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6 의심
- 하나, 둘, 셋! 좋아좋아. 어깨가 올라가지 않게 하고 다시 넷! 다섯!
“끄응.”
흰색 크롭티와 검은색 레깅스를 입고 있는 소녀가 티비에 나오는 유명 강사의 동영상을 보며 방에서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었다.
굳이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매끈한 몸매를 자랑하는 소녀였지만, 그녀는 호흡하나 놓치지 않고 집중해서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소녀가 열심히 운동을 움직이던 도중 그녀의 방문이 열렸다.
“유나야! 밥 다됐어!”
“아니, 엄마! 나, 운동 중이야! 바로 뭐 먹으면 안 된다고.”
“그래도 그냥 앉아 있어.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모여서 얼굴 한 번 보겠니?”
엄마의 말에 유나가 뿔이 난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의 말대로 공격대의 일정이 요즘 굉장히 빡빡하게 돌아갔던 터라 가족들과 제대로 식사를 할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멍멍!”
유나는 반갑게 짖어대는 애완견 뽀찌의 밥그릇에 사료를 듬뿍 준 후, 식탁에 앉았다. 커다란 4 인용 식탁이지만, 숟가락은 두 개 밖에 놓여 있지 않았다. 그리고 숟가락을 드는 것은 한 사람뿐이었다.
김치찌개로 보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국을 본 유나가 타박하듯 말했다.
“어째 오늘 요리도 실패한 거 같은데? 그냥 반찬 같은 거 시켜먹는 게 낫지 않아?”
솔직히 손재주가 아예 없다시피 한 엄마는 누군가하고는 달리 사람이 먹을 만한 음식을 만들지 못했다. 유나가 밥을 안 먹는 이유에는 그런 것도 없잖아 있었다.
예전에 엄마가 한 음식을 처음으로 먹어봤던 뽀찌는 그 이후 부엌에 엄마가 있는 모습이 보이기라도 하면 겁이라도 먹은 듯 집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닐 정도였다.
“됐어. 냉장고에 샐러드 사놨어. 이따가 그런 거라도 챙겨 먹어. 그런데 너는 무슨 마나를 각성한 애가 몸매 관리까지 하고 그러니? 일반인들이 욕 한다 욕해.”
“조금이라도 예뻐지고 싶어서 그렇지. 엄마 딸 요즘 잘나가는 거 몰라?”
“뭐, 엄마 친구들이 부럽다고 난리긴 하더라. 그래서 그 한민국 공대장이라는 사람 어때? 소문대로 그렇게 대단해?”
“최고지, 최고.”
조심스레 묻는 엄마를 향해 유나가 당연하다는 말과 함께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영웅 학교 시절부터 많은 영웅들을 만나왔고, 공대장을 희망하는 여러 동기들과도 던전을 돌아봤지만 지금의 그녀가 경험하고 있는 레이드는 그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민국의 꼼꼼한 리딩은 마치 에디터를 쓰며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처럼 대단했다. 피드백 또한 유명한 족집게 강사처럼 핵심만을 콕콕 찾아내 지적을 했다.
덕분에 유나는 서울 영웅 학교 동기들 사이에서는 화제의 대상이었다. 민국의 팀에서 딜러로 활동하며 【B – 5】 던전을 성공적으로 공략한 업적으로 영웅의 역사에 이름을 새겼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영광이었다.
물론, 스포트라이트는 전부 공대장인 민국이 차지했지만 유나는 자신의 이름이 그곳에 올라갔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공대장의 뛰어난 리딩과 회복 능력 그리고 팀원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결코 잡지 못했을 몬스터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네가 좋다니 다행이기는 한데…. 그래도 엄마는 조금 걱정이다.”
“뭐가?”
“그렇게 대단한 공대장이라면 그 사람의 팀에 들어가고 싶은 영웅들도 많을 거 아니야. 더욱이 남자 영웅이라면서?”
“그렇…지?”
유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서울 영웅 학교 시절 그녀의 딜러 성적은 그리 대단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쁜 편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최근 뜨거운 화제가 되고 있는 신입 공격대인 GGW 의 한 딜러로 활약하기에는 모자람이 있었다.
그나마 여러 레이드를 경험하면서 실력이 조금씩 성장한 것을 비롯해 난이도가 높은 던전들을 성공리에 공략하며 랭킹이 큰 폭으로 높아지기는 했다. 그래도 40 위 언저리에 불과했다.
김소정이 6 위, 정예린이 2 위를 차지한 것에 비하면 굉장히 낮은 순위였다. 그리고 유나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 내가 또 우리 공격대의 특별 임무 처리 전담반이거든. 공대장님이 나를 얼마나 신뢰하는데? 【B – 5】 던전을 공략할 때도 내가 공대장님의 리딩에 딱 맞춰서 스킬을 사용하는 대단한 활약을 했거든. 내 정신자극이 아니었으면 그 때 상대했던 아이스 드레이크는 절대로 못 잡았을 걸?”
“그랬어? 우와. 우리 딸 대단하네.”
“신나연 영웅이라고 최근에 우리 클랜에 입단한 대단한 선배가 있는데 마침 우리 팀에 오고 싶어 했다? 그런데 공대장님께서 우리 팀에는 인원이 꽉 찼다며 그분을 안 받아들였어. 나 사실 그 때 짤릴 줄 알았는데, 계속 데리고 간다면서 실력만 조금 더 키우라고 하더라.”
신이 난 듯 말을 하는 딸의 모습에 유나의 엄마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미소를 살짝 지어 보이며 말했다.
“다행이야. 요즘 너무 힘들게 레이드를 도는 것 같아서 걱정이었는데, 우리 유나가 성공적으로 영웅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엄마가 조금 마음이 놓이네. 그래도 무리하지는 말고.”
“응.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 그리고 계속해서 기량을 높여서…. 그래서.”
말을 꺼내려던 유나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참 후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비어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비어 있을 엄마의 옆자리로 향했다.
“아빠의 복수, 꼭 하고야 말거야.”
* * *
콰우우우우!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정감이 드는 울음 소리였다. 이마에 화살이 박히는 것과 동시에 생명력이 모두 사라진 아이스 드레이크가 서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공략 시간 16 분. 처음 아이스 드레이크를 공략했을 때와 비교해 40 % 가량이나 공략 시간이 줄어들었다. 다들 3 성 영웅이 되면서 【Gear Score】 크게 높아진 덕분이었다.
위기 상황도 없다시피 했다. 메인 탱커인 현아는 언제나 단단하게 팀원들을 지켰고, 공대장이나 힐러인 민국은 팀원들의 생명력이 40% 이하까지 떨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얼음 덩어리를 피하는 것도 이제는 여유를 부리면서까지 피할 정도였다.
“간단하네.”
민국이 레이드의 승리를 기뻐하는 팀원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스 드레이크를 너무 많이 잡아서인지 이제는 처음과 같이 요란한 반응을 보이는 이도 없었다. 그만큼 전투에 익숙해진 것이다.
전리품 상자에서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또 나왔어, 에이 꽝이네 라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런 팀원들의 모습을 보며 민국은 더 이상 이곳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상위 난이도의 던전을 공략해도 충분할 것 같았다.
‘어디보자….’
팀원 네 명의 평균 장비 점수를 200 까지 높이라는 뿌우의 퀘스트는 완료한지 오래였다.
3 개월 내에 클리어 해야 하는 퀘스트였으나 한 달 만에 끝내버렸다. 장비 점수를 높이라는 쉬운 조건이었고, 성급만 높이면 클리어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영웅의 장비는 경매장에서 돈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보상으로 얻은 오렌지급 결정 소환권 다섯 장은 팀원들의 성급을 높이는 데 바로 사용했다. 그렇게 장비 점수 퀘스트를 클리어하자 남은 퀘스트는 동남아시아 지역과 관련된 퀘스트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동남아 지역과 관련된 퀘스트는 그림 속의 떡이나 다름없는 퀘스트였다. 무려 【A – 1】 던전을 공략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민국과 팀원들의 스펙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공략이 불가능했다.
어쨌든 난이도를 높일 이유도 생겼으니 【B – 5】 의 공략은 여기서 마쳐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민국이 팀원들을 불러 모았다.
“내일부터는 던전의 난이도를 높일 생각입니다.”
“【B – 4】를 공략하시는 건가요?!”
민국의 말에 예린이 놀란 눈동자를 했다.
“우리 공대장님께서 척척 해결해 주실 텐데 뭐가 걱정이야? 그리고 【B – 4】나 【B – 5】나 4 등급 특수 개체가 더 늘어난다는 게 전부잖아?”
그런 예린를 향해 소정이 걱정하지 말라는 말투로 말했다. 1 년차 영웅에 불과한 자신들을 이끌고 4 등급 특수 개체까지 공략에 성공한 뛰어난 실력의 공대장이었다. 자신들만 잘 한다면 충분히 상위 난이도의 던전이라도 클리어를 해낼 수 있었다.
“김소정 영웅의 말이 맞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어려운 길과 쉬운 길.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어느 쪽을 고르실래요?”
“아…. 왠지 둘 다 느낌이 불안한데?”
이어지는 민국의 말에 현아가 으으거리며 난색을 표했다. 레이드에 관해서만큼은 거침없이 몰아붙이는 민국의 성향 상 둘 다 좋은 선택이 아닐 것 같았다. 그리고 소정이 민국을 향해 되물었다.
“공대장님께서는 어떤 것을 선택하실 생각이신가요?”
“물론 저는 어려운 길이겠죠?
여러 번의 시행착오가 있기는 하겠지만, 그것에 가장 빠르게 강해지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시행착오는 부활석이라는 것을 통해 줄일 수 있었다. 게다가 곧 부활석이 대량으로 얻을 일이 생길 예정이었다.
“그러면 저 역시 어려운 길을 선택할게요. 공대장님의 뜻에 따라야죠.”
“어? 그럼 저도요!”
저것이 바로 연륜인 것인가? 자연스레 아부로 넘어가는 소정의 행동에 유나가 감탄한 얼굴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런 팀원들을 향해 민국이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녀들 본인이 원했으니 이제는 공략 난이도를 높여도 상관이 없으리라.
“그러면 내일부터는 브리핑과 훈련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공략할 던전은 밤의 성채입니다.”
“밤의 성채? 던전 명이 꽤 마음에 드네. 되게 야릇해. 마치 서큐버스라도….”
아무 생각 없이 말을 꺼내던 현아가 화들짝 놀라며 민국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민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잠실에 있는 【B – 2】 던전인 ‘밤의 성채’ 그곳을 말하는 건 아니지?”
“맞아.”
“거, 거기는 4 등급 특수 개체만 무려 여섯 마리나 나오는 곳이라고?! 게다가 서큐버스 퀸 루디아는…!”
수많은 영웅을 타락시킨 무시무시한 몬스터였다. 하지만 민국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서울의 【B – 2】 던전은 ‘밤의 성채’ 한 곳 뿐이기 때문이었다. 【B – 1】 던전이 네 곳. 그보다 상위 난이도의 던전도 여러 곳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의외인 상
황이었다.
처음부터 서울에 【B – 2】 난이도의 던전이 ‘밤의 성채’ 한 곳밖에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서울의 【B – 2】의 던전은 ‘밤의 성채’를 제외하고도 세 곳이 존재했었다.
하지만 5 등급 보스 몬스터가 등장하는 【B – 1】 은 갈 수 없지만, 4 등급 특수 개체는 상대할 수 있는 공격대. 그리고 오렌지급 결정을 손에 넣어 성급을 높이려는 클랜들의 정규 공격대가 갈 수 있는 곳은 한정된 난이도의 던전 밖에 없었다.
그런 공격대들이 선택한 난이도의 던전이 바로 【B – 2】 였고, 무수히 이어진 공략 끝에 운이 좋게도 혹은 재수 없게도 ‘밤의 성채’를 제외한 서울의 【B – 2】 던전이 모두 무너져버린 것이다.
‘패턴이 까다롭기는 하지만 특수 패턴들만 잘 넘길 수 있다면야…. 그리고 패턴이 까다로워야지 레이드 실력도 느는 거고.’
워낙에 많은 영웅들이 공략을 했던 곳이라 그런지 ‘밤의 성채’에 대한 정보는 쉽게 굉장히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심지어 하위 난이도의 던전들보다 공략 정보가 더욱 많았다.
그리고 밤의 성채에서는 최종 보스 몬스터라 할 수 있는 서큐버스 퀸 루디아와 블러디 메이드 벨라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그럭저럭 할 만 한 수준의 몬스터들이었다. 다만, 루디아는 민국도 수십 번은 트라이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략법이 까다로웠다.
덕분에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 【B – 2】 던전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시간의 왜곡 아이템까지 써가며 던전을 공략하지 않아도 되었다. 높은 난이도 때문에 밤의 성채를 찾는 공격대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민국은 【B – 3】 과 【B – 4】 라는 선택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밤의 성채’를 공략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팀원들의 기량과 레이드에 대한 감각을 높이기 위해서는 난이도가 높은 레이드를 다수 경험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서큐버스는 어떻게 생겼을까?’
밤의 성채에 등장하는 판타지의 섹스 심벌, 서큐버스를 직접 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과연 남성 영웅은 어떻게 타락을 시킬 지 그 방법이 조금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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