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6 관계의 복잡함
팀원들과 함께 클랜 하우스에 도착한 민국은 바로 스케줄 표를 확인했다.
R’s 클랜의 1 군은 오늘 던전 공략 계획이 잡혀 있었다. 그리고 2 군과 3 군은 쉬는 모양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클랜 하우스의 훈련장은 제법 한산했다. 기껏해야 네, 다섯 명 정도만이 개인 훈련을 하는 모습이었다.
“다들 넓게 자리를 잡아. 아! 일직선으로는 서지 마. 켈림의 대검 올려치기에 두 명이 동시에 하늘을 나는 경험을 하게 될 테니까. 전장의 끝까지 날아갔다가 떨어지면 미친 듯이 아플걸?”
“현아! 너는 따로 훈련해야 돼. 켈림 레이드의 핵심은 탱커의 탱킹 능력에 달려 있어. 전방 좌우 휘두르기와 대검 올려치기와 같은 공격은 무조건 피하거나 막아낼 수 있어야 해.”
“그러면 일단 홀로그램으로 훈련을 해 볼게요.”
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민국이 본격적으로 ‘늪의 수호자 – 켈림’ 공략과 관련해 시뮬레이션 훈련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누군가가 훈련장에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클랜 관계자였다.
그리고 민국을 발견한 클랜 관계자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어쩐지 다급해 보이는 발걸음이었다.
“한민국 공대장님.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손님이 찾아오셨는데….”
“손님이요?”
갑자기 자신을 찾아와 말하는 클랜 관계자의 행동에 민국은 얼굴을 찌푸렸다. 팀 훈련을 방해한 것은 둘째 치더라도 자신을 찾아올 손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기자인가 싶어서 물어봤지만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저, 저기….”
탐탁지 않은 민국의 얼굴에 클랜 관계자가 쭈뼛거리더니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만약 한민국 공대장이 클랜을 찾아온 손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클랜 사무실은 난리가 날 게 분명했다. 아니, 그 문제아가 직접 이곳으로 들이닥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곤란한 것은 자신들이었다. 울상에 가까운 얼굴로 관계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보, 본사 쪽에서 나오신 높은 분입니다.”
“본사요? 로즈 그룹? 그런 사람이 왜 저를?”
그렇게 묻기는 했지만, 본사의 사람이 자신을 만나려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Tv 만 틀면 자신의 얼굴이 나오는 판국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약속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건 조금 실례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었다.
“저희도 그건…. 다만, 찾아오신 분이 그룹의….”
울상에 가까운 관계자의 말을 들으며 민국은 낮게 신음했다. 아까부터 본사에서 찾아온 사람을 입에 올리는 것을 어려워하더니만 관계자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무려 로즈 그룹의 후계자였다.
그것도 클랜의 구단주를 역임하는 인물. 어렵게 느끼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조수영이라고 했던가?’
로즈 그룹의 3 세. R’s 클랜의 구단주. 그녀의 이름과 평판에 대해서는 민국도 인터넷을 통해 본 적이 있었다.
● 조수영, 이 개 쌍년야! 제발 스쿼드에 투자 좀 해라! 한국을 대표하는 랭커 클랜 1 군이 【A – 4】 도 제대로 공략을 못하는 게 말이 되냐?!
● 조수영하고 그리폰의 조혜진하고 비교하면 누가 더 우위임?
└ 그래도 수영이 언니는 애들을 동남아에 팔아먹지는 않았어요.
└ 조수영은 관심이 없거나 무능한 거고, 조혜진은 진짜 쌍년이고. 그런데 조수영도 클랜 자금 삥땅쳤다는 이야기가 있음.
● 조수영 구단주의 장점. 클랜 운영에 터치를 안 함. 단점. 클랜에 너무 터치를 안 함. 그냥 아예 관심이 없고, 지원도 없어.
R’s 클랜을 응원하는 팬들 사이에서 조수영의 평가는 상당히 좋지 않은 편이었다. 클랜의 운영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게다가 그녀가 구단주가 된 이후 로즈 그룹의 지원도 형편없이 줄어들어서 단장인 현정이 굉장히 고생을 하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팬들에게 조수영은 죽일 년의 구단주였다.
“……후우.”
솔직히 그런 인물을 딱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만나는 봐야 할 것 같았다. 그쪽에서도 찾아온 이유가 있을 테고, 클랜 관계자의 표정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자신이 나서지 않는다면 고생을 하는 것은 이들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단장인 오현정도 클랜 하우스에 나오지 않은 까닭에 사무실에 있는 인원들이 본사의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훈련은….”
“나는 어차피 켈림의 공격만 막아내면 되는 거지? 타이밍을 잡으려면 홀로그램 훈련만 빡빡하게 돌려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아.”
“교대 플레이는 저희들이 알아서 연습하고 있을 게요. 영웅 학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훈련을 해 본 적이 있어서 대충 어떻게 하는지는 알고 있어요.”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와 같은 멘트는 내뱉는 팀 동료들에게 민국은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훈련을 막 시작하려던 참이라 땀 같은 건 나지 않았기에 씻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후우. 갑자기 웬 손님이람.”
“죄송합니다. 저희들도 본사에서 사람이 나오는 경우는 정말 드문 일이어서….”
그렇게 팀원들과 헤어지고 난 민국은 곧바로 2 층으로 향했다. 외부 손님을 모시는 응접실이 그 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사 쪽에서 나온 사람이라 그런지, 여러 개의 응접실 중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장소를 안내한 모양이었다.
똑똑똑
예의상 세 번의 노크를 하고 민국은 그대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세 명의 여성이 갑자기 조용해지더니만 민국에게 시선을 향했다. 정장을 입은 단발머리의 여성은 비서로 보였고, 그 뒤에 서 있는 여성은 경호원으로 생각이 되었다.
그리고…….
처음 만난 R’s 클랜의 구단주, 조수영의 이미지는 솔직히 말해 그냥 그랬다. 뭔가 재벌과는 어울리지 않는 양아치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어디서 껌 좀 많이 씹어본 일진 같은 느낌?
옅은 금발의 머리는 귀엽게 보이는 그녀의 얼굴상과는 제법 잘 어울렸다. 그러나 귀에 박혀 길게 늘어진 피어싱들은 재벌 3 세의 이미지에는 어울리지 않게 저렴한 티가 나는 느낌이었다. 뭐, 재벌을 만나본 적이 없으니 이런 생각 자체가 편견일수도 있겠지만.
‘다른 곳에도 했으려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민국은 곧 생각을 지워버렸다. 이런 자리에서 할 생각은 아니었다.
“한민국입니다.”
뭐라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 그냥 가볍게 이름만을 밝혔다.
“조수영이예요. 내 소개는 안 해도 되겠죠?”
“네,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로즈 그룹의 3세. R’s 클랜의 구단주. 이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이 되었다. 돈이 많은 재벌 3세라 그런지 가수에게 관리라도 받는 건가? 조수영의 목소리는 굉장히 예뻤다.
“잘됐네. 저기 앉아요. 그리고 너는 차를 좀 가져와. 어떤 거?”
“입맛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어서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클랜 하우스에 비치된 차 중 제일 괜찮은 걸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민국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서로 생각되는 여인이 바로 탕비실로 향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은 민국이 조수영을 향해 용건에 대해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만나자마자 갑자기 용건을 꺼내는 것 자체가 상대에 대한 실례이기 때문이었다. 과정이야 어쨌든 이렇게 만나게 된 이상 최대한 괜찮은 이미지로 보이고 싶었다.
자그마치 R’s 클랜의 구단주가 아닌가? 잘만 보이면 떡고물이 흘러나올지도 몰랐다. 부활석이라던가 하는 값 비싼 아이템 말이었다. 그리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조수영이었다. 서클 렌즈라도 꼈는지 민국을 바라보는 그녀의 금색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클랜 활동은 어떤가요?”
“아직 입단한 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좋은 것 같습니다.”
사실 지원이 부족한 것 같다는 말을 꺼내려다가 말았다. 그런 이야기는 자신이 아니라 단장인 오현정이 해야 할 말 같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자신이 말했다가는 오현정이 욕을 먹을 가능성도 컸다.
“뉴스에서 귀가 따가울 정도로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우리 클랜의 기대되는 유망주라죠?”
“아직 부족합니다. 아마 【B – 6】 난이도의 던전 공략을 성공한 것이 큰 화제여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안 그런가요?”
이야기를 하던 도중 비서가 차를 가지고 왔고, 민국은 뜨거운 녹차를 한 모금씩 마시며 조수영의 질문에 답을 이어나갔다.
그냥 방송에 나온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아무 생각 없이 만나고 싶었던 건가? 아니면 재벌의 호기심? 민국을 향한 조수영의 질문은 굉장히 평범했다.
주로 클랜 생활, 가족 여부와 같은 민국의 신변잡기에 대한 것들만 묻고 있었다. 딱히 비밀로 할 것도 아니었기에, 민국은 그런 수영의 질문에 거리낌 없이 입을 열었다. 다만, 가족 이야기를 할 때는 조금 더듬거려야만 했다. 원주인의 기억을 떠올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도중 민국은 문득문득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수영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먹잇감을 바라보는 야수와도 같은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뭐, 그런 것에 겁을 먹을 이유는 없었기에, 민국은 그런 수영의 시선이 느껴질 때 마다 가볍게 웃어 넘겼다.
“그러면 카르텔은 몇 명?”
“카르텔 말입니까?”
갑작스러운 수영의 질문에 민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르텔이라면 자신의 하렘을 뜻하는 말일 텐데….
어느새 질문을 던지는 수영의 말도 짧아져 있었다. 하지만 질문의 내용 자체가 더욱 충격적이었던 터라 민국은 그에 대해서는 기분이 나쁘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거기에 재벌 3세라는 상대방의 위치에 자연스럽게 넘어간 면도 없잖아 있었다.
‘이런 걸 대놓고 이야기해도 되는 건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세계의 어메이징 함을 떠올리면 이런 것을 밝히는 것 자체가 아무것도 아닌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과 함께 민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명입니다.”
“와. 그 얼굴로? 흐응…. 굉장히 적네. 그건 마음에 든다. 참,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식사라도 할까요?”
“식사 말입니까?”
민국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곤란했다. 이미 선약이 있기 때문이었다.
재벌 3 세와의 대화가 신선하기는 했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굳이 선약을 깰 정도로 그녀와의 만남을 길게 이어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 정도면 충분히 예의를 갖춘 것 같았다.
더욱이 오늘은 꼭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소정과 현아와 함께 밤을 보내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딸아이가 있는 까닭에 민국의 카르텔에 속한 여자 중에서 가장 관계를 적게 한 여자가 소정이었는데, 마침 오늘 시간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운이 좋게도 소정과 친분이 있는 클랜 소속 영웅이 오늘 자녀와 가족여행을 가는데, 혼자인 그녀의 딸을 안쓰럽게 여겨서 같이 데리고 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오늘은 저녁부터 뻐근하게 허리를 돌릴 예정이었다.
* * *
“까였네?”
수영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금방 넘어올 줄 알았는데, 역시 남자 영웅은 남자 영웅이라는 건가?
그녀는 천천히 다리를 꼬아 올리면서 문 밖을 나간 한민국의 얼굴을 떠올렸다. 남자 영웅답게 수많은 남자들을 만나봤던 자신의 가슴마저도 진정시키기 버거울 정도의 압도적인 외모였다.
더불어 이제껏 그녀가 작업을 걸다가 실패했던 그 어떤 남자 영웅보다도 훨씬 매력적이었다. 특히나 자신과 같은 최상위 계층의 여성 앞에서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다른 남자 혹은 남자 영웅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태도였다.
“무슨 약속인지 파악했어?”
수영이 손가락을 딱 튕기자 인 이어를 통해 무언가를 듣고 있던 비서가 재빨리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조금 전에 클랜 하우스 앞에서 같은 팀원인 오현아와 김소정을 만났다고 합니다. 함께 움직이는 것을 보면 그 둘과의 약속으로 생각됩니다.”
“목적지는?”
“김소정의 차를 타고 함께 움직이는데, 아무래도 본인들의 집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오늘 김소정의 딸이 2 박 3 일로 여행을 떠난 것이 파악되었습니다.”
“흐응.”
여자 영웅 둘과의 약속이라…. 분명 평범한 약속은 아니겠지? 침대 위에서 짐승처럼 돌변하는 한민국의 모습을 떠올리니 수영은 절로 몸이 흥분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그 즐거움을 누릴 시간이 아닌 모양이었다.
“한민국 공대장에게 필요한 게 뭔지 전부 알아오도록 해. 돈이든 아이템이든.”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수영은 몸을 일으켰다. 클랜 하우스를 방문한 목적은 전부 달성했다. 어머니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는 R’s 의 클랜 하우스를 방문하는 것은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괜찮은 남자를 만나서인지 오늘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자신이 고깝게 여기는 어머니의 충실한 개였던 단장도 없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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