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웅 소녀 전쟁-82화 (82/486)

EP.82 타락한 영웅

“뭐, 영웅 기록이 하루마다 갱신되고 있으니까. 그건 그렇겠지?”

그렇게 말을 하면서 예린은 슬쩍 영웅 패드(Hero Pad)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잘못 누르기라도 한 듯 그녀의 영웅 패드에는 환하게 전원이 밝혀져 있었다. 당연히 패드의 화면에는 예린의 영웅 기록이 적나라하게 띄어져 있었다.

“아우. 이제 보니 염장 지르려고 앓는 소리 했네. 잘났다, 잘났어.”

“얘는 뭐 자랑하는 방법이 날이 갈수록 는다?”

예전과 달라진 게 하나 없는 친구의 변함없는 모습에 은별과 지윤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최근 뜨거운 유명세를 타고 있는 R’s 클랜의 GGW 공격대에서 딜러로 활약하고 있는 예린의 업적이 궁금했던 모양인지 둘 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예린의 영웅 패드로 손을 뻗었다.

“와! 벌써 3 성 이야? 아니, 4 성 다 되가네? 언제 이렇게…. 아니지. 【B – 2】 난이도를 끝까지 제대로 공략하면 마력의 결정은 한 번에 한, 두 개씩 정도는 얻을 수 있겠구나.”

“정예린 진짜 용 됐다. 하기야 영웅 학교 시절에도 잘 나가기는 했지.”

친구들의 부러움 가득한 말에 예린의 콧대가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한 찬사는 언제나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던 도중이었다.

“너, 한민국 공대장님에게 리딩 노하우 같은 것은 안 배워? 좀 배워서 우리도 던전 좀 같이 돌자.”

“리, 리딩?”

갑작스런 은별의 말에 예린이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런 건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일반 영웅보다는 공대장이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많이 주목을 받기 때문이었다.

클랜과 맺는 계약 조건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능력이 증명된 공대장은 모든 클랜의 영입 1 순위의 영웅이었다.

“응.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정예린 공대장님, 충성충성!”

“맞아. 밑에서 개같이 일해 줄게. 나도 【B – 9】에서 탈출 좀 하고 싶어. 나는 아직도 1 성이라고.”

친구들의 말에 예린은 공대장이 된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홉이나 되는 영웅들을 지휘하며 무시무시한 어둠의 괴물들을 상대하는 전쟁터. 그 안에서 자신은 쉴 새 없이 딜을 하면서 괴물의 움직임을 파악하며 오더를 내리고….

“아무래도 그건 힘들 거 같은데…. 일단 우리 공대장님은 사람이 아니야. 일반적인 공대장들과는 리딩을 하는 게 차원이 달라. 노하우? 배워도 쓰지도 못할 것 같네.”

예린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는 게 좋았다.

팀원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살피고 세세하게 지적을 하는 한민국의 리딩은 자신이 아니더라도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다른 공대장들의 리딩 방법을 따로 배우면 배웠지 민국의 리딩 능력을 배우겠다고 달려들었다가는 괜히 눈만 높아질 뿐이었다.

“나중에 성급 좀 높아지고, 장비도 좋은 걸로 얻게 되면 오늘 같이 쉴 때 마다 내가 버스 태워줄게.”

그렇게 간만에 만난 세 친구는 카페에 눌러앉아 커피와 디저트를 먹으며 오랜 시간동안 수다를 떨어댔다. 다들 영웅으로 활동하는 공통점이 있던 터라 이야기가 끊일 새가 없었다.

“그러면 밥 먹고 한 잔 꺾으러 가자. 둘 다 일정 없지?”

슬슬 허기가 밀려오자 자리에서 일어난 은별이 지윤과 예린을 향해 말했다.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여기서 잡아먹겠다는 짐승 같은 눈빛이었다. 예린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콜. 어차피 공대장님이 내일까지 쉬라고 하셨어.”

“역시1 유능한 공대장은 팀원들에게 휴식을 주는 것도 남다르군. 지윤이 너도 함께 가는 거지?”

“아, 미안. 나는 여기서 헤어져야 할 것 같아. 우리 공격대, 내일 새벽부터 레이드에 들어가거든. 기껏해야 【B – 9】인데 짜증나게 새벽부터 출발을 한다네? 에이. 더러운 좆소.”

그에 반해 지윤은 아쉬운 얼굴을 지어 보였다. 오랜만에 셋이서 모인 터라 정말로 가기 싫어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무 이유 없이 공격대의 일정에 불참하게 되면 벌금은 물론이고, 공격대장과의 사이도 크게 틀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아직 1 년차 영웅에 불과한 그녀에게는 클랜의 생활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위험한 행위였다.

그렇게 지윤과 헤어진 둘은 분위기 좋은 곳에서 호들갑스럽게 식사를 마치고, 근처에 있는 바로 자리를 옮겼다. 내일 일정도 없겠다. 오늘은 찐하게 마실 생각이었다.

“아! 정예린. 너 진짜 부럽다. 작년만 해도 같이 영웅 학교에서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 이제는 아주 사는 세계가 달라졌다?”

“달라지기는 뭐. 그냥 운이 좋았던 거지. 우리 공대장님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야.”

“그래. 운 좋았지, 너는 진짜 전생에 한국을 구했나 보다. 아휴, 진짜로 부럽다. 그렇게 잘생긴 남자가 나한테 명령하는 목소리만 들어도 아우….”

은별이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몇 주 전에 있던 영웅 모임에서 만났던 민국의 멋진 외모와 목소리는 아직까지도 그녀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긴 한데, 말도 마. 우리 공대장님, 레이드에 관해서는 완전 칼 같다? 조금만 지적당해도 아주 눈물이 쏙 빠질걸?”

그 정도까지의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워낙에 레이드 능력이 뛰어난 터라 민국이 한 마디만 해도 팀원들은 맹수를 만난 초식동물 마냥 자연스럽게 긴장을 하곤 했다.

벌써 한 달이 넘게 함께하고 있었지만, 레이드 도중에 민국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흠칫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예린의 말은 은별에게는 배부른 투정일 뿐이었다.

“그래서 뭐? 진짜 엄청 좋을 것 같은데. 그래서 뭐 썸씽 같은 건 없었어?”

“썸씽? 흐응…. 살짝?”

손에 깍지를 끼고 내뱉는 친구의 의미심장한 단어에 은별이 눈을 반짝 떴다. 자고로 남의 연애사 만큼이나 술자리에서 재미있는 화제는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에 19 금 까지 가미가 되면 오늘의 대화는 이걸로만 이어가도 무리가 없었다.

“조금? 뭔데, 뭔데? 아, 잠깐! 남자친구는 어쩌고?”

“헤어졌어. 아후. 나 어장 관리 제대로 당했잖아. 수 만 달러는 뜯겼을 걸?”

“와아…. 천하의 정예린도 역시 남자한테는 못 당하는구나. 거 봐. 내가 걔 이상하다고 했잖아. 연인끼리 데이트도 안 할 때부터 심상치 않더라니. 그래서 언제 헤어졌는데?”

“우리 영웅 모임 있었을 때.”

“응…? 잠깐만.”

예린의 대답에 은별이 눈을 깜빡였다. 헤어진 시기가 참으로 묘했기 때문이었다.

전에 있었던 영웅 모임이라면 예린이 자신의 공대장인 한민국을 데리고 나타나 모임에 참여 했던 남자들을 전부 오징어로 만들어버리고, 동기들에게 엄청난 부러움을 샀던 날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사귀던 남자친구랑 헤어졌다? 뭔가 감을 잡은 은별의 표정이 점점 음흉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뭐야? 솔직히 말해. 어떻게 된 거야?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육하원칙에 따라 하나도 빼놓지 말고 아주 상세하게 이 언니에게 읊어보도록. 지금 당장, 바로 나우.”

진지한 친구의 협박에 슬쩍 주위를 둘러본 예린이 몸을 앞으로 당겼다. 그 모습에 은별은 침을 꿀꺽 삼켜 넘겼다.

“뭐긴 뭐야. 그날 미친 듯이 한 거지. 바로 다음 날 아침까지. 위에 호텔 있었잖아?”

“아우 씹. 미친. 아. 엄청 부럽다.”

이어지는 예린의 대답에 은별의 입에서 탄성 섞인 욕이 계속해서 튀어 나왔다. 솔직히 말해 은별은 예린이 영웅으로 잘나가는 것보다 남자 영웅과 섹스를 했다는 게 훨씬 더 부러웠다.

“누구는 월급 다 털어가면서 호스트바에 있는 물컹물컹 비엔나소시지를 주물럭거리고 있는데. 친구라는 년은 뭐? 우리나라에서 열 명밖에 안 되는 남자 영웅과 섹스를 해? 그래서 그게 끝이야? 어땠는지 말을 해야 될 거 아니야?”

“어떻기는…. 죽을 뻔했지. 좋아서. 밤새도록 박히고, 다음 날 일어나서 또 박히고 그랬다니까.”

그 때의 격렬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예린은 적나라한 표현까지 서슴지 않으며 은별에게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일반 남성과는 차원이 다른 파워풀한 힘과 왕성한 성욕에 오르가즘은 물론이고, 기절까지 경험했다는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은별의 목젖이 몇 번이나 내려갔다.

그리고 지금은 성 비서인 김소정의 관리 아래에 열흘에 한 번꼴로 민국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친구의 말에 은별의 얼굴에 부러움이라는 감정이 강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친….”

은별의 눈동자가 그렁그렁하게 변했다. 너무 부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예린처럼 일반 남자가 아닌 남자 영웅과 한 번이라도 섹스를 해보고 싶었다. 그런 은별의 성욕이 뇌를 그냥 지나쳐서 입으로 바로 튀어 나왔다.

“…야. 오늘 공대장님 쉬지?”

“어? 어? 그렇긴 한데….”

“한 번 연락이라도 해봐. 같이 밥 먹자고 해. 아니면 술 산다고. 응?”

“……미쳤어?”

“아니, 혹시 모르잖아. 공대장님이 집에서 홀로 계시다가 연락 받고 나올지 어떻게 알아? 오늘 팀원들은 다 뭐하는 데?”

그럴듯한 은별의 말에 예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팀원들은 다들 개인적인 볼일들이 있었다. 소정 언니는 딸과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고, 현아와 유나는 백화점 쇼핑을 하고 야간 데이트까지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공대장인 한민국은….

‘분명히 집에서 쉬시겠다고….’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어디서 용기가 솟아났는지 예린이 재빠르게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잘하면 오늘 밤, 쾌락에 미쳐 날뛸 수 있을 지도 몰랐다.

* * *

[저는 대한민국의 【B – 2】 난이도 던전인 ‘밤의 성채’를 경험하기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과연 일본의 【B – 2】 던전과 비교해 난이도와 위험성이 어떨지…….]

위이이이잉!

믹서기가 갈리는 소리에 티비에서 나오던 소리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커다란 화면에는 온 몸이 훤히 드러나는 붉은 색의 천을 걸친 말총머리의 여자가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었다.

일본의 검술 유파인 우주류를 사용하는 초특급 유망주 시라누이 마이라는 영웅이었다.

“카메라를 조금만 더 옆으로 돌리면 가슴이 보일 것 같기는 한데….”

냉장고에 있는 바나나에 우유를 섞어서 갈던 민국이 화면 속의 영웅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기자의 카메라 구도가 참으로 아쉬운 상황이었다. 그런 민국의 귀에 핸드폰이 세차게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예린?’

핸드폰에 뜬 익숙한 이름에 민국이 고개를 살짝 갸웃하고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바, 받았다? 공대장님?

전화를 걸었으면 받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술이라도 마신 듯, 살짝 취한 느낌이 드는 예린의 목소리에 민국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한민국 맞습니다. 갑자기 웬 전화예요?”

- 아, 아니 그게…. 호, 혹시….

옆에 누군가가 있는 모양인지, 빨리 말하라며 재촉하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보아하니 그냥 전화를 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뭔가 자신에게 용건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예린이 입을 열었다.

- 시, 식사 하셨어요?

“식사요? 지금요?”

민국의 고개가 부엌으로 향했다. 아까 전, 라면을 끓여먹고 남은 냄비가 싱크대에 그대로 있었다. 손에도 허기를 채우기에 충분한 바나나 우유가 들려 있었다. 게다가 시간이 벌써 여덟 시가 넘어 있었다.

- 네, 네. 오랜만에 친구랑 만났는데, 그 아시죠? 전에 영웅 모임에게 한 번 본 친구인데…. 이 친구가 공대장님에게 저녁을 사겠다고 해서요.

- 술도. 술도 사겠다고 해. 내일 쉬신다며? 천하의 정예린이 왜 이렇게 말을 빼? 제대로 이야기 못해?

- 아, 잠깐 넌 좀 조용히 빠져 봐. 공대장님하고 통화하잖아.

자기들 딴에는 조심스럽게 말을 하는 모양인데, 핸드폰이 좋은 건지 바로바로 민국의 귀로 들려오고 있었다. 어째 바로 사이즈가 나오는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친구랑 만났다가 자신의 이야기가 나왔을 테고, 친구 분께서 보고 싶다는 말과 함께 자신을 불러내라고 예린에게 말을 한 모양이었다. 남자들끼리 술을 먹다 보면 자연스레 나오는 상황이었다.

- 야. 이 언니 좀 구제해줘. 나도 응? 남자 영웅에게 한 번…. 셋이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영웅 학교 때 생각 안나? 너랑 나랑 지윤이하고….

- 야이, 미친년아. 공대장님이 들을지도 모른다고. 소리 좀 줄여.

‘그래도 이건 예상 밖인데?’

하지만 이세계의 남자와 여자의 성욕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여길 것도 아니었다. 몬스터들과 싸우느라 일반 여성들보다 호르몬이 활발하게 분비되는 까닭에 성욕이 왕성하게 변한 여자 영웅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어째 이야기가 진행이 될 생각을 하지 않자 오히려 민국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 아, 네. 공대장님. 그, 듣고 계시죠? 제 친구가….

“밥 사겠다고요? 그런데 어쩌죠? 제가 밥은 방금 먹었는데요.”

- 아아……. 벌써 식사 하셨구나.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그래도 단번에 포기하면 섭섭하지.

“그러니까 밥 대신 술이나 사세요. 그런데 친구 분하고 만나는 자리에 제가 끼어도 됩니까?”

이어지는 민국의 말에 예린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알겠다며 대답을 했다. 이어서 친구가 호들갑을 떠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렇게 갑자기 오늘 밤 약속이 생겼다. 평범한 술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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