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6 낭중지추
쩌저적!
몸이 회복된 현아가 다시 일어나 자리를 잡았다. 그와 동시에 현아의 발이 빠르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10 초간 움직일 수 없다더니만 저렇게 발을 묶는 모양이었다.
‘저것도 주의해야겠어.’
만약 탱커가 빙결 창에 얻어맞고 드러누운 상태에서 얼어붙는다면 그것도 상당히 곤란해질 것 같았다.
어쨌든 현아는 자신이 올해 신입 랭킹에 이름을 올린 탱커라는 것을 증명하듯 하체를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아니사의 공격을 검과 방패를 이용해 부드럽게 막아내고 있었다. 확실히 실력이 좋았다.
“딜러들 공격 시작!”
‘얼음 여왕 – 아니사’의 어그로가 어느 정도 잡혔다는 생각이 들자 민국은 딜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미리 약속했던 대로 자신들의 자리에 위치해 있던 딜러들이 아니사를 향해 마력을 불어 넣은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민국도 빠르게 현아의 뒤로 자리를 잡았다. 모든 팀원들에게 회복 능력을 사용해 줄 수 있는 절묘한 위치였다. 그렇게 전투가 진행되던 도중 아니사가 연기처럼 푹 꺼지며 모두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환영 이동이었다.
“얼음 감옥! 다들 팀원들을 주시해!”
아니사의 공격 패턴을 떠올리며 민국은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사가 누구의 뒤에 나타나는지 곧바로 파악해야했다. 다른 팀원들도 고개를 돌리며 서로의 등을 확인하고 있었다.
샤샤샤샤샥….
그러던 도중 얼음이 갈리는 것 같은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자신의 볼을 스치는 싸늘한 한기에 민국이 재빨리 몸을 뒤로 돌렸다. 어느새 나타난 얼음 여왕이 자신을 향해 사악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공대장님!”
이어서 민국을 중심으로 3 미터 정도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얼음의 갈퀴들이 사방에서 생겨나더니 민국이 있는 자리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거 제법….’
얼음 갈퀴가 모여드는 속도는 그리 빠른 편은 아니었다. 빠르게 움직인다면 갈퀴의 틈이 좁혀지기 전까지 충분히 피할 수 있을 정도.
하지만 자신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커다란 얼음 갈퀴 대여섯 개가 동시에 압박을 해오는 상황은 이 순간을 경험하지 않은 영웅이라면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리고 저 갈퀴에 걸리는 순간 30 초라는 긴 시간을 얼음 감옥에 갇혀 팀원들이 얼음 여왕에게 당하는 모습을 눈만 뜨고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민국은 올해 레이드 자격증을 획득한 신입 영웅에 불과했지만, 결코 초보라고는 부를 수는 없는 레이드의 고인물 그것도 석유나 다름없는 게이머였다.
“이렇게 피하면 되겠네?”
민국이 평온한 얼굴로 자신을 감싸 쥐려는 얼음 갈퀴의 틈 사이로 슬쩍 몸을 빼냈다. 얼음 갈퀴가 모이기 전에 벌어진 틈 사이로만 몸을 빼내면 되는 쉬운 패턴이었다.
- 샤아아아아!
민국이 얼음 갈퀴에서 벗어나오는 것을 본 아니사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구겼다. 그리고는 다시 연기처럼 푹 꺼지며 사라지더니 탱커인 현아의 앞으로 다시 나타나 탱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민국이 팀원들을 향해 외쳤다.
“생각보다 얼음 갈퀴가 커서 당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갈퀴의 틈만 보고 빠져나오면 바로 피할 수 있어요! 어렵지 않으니까 진짜 얼음 감옥에 걸리면 크게 실망할 겁니다!”
솔직히 이런 수준의 공격 패턴은 깽깽이 발로도 피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아니사가 현아를 향해 빙결 창을 사용했다.
퍼어어어억!!!
소름끼치는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사 빙결 창을 던지기 직전에 민국의 보호막이 현아를 덮었다. 그리고 현아가 피해를 입는 것과 동시에 회복 능력이 발동되도록 일찌감치 주문을 외우기까지 했다.
덕분에 빙결 창에 얻어맞는 것과 동시에 출렁였던 현아의 생명력이 순식간에 회복이 되었다.
‘이게 전부라면 초반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쉽게 돌아가는데?’
계속해서 이런 패턴이라면 어렵지 않게 아니사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얼음 여왕에게는 공격대를 전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위험한 패턴이 아직 하나 남아 있었다. 바로 얼음 구슬이었다.
그리고…. 아니사 사용한 첫 번째 얼음 구슬은 조금 황당한 방법으로 처리가 되었다.
“어라…?!”
최적의 위치에서 아군에게 힐을 해주고 있던 민국의 등에 차가운 뭔가가 닿았다. 그리고 펑하는 소리와 함께 첫 번째 얼음 구슬이 전장에 터졌다.
“으앗, 차가워!”
얼음 구슬이 터지며 차가운 냉기 파동이 터진 곳을 중심으로 전장을 훑었다. 이어서 사방에 얼음 가루들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우연찮게 얼음 구슬을 터뜨렸던 민국의 생명력은 30 % 정도가 날아갔고, 근처에서 함께 냉기의 파동에 영향을 받게 된 현아는 10 – 15 % 정도의 생명력이 사라졌다. 다행히 바로 복구할 수 있을 정도의 피해였다.
“방금 얼음 구슬 터진 거죠?! 맞죠? 고, 공대장님! 얼음 구슬이 나올 위치를 예측하고 있었어요?!”
흥분한 유나가 활을 당기며 말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재수 없게 아니 재수 좋게 얻어걸린 것에 불과했다.
마침 아니사가 빙결 창을 사용하려는 모습이었기에 민국은 대답 대신 보호막 주문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민국의 침묵이 유나에게는 큰 착각을 불러온 모양이었다.
“여, 역시! 매번 정확한 판단으로 오더를 내리시는 것을 보면…! 공대장님은 미래를 읽고 계셨던 거야!”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연찮게 얻어 걸린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황당한 말을 듣고 다른 이들도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빙결 창 패턴을 넘기자마자 민국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극구 반박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민국의 말에 유나와 팀원들은 왜인지 모르지만 굉장히 아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제대로 된 얼음 구슬 패턴이 팀원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정예린! 1 시 방향 끝!”
“넷!”
두 번째 얼음 구슬은 정예린이 처리했다. 전투가 벌어지는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얼음 구슬이 나타났기에 정예린은 민국의 오더가 떨어지자마자 이동 스킬인 얼음길을 사용해 미끄러지듯 달려가 온 몸을 던져 얼음 구슬과 부딪쳤다.
퍼어엉!
폭발과 함께 전장에 흩날리는 얼음 가루. 곧 원위치로 복귀해서 데미지를 넣기 시작하는 그녀에게 민국이 회복 마법을 사용했다.
그렇게 두 번째 얼음 구슬까지 처리하니 너무나도 전투가 무난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전투가 끝난다면 환영의 던전이 그리고 ‘얼음 여왕 – 아니사’가 특수 개체일 리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상황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얼음 여왕 – 아니사’의 공격 패턴들이 조금씩 꼬이거나 혹은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공대장의 상황 판단 능력이 가장 중요했다.
“유나! 얼음 감옥!”
아니사가 사라지며 최유나의 뒤로 나타났다. 그것을 지적하면서 민국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싸늘한 냉기가 온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전장 어디인가에 얼음 구슬이 나타났다는 신호였다.
그리고 얼음 벽 가까이에 지름 1 미터 정도의 크기의 푸른색 구슬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까 전만 하더라도 보지 못했던 구슬인 만큼 생겨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김소정! 8 시 끝!”
원래는 최유나가 처리해야 하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사의 얼음 감옥을 피하고 있었다. 어차피 아니사의 본체가 유나를 공격하고 있었기에 김소정은 빠르게 자신의 무기를 수납하고는 곧바로 얼음 구슬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어엇?!”
그녀가 달려가는 방향에서 또 하나의 구슬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렇게 두 개의 얼음 구슬이 동시에 등장하자 소정의 눈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먼 곳에 있는 걸 먼저 처리해! 저건 내가 처리한다!”
“네, 넵!”
소정의 움직임이 머뭇거리는 것을 본 민국이 빠르게 오더를 내렸다. 반대쪽에 자리를 잡은 정예린이 반응하기에는 조금 늦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민국이 현아에게 보호막을 건 후, 그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오현아! 보호막이 깨지면 헤비 디펜스 혹은 라이프 업 둘 중 하나 바로 사용해!”
그리고 민국이 달리기 시작했다. 냉기 구슬이 터지기까지는 30 초라는 여유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힐러인 자신이 자리를 비우게 되면 현아를 회복시킬 사람이 없었다.
곧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멀리서 냉기 파동이 전장을 훑었다. 김소정이 성공적으로 얼음 구슬을 처리한 것이다.
퍼어어엉!
그리고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김소정의 생명력을 회복시킨 민국이 몸으로 구슬을 부딪쳤다.
그동안 최유나에게 얼음 감옥을 사용한 아니사는 다시 환영 이동을 통해 원 위치로 돌아와 현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빙결 창이 보호막을 부수며 현아를 강타했다.
“하아아아압!!!”
하지만 기합과 함께 자신의 생명력을 크게 높인 현아는 큰 무리 없이 빙결 창 공격을 받아낼 수 있었다. 비록 큰 고통과 함께 생명력이 크게 깎여나갔지만, 현아에게는 깎인 생명력보다 더 많은 생명력이 남아 있었다. 정타를 허용하지 않는 이상 충분히 십여 초는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얼음 구슬의 냉기 파동을 치유할 시간도 없이 다시 제자리로 복귀한 민국은 현아의 생명력을 회복시키며 영웅 패드(Hero Pad)로 파티원의 스킬 쿨을 체크했다. 김소정과 최유나는 이동 스킬의 쿨타임이 아직 남아 있었고, 정예린은 이동 스킬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일단은….’
민국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탱커인 현아를 회복시키며 냉기 파동에 영향을 받은 김소정과 자신의 생명력을 추스를 시간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얼음 구슬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가까운 위치였다.
“정예린 4 시 방향! 가까우니까 이동기 사용하지 말고 그냥 부딪쳐!”
퍼어엉!
오더에 따라 냉기 파동이 전장을 휘감았고, 민국의 회복 능력이 파동의 여파를 내리눌렀다.
* * *
‘얼음 여왕 – 아니사’ 레이드에서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는 패턴은 얼음 구슬이 동시에 나온다거나 혹은 아군이 얼음 감옥에 갇힌다거나 아니면 힐러가 얼음 구슬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니사가 탱커에게 빙결 창을 사용할 때였다.
하지만 민국은 영웅 패드를 이용해 아군의 스킬 쿨을 계속해서 확인하며 정확하게 오더를 내렸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재빠르게 판단을 내리며 위기를 넘겨 나갔다.
이보다 더 복잡한 그리고 더 많은 영웅들이 함께하는 레이드에서도 무리 없이 공대를 지휘한 바 있었기에 이 정도의 리딩 쯤은 민국에게는 연습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다. 아주 약간의 난이도가 있는 연습?
“뒈져!!!”
그리고 얼굴 가득 힘겨워하는 표정이 보이는 얼음 여왕을 향해 현아가 방패를 들고 휘둘렀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아니사의 신체 곳곳이 계속되는 영웅들의 공격으로 조금씩 깨져 나가고 있었다.
“회오리치기!”
커다란 대검에서 뻗어 나온 마력이 크게 소용돌이치며 아니사를 강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사는 꿋꿋이 버티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할 것 같았다. 얼음 여왕의 생명력은 이제 2 % 남짓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마무리 합시다! 모든 스킬 쿨 돌리고 극디일!!!”
저 멀리 얼음 구슬이 하나 생겨나기는 했지만, 민국은 구슬을 무시하며 딜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것이 터지기 전에 얼음 여왕 아니사를 충분히 끝장낼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이십 초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비명과 함께 아니사가 파편으로 변해 사라졌다.
“후우…. 이겼다!”
방어구가 서리로 뒤덮인 현아가 추위에 으슬으슬 떨리는지 몸을 양팔로 감싸며 말했다. 얼음 여왕은 쓰러졌지만 전장을 가득 메운 냉기는 여전히 팀원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곧바로 민국이 손가락을 움직여 수인을 맺었다. 따뜻한 회복의 능력이 현아의 몸을 감싸며 그녀의 방어구를 덮은 서리들을 모조리 날려 버렸다.
“땡큐땡큐. 와…! 진짜 민국이 아니, 공대장님 말대로 생각보다 쉬웠네요. 그렇죠?”
탱커인 현아는 정해진 위치에서 아니사의 공격을 막아내는 게 이번 레이드에서 맡은 역할의 모든 것이었다.
빙결 창이 날아올 때 마다 자신의 스킬 쿨타임을 계산해서 능력을 발휘하고, 힐러가 자신의 생명력을 회복시킬 때까지 버텨야 하는 탱커 본분의 역할에 충실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네? 뭐라고요?”
“쉬웠다고요? 우리가 얼마나….”
그러나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던 딜러들은 현아의 그런 말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듯 버럭 반응을 했다.
얼음 감옥을 피하랴, 아니사를 공격하랴, 얼음 구슬의 위치를 파악해서 몸으로 구슬을 깨뜨리는 등 그녀들은 여러 상황을 대처하면서 전투를 벌여 나가야 했다.
거기에 아니사의 공격 패턴이 한 번에 하나씩만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 결국 민국의 리딩이 아니었다면, 클랜 하우스에서 봤던 R’s 클랜의 3 군과 2 년차 영웅들의 공략 영상처럼 파티가 펑펑 터져 나갔을 터였다.
어쨌든 결과는 원 트(One Try). ‘화염 다리 – 이프리트’처럼 ‘얼음 여왕 – 아니사’ 레이드 또한 단번에 성공을 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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