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8 클랜 평가
얼음 협곡에 도착한 재벌 3 세들의 등장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들에게로 쏠렸다.
조수영이나 김태연이나 둘 다 단장과의 만남을 제외하면 지금처럼 클랜 관계자들의 앞에 모습을 보이는 것이 거의 반년만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 둘이 이번 내기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태연과 눈이 마주친 수영이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른 이들에게는 공주의 성이라 불리는 펜트하우스에서만 지내던 친구를 이렇게 밖에서 보게 되다니 느낌이 새로웠다.
“안 올 줄 알았더니?”
“네가 짜증을 내는 모습이 보고 싶더라고? 그리고 로즈가 2 등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려고. 아, R’s 클랜은 순위가 5 위였던가?”
“쳇.”
괜히 아는 척 말을 꺼냈다가 호되게 얻어맞은 수영의 얼굴이 인정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룹의 이름만 들어가면 발정한 듯 날을 세우는 게 역시나 재벌 3세다운 모습이었다.
벌써부터 전투태세에 들어가 적의를 풀풀 풍기는 친구하고는 말을 나눠봤자 손해였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수영의 눈에 R’s 클랜의 단장 오현정이 들어왔다. 그리고 수영과 눈이 마주친 현정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오현정….’
좋아하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민국의 말이 있던 만큼 수영은 그녀에게 다가가 평범하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네? 아, 지금 아이스 드레이크를 앞두고 있습니다. 던전의 마지막 보스 몬스터입니다.”
“마지막 보스 몬스터? 메모리아는요?”
수영의 눈동자가 화면으로 향했다. 두 개의 커다란 디스플레이에는 R’S 클랜과 메모리아 클랜의 공격대가 정비를 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둘 다 아이스 드레이크라는 동일하게 생긴 몬스터를 앞에 두고 있었다.
“와? 이게 진짜? 신입인데? 메모리아에는 강채영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놀란 표정과 함께 수영의 고개가 이리저리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신 말고도 이 사실을 알아야 할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막 보고를 받았는지 허리를 굽실거리는 메모리아 단장의 앞에서 태연이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후.”
그런 태연을 향해 음흉하게 미소를 날려주자 그녀의 몸이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로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게 틀림없었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수영은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목소리가 꿀에 탄 듯 부드러워졌다.
“아시다시피 내가 영웅들의 생리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그런데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것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만약 아이스 드레이크를 물리치고 【B – 5】 던전의 공략에 성공하게 되면 1 년차 신입 영웅으로만 이루어진 공격대로는 세계에서 최초입니다.”
“흠. 흠. 최초요?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던가요?”
세계 최초, 그 단어가 주는 매력에 수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GGW 의 활약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미국도 아닌 대한민국의 레이드 팀이 세계 최초라니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다른 선배들의 도움 없이 신입들로만 이뤄낸 업적이니까요. 【B – 5】 에는 4 등급 특수 개체가 무조건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데, 아직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신입들의 기량으로는 당해내기 힘든 괴물들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딜러 랭킹 1 위라는 강채영에 포함되어 있는 메모리아의 공격대와 클리어 속도가 비슷하다는 말이군요. 대단하네. 누구의 활약이 제일 뛰어난가요?”
“공격대장인 한민국입니다. 정확한 리딩과 신입이라는 생각할 수 없는 뛰어난 힐링 능력으로 모든 레이드를 원트(One Try)에 성공시키고 있습니다.”
현정의 칭찬이 이어지면서 수영의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맴돌았다. 이제부터 정력만 뛰어난 게 아니라 능력도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모양이었다. 여자도 아닌 몸으로 저런 능력이라니…. 신기한 남자였다.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공격 대장이라….’
디스플레이를 바라보는 수영의 눈이 진지하게 변했다.
원래라면 R’s 클랜은 모 그룹의 지원 없이 조금씩 무너지는 미래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장미 방패단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박다영과 비슷한 수준의 공격대장을 키워낼 수 있다면, 큰 투자 없이도 R’s를 다시 전성기로 올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거 욕심나네.”
조은영 부회장도 R’s 클랜을 대한민국 최고의 클랜으로 성장시키며 후계자 자리에 오르지 않았던가? 그렇게 되면 자신의 그룹 회장 자리도 더욱 공고해질 게 분명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이번 내기는 자신들이 진다해도 별로 손해를 볼게 없어 보였다. 잃는 단장과 영웅들은 돈으로 보충하면 그만이었다. 아니, 차라리 한민국을 위주로 팀을 꾸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제대로만 성장한다면 말이다.
어쨌든 지금 레이드는 한민국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자리였다. 던전 공략을 성공만 시켜도 대단한 마당에 메모리아 클랜과 비슷한 속도로 공략을 해내고 있었다.
* * *
“좋아, 나는 준비 끝.”
“저도 끝났어요!”
민국의 말에 정예린이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소정도 현아도 손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전투 준비가 끝났다는 것을 알렸다. 마지막으로 최유나도 손을 들어 올렸다.
“유나, 스킬 스톤 교체 했지?”
“네! 정신 자극요.”
마력을 회복시켜주는 정신 자극 스킬은 딜러인 그녀에게는 하등 쓸모가 없는 스킬이었다.
아무리 능력을 퍼부어도 마력이 모자라는 일은 웬만해서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만약 딜러가 마력이 모자랄 정도로 공격을 퍼부었는데 몬스터가 쓰러지지 않는다? 그건 그 딜러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녀석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나는 한민국의 지시에 조금의 의문도 가지지 않고, 세 개 밖에 없는 스킬 칸에 정신 자극 스킬 스톤을 동기화시켰다.
“그러면 현아, 싸인 떨어지면 바로 진입하면 돼. 공격 패턴은 알고 있지?”
“물기, 앞발, 앞발, 휘두르기, 물기, 휘두르기, 앞발.”
“바뀔 수도 있으니까 그 점 염두하고, 꼬리 휘두르기는 바로 싸인 드리겠습니다. 단체 줄넘기를 넘듯 피하면 됩니다. 다들 어렸을 때 해봤잖아요?”
4 등급 특수 개체이자 던전의 마지막 보스가 앞에 있기 때문일까? 알게 모르게 경직된 팀원들의 모습에 민국이 농담을 섞어 말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좋아, 고!”
그리고 민국이 돌진 태세를 갖춘 현아를 향해 신호를 보냈고, 탱커인 현아가 아이스 드레이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쿠오오오오!
자신에게 접근하는 영웅의 존재를 느낀 아이스 드레이크가 포효를 터뜨리며 커다란 덩치를 일으켰다. 이어서 현아를 발견하고는 그녀를 향해 입을 쩍 벌리며 목을 뻗었다.
촤아악!
그런 아이스 드레이크의 공격에 현아가 슬라이딩을 하듯 앞으로 미끄러졌다. 그 뒤로 아이스 드레이크의 목이 처박혔다.
“이거나 먹어라!”
그렇게 아이스 드레이크의 안쪽으로 손쉽게 접근한 현아가 방패의 날을 세워 부메랑을 던지듯 위로 던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묵직한 방패에 얻어맞은 아이스 드레이크가 포효와 함께 날개를 펄럭였다.
그사이 떨어진 방패를 주워든 현아가 자세를 잡고는 보스 몬스터의 공격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현아가 아이스 드레이크의 어그로를 잡는 동안 민국은 ‘생명의 씨앗’이라는 스킬을 팀원들에게 감고 있었다. 회복량은 크지 않지만 3 초마다 영웅들의 생명력을 높여주는 도트형 회복 능력이었다.
드랍 비율이 높지 않아 힐러 영웅들 사이에서는 레어급 으로 평가받는 B 등급 스킬이었지만, 공격대에서는 거의 필수이다시피 사용되는 스킬 스톤인지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B 등급이라 가격이 비싼 편도 아니었다.
‘아슬아슬하게 막을 수 있겠네.’
그렇게 팀원들에게 회복 마법을 사용한 민국은 영웅 패드를 통해 바로 혹한의 한파가 주는 데미지를 확인했다. 혹한의 한파는 10 초 마다 아군에게 피해를 주는 아이스 드레이크의 패시브 능력이었다.
혹한의 한파에 데미지를 입은 영웅들이 생명력이 생명의 씨앗에 의해 다시 회복되고 있었다. 100 %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입은 피해의 90 % 정도는 회복시킬 수 있었다.
생명의 씨앗의 유지되는 시간은 1 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정도쯤은 충분히 체크할 수 있었다. 게다가 탱커에게는 생명의 씨앗을 사용하지 않았다. 어차피 보호막과 함께 단일 회복 능력으로 생명력을 채워야 했기에 생명의 씨앗이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콰우우우우!
현아의 목을 노리며 날아드는 드레이크의 공격. 그것을 보며 민국은 드레이크의 패턴을 생각했다. 두 번째 사용하는 앞발 공격이었다. 민국이 반사적으로 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꼬리 준비!!!”
그와 동시에 아이스 드레이크의 꼬리가 쩌억하는 소리를 만들어내며 땅을 내리쳤다. 이어서 통나무 몇 개를 묶어놓은 것 같은 커다란 꼬리가 지면을 훑듯이 쓸었다. 하지만 미리 민국의 지시를 받은 영웅들은 타이밍을 맞춰서 하늘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와, 청소 한 번 깔끔하게 하네. 으읏?!”
그리고 멋들어지게 착지를 한 예린이 빙판에 미끄러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모습을 본 민국이 바로 경고를 날렸다.
“빙판 조심!”
선배 영웅들이 공략 방법에는 딱히 주의할 점으로 지적되지 않았지만, 전장 곳곳에 깔려 있는 빙판들은 아군의 움직임을 충분히 방해하고 있었다. 만약 격렬하게 움직이던 도중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큰 사단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최유나! 저기 공격해!”
“빙판이요? 네!”
민국의 지시에 따라 유나의 화살이 아군의 진영 근처에 있는 빙판들을 모조리 박살냈다. 혹시나 할 법한 상황은 만들어내지 않는 게 좋았다.
“정예린! 지금 4 중첩! 터뜨려!”
“네, 네!”
캐스팅을 할 때 마다 뒤틀린 저주가 중첩되는 만큼 정예린은 중간마다 공격을 중단 해 디버프를 없애야 했다. 중첩이 커질수록 입은 데미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므로 안전하게 4 중첩 혹은 5 중첩 내에서 계속해서 디버프를 제거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딜러의 본분이라고 할 수 있는 딜량이 크게 떨어지고 있었지만, 예린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차피 이번 레이드는 클리어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게다가 공략을 위한 딜링이었다.
그렇게 민국의 리딩에 따라 팀 GGW 는 그럭저럭 무난하게 아이스 드레이크를 상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메모리아 클랜 쪽은 분위기가 달랐다.
“으, 으음….”
레이드를 지켜보던 태연의 입술에서 딱딱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메모리아를 대표하는 유능한 영웅들이 아이스 드레이크의 공격에 속절없이 당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디스플레이의 앞에 앉아 있는 클랜 직원에게 향했다.
“영웅들의 생명력이 채워지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힐러의 회복 능력이 사용되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이유 때문인지 묻잖아요?!”
라온 그룹의 3 세이자 클랜 구단주의 매서운 눈빛에 당황한 직원이 대답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김태연의 목소리가 높아지려던 찰나 클랜의 단장이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힐러의 마나 부족 때문입니다. 아이스 드레이크는 패시브 능력과 뒤틀린 저주라는 디버프 스킬 때문에 힐러의 부담이 상당한 몬스터입니다.”
“마나 부족이라면…. 보스 몬스터를 쓰러뜨리기 전에 우리 팀의 힐러가 먼저 리타이어 한다는 말인가요? 대응책은요?”
“최대한 데미지를 받지 않기 위해 딜러들이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감을 잡으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다들 내로라하는 영웅들이긴 하지만 장비 스코어의 차이 때문인지, 조금 섣부르게 움직이는 것이 없잖아 있습니다.”
“장비 스코어의 차이라….”
클랜 단장의 말에 태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는 달리 이들은 프로였다. 그렇게 생각한 태연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메모리아 클랜이 아닌 다른쪽 디스플레이로 향했다. 그리고는 멈칫했다.
‘분명히?’
비슷한 시기에 공략에 들어갔었다. 하지만 메모리아 클랜의 영웅들이 전멸한 것에 반해 신입 영웅들로만 이루어진 R’s 팀 GGW 는 아직도 아이스 드레이크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힐러의 마나 부족?”
그리고 GGW 공격대의 생명력을 책임지는 공대장 한민국은 쉴 틈 없이 자신의 마력을 회복 능력으로 전환시키고 있었다. 리타이어가 된 메모리아 클랜의 힐러와는 정 반대의 모습이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