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3 클랜 평가
≪[R’s 클랜의 올해 결산]
- 현재 클랜 평가 순위 – 5 위.
- 예상 클랜 평가 순위 – 8 위에서 10 위.
강한 여자들 클랜 다음으로 랭커 클랜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R’s 클랜은 작년 초에 예상했던 대로 작년 한 해 크나큰 하락세를 경험했습니다.
1 군 팀의 공대장인 김수아는 유능한 딜러이긴 하지만 랭커 클랜을 대표할 수 있는 리딩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본인의 말을 결국 증명하지 못했습니다.(R’s 클랜 1 군이 공략에 성공한 최고 난이도 던전 - 【A – 5】 21회)
R‘s 의 1 군이 상위 난이도의 레이드 공략을 성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팀원들 특히 힐러장인 최선경을 제외한 나머지 힐러들의 역량 부족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패턴이 복잡한 레이드에서의 반복적인 실수는 여전히 고쳐지지 않은 모습입니다.
클랜의 단장인 오현정은 이런 1 군의 문제점을 이적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지만, 모 기업의 투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일 것으로 사료됩니다. 또한 R’s 는 올해를 끝으로 1 군 팀의 힐러 한 명과 딜러 셋의 계약이 끝나게 됩니다.
이 중 두 명은 이미 클랜을 떠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고, 나머지 둘 역시 재계약에 딱히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과연 R’s 가 이들의 공백을 어떻게 메꿀지 우려가 됩니다.
다만, 최근 초특급 유망주 그것도 힐러 공대장으로 떠오른 한민국의 행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레이드 자격증을 딴지 두 달밖에 되지 않은 1 년차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B – 5】 난이도의 던전 공략에 성공했으며, 이는 세계 최초의 기록입니다.
이러한 활약으로 인해 섣부르기는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올해 안에 한민국이 5 등급 몬스터의 레이드를 지휘할 수 있는 공대장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전 세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공대장 유망주들과 비교해도 명실상부한 역사상 최고의 재능으로, 못해도 R’s 의 레전드 공대장이었던 박다영 이상으로 성장할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를 감안해 클랜 평가에서도 유망주 점수를 대폭 획득할 것으로 예상되며 1 군의 부진으로 인해 클랜 순위가 급 하락하는 것 또한 면할 것 같습니다.≫
“이런 영웅을 왜 우리 클랜에서는 영입하지 못했죠?”
고급스러운 차 안에서 보고서를 읽던 태연이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R’s 클랜에 입단하기 전까지 한민국은 그리 대단한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원거리 딜러였을 때는 기껏해야 C+ 수준의 딜러에 불과했고, 이는 중소 클랜에도 입단이 힘든 성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레이드 자격시험이 있기 일주일 전, 갑자기 힐러로 전직을 하면서 공대장을 맡은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전 공대장이 파티를 나가면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엄청난 리딩 능력을 보였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영웅학교에서는 그런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영웅 학교의 기록에는 한민국 영웅이 공대를 지휘한 적도 그리고 지휘하려는 모습을 나타낸 적도 없다고 나와 있습니다. 교관들을 통해서 확인한 사실입니다.”
비서가 김태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정말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한민국은 전과 후가 너무나도 달랐다.
“메모리아로의 이적은 가능할까요?”
“힘들 것 같습니다. 일단 R’s 클랜의 단장 동생인 오현아와 가까운 관계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서로 동거를 하고 있는 사이기도 하고요. 게다가 클랜에 대해 불만도 많지 않습니다.”
“돈으로도?”
“그렇습니다. R’s 클랜 직원의 말에 따르면 일주일에 던전을 대여섯 번은 공략할 정도로 몬스터에 대해 강한 적의를 보인다고 합니다. 다른 영웅들보다 영웅심이 강한 것으로 추측되고, 그 외적인 것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보고만 들어보면 정말 자신의 수중에 넣고 싶은 영웅이었다. 그렇다면 메모리아를 대한민국 최고가 아닌 세계 랭킹 순위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당장 한민국을 메모리아로 데리고 오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어쩔 수 없지. 천천히 접근하는 수밖에.’
오늘의 약속 역시 그런 이유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대화를 멈추고, 차창을 바라보던 태연이 휴대 전화를 꺼냈다.
“나야, 거의 다 온 것 같아.”
통화의 대상자는 오늘의 약속 대상인 조수영이었다. ‘얼음 협곡’ 사건으로 인해 일 년은 얼굴을 보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한민국과 자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어쩔 수 없이 약속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처음 뵙겠어요.”
“한민국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김태연 구단주님.”
영웅답게 젊고 멋진 남성이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캐쥬얼한 복장을 입고 있었지만, 본판이 좋으니 걸친 옷들도 전부 명품처럼 보였다.
슬쩍 브랜드를 확인해보니 역시나 태연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브랜드였다. 본인이 소유하고 있는 백화점에 들어와 있는 브랜드들도 아니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물질적인 것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다더니 그게 맞는 모양이었다.
“식사는 안에 준비해놨어. 그러면 비서 분은 나가보셔도 돼요.”
안을 가리키며 말하는 수영의 행동에 태연의 비서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곧 태연이 고개를 끄덕였고, 머뭇거리던 비서가 곧바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수영과 함께 태연이 안으로 들어섰고, 민국도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재벌 3세가 사는 장소답게 조수영은 백 평에 넘는 펜트하우스에 머무르고 있었다. 보통 드라마에서는 자식이 회장님을 모시고 사는 경우가 많았기에 태연이 오기 전 슬쩍 그에 대해 물어봤지만, 자주 찾아가기는 하지만 사는 곳은 따로 라고 했다.
“…….”
길게 쭉 뻗은 대리석의 복도에서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태연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조수영의 집을 방문했던 민국에게는 오늘만 두 번째 마주하는 복도였다.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데, 절로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워지고 있었다. 조수영과 떡을 치는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이런 행동이 나오는 것을 보니 이게 바로 재벌집의 위엄인 모양이었다.
자리에 앉자 식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대화도 배가 차고 나서야 할 수 있는 법이었다.
‘맛있네.’
태연은 음식을 한 입 먹고, 맛을 음미했다. 그리고는 소리를 내지 않고 삼켜 넘겼다. 자신의 미각에 거슬리는 느낌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확실히 실력 있는 셰프가 최고급의 재료를 사용해서 만들어 낸 요리였다.
요리에 대해 놀란 것은 민국도 마찬가지였다. 양은 쥐꼬리만 한 게 맛은 끝내줬다. 특히 자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니 혐오하다시피 한 연근이나 야채와 같은 음식들도 어떻게 참고 먹었는데, 다시 생각이 날 정도로 신기한 맛이었다.
이래서 다들 비싼 돈을 내고 레스토랑에 가는 건가 싶었다.
“식사는 마음에 들어?”
“좋은 재료와 실력 있는 셰프. 나쁘지 않네.”
“한민국 영웅은 괜찮았어요?”
“아, 최고였습니다. 제 입맛이 그리 대단치 않은데, 이건 정말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음식이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팀원들을 초대해서 이 맛에 대해 알려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진심이었다. 이런 식사는 비싼 돈을 내고도 충분히 먹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태연이 입을 열었다.
“팀원들과 함께라…. 한민국 공대장님께서는 지금의 공대원들이 굉장히 마음에 드시나 봐요?”
“다들 재능이 있는 영웅들이니까요.”
“하지만 최고의 영웅들은 아니지 않나요?”
민국이 옅게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질문에 담긴 내용이 너무나도 노골적이기 때문이었다.
“명필은 붓은 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탱커인 오현아는 굉장히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미국의 미리암과도 뒤지지 않는 재능이라도 생각합니다.”
“그 미리암 위크스를 말하는 건가요?”
“맞습니다.”
태연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미리암 위크스. 영웅 클랜을 운영하는 구단주라면 모를 리가 없는 이름이었다. 세계 랭킹 1 위의 공격대인 ‘화이트 하우스’의 메인 탱커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미리암은 전 세계에서도 넷 밖에 되지 않는 9 성 영웅 중 한 명이었다. 태연이 고개를 기울였다.
“한민국 공대장님께서는 조금 과장이 심하신 것 같네요. 미리암 위크스는 전 세계 최고의 탱커예요. 그녀의 손에 쓰러진 괴물의 수가 몇 마리나 되는 줄 아세요?”
“오현아를 데리고 앞으로 제가 쓰러뜨릴 몬스터와 비교하면 얼마 안 되는 숫자겠지요.”
“아?”
태연은 민국을 바라보았다. 능력이 뛰어난 것은 인정하지만 오만해 보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 자신의 실력을 믿기 때문일까? 그의 몸가짐에서 자신감이 엿보이고 있었다. 쉽게 내뱉은 말이 아닌 것 같았다.
하기야 보고서에 따르면 한민국의 GGW 는 이제까지 마흔 번에 가깝게 던전을 공략했다고 했다. 두 달, 아니 한 달 반 만에 이뤄낸 성과였다. 그리고 이는 일반적인 공격대가 일 년 정도에 걸쳐서 던전을 클리어 하는 속도와 비슷했다.
거기에 GGW 가 공략한 던전들의 난이도는 동 년차의 다른 영웅들은 엄두조차 못하는 상위 난이도의 던전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감이 넘치는 것도 당연해 보였다.
‘확실히 김성철이라는 같잖은 남자 영웅과는 다른 것 같네.’
다른 면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레이드에 관해서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자부심이 넘쳐 보였다. 이런 영웅과는 가까이 지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가까이 지내고 싶었다.
어느새 수영이 벽면의 장에서 위스키를 꺼내와 잔에 따르고 있는 모습이 태연의 눈에 들어왔다. 꽤 독한 것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괜찮은 사람을 알게 된 기념으로 한 잔 정도는 마셔도 괜찮을 것 같았다.
태연의 눈동자가 수영을 피해 민국에게 향했다.
“메모리아로 이적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R’s 에는 섭섭지 않을 만큼의 이적료를 그리고 한민국 영웅에게는 동년 차의 영웅들 중에서는 세계 최고의 대우를 해드리겠어요.”
김태연의 파격적인 조건에 민국은 순간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메모리아로 이적하게 되면 자신의 카르텔에 속한 여인들과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오현아와 클랜을 떠나려고 하지 않을 것 같았고, 조수영은 R’s 의 구단주였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저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 얘기였으니까요. 당연히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태연의 말에 수영이 불쑥 끼어들었다. 양 손에 크리스탈 글라스를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너, 우리 공대장님 빼가려고 한 거야? 마음에 안 드는데?”
“우리 클랜의 간판으로 키우려고 했던 신나연 줬잖아.”
“그건 ‘얼음 협곡’ 내기에서 내가 이긴 결과물이고. 우리 한민국 영웅님은 메모리아 1 군을 전부 줘도 안 바꿀 거야.”
태연의 날카로운 반박에 수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수영의 말에 태연의 평정이 뒤틀리고 있었다.
그런 태연에게 수영이 얼음이 담긴 잔을 건네주었다. 생명의 물이라 불리는 위스키가 담긴 잔이었다.
“로얄 샬루트?”
“50 년산이야. 제법 마실만할 거야.”
로얄 샬루트는 부드럽고 달콤한 것으로 유명한 술이었다.
“자, 이건 한민국 영웅님 꺼.”
그렇게 민국의 손에서 잔이 쥐어졌고, 서로를 바라보던 세 남녀 중 둘이 술잔을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을 하던 태연이 입에 잔을 가져다 대었다. 술이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한 잔 정도는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한 잔으로 시작된 술은 곧 두 잔이 되었고, 두 잔은 다시 세 잔으로 변해 버렸다. 그녀가 술잔을 내려놓으려고 할 때 마다 옆에서 누군가가 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뭐야? 안 마셔? 공주님답게 술이 굉장히 약하네?”
태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남성 영웅이 있어서일까? 오늘따라 수영은 계속해서 자신을 도발하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에는 그냥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 이 따위 술 정도는….’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느낌이었지만, 태연은 정신을 집중하며 잔을 들어 올렸다. 누군가가 그랬다. 술은 정신력으로 먹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건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잠시 후, 쿵하는 소리와 함께 태연의 이마가 탁자를 들이박았다.
“제법 취했네. 여기서 재워야겠다. 비서는 돌려보내면 되겠고. 히…. 당신도 함께 잘 거죠? 나랑?”
그리고 얼굴이 불콰해진 수영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녀도 술에 취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에 반해 민국은….
“물론이지.”
아주 멀쩡했다. 술자리 혹은 회식 자리의 기본기인 물 많이 술 조금의 노하우를 선보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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