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웅 소녀 전쟁-37화 (37/486)

EP.37 낭중지추

“저희 말이에요. 서로 호흡이 되게 잘 맞는 것 같지 않아요? 벌써 특수 개체를 두 번이나 원 트(One Try)에 잡았어요.”

본인의 실력 이상으로 수준 높은 레이드. 그런 전투에서 벌써 두 번이나 레이드를 성공한 까닭에 예린의 표정은 흥분으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영웅 학교 시절 자신이 꿈꾸던 레이드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 지분의 80 % 는 공대장님 덕분인거 같기는 한데….”

이어지는 소정의 말에 모두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확실히 민국의 리딩 능력은 정말 범상치 않은 수준이었다.

“그래도 저 역시 정예린 영웅의 말에 동의해요. 아까 전에 소정 언니, 아차! 김소정 영웅하고 공대장님이 순차적으로 구슬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어디서 그런 호흡을 맞추셨어요?”

유나가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민국이 피식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감탄할 거리가 전혀 없는 아주 기본적인 움직임이었다. 혹시 모를 위기를 대비해 김소정을 회복시키고 구슬 터뜨린 것은 센스 플레이 정도? 영웅 학교에서도 기본적으로 가르쳐 주는 움직임이었다. 뭐, 이론과 실전은 크게 다른 법이긴 하지만.

당연히 따로 호흡을 맞춘 적도 없었다. 다만, 호흡 말고 침대 위에서 다른 것을 맞춰 보기는 했었다.

“자, 그러면 전리품 상자를 확인해 봅시다!”

‘얼음 여왕 – 아니사’의 시체가 사라지고 전장의 중앙에 반짝반짝 빛나는 전리품 상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번 전리품 상자는 공대장인 한민국이 열기로 했다.

“공대장님! 예전에 전리품 상자에서 실버 티켓 뽑지 않았나요?”

“그러면 이번에는 공대장님이 열면 되겠어요. 와아아아!”

공대장도 한 번쯤 열어 봐야 한다는 팀원들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 주동자는 현아와 유나였다. 마력의 결정에 부담감을 느끼는 다른 팀원들도 찬성하는 모습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저 진짜 운이 나쁜 편입니다? 마력의 결정이 안 나올 수도 있어요.”

민국은 그런 팀원들의 의견이 별로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게 정해진 것 같았다.

가상현실 수집형 모바일 레이드 게임인 GGW 에서 세계적으로 정상을 다투는 랭커임에도 불구하고, 민국은 높은 성급의 영웅을 뽑아본 기억이 그리 많지 않았다.

덕분에 성급 높은 영웅들은 대부분 이벤트로 획득하거나 정말 애정과 노력을 쏟아 큰 폭으로 성장을 시킨 낮은 태생의 영웅들로 레이드를 진행해야 했었다.

‘이런 나의 운빨을 생각하면 마력의 결정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민국은 전리품 상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냥 팀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라도 하나 나와라!’

민국은 자신의 기대감을 최대한 버리며 내면의 평화를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인 것일까? 이러다가 상자 안에 마력의 결정이 들어 있으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전리품 상자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머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덜컹

“…….”

그리고 상자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민국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아니나 다를까 전리품 상자 안에는 마력의 결정은커녕 부활석 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스킬 스톤이나 클래스 스톤도 없었다. 그렇다. 꽝이었다.

“그래. 어차피 안 나올 줄 알았다니까? 하하하.”

이미 예상했던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슬퍼할 이유도 없었다. 진심이었다. 절로 터져 나오는 웃음이 그 증거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원하는 아이템인 마력의 결정이 나올 때까지 ‘얼음 여왕 – 아니사’를 반복적으로 때려잡으면 되었다. 무려 30 % 의 확률. 열 번 때려잡으면 그래도 평균적으로 세 번은 얻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결코 낮은 확률이 아니었다.

그렇게 민국이 자신에게 실망감을 안겨준 얼음 여왕을 향해 강렬히 투지를 불태울 때였다.

띠링

익숙한 효과음과 함께 GGW 에서나 봤었던 메시지 창이 민국의 눈앞에 떠올랐다. 이세계로 넘어온 이후, 몇 번이나 보는 메시지였기에 민국은 당황하지 않고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고생에 비해 보상이 형편없네요(/울음). 전리품 상자의 내용에 크게 실망하신 민국님의 모습을 본 카오스님이 안타까움을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이 뿌우가 민국님의 힘을 북돋아줄 퀘스트를 드리겠습니다.(/응원)

[목표] - ‘얼음 여왕 – 아니사’를 또 다시 쓰러뜨리고 전리품 상자를 직접! 열어라! 단, 파티원들을 한 명도 죽이시면 안 됩니다.

[기간] - 세 시간 내!

[보상] - 마력의 결정!

어떻습니까? 힘이 팍팍 나시죠? 막 어둠의 괴물들을 쓰러뜨리고 싶죠?(/환호) 그렇다면 지금 바로! 행동에 옮기세요! 마력의 결정이 민국님을 기다릴 겁니다! 아, 직접 전리품 상자를 여시는 것. 잊지 마시고요!》

“어라?!”

이렇게나 가성비가 좋은 퀘스트라니?! 뿌우. 내가 전에 욕했던 것을 진심으로 사과….

“잠깐만….”

다시 생각해보니 ‘얼음 여왕 – 아니사’의 전리품 상자에서 마력의 결정을 얻을 수 있는 확률은 약 30 %. 두 번 잡아서 한 개의 결정을 획득하는 것이면 평균보다 조금 더 운이 좋은 수준에 불과했다.

“쯧. 뭐야? 별로 대단한 퀘스트도 아니네. 두 개도 아니고 한 개라니….”

민국은 혀를 한 번 차고는 퀘스트 창을 닫았다. 그래도 이왕 받은 퀘스트, 당연히 클리어는 할 생각이었다. 공짜는 거절할 이유가 었다.

퀘스트에 나타난 시간제한은 세 시간. 여유가 넘칠 정도로 넉넉한 시간은 아니었다. 어째 환영의 열쇠를 모아야 하는 시간까지 포함이 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얼음 여왕 – 아니사’를 공략하겠습니다.”

그런 만큼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바로 레이드를 준비하자는 민국의 말에 그의 뒤에 있던 정예린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원 트(One Try)에 성공하면 키스를 받기로 했는데, 벌써 민국이 두 번이나 까먹은 까닭이었다.

그리고 바로 시작된 아니사 레이드에서 사고가 터지고야 말았다.

* * *

얼음 구슬의 처리도 끝났고, 탱커의 어그로도 안정적이었다. 그렇기에 정예린은 자신의 마력을 뿜어내며 신나게 보스 몬스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0 인 공격대에서 활동할 미래를 대비해 뛰어난 실력을 가진 공대장에게 자신의 데미지 능력을 어필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에 남성 영웅인 민국이 자신에게 줄 보상을 떠올렸으면 하는 마음도 조금은 끼어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정예린이 아니사의 환영 이동이 자신의 뒤로 향한 것을 빠르게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은….

“정예린!!!”

자신을 부르는 팀원들의 목소리에 예린은 큰일이라는 생각과 함께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투에 잠깐 집중하지 못한 사이, 쐐기형태의 얼음 갈퀴가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얼음길!”

스킬의 발동과 함께 예린의 마력이 출렁였다. 그와 동시에 예린의 시선이 닿는 곳까지 푸른색의 얼음길이 생겨났다. 그 방향으로만 미끄러져나간다면….

그러나 예린은 앞으로의 미래를 그리며 자신의 입술을 꽉 깨물어야만 했다. 자신을 조여 오는 얼음 갈퀴의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라면 갈퀴의 틈으로 몸이 빠져나가기도 전에 얼음 감옥에 갇힐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몸을 빼내려는 예린에게 민국이 사용한 보호막이 휘감겼다.

콰아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아니사 만들어 낸 얼음 갈퀴가 전장의 한 곳에 투명한 감옥을 만들어 내었다. 그렇게 딜러 한 명이 이탈되었다.

“30 초! 모두 침착하고, 오더에 집중합니다!”

곧바로 민국이 팀원들을 향해 외쳤다. 사고가 터졌으면 이제는 이 시간을 어떻게 무사히 넘길지 생각을 해야 했다. 이럴 때일수록 전투에 더 집중해야했다.

다행히 ‘얼음 여왕 – 아니사’ 는 높은 딜링 능력을 요구하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전투 시간을 조금 더 길게 가져가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회복 능력에 사용할 마력도 충분했다.

문제는 딜러가 터뜨려야 하는 얼음 구슬이었다. 정예린이 얼음 감옥에 갇혔으니, 김소정과 최유나 이 둘이 얼음 구슬의 처리를 도맡아야 했다.

‘쿨타임은?’

민국의 눈동자가 영웅 패드(Hero Pad) 로 향했다. 김소정과 최유나, 둘 다 아까 전에 이동 스킬을 사용한 상황이라 쿨 타임이 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레이드에서 최유나는 이동 스킬을 두 개나 가지고 전투에 임했다.

혹시 모를 이런 상황을 대비한 것이기는 했지만, 막상 일이 터지고 보니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유나! 다음 번 구슬!”

“네!”

민국의 오더에 유나가 대답과 함께 아니사를 향해 마력의 활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정예린이 갇힌 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싸늘한 냉기가 모두를 짓눌렀다.

“2 시 방향!”

구슬의 위치를 확인한 민국이 얼굴이 일그러뜨렸다. 새롭게 구슬이 생겨난 방향은 하필이면…. 정예린이 있는 위치였다. 그리고 자신의 체내에 마력을 퍼뜨린 최유나가 자신의 활을 꽉 쥐고는 스프린터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탓탓탓!

유나의 발이 닿은 곳에서 얼음 가루들이 화려하게 비산했다.

이동 스킬을 사용한 유나는 어렵지 않게 얼음 구슬이 폭발하기 전 구슬을 손으로 건드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냉기 파동의 범위에 휩쓸린 것은 유나와 정예린. 둘이었다.

‘……어?’

생명력이 줄어든 최유나와 정예린에게 회복 능력을 사용한 민국이 이마를 찌푸렸다. 얼음 감옥에 갇힌 정예린의 생명력이 회복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얼음 감옥에 갇힌 예린은 감옥의 냉기 때문인지 생명력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이런 내용은 공략 영상에는 나와 있지 않았었다. 아무래도 누락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54 %.”

그 속도를 생각해 보면 다행이 얼음 감옥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어 보였다. 예린이 감옥에 갇히기 전, 힐러의 본능에 따라 보호막을 사용했던 게 잘한 선택이었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제부터가 중요한 순간이었다. 김소정도 그리고 최유나도 이동 스킬을 사용할 수 없었다. 여기서 얼음 구슬이 이상한 위치에 나타난다면 레이드는 실패로 돌아갈지 몰랐다.

“최유나는 제자리에 고정! 김소정 딜러는 딜을 멈추고, 후방으로 살짝 물러나서 얼음 구슬 패턴을 대비하세요! 6 시 방향은 제가 맡겠습니다!”

그렇다면 얼음 구슬을 처리하기 전까지 미리 자리를 잡고 대기를 하고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이번 얼음 구슬 패턴만 무사히 넘길 수 있으면, 다음은 아니사가 환영 이동을 쓰기 전까지 구슬 패턴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음 구슬이 나타났다. 운이 좋게도 최유나가 있던 곳에서 수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찾았어요! 바로 터뜨릴 게요!”

“자, 잠깐 기다려!”

구슬을 발견한 유나가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구슬을 터뜨리려고 했다. 하지만 민국이 반사적으로 그런 유나의 행동을 저지했다. 민국의 눈동자가 줄어들고 있는 정예린의 생명력으로 향했다.

‘저게 터지면….’

강제적으로 냉기 파동에 휩쓸리게 되는 정예린은 얼음 감옥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높은 확률로 사망할 가능성이 높았다. 얼음 감옥 안에서는 회복 마법도 통하지 않는 것 같았기에 회복을 시켜줄 수도 없었다.

다행이 ‘환영의 던전’에 진입하기 전, 부활석을 사용한 터라 정예린이 사망할 경우 레이드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전투가 끝나고 나면 그녀를 부활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민국은 그녀를 죽이지 않고 이 레이드를 성공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그래야 할 이유도 있었다.

‘시간적 여유도 충분히 있어.’

비록 십여 초 정도에 불과하겠지만, 상위 레이드에서 활동하는 공대장과 힐러라면 그 정도의 시간은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야 했다.

“최유나! 구슬 옆에서 대기! 내가 신호할 때까지 절대로 건드리지 마!”

유나에게 오더를 내린 민국은 바로 회복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대상은 오현아. 마침 빙결 창이 그녀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꺄으으으윽!”

괴상한 비명과 함께 뒤로 튕겨나간 현아가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났고, 민국의 회복 능력이 현아의 상처를 회복시켰다.

그러는 동안 얼음 감옥 안에 있는 정예린의 고함이 희미하게 민국의 귀를 간질였다. 투명한 감옥 안에서 지금의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내지르는 소리였다. 아마, 자신은 신경 쓰지 말고 구슬을 처리하라는 소리일 게 분명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렇게 심각한 상황도 아니라고, 천천히 해도 돼.”

민국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정예린이 죽는다면 얼음 구슬을 처리해야 하는 딜러가 한 명 줄어들기 때문에 앞으로의 레이드가 조금 더 힘겨워질 수 있었다. 더불어 마력의 결정을 보상으로 얻을 수 있는 퀘스트도 실패했다. 예린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민국은 사실 그게 더 신경이 쓰였다.

다음화 보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