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웅 소녀 전쟁-16화 (16/486)

EP.16 초보 영웅들

모텔에 도착한 일행들은 곧바로 방 두 개를 잡았다. 카운터를 지키는 분은 중년의 남성이었는데, 이 세계에서 남자를 보는 게 워낙에 드문 일이기 때문일까? 약간은 신기하게 느껴졌다.

호실은 402, 403. 그리고 민국은 403호에 현아와 애슐린을 집어넣었다. 한 명은 침대에 한 명은 바닥에 눕혔으니 잠버릇 때문이라도 깨지는 않으리라. 다행이라면 다행일지 모텔의 시설은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호텔 같은 모텔. 딱 그 수준이었다.

그렇게 현아와 애슐린을 재운 민국과 두 여인은 곧바로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은 모텔의 바로 옆에 있었다.

“얼마나 마실 거야?”

“죽도록 마실 건 아니니까…. 가볍게 먹자.”

그렇게 말을 하며 민국은 소주 두 병과 맥주 네 병을 바구니에 담았다.

고깃집에서 본 결과 린샤와 유나도 제법 술을 마시는 편이었다. 아무래도 영웅이라 그런 것 같았다. 아니면 원래 술을 좋아하거나. 그래도 여자라고 인당 소주 1 병의 기준은 적용시키지 않았다. 만약 친구였다면 가차 없었겠지만. 그래도 만난 지 이틀 밖에 되지 않은 사이라 아직은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많이 사도 돼?”

민국의 손에 들린 술병을 본 두 여자는 한껏 놀란 얼굴이었다. 그런 두 여자를 향해 민국이 피식 웃었다.

“괜찮아. 억지로 먹으라고 안 할 테니까. 혹시 모자랄까봐 사는 거지, 굳이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돼.”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닌데…. 그리고 남자 영웅이란 마시는 데 어떤 여자가 술을 빼…….”

뒤에서 린샤가 뭐라 말하는 게 들려왔지만, 알아듣기에는 너무 작은 목소리였다. 민국은 곧바로 카운터로 가 술을 계산했다. 안주로 먹을 과자도 몇 개 집었다. 그래봤자 술 6 병과 과자 몇 봉지가 전부였는데 무려 70 달러, 8 만원에 가까운 돈이 나왔다.

‘어둠 숲’ 공략을 성공하며 받은 포상금은 물론이고, 몬스터를 물리치며 얻은 아이템의 정산금까지 회식과 술값으로 싹 다 날아가 버렸다.

“어둠의 괴물 새끼들이 문제라니까. 전부 싹 다 잡아서 족치던가 해야지…. 내가 이래봬도….”

알콜이 혈관을 타고 있어서일까? 편의점을 나서면서 모든 남자들의 공통적인 술버릇이라 할 수 있는 허세가 민국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그러게요. 오빠라면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런 민국을 보며 유나가 뒤에서 쿡쿡 웃으며 말했다.

술에 취한 여자들이 허세를 부리는 모습은 수도 없이 많이 봤었다. 지금도 술집에 가면 테이블 마다 한 명씩은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남자가 그것도 영웅이 저런 말을 내뱉으며 걷는 것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민국이 오빠, 원래 저렇게 귀여워요?”

“……쟤랑 알고 지낸지 반 년 조금 넘은 거 같은데, 같이 술 먹는 것은 나도 오늘이 처음이야.”

린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도 술에 취한 민국의 모습이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아하.”

그녀의 대답에 유나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이제껏 누군가가 허세를 부리는 모습을 꼴불견이라고 생각했지만, 민국의 저런 행동은 왠지 모르게 귀엽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세 남녀가 방 하나에 도란도란 앉았다.

“크…. 역시 소주는 이슬이라니까. 솔직히 처음이 더 낫기는 한데, 편의점에는 없더라?”

“요즘 누가 처음을 마셔? 전부 이즈백 마시지.”

“이즈백?”

린샤의 말에 민국이 고개를 갸웃했다. 본 적은 있지만 마셔본 적은 없던 술이었다. 병이 옛날 두꺼비처럼 투명했던 것 같은 기억은 있었다. 옆에서 홀짝이던 유나가 민국에게 물었다.

“오빠, 소주 많이 마시는 편이세요? 보통 남자들은 소주 잘 안 먹던데….”

그녀가 알기로 남자들이 마시는 술의 80 % 는 맥주와 과일주였다. 민국처럼 소주를 마시는 남자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껏해야 한, 두잔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민국은 고깃집에서부터 시작해 벌써 두 병 넘게 소주를 비우고 있었다.

“나는 진정한 남자니까. 다른 사람들하고는 다르다고.”

“푸핫! 누가 보면 엄청나게 술 잘 먹는 줄 알겠다?”

“사실인데? 제법 마시는 편이지?”

민국의 말에 린샤가 피식 웃었다.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린샤의 도발에 민국이 잠깐 울컥하기는 했지만, 잠시 후 린샤의 국적을 떠올리고는 바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원 주인의 기억에 따르면 중국 국적의 린샤는 독한 고량주와 이과두주를 병째로 마시는 여자였다. 지금도 얼굴빛이 살짝 술기운을 띄어 불그레할 뿐 혀가 꼬이거나 하는 모습이 전혀 없었다.

민국의 술을 들이키자마자 다시 소주잔에 술이 채워졌다. 유나였다. 공대원 중 가장 어린 막내라 그런지, 술잔이 비면 바로바로 채우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오빠, 올해 서울 영웅 학교를 졸업하신 거 맞죠? 64기?”

“어, 어? 그렇지?”

그런 괴상한 이름의 교육기관을 졸업한 기억은 없지만, 어쨌든 이 몸의 원주인은 달랐다. 이 세계의 한민국은 영웅 학교를 졸업한 인재 중의 인재였다.

그것도 마나를 각성한 진정한 영웅. 비록 예비기는 했지만, 레이드 자격시험을 통과한 예비 딱지 또한 떼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민국의 대답을 들은 유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그러면 저보다 한 기수 선배이신데….”

“오? 서울 영웅 65기? 완전히 직속 선배네? 그런데 그건 왜?”

린샤가 끼어들며 말했다. 그녀도 민국이와 같은 서울 영웅 64 기였다. 옆방에서 기절한 현아도 같은 기수였다.

“아뇨. 그, 그게…. 사실 저희 1 기수 선배 중에 민국이 오빠처럼 오더를 잘 내리는 남자 선배가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 봤거든요. 그런 말을 하셨던 교수님도 없으셨고.”

“확실히. 민국이 오더가 대단하긴 했지.”

유나의 말에 인정한다는 듯 린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두 번의 레이드에 불과했지만, 민국이 공대장으로 보여준 모습과 실력은 다른 예비 공대장 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정규 공격대를 맡고 있는 공대장들도 민국처럼 정확히 오더를 내리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그만큼 놀라움이 컸다.

“그거야 당연하지.”

민국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 몸의 원주인은 오더는커녕 원거리 딜러로도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던 놈이었다. 영웅 학교에서의 성적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오더를 잘 내린다는 소문이 돌았을 리가 없었다.

“그 때는 내가 본의 아니게 실력을 감추고 있던 터라 아무도 그런 사실을 몰랐거든.”

“네? 왜, 왜요?”

“뭐, 설명할 수 없는 남자의 비밀? 그런 게 있단다.”

제대로 된 사실을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민국은 말을 얼버무렸다. 그런 민국의 모습에 유나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린샤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쟤랑 영웅학교를 같이 졸업했거든? 그런데 그 때는 솔직히 실력이 별로였어.”

“……숨긴 거라니까? 주인공은 힘을 감춘다? 그런 이야기 못 들어 봤어?”

다시 말하지만 원 주인 녀석의 능력이었다. 민국은 원거리 딜러로도 충분히 잘 활동할 자신이 있었다. 수많은 레이드 경험에서 나오는 짬과 바이브는 어디 가는 게 아니었다.

더욱이 GGW에서 공대장으로 활동하려면 공대에 속한 모든 클래스의 특징과 역할에 빠삭하게 잘 알고 있어야 했었다. 힐러가 아닌 다른 클래스로도 평균 이상의 활약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민국의 투덜거림을 무시하며 린샤가 계속해서 말했다.

“뭐, 그래도 남자 영웅인지라 졸업 전에 데리고 가려는 팀은 굉장히 많았어. 그런데 어쩌다보니 현아랑 같이 레이드 시험을 준비하고 있더라고?”

린샷의 이야기에 민국의 눈이 가늘어졌다. 현아의 언니가 단장으로 있는 서울의 유명 레이드 팀인 R’s 에 들어가기 위해 원 주인 녀석이 현아에게 달라붙었던 게 정확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영웅학교에서부터 현아랑 친하게 지내던 사이라 자연스럽게 함께 하기로 한 거고. 마침 그 때 딜러 자리도 하나 비었었거든.”

“아하, 그랬구나. 하기야 남자 영웅이 드물긴 해죠. 저희 학년에는 아무도 없었거든요.”

다시 말하지만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영웅 중 마나를 각성한 남자 영웅은 정확히 열 명에 불과했다. 전 세계적으로 따져도 그 숫자가 삼백이 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대부분이 후방에서 활동할 뿐, 몬스터들과 직접 싸우며 일선에서 활동하는 남자 영웅은 서른 명 정도가 전부였다. 수만, 수십만에 다다르는 여자 영웅에 비하면 엄청나게 적은 숫자였다. 그리고 유나가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것 마냥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저 이 팀에 온 이유도 남자 영웅이 있다고 해서 온 거예요. 궁금했거든요.”

“하하하. 그래서 궁금증은 많이 풀렸어?”

민국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술이 좀 들어가서 그런지 아니면 예쁜 후배가 옆에 있다는 것 때문인지, 목소리가 절로 부드럽게 나왔다. 예전 세계의 동성 친구들이 봤다면 욕설과 함께 느끼하다고 후려쳤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린샤와 유나의 반응은 달랐다.

“와우….”

“이, 이래서 남자랑 술을 마시는 구나.”

탄성과 함께 두 여자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술이 살짝 들어간 남자 그것도 영웅의 모습이 그녀들의 어떤 욕망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잠시지만 조용한 침묵이 방 안에 맴돌았다. 묘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린샤와 눈을 마주친 유나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민국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오빠. 제가 한 잔 따라드릴까요? 직속 후배니까…. 소맥으로?”

“소맥? 좋지.”

민국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유나가 곧바로 종이컵을 꺼내들었다. 이어서 소주와 맥주가 종이컵 안에 콸콸 쏟아졌다. 소주 8 에 맥주 2 의 비율이었다.

하지만 민국은 절묘하게 시야를 가리는 린샤의 위치로 인해 그런 유나의 행동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게다가 알딸딸한 기분을 느끼느라 유나의 행동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자! 제, 제 사랑을 담았어요. 원샷!”

“그래, 원샷.”

갑자기 애교를 부리는 유나의 행동에 민국이 피식 웃으며 종이컵을 들어올렸다. 마치 군대 후배가 선임에게 딸랑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잔뜩 들었던 탓이었다.

하기야 영웅들의 기수 문화는 민국이 살던 세계의 군대 문화보다도 훨씬 강했다. 기억에 따르면 상상 그 이상이었다.

어쨌든 후배가 주는 술을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 민국은 그대로 소맥을 마시기 시작했다. 맛이 쓰디쓴 게 소주의 비율이 많이 섞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에 굴할 자신이 아니었다. 군대에서 마셨던 진급주는 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쓰다 못해 속이 뒤집힐 정도였었다.

“크으….”

그러나 갑작스럽게 들어간 소맥은 이미 알딸딸해져 있던 민국의 정신을 빠르게 내려놓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앉아있던 민국의 모습이 어느새 반쯤 누운 자세로 변했다.

술김에 더웠는지 상의의 단추가 몇 개 풀려 있었고, 바지의 버클 또한 열려 있는 모습이었다. 원래의 정신이었다면 몸가짐을 제대로 했을 텐데, 술이 정신력을 이기기 시작한 것이다.

“……꿀꺽.”

그런 민국의 모습에 린샤는 안절부절 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후배인 유나도 더욱 침착해 보였다. 그리고 민국을 바라보던 유나가 린샤를 향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 아니 선배님, 어떻게 한잔 더?”

“언니라고 불러도 돼. 지금 더 먹이면 갈 것 같은데…. 먹여 봐봐.”

반쯤 눈이 감긴 민국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킨 린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유나가 무서운 속도로 소맥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역시나 소주 8 에 맥주 2 의 비율이었다. 인심도 넉넉하게 담았다. 그리고는 누워있는 민국에게 가져다주며 말했다.

“오빠, 괜찮아요? 여기 물이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유나의 거짓말에 린샤의 눈이 절로 크게 떠졌다. 자신도 모르게 엄지손가락이 위로 치켜 올려지고 있었다.

“어…. 땡큐.”

그런 유나의 말에 민국은 아무 의심도 없이 종이컵의 액체를 마시기 시작했다. 두 여인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과 동시에 꼴깍꼴깍 하는 소리가 들리며 민국의 목젖이 움직였다. 그리고는 그대로 정신 줄을 놓으며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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