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5 라이벌?
“그러면 이번 전리품 상자는 정예린 영웅 당첨!”
민국이 고개를 끄덕이자 현아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대장의 허락도 떨어졌으니 다들 정예린이 상자를 여는 것에 찬성했다.
‘제발! 제발…!’
전리품 상자로 걸어가면서 예린은 상자 안에 골드 티켓이 있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그런 까닭에 뒤에서 민국이 어깨를 으쓱이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선배 영웅들의 수많은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웅 도감의 정보에는 【B – 8】 던전에서 골드 티켓이 등장할 확률은 약 0.5 % 라고 적혀 있었다. 굉장히 낮은 수치였다.
‘반드시 뽑아야 해.’
하지만 예린에게는 티켓을 꼭 뽑아야 할 사정이 있었다. 극히 낮은 확률에 도박을 할 만큼 간절한 사정이었다.
“나쁜 자식….”
예린이 분노가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도저히 설아가 자신을 비웃는 것을 감당할 수 없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는 어젯밤 다시 남자 친구에게 영웅 모임에 함께 갈 수 있냐고 부탁을 했었다. 영웅의 자존심까지도 내다버린 부탁이었다. 그러나 남자친구는 그런 그녀의 메시지를 읽고 그대로 씹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예린은 티켓을 뽑게 된다면 한민국 공대장에게 내일 있을 강남 영웅 학교 44 기 모임에 함께 가달라고 부탁을 할 생각이었다. 부탁을 할 정도로 친분이 있는 남자가 민국밖에 없었다.
영웅 학교 시절 첨예하게 다퉜던 라이벌인 설아가 자신을 무시하는 모습만큼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모임을 빠질 수도 없었다. 다른 이들에게 우스갯거리가 될 게 분명했다.
‘제기랄. 그 새끼만 아니었어도….’
괜히 공대장에게 이런 말까지 해야 하는 상황을 만든 남자친구가 크게 원망스러워졌다. 하지만 그것도 골드 티켓이 나올 때의 이야기였다. 그렇게 크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예린은 전리품 상자를 열었다.
“어, 어어?!”
상자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예린은 숨이 멎는 것과 같은 충격을 받을 수 있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티켓 두 장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그 옆에는 영롱한 빛을 내뿜는 부활석도 하나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는 전리품 상자의 내용물에 예린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저번에는 오현아 영웅이 대박을 터뜨리더니, 이번에는 정예린 영웅이 대박을 내네?”
“다들 원기옥이라도 모으시는 거예요? 와….”
팀원들도 다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0.5 % 의 확률인 골드 티켓이 무려 두 장이나 상자에 들어 있었다.
결과를 알고 있던 민국도 얼굴에 기쁨과 놀람이 함께 공존해 있었다. 골드 티켓 때문은 아니었다. 부활석이 들어 있어서였다. 운이 좋아도 저렇게 좋을 수 있나?
“한 장도 아니고, 두 장이네. 이거 제대로 들어줘야겠는데? 그럼 소원이 뭐예요?”
민국이 보상의 감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예린에게 물었다. 티켓을 뽑았으니 이제는 소원을 들어줄 차례였다. 뭐, 대충 예상되는 것들이 있기는 한데….
“내, 내일 저랑 함께 영웅 모임에 가주세요!”
예상을 벗어나 버렸다.
귀를 쩌렁하게 울리는 예린의 고성에 민국이 몸이 움찔했다. 영웅 모임? 의문에 찬 민국의 눈동자가 현아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녀도 예린이 내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다행히 유나가 아는 척 입을 열었다.
“와! 그러고 보니 기수들 모임이 열릴 때가 되었네요. 45 기 선배님들과 우리 기수는 아직 졸업한지 얼마 안 돼서 내년에 한다던데…. 정예린 영웅은 강남 44 기셨죠?”
유나의 말에 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민국에게 향해 있었다. 아직 민국의 대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남자 친구랑 갈 생각이었는데….”
“와?! 남자 친구가 있었어요?”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치는 현아의 말에 예린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로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자랑을 할 것도 아니었다. 카르텔이 있는 것도 아닌데, 관계가 영 미적지근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긴 한데…. 요즘은 그냥 그래요. 사귀는 건지 아니면 카르텔 관리를 당하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이번에 영웅 학교 모임에 같이 가자고 했는데, 아니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자신의 일에 관심을 보이는 동료들이 모습에 흥분한 모양인지 예린은 평상시보다도 훨씬 많이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약속을 무시당한 것을 물론이고, 오늘 실수를 연발했던 이유까지 예린은 쉴 새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이야기를 듣는 여성 영웅들은 힘이 잔뜩 들어간 얼굴로 그녀의 말에 공감하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민국은 뒤에서 곤란한 웃음만을 지을 뿐이었다. 저들의 대화에 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하나 만큼은 공감할 수 있었다. 예린이 남자친구는 정말로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와, 진짜 나쁜 사람이네요. 어쩜 사람이 그렇지?”
“내 생각에는 남자 친구가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카르텔 관리 당하는 거 아니야? 헤어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카르텔은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성 비서를 몇 번 해본 내 경험에 의하면 그건 분명 거짓말이 틀림없어. 혹은 있는 걸 숨기고 있는 걸 거야. 그게 아니면 너를 좋아하지 않는 거지.”
“영웅이라 돈은 좀 있으니까 물주 취급을 하는 거겠지. 남자 친구 집도 네가 구해줬다며?”
그렇게 정예린의 남자친구를 씹어대던 여성 영웅들의 시선이 민국에게로 향했다. 어쨌든 이렇게 말은 해도 민국이 원해야지만 모임의 파트너로 그를 데려갈 수 있는 것이었다.
누군가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조용해진 분위기에 민국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왠지 안 가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모임이 정확히 어떤 건지 모르겠는데, 동창회 같은 건가요? 밥만 먹고 대충 이야기를 나누고 오면 되는?”
민국의 말에 예린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네! 장소가 호텔이라 음식과 디저트는 굉장히 좋을 거예요. 혹시나 불편한 일이 생기면 제가 전부 커트 할게요. 그러니….”
“알았어요. 그럼 내일 한 번 갔다 오죠.”
“와아아아아아!!!”
민국의 말에 예린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냥 남성도 아니고 무려 영웅이 자신의 파트너였다. 다 죽었어!
예린을 바라보는 민국도 웃는 얼굴을 했다. 그 역시 모임 장소가 다른 곳도 아닌 호텔이라는 사실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 * *
다음 주면 인류의 가장 큰 기념일 중 하나인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최근의 날씨는 겨울답지 않게 기온이 굉장히 포근했다. 따뜻한 거리를 오가는 몇몇 커플들은 올해가 가기 전에 하얀 눈이 내리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올해가 가기 전까지 눈 소식은 없었다.
그런 소수의 커플과는 달리 많은 솔로 여성들은 올해는 꼭 눈이 내리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특히 현역으로 복무하는 여성 군인들은 경우가 더했다. 그녀들에게 있어서 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개 같은 쓰레기일 뿐이었다.
● 남의 나라 기념일을 왜 우리가 챙기냐?
● 아니, 그래도 크리스마스에 남자랑 있는 시간이 1 시간은 돼야지 않냐? 그래서 교회 간다.
└ 아직도 교회에 남자가 있다고?
└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실 거임…….
● 오늘도 내 거기 내가 만지면서 놀아야겠다.
● 크리스마스 솔로 영웅들끼리 1 등급 던전 가실 분 찾아요! 아주 소멸될 때까지 돌 예정입니다.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였다.
백여 년 전이야 크리스마스가 모든 이들 그리고 커플들에게 축복받는 기념일이었지, 어둠의 괴물들이 지구를 휩쓴 지금은 수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짓밟고 슬프게 하는 날에 불과했다.
그리고 오늘 서울의 유명한 특급 호텔에서는 강남 영웅 학교 44 기의 모임이 열릴 예정이었다. 인류를 지키는 영웅들의 모임인 만큼 호텔은 모임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인해 성탄절 아침부터 분주했다.
거기에 영웅들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선물꾸러미가 호텔로 몰려들었다. 그만큼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영웅들은 많은 사람들의 우상이었다.
“자랑스러운 강남 영웅 학교 44 기 모임에 참여해 주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앞으로의 활동을 기대하면서….”
강남 영웅 학교 44 기의 회장의 연설은 간단하게 끝이 났다. 굳이 길게 말을 해봤자 주의 깊게 들을 사람도 없었다. 다들 소속 클랜도 다르고, 몇몇은 외국에서 활동을 하는 터라 연설의 의미가 없다시피 했다.
당연히 모임에 참여한 영웅들도 학창 시절 친했던 동료나 같은 클랜에서 활동하는 영웅들 위주로 모여 자리에 앉았다.
“정말로 왔네?”
“어머, 저 사람이 그 소문의 남자 친구야? 잘생겼는데? 영웅인가?”
모임 회장에서 케이크와 차를 즐기고 있던 여성 영웅들이 화려하게 꾸미고 나온 금발의 여인을 보며 수군대었다.
아무리 남성들의 숫자가 적다해도 어둠의 괴물들을 상대하며 인류를 수호하는 여성 영웅들의 모임. 회장에 있는 사람들의 반 수 정도가 남성 파트너와 함께하고 있었다.
하지만 회장을 돌아다니는 여러 남성들 중에서도 금발의 여인과 팔짱을 끼고 있는 젊은 남성은 회장에 모인 많은 영웅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만큼 외모가 훤칠했기 때문이었다.
“후후.”
그런 시선들을 즐기며 금발의 여인, 설아는 한쪽 입 꼬리를 올렸다.
이 모임에서 자신보다 많은 시선을 받는 이는 없었다. 동기 회장과 함께한 남성도 젊은 축에 속했지만, 외모로 따지자면 자신의 파트너가 한 수 위였다. 자신의 출중한 외모를 이용해 이 남자를 파트너로 데리고 온 것은 역시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뿐인가? 그녀에게는 메모리아라는 랭커 클랜이라는 배경도 있었다.
“영웅은 아니라고 하던데…. 잘생기긴 했네. 연예인인가?”
“우리랑 같은 계열이라고 들었어. 메모리아의 지원팀장이라는데, 소문이 꽤나 좋은가 보더라고.”
그렇게 설아가 다른 영웅들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우월감을 느낄 때 회장에 자리하고 있던 동기 영웅인 은별과 지윤도 설아를 주시하고 있었다.
설아가 훈훈한 남자와 대동한 사실이 부러워서는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들의 절친인 정예린과 지극히 사이가 좋지 않은 라이벌이기 때문이었다.
“제길…. 메모리아 정도면 지원팀 직원에도 남자가 있구나. 우리 클랜은 비서실에서나 볼 수 있는데….”
은별의 말에 지윤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22 년의 시간동안 강제적으로 솔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비, 비서실? 혹시 쉬는 시간마다 막 그렇고 그런 거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지. 잠깐, 그러고 보니 전에 내가 실수를 해서 공대장하고 같이 단장실에 보고를 하러 갔거든?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압축하지 말고 아주 길게 늘여서 말하는 게 매너인거 알지?”
여자가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말처럼, 오랜만에 본 동기들끼리의 요란한 수다가 이어졌다. 좋은 차와 향기로운 커피 그리고 달콤한 디저트와 호텔이라는 고급스러운 분위기까지. 여성들이 수다를 나눌 모든 준비가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
“아, 진짜 옆구리도 시린데 나와 만나줄 남자 어디 없나.”
“있겠어? 아직 안 태어났을 걸?”
“그러는 너는? 너도 마찬가지잖아. 아, 제길. 갑자기 마력학 교수님 생각나네.”
포크로 디저트를 찍던 지윤이 은별의 말을 받았다.
“그, 그…. 우리 입학할 때 마력 강의하면서 남자친구랑 놀러가는 사진만 있으면 출석 인정해 주신다고 했던 그 분?”
“응. 결국 마력학 수업이 모두 끝날 때까지 수업을 빠지고 놀러갔던 동기는 아무도 없었지.”
“기억난다. 교수님은 몇 번이나 농담이 아니라고 했는데…. 진짜 우리도 농담이 아니었지.”
두 여인이 동시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만큼 이십대의 꽃다운 나이에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 친구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운이 좋아야 카르텔에 들어가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예린은 언제….”
중견 클랜에서 활동하는 신입 영웅의 수입으로는 먹기 힘든 디저트들을 흡입하며 은별이 자신의 친구를 입에 돌릴 때였다.
아……!
와아…?!
갑자기 입구 쪽에서 일제히 탄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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