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4 이상한 내기
[선배님의 말씀대로 영웅의 임무는 어둠의 괴물을 물리치는 게 맞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번 달에만 30 회가 넘게 던전을 클리어 했습니다. 난이도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저희들의 수준에는 맞는 던전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국민들을 위한 이벤트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5 인 팀. 동일 파티 구성(근거리, 원거리 통일입니다. 단, 무기는 상관없습니다), 동일 장비(평균 【Gear Score】 만 같으면 됩니다), 성급 관계없이 누가 빨리 【B – 5】를 완벽하게 그리고 빨리 클리어 하는지 실시간으로 중계를 하는 겁니다. 어둠의 괴물도 쓰러뜨릴 겸 말이죠. 아, 【Gear Score】 는 185 정도로 맞춰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저희 팀 평균 스코어라서요. 200까지도 괜찮습니다.]
[던전은 선배님께서 정하셔도 됩니다. 후배로서 아무 곳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진짜로 올리게?”
한참 만에 입을 연 현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로 민국이 이렇게 글을 올리게 되면 인터넷은 난리가 날 게 분명했다.
인터넷뿐인가? 영웅 커뮤니티도 다시 한 번 폭발할 게 틀림없었다. 기수 문화가 강한 영웅 조직에서 새파란 후배가 까마득한 선배에게 도전하는 꼴이기 때문이었다.
“왜? 안 돼?”
하지만 눈앞의 민국은 현아가 알고 있는 영웅 학교 45 기의 그 남자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영웅들의 기수 문화에 대해서도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으으음….”
현아가 이마가 찌푸렸다. 확실히 김성철의 행동은 정도가 지나친 면이 없잖아 있었다. 아무리 후배라지만 대놓고 깎아내리는 꼴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에 발끈해서 이렇게 도발하는 댓글 역시 사람들에게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게 분명했다. 게다가….
“만약에 김성철이 내기를 받아들이면 어떻게 해? 이건 메모리아 대 R’s 가 붙는 꼴이야. 클랜의 이름을 거는 일이라고.”
“그래서 이렇게 올리려는 거야.”
“응응?”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민국의 반응에 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민국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클랜의 이름이 걸리는 일이니까 김성철도 함부로 제안을 못 받아들이지 않겠어?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고, 후배는 도발을 했고. 그렇다면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누구나 다 김성철을 겁쟁이라고 욕할 거 아니야? 덤으로 메모리아도 욕을 좀 먹겠지? 신입 영웅한테 쫄은 클랜이라고? 둘 다 열 좀 받으라고 적는 거야.”
“아, 아니….”
“그리고 나와 우리 팀원들은 전부 나이가 많지 않은 신입 영웅이잖아? 클랜의 명예 같은 건 생각하지 못했고,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한 이야기였다고 말하면? 치기 어린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지 않을까?”
“그러니까….”
현아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러니까 상대를 열 받게 하려고 이런 글을 올리는 것이었다.
게다가 민국의 말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남들이 뭐라고 하면 민국이 했던 말 그대로 어리고 유치한 감정에서 나온 행동이었다며 무마시킬 수 있었다. 또한 먼저 날을 세운 것은 메모리아의 김성철이었다.
“어, 언니한테 말은 해놓을게. 혹시라도 일 터지면 당황하지 말라고….”
“그럼 나야 고맙지.”
현아의 연락을 받은 R’s 클랜의 단장인 현정도 마침 김성철의 행위에 괘씸하다고 여기던 도중이었다. 그리고 동생의 이야기를 들은 현정은 바로 알겠다며 민국에게 글을 올려도 된다고 허락했다. 물론, 그 짧은 시간에 현아는 이해득실을 전부 따진 후였다.
메모리아는 어디까지나 R’s 보다 상위로 평가받는 랭커 클랜. 행여나 상대가 민국의 도발을 받아들여 시합에게 깨지기라도 하면 R’s 의 명성을 드높일 수 있다는 계산도 끼어 있었다. 그렇지 않다 해도 R’s 는 나쁠 게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R’s Han, 민국의 아이디로 알려진 SNS 계정이 김성철이 올린 댓글에 답글을 달았다.
* * *
민국의 파격적인 제안은 곧바로 영웅 커뮤니티를 휩쓸었다. 엄청난 비난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의외로 건방지다는 의견과 이벤트 삼아 재미있게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의견이 반반을 이루고 있었다.
만약 여성 영웅들 사이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크게 난리가 났을 터였다. 그러나 남성 영웅과 남성 영웅의 대립 관계에 불과했다. 영웅들의 다수를 이루는 여성들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심산이었다.
랭커 클랜에서나 꽁꽁 싸매는 남성 영웅들이 이렇게 대놓고 SNS 활동을 하는 것도 쉽게 보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찌되었든 커뮤니티는 불타고 있었고, 그럴수록 민국의 이름은 수많은 영웅들에게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사람들 그리고 영웅들의 시선은 메모리아의 김성철에게 향했다. 과연 그가 한민국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궁금해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민국의 예상대로 김성철은 한민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안 된다는 겁니까?! 그 녀석은 저를 그리고 메모리아를 무시했습니다!”
얼굴이 빨개진 클랜의 영웅을 향해 메모리아의 단장이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만약 지기라도 하면요? 메모리아가 R’s 에게 지는 겁니다.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지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 제가 한민국이라는 애송이….”
“김성철 영웅님. 그 애송이보다 리딩을 잘 할 자신은 있으세요?”
“그, 그건…!”
성철의 입이 다물어졌다. 신입 영웅에 불과하지만, 클랜에 입단하자마자 자신만의 팀을 꾸려 【B – 6】 난이도까지 던전을 클리어 한 녀석이었다. 괜히 대한민국이 주목하는 유망주가 아니었다. 버릇은 없어도 실력만큼은 진짜배기였다.
“동일 장비 스코어와 동일 스킬이라는 전제 조건이라면 성급의 차이가 별로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그런 패널티를 겪으면서까지 상대와 붙을 필요는 없어요.”
그렇게 말한 중년의 단장은 인터넷의 글들을 확인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김성철 영웅님. 당신은 5 성 영웅이고, 인터넷에서 날뛰는 애송이는 2 성에 불과한 녀석입니다. 이걸 단순한 이벤트로 치부하기에는 메모리아 클랜의 이름은 가볍지 않습니다. 무조건 이긴다는 확신이 있어야 저는 허락을 내릴 겁니다.”
“으…….”
단장의 말에 성철은 이를 악 물었다. 자신이 있다고, 무조건 이길 수 있다고 이 자리에서 외치고 싶었지만,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긴다면 모를까, 혹시라도 지게 된다면 잃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치기어린 애송이의 수작일 뿐입니다.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김성철 영웅님. 우리는 대한민국의 대표 클랜인 메모리아입니다. R’s 와 같은 하위 클랜의 도발 따위에 섣부르게 응할 필요가 없어요.”
“알겠습니다.”
결국 성철은 단장을 설득하기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벌써부터 인터넷에 올라올 글들을 떠올리니 속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민국의 예상대로 메모리아와 김성철은 민국의 제안에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제안을 받아들여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 이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거 아니냐?!
● 메모리아 쫄?!
● 역시 명문은 어디가지 않는 건가? R’s 의 제안에 아무고토 못하는 대표 클랜이 있다?
└ 그것은 바로 쫄모리아!
당연히 네티즌들은 이런 메모리아의 무대응을 신나게 까 내리기 시작했다. R’s 의 위상이 옛날 같지 않다는 것도 메모리아가 욕을 먹는데 큰 몫을 차지했다. 어느새 신입 영웅인 한민국의 건방진 도발은 쏙 들어가고 없었다.
하지만 네티즌들이 난리를 치던 말든 메모리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현상이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라도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한 달 후에는 영웅 협회에서 클랜 평가가 발표되는 시기였다. 더불어 세계 그리고 국내에서 주목받는 영웅 혹은 유망주와 같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며 영웅을 동경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 때까지만 조용히 넘어가면 될 거라는 게 메모리아 클랜 구단주의 생각이었다. 이번 일에 대한 복수는 언제든지 해도 그만이었다. 게다가 메모리아 클랜은 이미 R’s 클랜의 1 군을 상대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클랜 평가가 한 달 정도 남기는 했지만 올해부터 R’s 클랜은 랭커 클랜이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내려놓아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 흥미를 가진 한 여인에 의해 메모리아 단장의 계획에 커다란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 * *
김태연은 자신이 머무르는 공간에 불쑥 찾아온 손님을 바라보았다.
라온 호텔의 최상층인 펜트하우스에 거리낌 없이 찾아올 정도로 권력이 있는 여자였다. 아니, 그만큼의 돈이 있었다. 손님의 정체는 바로 로즈 그룹의 재벌 3세, 조수영으로 그녀와는 동갑내기 친구였다.
“네가 여기는 웬 일이야?”
“그냥. 안부 인사차 들렀지?”
그렇게 말한 수영은 제 집 마냥 자연스레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화려하게 꾸며진 펜트하우스의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 사이 가정부가 차를 내왔다.
“매번 느끼는 건데 말이야. 나는 이런데서 혼자 살면 막 외롭다 못해 우울증이 걸릴 것 같은데? 너는 괜찮아?”
“가정부들이 있잖아. 애야? 그런 것 가지고 우울증이 걸리게? 하기야…. 너는 남자가 없으며 안 되는 몸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짐직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태연의 모습에 수영이 대놓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언제나 고상한 척만 하는 돈 많은 이 친구는 그냥 재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자신이 그녀의 앞에서 재수 없게 굴 차례였다.
갑자기 자세를 바로 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수영의 행동에 태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나 와서 남자 자랑, 돈 자랑만 늘어놓다가 떠나던 애가 오늘 따라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것이 뭔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태연이 작게 한숨을 쉬며 물었다.
“오늘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아, 별거 아니야. 메모리아 클랜, 네가 관리하고 있지?”
“메모리아? 그렇긴 한데…. 잠깐, 설마 영웅 이적을 하자는 건 아니겠지? 그런 이야기라면 바로 거절하겠어. 그리고 그건 단장의 권한이지, 내 권한이 아니야.”
수영의 말에 태연이 긴장한 모습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1 월이면 클랜 평가를 앞둔 영웅들의 이적 시즌이기도 했다.
“아니? 내가 왜? R’s 가 어떻게 되던지 난 크게 신경 안 써. 너도 알잖아? 그런데 미쳤다고 비싼 돈 들여서 너네 클랜 애들을 데리고 오겠어? 그 전에 우리 회장님께서 허락하지 않을 걸? 맨날 라온을 따라잡겠다고 노래를 부르시는데, 영웅 영입에 쓸 돈이 어디 있겠어?”
심드렁한 수영의 대답이었지만, 태연은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영웅 이적이 아니라면 그녀가 클랜과 관련해서 자신에게 이야기를 꺼낼 게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경계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태연을 향해 수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진짜 모르는 모양이구나? 인터넷 같은 거 안 해?”
“하는데? 아, 최근은 좀 바쁘긴 했다만. 후우….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아니, 뭐. 별 건 아니고. 내가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네가 직접 보는 게 낫겠다.”
말과 함께 수영은 인터넷에 논란 중인 R’s 클랜과 메모리아의 대결과 관련된 영웅 커뮤니티의 댓글 화면을 태연에게 보여주었다. 댓글의 내용들은 전부 R’s 클랜의 패기에 대한 칭찬 그리고 제안을 회피한 메모리아를 겁쟁이라고 치부하는 글들이었다.
“이건…!”
글의 내용을 읽어갈수록 태연이 눈도 크게 부릅떠졌다. 덩달아 그녀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전후 사정을 파악한 태연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다른 그룹도 아니고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로즈 그룹의 R’s 에게 라온의 메모리아가 상대도 되지 않는 이미지가 인터넷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물며 ‘로즈 그룹 > 라온 그룹’이라는 써놓은 무수한 댓글이 그녀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순위만 높으면 뭐해? 실속이 있어야지. 너네는 이런 패기 넘치는 신입 영웅 없지?”
더불어 옆에서는 수영이 히죽이며 자신을 도발하듯 웃고 있었다. 절로 이가 으득 갈렸다. 이건 라온의 3 세라는 자존심 아니, 그것을 넘어 그룹끼리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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