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6 타락한 영웅
커어어엉!
어둠에 타락한 콜리보르. 【B – 2】 난이도의 던전, ‘밤의 성채’의 수문장이나 다름없는 거대한 괴수가 비명과 함께 서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도 많이 상대를 한 터라 이제는 귀엽게까지 느껴지는 누렁이를 복날에 개 패듯 때려잡은 GGW 의 딜러들이 자신들의 마력을 갈무리하며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후우! 신나게 휘둘렀네.”
“역시 얘가 손맛이 제일 끝내준다니까요. 무빙에 신경 쓰지 않고, 딜을 넣기에도 편하고요.”
소정과 예린의 말이었다. 브레스를 가장한 더러운 트림 공격과 성채 안에서 고깃덩이가 날아올 때를 제외하면 조금도 움직일 필요 없이 제 자리에서 자신들의 마력을 폭발시키며 공격만 하면 되는 녀석이었다.
힐러만 고생을 할 뿐, 딜러는 날로 먹는 몬스터였다.
“정예린 영웅. 공략 기여도 몇이에요?”
“S- 요. 김소정 영웅은요?”
“아, 저도 S- 인데. 우리 세부수치까지 한 번 비교해 볼까요?”
덩달아 하늘을 꿰뚫을 정도로 치솟는 DPS(영웅 기록에 나타나는 초당 데미지)를 보다보면 다음 번 레이드 때는 좀 더 높은 데미지를 넣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고양감에 휩싸이곤 했다. 딜러에게 높은 DPS 란 그들의 가치이자 자부심이었다.
다만, 똑같은 딜러 포지션인 유나는 저 둘의 대화에 제대로 낄 수가 없었다. 그녀의 기여도는 B-. 썩은 고깃덩이를 찾느라 제대로 데미지를 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다음 녀석을 상대하러 갑시다.”
간단하게 콜리보르를 쓰러뜨린 민국은 팀원들을 이끌고 밤의 성채에 등장하는 보스급 몬스터들을 하나, 둘씩 차례대로 클리어 해 나갔다. 이미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경험하며 공략에 성공한 녀석들인 터라 공략속도는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리고 밤의 성채의 준 보스급 몬스터라 할 수 있는 ‘인큐버스 – 라함’까지 쓰러뜨린 민국과 일행들은 요염한 포즈로 옥좌에 앉아 있는 던전의 최종보스 ‘서큐버스 퀸 – 루디아’를 마주할 수 있었다.
“으음. 서큐버스는 서큐버스인데…. 내가 생각한 것과는 생김새가 조금 다르네. 공략 영상에서는 화질이 안 좋은 줄 알았는데….”
루디아의 모습을 본 민국이 낮게 신음을 흘렸다.
[기절할 만큼 아름다우며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를 지니고 있고, 칠흑 같은 머리카락에 양 쪽으로 솟아난 두 개의 뿔이 그녀들이 악마라는 것을 증명한다.
눈동자는 언제나 요염한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으며, 등에는 커다란 박쥐 날개가 펄럭이며 영웅들을 유혹한다.]
이 세계에서 인터넷을 통해 민국이 알아낸 서큐버스에 대한 정보였다. 당연히 적힌 내용처럼 서큐버스 퀸 - 루디아도 쌔끈하고 아름다울 거라 생각했었다. 게다가 서큐버스 하면 판타지의 섹스 심볼이지 않은가?
아무리 몬스터라지만 서큐버스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는 예전 세계의 남자들이었다면 분명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하체를 먼저 들이밀 놈들도 있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세계의 서큐버스는 그 외형이 조금 달랐다.
“뭔가 되게 애매하네. 몬스터는 역시 몬스터인건가?”
눈에 확 들어오는 육감적인 몸매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뭐랄까, 굉장히 애매하게 예쁜 모습이었다. 아니 예쁘기는 한데, 몬스터의 아름다움 같은 느낌이었다. 민국의 취향과는 크게 동떨어진 생김새였다.
‘박으라면 박을 수는 있겠는데….’
몸매만 보면 충분히 거기서 설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굳이 그러고 싶은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주위에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쩝. 그러면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서큐버스 퀸을 바라보던 민국이 입맛을 다시며 실망감을 감췄다. 그리고는 미련을 털 듯 등을 돌렸다.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네 명의 여인이 눈앞의 루디아보다 백배는 더 아름다웠다.
《서큐버스 퀸 - 루디아
▷ 서큐버스 퀸 루디아는 유혹의 거울이라는 스킬을 패시브로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을 공격하는 대상 중 가장 가까이에 있는 대상에게 받은 피해의 100 %를 돌려주는 스킬입니다. 그러므로 딜러는 근거리와 원거리를 가리지 않고, 탱커보다 루디아와 가까이 붙어서는 안 됩니다.
▷ 전투가 시작되면 루디아는 어둠의 유혹이라는 능력으로 전장 전체에 커다란 어둠을 형성합니다. 이에 닿는 팀원들은 매초마다 피해를 입게 되므로 힐러는 팀원들의 생명력 유지에 온 신경을 써야 합니다.
▷ 일정 시간마다 루디아는 꼬리 속박이라는 기술을 사용합니다. 탱커를 제외한 팀원 중 한 명을 무작위로 감싸 자신의 마나로 속박합니다.
루디아가 꼬리 속박을 사용하고 나면 딜러들은 자신들의 마나를 폭발시켜 아군을 속박한 루디아의 마력을 최대한 빠르게 파괴시켜야 합니다. 특히나 힐러가 속박에 당하는 경우, 공격대의 생존자체가 위험해 질 수 있습니다.
★★★주의 - 속박에 걸린 아군이 1 분 안에 풀려나지 않으면 루디아의 마력에 의해 타락하게 됩니다.
▷ 루디아는 일정한 피해를 입으면 유혹의 화살을 발사합니다. 유혹의 화살은 대상과 그로부터 10 m 이내에 있는 영웅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므로 화살의 대상자는 빠르게 동료 영웅들과 거리를 벌려야 합니다.》
간략하게 정리한 민국의 브리핑을 들은 팀원들은 다들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몬스터와 맞상대하는 일은 영웅 학교 시절 쪽지 시험을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예습은 했지만 통과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그런 상황.
“생각보다 까다롭네요.”
“꼬리 속박의 대처 방법은 알겠는데…. 현아의 움직임을 보고 루디아를 공격하려면 검 끝으로만 루디아를 찔러야 하는 건가?”
“제가 좀 더 붙어서 공격을 할게요.”
영상을 통해 다른 공격대가 루디아를 공략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돌려봤지만, 막상 그 임무를 자신들이 잘 수행해낼지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 팀원들을 향해 민국이 입을 열었다.
“어렵지 않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됩니다. 아군이 속박에 걸리면 딜러들은 루디아의 속박 마력을 빠르게 박살낸다. 탱커를 제외한 나머지 팀원들은 루디아와 가까이 붙지 않을 것. 유혹의 화살이 날아오면 아군에게서 멀어질 것. 이 정도만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으면 됩니다.”
그 외에 주의해야 할 사항이 몇 가지 더 있기는 했지만, 어차피 공격대의 생명력을 책임지는 것은 자신이었다. 정 안되면 필사적인 힐 업으로 버티다가 전멸을 하고 나면 그 때 문제점을 피드백 하면 되는 일이었다.
‘어차피 힐러진이 든든하면 공략법은 다 나오니까.’
적의 공격 패턴을 파악하고, 그 패턴에만 대응할 수 있으면 레이드는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보다 더 가까이 붙지 마세요!”
선제공격은 당연히 탱커인 현아의 몫이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검과 방패에 마력이 선명하게 서렸다.
- 현명하지 못 한 이들이 또 찾아왔네.
침입자의 등장에 옥좌에 앉아있던 서큐버스의 여왕이 박쥐의 피막과도 같은 날개를 활짝 펴며 날아들었다. 그리고는 현아의 몸을 찢어발길 듯 본인의 손톱을 휘둘렀다. 하지만 현아의 대응도 굉장히 신속했다.
쩌엉!
커다란 카이트 실드를 들어 루디아의 공격을 막아낸 현아는 그대로 루디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장비 스코어가 높은 아이템이라 그런지 루디아의 공격을 정면으로 막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방패에는 기껏해야 가느다란 흠집만이 생겼을 뿐이었다.
쩌엉! 쩡!!!
그러나 현아의 공격은 처음 한 번에 불과했을 뿐, 그 이후로는 루디아의 일방적인 공세가 펼쳐졌다. 그래도 현아는 그런 루디아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내고 있었다. 간간히 피부가 찢겨져 나가기는 했지만, 몸에 허용하는 정타는 한 방도 없었다.
그렇게 둘의 전투를 지켜보던 민국이 완드를 감싸 쥐었다. 회복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딜러들도 미리 얘기했던 자신들의 위치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쉬아아아아아….
어느새 전장에 깔린 검은색의 연기가 영웅들의 발목을 뒤덮고 있었다. 마력을 사용하거나 몸을 움직일 때 마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어그로 잡혔어요!”
영웅 패드를 주시하던 소정이 말과 함께 대검을 꼬나들고 루디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정예린과 최유나도 주문을 캐스팅하고 화살을 날려 대었다. 민국의 지시가 없어도, 알아서 어그로를 체크하고 공격을 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괴물들과 달리 루디아의 신체가 큰 편은 아니었기에, 원거리 딜러들은 다른 몬스터들을 상대할 때 보다 더욱 정신을 집중해서 공격을 했다. 까닥하다가 아군에게 맞으면 낭패가 따로 없었다.
그렇게 탱커와 딜러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하는 동안 민국도 쉴 새 없이 본인의 마력을 개방했다. 회복의 능력이 완드를 타고 현아를 포함한 팀원들에게 계속해서 전달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민국은 루디아의 움직임과 주변의 변화를 파악하며 팀원들을 리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창 전투를 하던 도중 탱커를 상대하던 루디아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순간적으로 정예린이 있는 쪽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마치 파리를 내쫓는 것 같은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어째 움직임이….’
하지만 민국은 그런 루디아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빠르게 캐치할 수 있었다.
“정예린! 화살 조심!!!”
“넷, 앗?! 꺄아아악!”
민국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루디아가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까닭인지 정예린이 그대로 화살에 어깨를 내주었다. 커다란 비명과 함께 50 % 가 넘는 생명력이 순간적으로 퍽 하고 깎여나갔다.
이어서 어둠의 유혹이 기생충마냥 그녀의 생명력을 쉴 새 없이 빨아들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딜러들 끼리 거리를 벌리고 있던 까닭에 화살의 범위 공격에 영향을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오현아!!!”
민국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현아가 【수호 기사】의 특수 스킬, 희망의 방패(B)를 정예린에게 사용했다. 일정 시간 동안 아군이 입는 데미지를 반반씩 나눠서 받는 스킬이었다. 척하면 척. 이어서 루디아의 공격을 대비해 헤비 디펜스(B) 까지 사용했다.
그렇게 현아가 시간을 버는 동안 민국은 재빠르게 정예린의 생명력을 회복시켰다. 그러면서 아군에게 경고를 날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유혹의 화살을 기습처럼 날리니까 조심하세요! 루디아의 팔 움직임을 주시해야 합니다! 특히 김소정 영웅! 거리가 가까우니까 긴장 풀지 마요!”
“알겠어요!!!”
힐 샤워가 이어지면서 루디아의 순간적인 공격에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렸던 정예린의 생명력이 회복되었다. 그제야 민국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무슨 페이크를 넣듯 아무렇지도 않게 가볍게 던진 화살이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데미지가 강력했다.
하지만 루디아의 공격 패턴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갑자기 루디아의 기다란 검은색 꼬리가 식충 식물마냥 쫘악 벌어졌다. 그리고는 김소정을 덥석 물더니 그대로 멀리 집어 던졌다. 자연스레 민국의 발이 김소정이 던져진 장소로 따라 움직였다.
“꼬리 속박! 딜러들 타겟 변경!!! 빨리빨리!!!”
“헤비 샷!”
“이야야아아아압!!!”
민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유나의 커다란 화살이 김소정을 속박한 루디아의 마력을 꿰뚫었다. 이어서 정예린의 뇌전 마법이 거미줄처럼 펼쳐진 서큐버스 퀸의 마력을 세차게 두들겼다.
그렇게 얼마나 공격을 했을까? 루디아의 마력에서 벗어난 김소정이 지면으로 떨어지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어느새 민국의 회복 능력이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김소정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확인한 민국은 곧바로 영웅 패드를 확인했다.
‘32 초.’
정예린과 최유나가 루디아의 마력 속박을 완전히 깨뜨릴 때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꼬리 속박의 마지노선이 1 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속도였다. 더욱이 최유나의 딜링 능력이 딜러 중에서 가장 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만약 그녀가 묶이는 상황에서는 더욱 빠르게 마력 속박을 깨뜨릴 수 있었다.
‘제일 문제가 되었던 건데…. 생각보다 간단히 처리할 수 있겠네.’
어둠 속박은 루디아의 공략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 그렇기에 민국은 어둠 속박만 무사히 넘길 수 있다면 쉽게 루디아를 클리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공략의 키 포인트라고 생각했던 꼬리 속박이 아니었다.
잠깐의 실수에 현아보다 가까이 붙어 있던 소정이 반사 데미지에 얻어맞고 얼굴을 구겼다. 어둠의 유혹으로 인해 생명력이 줄어들고 있던 터라 타격이 더 했다.
“…커억!”
이어서 기습적으로 날아온 유혹의 화살에 의해 소정은 자신의 눈을 부릅떴다. 너무나도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것이다. 민국의 회복 능력이 바로 소정의 몸을 감쌌지만, 그녀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사라지고 난 뒤였다.
“이런!”
1 초? 아니 0.5 초 차이로 팀원을 살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민국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렇게 루디아가 자연스레 휘두르는 손짓에 팀원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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