는 남자가 있을 리가 없잖아? 아, 5 성 영웅 정도면 저렇게 생긴 남자도 좋아한다고 달라붙으려나?”
“…뭐?”
치킨을 뜯던 민국의 고개가 현아를 향해 홱 돌아갔다.
* * *
천지가 개벽하다.
자연계나 사회적으로 큰 변혁이 일어났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뜻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민국은 그 천지개벽의 단어를 정신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가상현실게임 GGW. 일명 우주소녀전쟁에는 오직 여성 영웅들만이 존재한다. 주 소비충인 남성 게이머들을 잡기 위한 개발사의 의도가 강하게 느껴지는 설정이다. 1 성 영웅인 오현아, 2성 영웅인 루니아처럼 카오스의 손에 보내진 이 세계도 GGW 와 비슷한 설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GGW에서 등장하는 소녀들은 단순히 보스 몬스터의 공략에 필요한 영웅들에 불과했다. 그 외의 배경은 설명되지 않았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이 세계는 달랐다.
- 하. 전 남친이 너무 보고 싶다. 2성 영웅인데, 3성 되고 찾아가면 다시 만나줄까?
└ 사진 있음? 전 남친이 인기가 있을 정도로 잘생겼으면 3 성 영웅이 되도 붙잡기 힘들지 않을까?
- 알바 하는 데 어떤 남자가 번호를 주고 갔어요. 연락해도 될까요? 설마, 장난은 아니겠죠?
└ 영웅도 아닌 일반인에게 남자가 번호를 준다고? 엄청 예쁘게 생기셨나 봐요?
└ 놉. 그런 남자는 조심해야 됨.
- 남자가 피곤해 할 때 전화 계속한다? 끊는다?
└ 쓰니야. 일단 전화할 남자가 있다는 것부터 물어보는 게 예의 아니냐?
└ 나는 있는데? 있으니까 이런 글 올리는 게 아니겠니?
└ 쓰니 너 눈치 없다는 말 많이 듣지?
인터넷에 올라온 혼란스러운 내용을 보는 민국의 눈동자가 위 아래로 크게 떨렸다. 여러 정보들을 찾아봤지만 눈에 보이는 뉴스도 게시판도 다 이와 비슷한 뉘앙스의 글들뿐이었다.
“어…씨. 나 이런 상황,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모니터를 바라보던 민국은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꾹꾹 눌렀다.
남녀역전. 성 전환이 아닌 두 성(性)의 성 역할이 변화된 세계가 딱 이러했다. 소설 혹은 만화에서나 볼 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인터넷을 검색하다보니 이 세계도 처음부터 이렇게 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오래 전, 어둠의 괴물들이 등장하면서 발발된 전쟁으로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남성들이 목숨을 잃은 게 그 시발점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괴물과의 전쟁이 시작되고, 삼 년 만에 전쟁터로 끌려간 이십 대 남성의 65 % 가 사망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여성의 피해도 적지 않았지만, 전쟁으로 희생된 남성과는 비교가 되지 못했다.
그렇게 남성들의 숫자가 크게 줄어들면서 종족의 보존을 위해 남성들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이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했고, 거기에 오직 여성만이 마나를 각성한 영웅이 되어 괴물들과의 싸움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두 성의 역할이 차츰 변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상황이 수십 년간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이러한 상황이 된 것 같았다.
“그런가 보다. 그런데 왜 이 몸의 주인은 현아와 동거를 하고 있던 거지?”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성의 지위가 낮은 편인 전의 세계에서는 동거를 하게 되면 여성이 손해라는 인식이 강했다. 특히나 결혼상대로 꺼려하는 이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러면 그와 반대로 여기서는 남성이 손해라는 인식이 강할 텐데…. 이 몸의 주인이었던 녀석은 영웅 학교 동기였던 현아와 동거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두 달 전부터 동거를 시작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아아….”
그리고 원 주인의 기억을 떠올리던 민국이 이마를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 자식, 나쁜 놈이었네.”
원주인이 현아와 동거를 하게 된 이유는 바로 현아의 언니 때문이었다.
오현정. 한 때 영웅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녀는 서울의 레이드 클럽 R’s(Rose Shield)의 단장이었다. 인터넷에 검색만 하면 바로 나오는 명문 레이드 클럽이었다.
덕분에 현아는 레이드 자격을 획득하면 R’s 에 입단할 예정에 있었다. 영웅 학교에서 최상위권의 성적을 받았을 정도로 재능도 뛰어났다.
그에 반해 이 몸의 원주인은 별다른 장점이 없는 원거리 딜러. 성적도 형편없었다. 그리고 남성이라는 메리트만으로는 결단코 R’s 에 들어갈 수 없었다. 아니, 애당초 레이드 자격증을 획득하는 것도 힘든 상황에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동거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더불어 손쉽게 레이드 자격을 획득할 수 있었던 현아의 상황도 이상하게 만들어버렸고 말이다.
“뭐, 어차피 사라진 놈이니까. 나랑은 상관없지.”
마나를 각성한 영웅들의 신체는 신비로운 마나의 힘에 의해 새롭게 탄생하게 된다. 신체적인 불균형을 바로 잡는 과정이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영웅들의 외모는 하나같이 뛰어났다. 당연히 오현아도 길을 가다보면 절로 고개가 돌아갈 정도의 미녀였다.
“아니, 좋은 거 아닌가?”
민국은 의자에 앉은 채로 손을 쭈욱 펴며 씨익 웃었다. 어찌되었든 미녀와의 동거는 모든 남자들이 꿈 꿀만한 판타지였다. 게다가 합법적(?)으로 속옷 차림의 여성을 감상할 수도 있었다.
“하하하하!”
민국이 인터넷을 하는 동안, 현아는 여전히 티비에 빠져 있었다. 박장대소를 하며 티비를 보는 것이 정말로 푹 빠진 모습이었다. 주문했던 치킨은 현아의 입을 통해 전부 뼈로 변해 있었다. 영웅들은 식욕도 왕성한지 그녀는 앉은 자리에서 치킨 두 마리를 가볍게 해치웠다.
그리고 인터넷 검색을 마친 민국이 슬그머니 쇼파에 앉으려고 할 때, 현아는 네모난 베개를 품에 끌어안은 채 아까와는 다른 뉘앙스의 탄성을 내고 있었다. 마침 TV에서 동거 역에 있던 남자와 여자가 스킨십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어…?! 하, 한다, 한다! 꺄아아아!”
“……놀고 있네.”
핑크빛 분위기를 물씬 잡더니 하는 것이라고는 볼 뽀뽀. 탄성과 함께 자지러지는 현아의 모습에 민국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 있었던 레이드에서 애슐린과 린샤와 함께 자연스럽게 음담패설을 하던 여자는 어디로 간 걸까?
“왜? 뭐? 그건 고블린이고, 이건 남자잖아. 그 둘은 다르지.”
“대체 무슨 차이야? 그건?”
“음…. 비유가 애매하기는 한데, 그냥 고블린은 성인용품 같은 거? 뭐, 그런 거야. 아, 몰라. 말 시키지 마.”
무슨 말 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TV에서 핑크빛 분위기가 보일 때 마다 현아는 계속해서 탄성을 터뜨렸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도 번갈아보며 빠르게 채팅을 하기 까지 했다. 잠깐 내용을 확인하니 친구들과 지금 나오는 프로그램을 주제로 채팅을 하는 모양이었다. 뭐, 주된 내용은 역시나 서로의 관계가 스킨십에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TV를 보던 민국이 물었다.
“그래서 쟤네 둘은 사귀는 거야?”
“그럴까 말까 고민하는 중. 여자는 사귀고 싶어 하는 데, 남자가 빼고 있어. 분명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한데, 저렇게 반응하는 거 보니 잘 모르겠네.”
“…….”
민국의 눈동자가 다시 TV 로 향했다. 프로그램에 나오는 여성은 웬만한 연예인들은 쭈구리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거기에 5성 영웅이라는 엄청난 능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영웅으로 활약하며 벌어들이는 한 달 수입이 수백만 달러라고 했다. 또한 생명을 지킨다는 명예도 있었다. 그에 반해….
“미친 새끼. 주제 파악도 못하고 배가 무지하게 불렀네.”
“뭐? 뭐요? 나한테 욕한 거야?”
“어? 아, 아니야. 너한테 한 거.”
잠시 대화가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민국의 눈치를 살짝 보던 현아가 슬쩍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앉아 있는 거야? 너 원래 이런 프로그램 안 좋아 했잖아?”
“어? 네가 보고 있기에 그냥 보는 건데?”
원주인 녀석이 그랬던가? 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혼자서는 할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멍하니 기억을 정리하는 것도 그 때뿐이었다.
“어? 그, 그래…? 내가 봐서?”
그런 민국의 대답에 현아의 다소 작아진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민국은 그런 현아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단지 TV 에 나오는 내용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게다가 현아의 속옷 차림이 영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방송을 보던 도중 또 다시 스킨십과 관련된 장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볼 뽀뽀가 아닌 조금 더 수위가 있는 스킨십이었다.
“…와, 부럽다.”
그 장면을 보며 현아가 침을 꿀꺽 삼켜 넘겼다.
“그럼 우리도 할래?”
그런 현아의 모습에 속옷에 눈이 팔려있던 민국이 반사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기억에 따르면 원주인과 현아는 가벼운 스킨십을 했던 사이였다.
“지, 진짜?! 정말이야?”
민국의 말에 현아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레이드 몬스터와의 전투 직전에나 볼법한 긴장감 가득한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드러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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