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0 의심
레이드라는 건 혼자 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여러 영웅들이 힘을 합쳐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어둠의 괴물과 싸우는 전투이며 넓은 의미의 전쟁 행위였다. 아무리 뛰어나고 용맹한 영웅이라 해도 홀로 동급의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어둠의 괴물들과 싸우는 영웅들에게는 상식이라는 게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어둠의 괴물들과 전쟁을 벌여가며 얻은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식이 눈앞에서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었다.
“어, 어떻게 【B – 2】에서?! 설마 클리어를 하신 겁니까?”
7 성 영웅 일레느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질문의 대상자는 바로 민국이었다.
자신을 향한 낯선 이의 질문에 민국은 슬쩍 단장인 오현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고개가 끄덕이자 민국이 자신에게 질문을 한 외국 여성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B – 2】 던전의 클리어는커녕 이제 첫 번째 보스 몬스터를 공략한 참이었다.
“클리어 하지도 못할 던전에는 대체 왜 들어간 거람?”
그런 민국의 대답에 사카시타 마키가 툴툴거렸다. 내심 다행이라는 감정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파밍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실례지만 누구신지?”
“세계 영웅 협회에서 나온 7 성 영웅 일레느입니다.”
“일본 영웅 협회의 사카시타 마키입니다. 6 성 영웅입니다.”
“아, 3성 영웅인 한민국입니다. 선배님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외국의 영웅이 단장과 함께 자신들을 찾아 올 리 없었다.
조만간 세계 영웅 협회에서 사람이 나올 거라는 것은 이미 들은 바였지만, 그게 마침 오늘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누렁이 레이드는 이걸로 끝내야 할 것 같았다.
“자, 그러면 ‘얼음 협곡’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민국이 팀원들을 향해 말했다. 세계 영웅 협회에서 사람이 나온 이유는 자신들의 던전 공략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B – 5】 던전인 ‘얼음 협곡’을 클리어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만사 오케이였다. 그런 후에 부활석과 장비를 대여 받으면 끝이었다.
그 때였다. 무언가를 생각하던 일레느가 민국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한민국 공대장.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B – 2】 던전에는 왜 들어가신 겁니까? 당신들의 스펙으로 【B – 2】를 공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텐데요?”
“파밍을 위해서였습니다. 스펙은 부족하지만 전술적인 능력만 있다면 공략할 수 있는 몬스터도 있으니까요.”
“파밍? 그게 가능합니까? 【B – 2】 라면 최소 4 성 이상에 장비 스코어가….”
“괜한 마음에 한 번 도전해 본 거 아닙니까? 솔직히 1 년차 영웅이 【B – 5】를 클리어 했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는데, 【B – 2】 라니요? 경험과 장비를 갖춘 4, 5 성 영웅도 고전하는 던전입니다. 그걸 신입 영웅이 공략하려고 했다니? 그걸 어떻게 믿나요?”
“그건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할 문제입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제가 한국을 방문한 게 아니겠습니까?”
일레느가 뚱한 표정으로 사카시타 마키를 바라보았다. 한국과 일본의 라이벌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일레느의 눈빛에 마키가 찔끔하며 뒤로 물러났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한국 영웅협회의 여성이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손바닥을 이용해 입을 가렸다.
자신을 향해 빙그레 웃는 민국을 향해 일레느가 다시 물었다.
“성과는 있었습니까?”
“네. 제법 괜찮은 것을 획득했습니다. 보시겠습니까?”
“실례지만 영웅 기록도 함께 공유가 가능하겠습니까?”
일레느의 부탁에 민국은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 영웅 협회에서 나온 이는 철저하게 진실 여부를 알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어차피 거짓말을 한 게 없었기에 영웅 기록의 공유는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눈앞의 두 여인은 팀 GGW 에게 수백 개의 부활석과 파밍을 줄여주는 고급 아이템을 대여해 줄 인물이었다. 괜히 뻗댈 필요도 없을 뿐 더러 잘 보여야 했다. 인상이 좋게 남으면 대여 비를 깎아줄 지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으음…, 음.”
민국을 비롯해 네 명의 여인이 다들 영웅 기록을 공유했다.
그리고 일레느와 사까시, 아니 사카시타 마키라는 일본 협회의 영웅은 GGW 의 기록이 거짓이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영웅 기록을 살폈다. 하지만 첫 번째 트라이에서 전멸, 두 번째 트라이에서 콜리보르를 잡았다는 기록이 정확하게 나와 있었다.
영웅이 지닌 마력의 유동을 읽어서 기록을 하는 영웅 기록은 카메라나 스캔 등으로 기록을 공유하면서 조작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조작이 불가능했다. 기록을 확인하던 일레느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눈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이빨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혹시….”
“네. 황금 송곳니입니다, 선배님.”
일레느의 시선을 받은 소정이 고개를 꾸벅이며 황금 송곳니를 내밀었다. 자세히 확인해보라는 의도가 담긴 행동이었다.
‘설마 정말로 잡았다고?’
영웅 기록도 전리품도 확인했다. 하지만 일레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B – 5】 도 아니고 【B – 2】였다. 그것도 1 년차 영웅들끼리 잡은!
행동이 굳은 것은 사카시타 마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다섯 영웅의 기록들을 교차 확인해 봐도 이상한 게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을 꺼내지 못하는 두 영웅을 향해 민국이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저희들이 【B – 2】 던전 ‘밤의 성채’의 몬스터를 공략하는 모습을 직접 보여드려도 되겠습니까?”
일레느가 화들짝 놀라며 민국을 바라보았다.
“……아?! 그, 그,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한참의 시간의 지나서야 생각이 정리된 그녀가 신음성과 함께 대답했다. 1 년차 영웅들끼리 하는 【B – 2】 레이드. 자신의 상식을 완벽히 깨뜨리고 있는 이들의 레이드는 과연 다른 이들과 얼마나 진행이 다를 지 벌써부터 궁금해지고 있었다.
* * *
“정예린 오른 쪽으로. 몬스터의 공격 범위에 아슬아슬합니다.”
“고깃덩이 날아옵니다. 최유나, 확인 준비. 탱커는 반시계 방향으로 뒷걸음질로 움직입니다.”
“아군 딜러들은 3 시 대기.”
컴퓨터처럼 아군이 움직이는 방향과 타이밍까지 알려주는 정확한 오더였다. 사실 이론적으로 따지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적의 패턴을 예상하고 아군의 움직임을 짚어주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정확한 리딩을 하며 전투를 해내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었다. 더욱이 상대는 어둠의 괴물이라는 강력한 몬스터였다. 심지어 공대장인 한민국은 딜러도 아닌 힐러였다. 조금만 까딱해도 탱커를 죽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러나 한민국은 정확한 리딩과 함께 끊임없이 수인을 맺고 있으며 아군의 생명력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줄어들었던 탱커의 생명력이 회복 능력이 연달아 터질 때 마다 뻥뻥 차오르는 느낌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들어 주는 광경이었다.
“공대장의 리딩도 놀랍지만…. 저 탱커는 대체 누구지?”
딜러들은 평범한 편이었다. 하지만 민국의 리딩대로 정확히 움직이는 탱커의 활약은 7 성 영웅이 일레느의 눈에도 남다르게 느껴졌다. 옆에서 긴장한 눈빛으로 레이드를 보고 있던 현정이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오현아입니다. R’s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우고 있는 탱커 유망주지요. 역시 1 년차 영웅입니다.”
“저런 탱커 유망주를 보유하고 계셨다니, R’s 의 미래도 제법 밝군요. 그런데 오현아? 이름이….”
“친동생입니다.”
현정의 목소리에는 자랑스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한민국이 공대장으로 있는 팀 GGW에서 활동을 하면서 현아의 기량이 급성장했다는 사실은 보고서를 통해 전달 받은 바 있었다.
그리고 최근 기량이 상승한 모습을 확인 했을 때는 【B – 5】 난이도의 던전에서 활약할 때였다. 그런데 불과 며칠 만에 현아는 【B – 2】 던전의 강력한 몬스터를 상대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탄탄한 방어로 아군을 지켜내고 있었다.
“아……. 자매가 함께 마나를 각성하셨다니. 축하드립니다. 동생분의 재능이 정말 엄청나군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아직 1 년차에 불과한 영웅입니다. 성장할 날이 엄청나게 많이 남았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벌써부터 【B – 2】 던전의 보스 몬스터를 저렇게 탱킹하다니 정말 앞으로의 모습이 기대가 됩니다.”
세계 영웅 협회에서 나온 7 년차 영웅인 일레느의 칭찬이 계속되자 현정을 비롯해 한국 협회의 인물도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에 반해 사카시타 마키는 조금 당황한 모습이었다. 이들은 정말로 【B – 2】 의 보스급 몬스터를 잡고 있었다.
민국이 지휘하는 GGW 는 하나의 코스 요리처럼 깔끔하게 콜리보르를 요리했다. 운도 따라줬는지 독성이 섞인 썩은 고깃덩이 또한 바로 찾아낼 수 있었다.
잠시 후, 콜리보르가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일레느가 민국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Excellent! 정말 믿을 수 없는 레이드였습니다. 지금의 모습들을 협회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B – 2】 던전의 몬스터도 때려잡는데, 【B – 5】 정도쯤은 일도 아니지요. 그러면 이번 논란은 단순한 해프닝이었던 걸로 보고를 하겠습니다.”
“으음….”
일레느의 말에 사카시타 마키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도 안 됐던 내용들이 전부 사실이었다니….
일본의 초특급 유망주인 시라누이 마이도 이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딜을 넣는 능력은 앞의 다섯 명보다 뛰어날지 몰랐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공대장인 한민국의 정확한 리딩과 힐링 능력은 그녀가 봐도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현정이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팀 GGW 에 대한 아이템 대여의 요청은 언제쯤 진행이 되겠습니까?”
“아, 그 건 역시 바로 보고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비행기의 화물로 경비 병력과 함께 이동될 테니 아무리 빨라도 나흘 정도는 걸리겠네요.”
현정의 질문은 전부 민국이 들으라고 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민국은 그런 단장을 향해 윙크를 보냈다. 앞으로 나흘 후면 콜리보르 뿐 아니라 제대로 된 ‘밤의 성채’ 공략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날, 대한일보의 기사 1 면으로 민국과 네 명의 여인들의 얼굴이 대문짝하게 실렸다. 어제 있었던 일을 에볼루션과 대한일보의 기자가 한 명씩 나와 취재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대한일보의 베테랑 기자인 안혜정은 민국과의 인터뷰도 독점으로 따낼 수 있었다. 물론, 이를 위해서 수십억에 가까운 돈을 부활석으로 바꿔 R’s 에 제공해야 했지만, 그런 보람이 있게끔 대한일보의 기사는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사를 읽은 영웅들의 반응은 다들 황당하다 못해 혼란에 빠진 모습이었다.
● 기사에 오타가 있는 것 같은데? B 뭐라고?
● 5를 뒤집으면 2 비슷하게 생겼는데, 잘못 적은 거 아니냐?
● 완전 공략도 아니고 몬스터 하나 잡은 건데, 그 정도면 가능하지 않을까?
└ 너 일반인이지?
└ 영웅 아닌 티 좀 내지 마라. 저게 가능한 일이었으면 어둠 괴물과의 전쟁은 진즉에 인류가 승리했어.
● 이래서 기자를 가리켜 기레기라고 하는 것인가?
└ 기사 쓴 사람이 안혜정이다.
└ 그러네? 안혜정이 이런 실수를 한다고? 완전 베테랑 기자잖아?
└ 기자님. 기사에 오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기사의 내용을 읽은 대다수의 영웅들은 기사를 쓴 안혜정이 급한 마음에 오타를 낸 것이라 여겼다.
솔직히 말해 【B – 5】도 믿기가 힘든데 【B – 2】라니? 무려 세 단계의 난이도를 뛰어 넘은 것이다. 게다가 한민국과 팀 GGW 는 고작해야 1 년차에 불과한 영웅이었다.
“최근 한국 영웅 협회의 비리와 관련해 논란이 있었던 R’s 클랜의 한민국 공대장과 관련된 루머들은 전부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팀 GGW 는 최근 한 달 내에 【B – 5】 던전을 22 번 공략하는데 성공했으며, 【B – 2】 던전인 ‘밤의 성채’에 등장하는 보스급 몬스터 콜리보르까지 쓰러뜨린 것으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혜정의 기사 내용은 곧 사실로 밝혀졌다. 세계 영웅 협회의 대변인이 직접 입을 열면서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양국 간의 자존심 때문인지 세계 영웅 협회와 함께 GGW를 조사했었던 일본 영웅 협회는 많은 일본 영웅들의 진실 요구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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