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4 라이벌?
“나 왔어.”
숙련된 운전 실력을 한껏 발휘하며 예린은 곧바로 남자친구가 사는 집으로 향했다. 자신이 얻어준 원룸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남자친구가 게임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AOS 장르라고 했던가? 열 명의 게이머가 싸우는 ‘역사 속 영웅 - 에테리얼’ 이라는 유치한 이름의 게임이었는데, 최근 남자친구가 푹 빠져 있는 게임이었다.
- 미드미드미드!
- 정글 온다! 빠져! 빠져!!!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여자들의 목소리와 상황에 따라 남자 친구가 흥분된 소리를 내며 게임을 즐기는 게 딱히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예린은 자신의 표정을 관리하며 환한 목소리로 남자친구에게 다가가 말했다.
“자기, 뭐해?”
“왔어? 게임. 잠깐만 기다려.”
남자친구의 말에 예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에 오기 전, 잠깐 들려서 사온 음식들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남자 친구가 좋아하는 치킨과 피자 그리고 보쌈이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쇼파에 앉아 리모콘을 돌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게임을 마친 남자 친구가 나와 예린이 사온 음식들을 먹기 좋게 차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일찍 왔네?”
“같이 저녁 먹기로 했잖아. 원래는 외식을 하고 싶었는데….”
“나가면 사람들 시선 때문에 불편해. 그냥 집에서 이렇게 먹는 게 낫지.”
“그, 그렇지? 그래. 나도 집에서 이렇게 먹는 게 더 좋긴 해. 둘만 있을 수 있잖아?”
왠지 기분이 나빠 보이는 남자친구의 대답에 예린이 공감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기야 남자가 워낙 적은 터라 어디만 가도 동물원 원숭이 취급이었다.
“오늘 그냥 훈련 조금 하고, 다음에 공략할 던전을 브리핑 하는 정도로 끝났어. 다행히 공대장님이 하루 일정을 미뤄주시더라.”
“공략할 던전? 【B – 9】 던전? 매번 똑같은 곳을 돈다는 그 곳이야?”
“응, 아니야. 내일은 새로운 곳으로 출발할 거야. 아, 【B – 9】 던전.”
사실은 【B – 8】 던전이지만,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클랜에서 비밀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음식 세팅이 끝났고 식탁에 앉은 예린이 남자 친구가 건네주는 식기들로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문득 드는 생각에 예린이 남자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레 시간은 비워놨지? 그 때 함께 가야 할 곳 있다고 했잖아.”
“모레? 아…. 나 그때 못 가. 약속 잡혔어.”
“어, 어어?”
젓가락으로 막 치킨을 먹으려던 예린이 움직임을 멈추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오래전부터 이야기했던 약속인데, 아무렇지도 않게 새로운 약속을 잡고는 음식을 먹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 짜증이 짙게 몰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야? 모레 영웅 학교 동기들하고 모임 있다고 했잖아? 아니, 며칠 전부터 이야기 했는데 어떻게 약속을 잡아?”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결국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 그건 미안해. 그런데 나도 모임이 잡혔어.”
“뭔데? 대체 무슨 모임이기에 내가 며칠 전부터 이야기한 것보다 그게 우선인 건데?”
“……그건 왜? 왜 그런 걸 꼬치꼬치 캐물어? 네가 영웅 학교 동기들하고 모이는 것처럼 나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거든? 그런 건 터치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언성을 높이는 예린을 향해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코웃음을 쳤다. 말로는 미안하다지만 행동을 전혀 그렇지 않은 남자의 모습에 예린은 화가 난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원래였다면 이러한 상황이라도 감정을 숨기고서 자신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남자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애를 썼을 것이다. 이제까지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그만큼 내일 모레 있을 모임은 그녀에게 굉장히 중요한 모임이었다.
- 설아? 걔 메모리아 들어갔잖아. 너 R’s 들어간 거 보고 엄청나게 비웃던데? 메모리아보다 R’s 가 랭킹이 더 낮아서 그런가 봐.
- 하기야 영웅 학교 시절 너는 5 위권의 성적이었지만, 걔는 10 위권에 간신히 턱걸이 했을 정도잖아. 그런데 입단한 클랜 랭킹은 메모리아 더 높으니 기분이 좋기도 하겠지.
- 걔 남친 데리고 온다는데? 클랜에서 만났다나? 카르텔에 들어간 것 같은데, 남자가 설아를 꽤 마음에 들어하나봐. 하기야 고 년이 영웅들 중에서도 유독 예쁘게 생기긴 했지.
- 뭐? 너도 남자친구 데리고 온다고? 와! 그 날 장난 아니겠는데? 스타일에 힘 좀 잔뜩 주고 와. 남자 친구도 멋지게 꾸며주고. 설아 고년이 뻐기는 건 나도 보고 싶지 않으니까. 야야. 내가 돈 좀 보태줄게. 남자 친구 명품으로 완전 둘러 버려. 그냥 기를 팍! 죽여 버리라고.
내일 모레 있을 동기 모임에는 그녀의 영웅 학교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재수 없는 년이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남자친구까지 동원한 채 말이다. 그 말에 질 수 없었던 예린 또한 자신도 남친을 데리고 간다고 동기들에게 선언까지 했었다.
“후우. 화낸 건 미안해. 그런데 어떻게 안 될까? 나 모레는….”
“됐어. 넌 이런 기분에서 꼭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야겠니? 다음에 이야기 하자.”
“…….”
제기랄. 남자 친구의 말에 예린은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예린은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쫓기듯 남자 친구에 집에서 나와야만 했다. 자신의 어이없는 상황에 한숨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쳐 올랐지만, 어떻게 풀 방법이 없었다.
“에이, 씨발.”
뭐, 이런 일이 한 두 번은 아니었으니까. 며칠 쯤 지난 후에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비싼 물건을 선물해주면 화가 풀리리라.
“개새끼. 그렇다고 해도 하필 그 날 약속을 잡을 게 뭐람. 내가 몇 번이나 이야기를 했는데….”
벌써부터 혼자 모임에 참가하는 자신을 비웃는 설아의 얼굴이 예린의 머릿속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친한 동기들에게도 할 말이 없었다. 그 상황이 상상만으로도 짜증이 나는 까닭에 절로 주먹이 꽉 쥐어지고 있었다.
“아, 진짜 그년 쳐 웃는 꼴은 보고 싶지 않은데….”
그렇다고 모임을 빠지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가뜩이나 메모리아와 R’s를 비교하면서 자신을 비웃던 년이었다.
영웅 학교 성적은 자신보다도 5 등이나 떨어지는 주제에 말이다. 그리고 고민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일까? 다음날 있는 【B – 8】 던전인 ‘사형자의 무덤’ 레이드에서 예린은 전에는 없던 실수를 연발하고 있었다.
“정예린! 차단이 늦어!!!”
“조, 죄송합니다!”
처형의 낫을 사용하는 세르탄의 공격을 자신이 차단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머리에 모임 생각이 계속해서 끼어드는 바람에 예린은 제때 세르탄의 스킬을 차단하지 못했고, 처형의 낫이 현아의 휘감고 지나갔다.
곧바로 공대장 한민국의 힐이 이어지면서 출렁였던 탱커의 생명력이 다시 원상 복구가 되었다.
‘아이씨 진짜….’
자신의 실수에 예린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가장 기본적인 것도 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고 있었다. 상황이 빠르게 안정화되고 민국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향했다.
“정예린 영웅, 차단 자꾸 늦습니다. 집중해요. 어려운 놈 아니잖아요?”
“죄송합니다!”
공대장의 충고에 예린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필사적으로 자신의 마력을 사용해 몬스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푸른색의 마력이 일렁이며, 세차게 방출된 얼음의 화살이 전방으로 쏘아져 나가며 세르탄을 공격했다.
그렇게 몇 번을 연달아 공격을 명중 시켰을까? 자신의 영웅 패드를 확인하며 조금이라도 더 데미지를 넣기 위해 예린이 정신없이 마력을 끌어올릴 때였다.
- ……닥!
쩌저정!
귀를 스치고 지나가는 공대장의 목소리와 함께 자신의 몸을 휘감는 쇠사슬을 느끼는 순간 예린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레이드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바닥 피하기를 의식하지 못하고 세르탄의 스킬인 처형 사슬에 그대로 몸을 내줬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몸을 강하게 짓누르는 고통에 예린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악!!!”
곧바로 민국의 보호막이 예린의 몸을 감싸며 쇠사슬의 고통을 줄여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쇠사슬에서 벗어나 기침을 콜록이는 예린에게 민국의 회복 마법이 사용되었다.
‘아, 진짜 망했다….’
자신의 몸을 치유하는 따뜻한 기운과는 정 반대로 예린은 가슴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벌써 커다란 실수를 두 번이나 범했다. 그래도 세르탄의 정면에 섰던 것이 아니라 처형의 낫 공격에 탱커와 함께 얻어맞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삐익!
▶ “사형자의 무덤”의 토벌을 완료했습니다.
▶ 영웅 패드에 업적 포인트가 1 주어집니다.
▶ 영웅 도감의 횟수가 갱신되었습니다.
원트(One Try). 여러 실수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팀 GGW 는 어렵지 않게 처형자 세르탄을 처리할 수 있었다.
“【B – 8】 도 별 거 아닌데? 4 등급 몬스터라도 쫄았는데, 어렵지 않게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어.”
쓰러진 세르탄의 사체를 보며 현아가 호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현아의 모습에 민국이 피식 웃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Gear Score – 200】 의 장비로 모든 부위를 맞춘 현아에게 세르탄의 공격은 크게 아프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보다 장비 스코어가 90 이 떨어지는 탱커도 버틸 수 있다는 데 말이다.
하물며 힐러가 고인물인 자신이었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딜러진 아니, 정예린의 실수가 유독 많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모두의 스펙이 높아진 것 때문에 던전의 공략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아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계속해서 실수를 한 것 때문인지 예린은 레이드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해서 민국을 포함한 팀원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하지만 민국은 잡으면 무조건 장땡인 것처럼 그녀의 실수를 크게 탓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처음 경험하는 몬스터인 만큼 공략에 익숙해지는 시간이라 생각하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예린의 실수 같은 게 아니었다.
《카오스님이 주시하시는 영웅다운 대단한 활약! 이 뿌우가 민국님의 <【B – 8】 난이도의 던전을 클리어 하라!> 퀘스트 성공을 축하드립니다. 바로 보상을 확인하세요!
[목표] - ‘【B – 8】 난이도의 던전을 클리어 하라! - 달성!
[보상] - 마지막 보상 상자에서 골드 티켓 두 장!(누구나 상자를 열어도 상관없습니다.》
퀘스트의 완료를 확인한 민국이 옆에 있던 현아를 쳐다보았다. 4 등급 몬스터가 주는 동색의 전리품 상자를 기다리며 그녀는 보상이 기대가 되는 모양인지 연신 손바닥을 비비고 있었다.
“……너 말이야. 모든 장비를 장비 스코어 200 짜리로 맞췄는데, 전리품 상자의 보상이 중요해? 【B – 8】 에서는 기껏해야 120 짜리가 나온다며?”
“응? 당연하지. 전리품 상자는 까는 것 자체가 재미있는 거야. 그리고….”
“그리고?”
“진짜 재수 좋으면 티켓 나올 수도 있잖아? 골드 티켓.”
골드 티켓을 기대하는 현아의 모습에 민국의 얼굴에 장난기가 맴돌았다. 퀘스트의 보상 때문에 이번 전리품 상자는 누가 까던 골드 티켓 두 장이 무조건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러게요. 골드 티켓이 나오면 좋겠다. 장비 스코어 200에서 230 까지 나온다면서요? 그 정도면….”
“【B – 5】 까지는 장비 교체 없이 무리 없이 돌 수준이지.”
“우와아. 진짜 나오면 좋겠다.”
다들 현아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어차피 2 성 영웅이 되면서 경매장에서 좋은 장비를 미리 구입한 터라 세르탄의 전리품 상자에서 얻을 수 있는 120 짜리의 장비는 크게 필요한 편이 아니었다. 모자란 부위가 나오면 좋겠지만, 그런 부위가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다.
‘어디 한 번 놀려볼까?’
그리고 민국은 자신이 상자를 열어서 골드 티켓을 뽑은 후에 현아를 놀려 볼 생각이었다. 까는 건 자신이 운이 별로 없으니 다른 사람을 시키고 말이다. 그때였다.
“고, 공대장님!”
팀원들 사이에서 조용히 있던 정예린이 번쩍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제가 전리품 상자를 열어서 골드 티켓 한 장 뽑으면 소, 소원 좀 하나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그리고는 박력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굉장한 기세가 담겨 있던 터라 민국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무조건 소원 들어주는 각인데…. 민국은 순간 예린의 소원이 스킨십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도 그녀와 뽀뽀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하고 몇 번을 계속해서 넘어가다 보니 이제는 먼저 말을 꺼내기가 어색했다.
하지만 이제는 슬슬 예린도 카르텔에 넣을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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